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민족은 말과 글을 통해서 민족정신을 지킨다
세종어제훈민정음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로 사맛디 아니할쎄
이런 젼차로 어린 백셩이 니르고져 홇베이셔도
마참내 제 뜨들 시러펴디 몯핧 노미하니라
내 이랄 윙하여 어엿비너겨
새로 스믈 여덟 짜랄 맹가노니
사람마다 해여 수비니겨 날로 쑤메 뼌한킈 하고져 할따라미니라.
국민이 제 뜻을 실어 펴지 못하여
국민을 어엽비 여겨
하늘과 땅과 사람이
서로 어울려 꽃을 피우고
더불어 사는 인류를 사랑하고
하늘의 경계를 살펴라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글
훈민정음
언어는 세계를 보는 눈
언어는 존재의 집
존재와 소통하며 세계를 이해한다.
세상과 소통하며 이해하는 한글
글자는 간단한데도 쓰임이 무궁하니 훈민정음이라 불렀다
소통하며 세상을 잇자
한글로 세계 의 빛이 되자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익혀서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애민, 홍익인간, 인류공영, 사람 사랑이다 서로 보듬어 주는데 있다
‘천원지평인립(天圓地平人立: 하늘은 둥글고 땅은 평평하며 사람은 서 있다)’이라는
삼재(三才) 원리이다
한국 사람은 우리 것을 소중히 한다
우리문화를 창조한다
신라 설총은 이두, 향찰를 만들어 언어생횔을 하게 하고
새종대왕은 이두, 향찰을 기초로 1443년 훈민정음의 기초가 되게 하였다
한글 덕에 문맹은 찾아보기 힘들고 산업과 가 크게 융성하여 세계 민족으로
세계의 역사를 이끌어갈 으뜸 민족이다
훈민정음 완성 1443년12월 30일( 25년) 창제
한글 창제 1446년 9월 29일 ( 28년) 반포 예조판서 정인지가 이리 선언하였다.
‘훈민정음은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
(1446년 9월 29일 ‘세종실록’, 정인지 훈민정음 서문)
세종대왕은 한글 반포 4년 후 세상을 떠났고(1450년),
한글은 1894년에야 우리 사회에서 공식 문자로 인정받았고(1894년(고종 31) 11월 21일)
1926년 음력 9월 29일을 반포 기념일로 정하여
처음에는 가갸날 1928년 재정
한글(크다, 바르다, 하나, 세상에 제일 가는 글)
1940년 10월9일 한글날로 재정 되었다
널리 퍼져나간 언문
1490년 충청도 회덕에 사는 여자 신창 맹씨는 함경도에 근무하는 군인인
남편 나신걸로부터 언문 편지를 받았다
함경도에서 경성(한성)으로 전근됐으니 옷을 보내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안동에 사는 원이 엄마는 1586년 ‘둘이서 머리 하얗게 되도록 살다 함께 죽자더니 먼저 가냐’며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원이 아빠 이응태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이 편지를 읽으면 꼭 꿈에 나와 말을 걸어달라’고 적혀 있다.
17세기 초에 허균은 소설 ‘홍길동전’을 한글로 썼다.
반면 위대한 실학자 정약용이 19세기 초반에 저술한 ‘경세유표’ ‘목민심서’ 등은 모두 한문이었다.
훈민정음 반포 400년 세월이 흘러 1882년 양력 8월 임오군란 진압을 위해 조선에 온 청나라
오장경 부대 막료 설배용(薛培榕)이 경성 거리를 구경하며 이렇게 기록하였다.
‘농부들도 모두 글을 알고 집집마다 모두 편안히 읽으니
당 태종이 군자의 나라라고 한 것도 거짓이 아니었다
(農每知書 戶皆安讀 唐太宗稱爲君子之國 信不誣也‧
농매지서호개안독당태종칭위군자지국신불무야).’
(설배용, ‘조선풍속기(朝鮮風俗記)’, 소방호재여지총초, p61)
1901년(광무 5년) 정월 25일 조봉길이라는 사내가 여섯 살 먹은 딸 완례를
윤참판 댁에 종으로 팔았다.
완례가 윤참판 댁에 노비로 팔려가고 4년이 지난 후
‘신정국문(新訂國文)’인 한글로 국민을 깨웠다
1905년 7월 19일 한성법어학교(漢城法語學校)교장 이능회, 지석영이
새로운 맞춤법을 제안한 ‘신정국문(新訂國文)’을 상소해 고종으로부터 허가를 받았다.
‘세계 모든 백성이 누구나 글을 알고 날이 갈수록 문명으로 전진하고 있는데
유독 우리나라만이 어물어물 전진하지 못하고 있다.
해득하기 어려운 한문에 인이 박여 쉽게 이해되는 국문을 숭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1907년 주시경이 한글학회를 창립하다.
근대 한글, 그리고 21세기
‘동대문시장 간판들을 보니 글자를 합하면 낼 수 있는 소리가 이루 헤아릴 수 없고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1936년 루쉰(魯迅)은 이렇게 선언했다.
‘한자가 멸망하지 않으면 중국이 반드시 망한다(漢字不滅 中國必亡‧한자불멸 중국필망).
1950년 중화민국 부주석 류사오치(유소기)가 선언했다.
“조선(북한) 대사 이주연이 나에게 말했다. 아무 곤란 없이 외국 저작을 한글로 번역할 수 있다.”
21세기 컴퓨터와 한글은 소리글자로 글자 조합, 융합이 편리하여 세계를 이끌어간다
한글 반포 600주년이 되는 2046 디지털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세계적인 유산인 한글을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가장 독창적이고 합리적인 문자”
세계화·정보화·온라인 시대에 정보 전달력
우수성과 진정한 가치를 돌아볼 때다
일제 강정기 한글 지키기
1905년 7월 19일 한성법어학교(漢城法語學校)교장 이능회, 지석영이 새로운 맞춤법을 제안한
‘신정국문(新訂國文)’을 상소해 고종으로부터 허가를 받았다.
‘세계 모든 백성이 누구나 글을 알고 날이 갈수록 문명으로 전진하고 있는데
유독 우리나라만이 어물어물 전진하지 못하고 있다.
해득하기 어려운 한문에 인이 박여 쉽게 이해되는 국문을 숭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1907년 주시경이 한글학회를 창립하다.
1921년 12월 3일 임경재, 최두선, 이승규 등이 모여 국어연구 및 국어운동단체인
‘조선어연구회’로 이름을 고쳐 재건하였다.
10년 뒤인 1931년 1월 10일의 총회 결의에 따라 이름을 ‘조선어학회’로 고치고,
광복 뒤 1949년 9월 5일 정기총회에서 다시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모임은 창립 당시부터 단순한 학문의 연구만을 위한 학회는 아니었다.
주시경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그의 정신과 학문을 이어받는 데 힘쓰고,
국어학의 원리와 이론[學理]을 연구하는 한편,
말과 글을 통해서 민족정신을 지키고 불어넣는 일을 실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