시인조명
두 발로 걷지 않는다
정승화
가자, 아이야
금을 넘자
저 건너 숲의 안쪽,
두 발 가진 생물은 출입이 금지된 곳으로 가자
식은 걸음이 안개를 모으며
어둠을 잃어버리고 모퉁이를 지운다
흉터가 없는 이들은 찾아낼 수 없는 곳
절망의 땅을 딛어 본 적 없는 이들은 발견할 수 없는 곳
온몸을 울음으로 채워본 적 없는 이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
그들은 모두 두 발로 걷지 않는다
빨던 젖을 놓친 아이의 손을 잡고 금을 건넌다
젖을 빨던 아이의 입술을 놓친 여자의 손을 잡고 숲 안쪽으로 간다
나비인 양 팔랑이는 서쪽 낙엽 사이를 건너서 사라진다
자장가를 불러주던 입술이 자장가를 듣고 있는 두 귀가 주소 반대쪽을 본다
솔방울 같은 울음들이 쫓긴 숲 안이 고요하다
무엇을 놓치고 울고 있었던 걸까
처음 눈물을 배운 아이의 먼 뒷배경 같은 침묵이 웅성거린다
가자, 아이야
금을 지우면서 가자
푸른 점
자물통 하나로 지켜질까
잠근 후 바다에 던진다고 지켜질까
어느 날 물었지
목덜미의 푸른 점에 대해서.
사실 그것은 점이 아니야
이를테면 나비가 뺨을 통과하다 들킨
붓꽃의 비밀장소 같은 거야
또 한때 붉은 기타 몸뚱이를 몰래 빠져나온
못된 악보의 푸른 상처지
가끔 그 비밀장소에서 푸른 상처와 입을 맞추곤 해
그리고 자물쇠를 채운 뒤 바다에 번져 버려
일종의 꽃잎 따기 놀이야
꽃잎 개수를 미리 세어 놓고
사랑한다 안 한다를 점치지
백발백중 사랑한다로 꽃잎은 장렬히 전사해
목덜미의 푸른 점을 보면서
풀어져 도망간 사랑을 이야기하지
하지만 푸른 점이 목덜미를 물고 있는 한
진행 중인 거야
푸른 점은 흔적이 아니라 상처야
그 비밀장소에서 아직 붓꽃의 맥박 소리가 들리거든
그동안은 상처라고 불리는 거야
드디어 맥박 소리 비밀장소를 빠져나갈 때
그때 흔적이라고 말해주겠어
흔적은 마음을 밖으로 내보내는 일이거든
뾰족한 겨울에 찔려 눈雪이 내리는 것처럼
어떤 몽상가의 생애
1
숨결이 바람이 되었고 시선은 태양이 되었다
사막과 초원에서 태어나
거룩한 반지를 가운뎃손가락에 끼고
숨결 잃은 갈대 사이에 누워 태양을 본다
사랑스런 이름들이 태어났다 돌아가고
혼돈은 벌어진 틈으로 오래 머물다
어둠의 문으로 빠져나갔다
목숨 바쳐 지켜냈던 이름들이 허공으로 떠오르고
공허의 이름을 지운 별들이 낭자하게 자랐다
연기를 먹고 자란 숨결의 눈동자가 사납다
한잔 술의 취기에 존귀한 이름을 버리고
21일 동안의 기도가 은총의 종을 울린다.
때를 잃은 감성과 장소를 잃은 이성을 두고
치열한 승부를 겨룬다
2
웃음이란 치아가 보이는 일
목젖이, 막 출산한 산양의 젖처럼 보이는 일
길을 걸어오는 일은 선물 같은 것
뾰족한 고깔 위로 하늘이 열리고
약속을 이루지 못한 꿈이 첫눈처럼 내린다
멈춘 적 없는 기도와 응답과 약속이 단결한다
가죽옷을 걸친 동상이 우상으로 서 있는 사막
눈빛이 초록인 노래와 흥겨운 발바닥의 춤들,
숨겨진 몽상가의 치마가 커튼으로 내리는 날
이뤄질 약속이 근엄해진다
3
위대한 이름을 머리띠로 두르고 천막 가운데 불길로 치솟는다
태양이 유산으로 남긴 사막에서 짧은 순간 붉은 낙타를 탄다
광활이 광오가 되어 사막을 밟는다
혼돈이 온순히 어루만져지는 날, 칼을 뽑은 언어가 태양에 닿는다
울음이 웃음으로 웃음이 벅찬 눈물로 부활한다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숨결이고 태양인가
숨결 위에 태양이 흐르고 빛이 쏟아진 자리에 바람이 분다
시선이 머물다 돌아오고 돌아가는 길목의 묘지 위에
타오르는 뜨거움이 만져지는 땅의 체온이 죽어있다
4
유언이 유산이 되어 기약의 도장을 찍는다
주소를 찾아가는 길에 허물을 벗고 불의 편견을 깬다
소금이 낳은 지점에 닿아 두려움을 지우고
포로가 된 교란을 잠재우는 매복,
산양의 젖물 같은 노래로 세수를 하고 경계를 허문다
수많은 밤이 시작되는 날 거친 낙타처럼 맨발로 서서
통곡이 불멸하는 지상에서 방랑자의 시작이 끝난다
흰白, 아이에게
나는
흰보다 더 고요한 색을 알지 못했다
그 침묵은 모든 소리 이전의 공명이었다
흰보다 더 충만한 결핍을 알지 못했다
그것은 없음으로 가득한 충만이었고
무無의 가장 온전한 지금이었다
흰보다 더 절대적인 무관심으로
모든 것을 수용하는 색을 알지 못했다
말이 사라진 자리에서 시작되어
고요가 눈 뜬 생성의 바닥에 깔려 있다
흰은 많은 것을 감내한다
겹쳐지면서도 지워지지 않고,
물러서면서도 바탕이 된다
흰은 모퉁이를 남기지 않는다
그 어떤 가장자리도 남김없이 품어
시간조차 고요해지는, 존재의 주석 없는 본문
아이야 나는 네게로 간다
흰의 질량으로, 기억되지 않는 사랑의 방식으로
사막 한 가운데 오아시스처럼
그 오아시스 곁의 나무 그늘처럼
모래의 시간 위, 한 점 물방울이 되는 일은
스스로를 사라지게 하는 일
그럼에도 남은 본질의 파편을 모아
너에게로 간다
무한에 가까운, 언어 이전의 응원
의심의 그림자조차 닿지 않는 흠 없는 믿음
그러니 아이야
너는 그 오아시스에서 마른 목을 축이고
그 나무 그늘에서 땀을 닦아라
나는 기도한다
너의 순수가 결코 환상이나 기억이 되지 않기를
그것이 현실의 가장 진실한 흔적이 되기를
허물이 껍질처럼 벗겨지고 비상의 시각이 도래해도
나는 여기,
발화 이전의 동상처럼, 이름 없는 증언처럼
흰의 방식으로 서 있으리라
마침내 나는
허공의 파동에서 번역되지 않은 새의 지문을 읽는다
허공에서 시작되는 새의 긴 문장을 해독하기에는
나의 어휘가 너무나 가난해서
죽어가는 문장 대신 꽃을 읽는다
허공에서 자라는 꽃은 지문 대신
여러 겹의 몸을 흔들며 가시를 키운다
찔린다는 것은 피 흘리는 일,
몇 방울의 핏속에서 허공의 일생을 읽는다
허공이 새에게 나눠줬던 날짜와 계절과 밤낮이
어두워지는 것은 죽는 것이라며
절대 눈을 감지 않는다 그러나
오류가 데려다준 안식은
기억의 몇 가지를 지워준다
먼 뒤 시간이 데려다준 지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눈을 감으면 어둠의 뒤편에서 꽃은 환하고
모든 기억이 저물고 나면 끝내
허공을 밟은 새의 지문은 꽃으로 번역된다
그러니 그깟 가시쯤은 무시한다
오류의 그림자가 퍼뜨린 그늘이 밤이 된다
밤은 허공에 평안을 준다
더 이상 새의 지문을 번역할 필요가 없다
어둠은 죽음에 관계되지 않고
휴식이라고 점을 찍는다
마침내 눈을 뜨지 않는 것과 잠드는 것이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다
이제 마침내 허공에서 단내가 난다
모든 것의 증인이 되는 시간에서
슬프지 않게 증발할 수 있다
나를 누설하는 모든 공간을 덮을 수 있다
마침내 나는
붉은 문설주 안
검은 숨결로 웃는 상냥한 유다처럼
뺨에 입을 맞추고 당신을 판다
내 주머니엔 당신이 새겨진 은화가 가득하고
수많은 혼란 가운데 홀로 침묵하는 분노,
부유한 어둠이 말을 걸 때마다
피를 받치는 염소의 뿔이 자란다
마르고 긴 머리카락을 지닌 당신은
더욱 딱딱해져 간다
유연한 말과 사랑스러운 글씨는 땅이 삼키고
뿌려진 문장들은 쉼표도 없이 비둘기처럼
머리 위를 선회한다
오만한 자리에 앉아
악인의 꾀는 어떻게 자를 수 있는가
당신에게 묻고 내가 쓰러뜨린 순종과 내가 부숴버린 성전을
삐뚤어진 낙서로 가득 채운다
분노하라 왼뺨과 오른뺨을 쳐라
발가벗고 사막을 건너라
새벽닭의 혀는 굳었고
내가 박은 못들이 나를 찌를 동안
허공에 매달린 회개의 휘장이 찢어진다
아, 당신은 눈을 감고 빛을 뿌리며
세상의 모든 검정을 삼켜버렸다
달렸다 하염없이 도망쳤다
그러나 벼랑 끝은 보이지 않았고
태초 에덴의 시간은 흔적도 없이 말라 버렸다
검은 옷자락이 하염없이 펄럭인다
내가 팔아버린 나를 당신은 자꾸 사들인다
당신의 심장에 자꾸만 나를 쌓고 가둔다
표범의 반점 하나 지우지 못하는 내가
오른쪽에서 당신의 슬픔으로 눈을 닦고
더러워진 나의 발바닥을 당신이 쏟아낸 핏물에 담그고
당신의 그림자 밑으로 숨는다
당신은 내가 던진 돌멩이를 삼키며 내게 흰 신발을 신겨
당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AI 시대에 시가 더욱 절실해졌다
나는 시를 쓰는 사람이다. 그 사실만으로 이미 세상의 시끄러운 소음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아간다. 세상은 끊임없이 반짝이고 정보와 감정이 폭주한다. 손안의 AI 알고리즘은 내가 읽지도 않은 글을 추천하고 순간의 감정을 수치로 평가한다. 그 속에서 시인은 어떻게 자신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을까? 나는 체험과 침묵의 영역에서 나의 언어를 찾는다. 시의 출발은 언제나 삶의 체험이다. 어린 시절 울음, 첫사랑의 떨림, 좌절과 희열 이 모든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 단어 이전의 방식으로 드러날 준비를 한다. 체험은 단순한 경험이 아니라 언어의 진동을 문장으로 전환시키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결코 디지털의 편리함은 체험을 대신할 수 없다. 시인은 고독 속에서 자기 체험을 깊게 간섭해야 한다. 그것이 단어 하나하나를 진동시키는 힘이 된다.
시를 쓰는 일은 삶의 몰입이다. 단순히 시를 쓰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을 시에게 맡기는 일이다. 또한 존재의 모든 순간을 시와 연결하는 일이다. 시에 미치지 않으면 중도에서 포기하게 되지만 시를 내 삶의 중심에 두고 몰입하는 순간 모든 소리와 침묵이 시적 울림으로 증폭된다. 또한 좋은 시를 읽고 필사하는 것은 학습이 아니라 언어와 감각을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반복적 필사를 통해 시인의 언어와 호흡을 내 것으로 만들고 나만의 독창성을 만든다. 또한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여행을 다니면서 체험을 보충해야 한다. 체험은 시를 쓰는 영양분이자 인간을 증명하는 길이다. 시가 주체가 되는 삶,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순간이 시와 연결되는 삶 속에서 사소한 언어가 가진 깊이를 느낄 수 있다. 그렇게 태어난 문장의 낯설기는 독자를 사유로 이끈다. ‘저녁이 되자 해가 졌다’ 대신 ‘저녁이 되자 해가 시들었다’처럼 단어와 문장은 나만의 감각으로 비틀어야 한다. 시는 은유와 묘사, 의미의 중첩을 통해 독자를 단순한 읽는 행위를 넘어 사유로 이끌어야 하고 독자가 읽고 상상하는 과정에서 시는 비로소 완성된다.
현재를 사는 시인은 과거의 언어를 그대로 반복해서는 안 된다. 현대의 시는 이성적 사유와 감각적 체험을 동시에 요구하며 불편함과 모호함 속에서 새로운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시적 페르소나를 통해 현실과 상상을 결합하며 가면을 쓰듯 겉모습을 숨기면서도 본질을 드러내야 한다. 독자가 즉각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불편함과 모호함, 두 개의 상반된 개념이 하나로 합성될 때 독자에게 불편하지만, 깊은 긴장감을 제공한다. 그러기 위해서 시인은 다시 말하지만, 많이 읽고, 많이 필사하며, 체험을 쌓고, 몰입해야 한다. AI가 제공하는 디지털 소음 속에서도 자기 체험적 언어를 지켜야 한다. 시는 단순한 글이 아니라 존재의 진실을 드러내는 울림이며 탐색하는 행위다.
시인은 시를 통해 시대와 존재의 진실을 비추는 거울이며 시는 그 거울 속에서 체험과 침묵의 울림으로 존재한다. 또한 시는 시인을 담아내는 그릇이며 시인은 시를 통해 시대와 존재의 진실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오늘도 나는 화면 너머로 흘러오는 정보의 파도 속에서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을 붙잡고 AI의 소용돌이를 넘어선 곳에서 희로애락으로 시적 진동을 느끼며 시를 쓴다.
시인이여, 디지털 노이즈 속에서도 침묵하고, 체험 속에서 단단히 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