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 둘레길 안양구간 트레킹 #3
09:24 전망바위에서 바라 본 비봉산 전망대(295m) 정상부
삼성산과 뒤로 관악산을 조망한다.
09:28 쉼터 의자에서 다시 비봉산 전망대 정상부를 조망한다.
09:30 항공무선표지소 갈림길
비봉산 마실길 0.9km, 비산3동 가는길 0.9km, 항공무선표지소 0.1km 임도를 만난다.
안양 항공무선표지소 0.1km 이정표에서 망해암까지 포장임도를 따라 내려간다.
09:37 대한불교조계종 안양 망해암 안내도
09:39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에 있는 조선전기에 중건한 암자 망해암 (望海庵)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인 망해암은 관악산(冠岳山)이 흘러내려온
비봉산(飛鳳山, 295m) 동남쪽 8부능선에 서향으로 자리한 암자이다.
1940년대에 편찬된 「봉은본말사지」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 5년(665)에 원효대사가 처음으로 미륵불을 봉안하고
망해암이라 사명을 지었다고 하는데 유물이나 문헌으로 고증된 사항은 아니다.
1407년(태종 7) 한양의 백호(白虎)에 해당하는 관악산의 산천기맥(山川氣脈)을 누르기 위해 왕명으로 몇몇 사찰을 중창할 때 함께 중건하였다고 한다.
1803년(순조 3) 홍대비(洪大妃)의 시주로 중창하였고 1863년(철종 14) 대연화상이 중수하였다.
1950년 6.25 전쟁으로 소실되었는데 이후 현대식으로 신축하였다.
경내에는 근래에 건립한 법당과 범종루, 요사채 등이 있다.
용화전에는 화강암으로 조성된 석불입상과 약사불이 봉안되어 있다.
제4경 망해암 일몰 안내도
망해암(望海庵)은 '바다를 볼 수 있는 암자'라는 뜻으로 신라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創建)하고
조선 순조(純祖) 3년 정조 대왕의 모친인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가 중건했다고 알려진 유서 깊은 사찰이다.
아름다운 서해바다 낙조(落照)를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각박한 도시 일상을 벗어나 나만의 고즈넉한 시간을 가져볼 수 있다.
망해암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조선 세종때 삼남지방에서 국가 세금으로 받은 곡물을 가득 실은 여러 척의 배들이
인천 앞바다 팔미도 근해를 지날 무렵 심한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혀질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매우 절박한 상황에서 많은 선원들이 이리 밀리고 저리 밀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날뛰고 있던 중
돌연 뱃머리에 한 스님이 나타나 “그대들은 너무 당황하지 말고 차분히 내말을 잘 들으라” 하며
선원들을 진정시키고 인도하여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풍랑이 잠잠해지자 한 선원이 “대사님은 어느 절에 사십니까?” 하고 묻자 관악산 망해암에 있노라하며 홀연히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이후 선원들이 한강까지 무사히 도달한 뒤 생명의 은인이며 신통했던 스님을 찾아 망해암에 올라가 보았지만
스님은 계시지 않았고, 그 스님과 용모가 흡사한 모습의 부처님이 법당 안에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이 사연을 임금께 상소하여 알리니 이를 가상히 여긴 임금은
매년 한 섬씩의 공양미를 불전에 올리도록 하였다고 하며 400여년 간 계속되었다고 한다.
망해암은 입지의 불리함 때문에 산 정상의 좁은 대지와 절벽을 이용해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망해암은 서향을 하고 있어 해가 지는 오후가 되면 눈부신 태양이 서쪽 산 너머로 사라지는 일몰의 장관을 조용히 지켜볼 수 있는 곳이다.
또한 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어 눈앞에 안양시의 전경을 바라다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망해암은 가람고, 여지도서 등 18세기 역사서에서 그 이름을 확인 할 수 있어 그 역사가 오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관음전과 종각이 있던 자리에 2층 건물로 1층 지장전(地藏殿)과 2층 천불전(千佛殿)을 신축하였다.
지장전의 내부기둥(內陣柱)은 양쪽으로 돌기둥을 세우고
자연석 암반을 그대로 좌대(座臺)로 사용하여 머리 위에 화려한 보개천장(寶蓋天障)을 앉힌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모시고 있다.
2층 천불전(千佛殿)
천불전에는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주불로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협시보살로 봉안하였다.
공양간이 결합된 복층 건물인 종무소와 요사채
세심당(洗心堂)
안양 망해암 사적비와 전통사찰 망해암 안내도
거북 모양의 받침인 귀부(龜趺) 위에 망해암의 연혁(沿革)과 전설(傳說)을 기록한 비신(碑身)을 세우고
비신 위에는 구름과 용이 얽혀 있는 모습을 조각한 이수(螭首)라고 하는 옥개석(屋蓋石)을 얹었다.
삼성각(三聖閣)은 칠성(七星), 산신(山神), 독성(獨聖)을 모신 전각으로
조선시대 불교가 탄압을 받는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토착신앙을 수용하는 자구책을 마련한 형태로
보통 사찰에서 가장 깊숙하고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오층석탑과 삼성각
오층석탑과 용화전
용화전(龍華展, 미륵불을 모신 법당)
용화전(龍華殿)은 망해암의 주불전으로 미륵불(彌勒佛)과 약사여래(藥師如來)를 모신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지붕 건물로 1952년에 지은 건물이다.
1986년에 세워진 <안양망해암사적비> 기록에 따르면 1407년(태종 7) 한양의 백호(白虎)에 해당하는
관악산의 산천기맥(山川氣脈)을 누르기 위해 왕명으로 몇몇 사찰을 중창할 때 함께 중수하였다고 한다.
1803년(순조 3) 정조대왕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가 정조 능행차길이 잘 보이는 이곳에
정조 임금이 도솔천(兜率天-수미산 꼭대기에 있는 미륵보살이 사는 곳)에서 다시 태어나도록 빌면서 시주를 하여 중창하였다.
주불전인 용화전(龍華殿)은 미륵부처님의 용화장세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용화전(龍華展, 미륵불을 모신 법당)에 봉안된 안양 망해암 석조여래입상(石造如來立像, 경기도 유형문화재제 383호)
망해암 석조여래입상은 고려시대 불상으로 추정되며 총 높이가 3.4m에 이른다.
머리 위에 원형 보개(寶蓋)를 착용하였으며 무릎 아랫부분은 마루 밑에 묻혀있다.
보개를 제외한 몸 전체와 발밑에서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臺座)가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석불입상의 보개 하단에는 ‘성화십오년사월일조성(成化十五年四月日造成)’이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어
1479년(조선 성종 10)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둥글고 양감이 두드러지는 것이 특징이다.
왼손은 가슴께 까지 들어서 엄지와 중지를 맞대었고, 오른손은 자연스럽게내려서 옷자락을 쥔 듯 손가락을 구부리고 있다.
얼굴과 옷 주름, 손 모양에서 보이는 이러한 특성은 안성 죽산리 석조여래상과 시흥 소래산 마애보살입상, 해주 영파리 석조보살입상등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들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이다.
불상의 상호, 옷주름, 수인 등은 고려 전기 석불의 특징을 갖추고 있어 후대에 보개를 추가한 것으로 추정되며
도톰한 코와 입, 길게 늘어진 귓불에 법의는 통견(通肩)이며 굵은 U자형의 옷자락 선이 조밀하게 표현된 조선 시대의 불상으로
당시의 시대적 유형을 살피는 자료로 평가된다.
불상의 후면은 평면으로 다듬은 후 아무런 조식을 하지 않았다.
왼손은 가슴 앞으로 올려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내장하였으며, 오른손은 오른쪽 다리로 내려 외장하였다.
복원하기 이전에는 머리와 보개는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상호와 신체부는 흰색의 안료로 도색되어 있었다.
머리는 마모되었지만 나발을 갖추고 있다. 머리 위에는 큼직한 육계가 있고 육계 상면에는 원형의 두터운 보개가 있다.
머리의 정면 중앙에는 계주가 표현되어 있다. 상호는 방형에 가까운데 이마에는 금속재로 백호를 표현하였다.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양 눈은 반개하여 아래를 보고 있다. 코와 입은 두툼하게 조각하였다.
양 귀는 크게 만들었으며 귓불을 길게 내려뜨리고 있다.
미륵부처님은 정면을 바라보지 않고 얼굴을 약간 오른쪽 방향으로 돌려서 서해 바다쪽을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