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가 시작될 무렵,
이국(異國)의 밤나무가 유난히 눈에 띄는 마리아브론 수도원에는
고립된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한 사람은
선량함과 순진과 겸허를 함께 지닌 늙은 원장 다니엘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기품 있는 희랍어를 구사하고 기사다운 행동을 하며
윤곽이 또렷한 용모와 사색가다운 눈매를 지닌
제자 나르치스였다.
그런데 이 수도원에 골트문트라는
어린 소년이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곧 누구와도 친해졌으나,
참다운 벗은 쉽사리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소년의 마음을 끈 것이 바로 나르치스였다.
소년은 자기와는 정반대로 보이는 나르치스를 존경하게 되었다.
어느 날
안젤름 신부의 심부름으로 고추나물을 캐러 갔던 골트문트는
리제라는 여인의 유혹을 받는다.
그는 수도원을 떠날 결심을 하고 나르치스를 찾는다.
나르치스는 마지막으로
"너는 어머니의 품 속에 잠자지만 나는 황야에서 눈을 뜨고 있다.
너의 꿈은 소녀의 꿈을 꾸지만, 나는 소년의 꿈을 꾼다”
라고 작별 인사를 한다.
골트문트는 약속한 장소에서
리제를 만나
첫사랑의 희롱을 즐기나,
날이 밝자 그녀는 자기 남편에게로 돌아간다.
골트문트의 기나긴 방랑 생활은
무수한 여인의 눈물을 뿌리게 했다.
그는 한곳에 정착할 수 없는 자신을 이상하게까지 생각하게 된다.
그 동안 그는 결혼하지 않은 처녀에게 마음을 쏟고,
사랑하는 방법, 사랑의 기교에 관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방랑 생활이 어언 두 해가 지난 뒤,
골트문트는 어여쁜 두 딸을 가진 노기사의 저택으로 간다.
어느 가을 날,
영주가 부인과 함께 놀러 온 것을 계기로
골트문트는 영주의 부인과 접근함으로써
노기사의 딸 리디아의 질투심을 불러일으켜
그녀와 가까워지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런 후 리디아는
골트문트의 잠자리에 나타나 정사를 벌이며,
언니의 행동을 눈치챈 율리에는
언니와 잠자리를 같이하고 있는 골트문트의 방에 들어와
자기도 함께 즐기자고 한다.
언니 리디아는 뛰쳐나가 아버지에게 사실대로 고백한다.
골트문트는 당장 쫓겨나고,
리디아는 한스라는 하인을 시켜
그녀가 손수 짠 재킷과 소금에 절인 고기, 금화 하나를 건네준다.
재킷으로 갈아입고 길을 재촉하던 그는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저녁,
해산의 놀라운 광경을 통해
쾌락과 고통은 동반한다는 것을 느낀다.
이 마을에서
그는 빅토르라는 유랑자를 만나
함께 유랑 생활을 하지만,
도벽이 심한 빅토르는
골트문트가 잠자는 사이에 주머니를 뒤지다가 발각되자
목을 조르려고 달려든다.
골트문트는 자기에게 죽음의 공포가 닥치자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빅토르를 살해한다.
그리고 굶주림에 회한과 공포를 잊고
그저 방황하다가
빅토르와 만났던 마을 근처에 쓰러져
크리스티네라는 부인에게 구출된다.
얼음이 녹고 오랑캐꽃이 피던 봄날,
그는 어느 아름다운 마을에 도착했다.
그는 빅토르를 죽인 것을 참회하려고
성당을 찾았다가 성모 마리아 상에 매혹되어
그 작품을 만든 사람이 니콜라우스라는 것을
성당 신부 파티우스에게서 듣고 니콜라우스를 찾아 떠난다.
그는 니콜리우스에게 시험을 받고 배울 수 있게 된다.
스승은 리스베트라는 아름다운 딸을,
감동과 투기심에 얽힌 감정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골트문트는 그녀를 눈을 뜬 여인,
관능적인 여인,
괴로워하는 여인으로 초상을 만들고 싶어 했으며,
마음속의 여인,
자기 어머니를 이브의 상(像)으로 만들어 보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예술이 아니고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였던 것이다.
실망에 찬 그는
여러 얼굴들을 소묘하는 것으로 나날을 보내다가
우연히 아그네라는 총독의 첩과 눈이 맞아
육체의 쾌락을 즐기다가 들키게 되자 도둑으로 가장하고 잡힌다.
감옥에서 그는 살아야겠다는 집념이 생겨
고해성사를 받으러 신부가 들어오면
그를 죽이고 탈출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신부는 그의 옛 친구 나르치스였다.
나르치스의 구원으로
그는 마리아브론 수도원으로 돌아와 일터를 제공받는다.
나르치스는 이 수도원의 원장이 되어 있었다.
그는 이제야 참회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흐뭇해했으나
고해 신부는 그의 죄 자체보다 기도와 참회와 성례를 중시했다.
덕분에 2년 동안은 제작에 열중할 수 있었으나,
작품이 완성되자
그는 조금씩 방랑을 하거나
프란체스카라는 처녀에게 구혼을 했다가
실패하자 자기의 늙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리디아의 모습을 부각시킨 마리아 목조상이 완성되자
그는 방랑을 결심하고,
나르치스는 하나님에게 종사하는 자신이
너무 친구에게 집착하고 있음을 스스로 개탄하며
골트문트를 떠나 보낸다.
말을 타고 떠났던 그는
어느 보슬비 내리는 날 오후,
절뚝거리며 돌아와서는
문병을 온 나르치스에게 최후의 말을 한다.
"모든 사람 중 오직 자네만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네.
속세의 모든 여인과 방랑,
그리고 자유가 나를 버린 지금,
나는 자네의 사랑을 받아들이며 감사하네.
하지만 나르치스,
정말 어머니 없이는 죽을 수 없다네.
- 김희보, 세계문학사 작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