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7일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마태오 19,13-15
어린이처럼 다가가라
인형인 줄 알았는데 악마였다는 설정의 공포영화들이 많습니다.
예전의 ‘처키’가 바로 그런 영화였습니다.
귀여운 처키 인형에 도둑의 영혼이 들어가 사람을 해치려한다는 설정입니다.
인형이 분명히 움직였는데 배터리를 확인하니 배터리가 없는 것을 발견할 때의 공포는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요즘엔 제임스 완 감독의 ‘애나벨’이 있습니다.
인형을 통해 마귀가 사람의 영혼을 빼앗으려 한다는 내용입니다.
성당의 유리로 쓰였던 곳에 가두어놓고 매주 사제가 와서 기도하고 성수를 뿌려주지만 누군가 호기심으로 그 문을 열었다가는 큰일이 벌어집니다.
그 안에 숨어있는 마귀가 움직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인형은 그냥 죽어있어야 가장 예쁩니다.
인형이 칼 들고 서 있는 포스터는 참으로 무섭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보일까요?
나도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또 다른 사람도 나에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이런 많은 만남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어떤 사람은 참으로 사랑스럽고 또 어떤 사람은 좀 밀쳐내고 싶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내가 위 공포영화처럼 겉모습은 인형이지만 손에는 칼이 쥐어져있어서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어린이들이 당신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하늘 나라’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이 하늘나라입니다.
왜 하늘나라가 어린이들과 같은 이들의 것일까요? 어린이는 무언가 달라고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린이의 손에는 칼이 없습니다.
그저 주인이 안아주면 만족하는 인형과 같습니다.
어린이는 예수님께서 그저 머리 한 번 쓰다듬어 주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예수님께 뭔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예수님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예수님을 좋다고 말하면서도 실상은 예수님께서 주실 수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안다는 것으로 인정을 받고 싶어서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형에게 준 재산을 자신에게도 주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다가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거든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가진 것이 없어야 어린이처럼 욕심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가지면 더 가지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더 가지고 싶은 마음이 내 손에 쥐어진 칼입니다.
어린이는 왜 욕심이 없을까요?
무언가를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먹어 봐야 맛을 아는 것입니다.
저는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마 어렸을 때 먹어보지 못해서 맛을 들이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돈의 맛을 알았기 때문에 부자가 되고 싶은 것이고, 힘의 맛을 알았기 때문에 권력을 쥐고 싶은 것입니다.
이 욕구가 누군가에게 다가갈 때 내 손에 쥔 칼이 됩니다.
톰 행크스의 ‘그린마일’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두 여자 아이의 살인누명을 쓴 몸집이 거인 같고 험악하게 생긴 흑인 죄수와 그를 지키는 간수의 이야기를 다루었습니다.
처음엔 그 거인에게 잡히면 자기 목숨도 위험할 것 같아서 항상 주의했지만 나중엔 마음이 천사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신에게 해를 가하지 않고 자신의 병도 고쳐줍니다.
사실 그 흑인은 죽어가는 두 아이를 살리려고 했던 것인데 그 생김새만 보고 사람들이 그 사람이 죽였다고 믿어버린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좋은 관계에서 오는 행복인데,
어린이들은 사적인 욕구가 적기 때문에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만들 줄 아는 능력이 있어서입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어린이처럼 다가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냥 예수님이 좋아서 다가오기를 원하십니다.
욕심이 없다는 말은 ‘가난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가난한 마음이 어린이의 마음입니다.
예수님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마음이 어린이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당신은 당신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 존재 자체를 사랑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17일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복음: 마태 19,13-15
그들은 이미 지상에서 천국을 살고 있습니다!
요즘은 어린이들에 대한 인식이나 처우가 과거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좋아졌습니다.
이곳 태안에서는 아기 한 명이 태어나면 마을 입구에 큼지막한 플래카드까지 내겁니다.
가정에서건, 학교건, 성당이건, 아동양육시설이건, 어디든지 아이들을 금이야 옥이야 하며 상전 모시듯이 정성껏 양육하고 동반합니다.
사실 이게 정상인데...그간 너무한 부분이 참 많았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는 남자 성인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유아나 어린이 사망률이 높던 시절, 일단 성인이 되어야 비로소 한 인간 존재로 취급받았습니다.
이런 연유로 사도들은 예수님께 축복을 청하러 오는 어린이들과 부모들을 꾸짖었던 것입니다.
안 그래도 과도한 사목활동으로 몸에 과부하가 걸린 예수님이신데, 별 도움도 안 되는 어린이들에게 할애할 시간이 없다는 생각에 사도들은 언짢아하며, 그들을 물리친 것입니다.
그때 보여주신 예수님의 태도가 놀랍습니다. 어린이들을 무시한 사도들을 크게 꾸짖으십니다.
어린이들도 하느님께서 손수 창조하시고 생명의 숨결을 불어 넣어 주신 소중한 존재임을, 그들 안에도 하느님께서 굳건히 현존하심을 강조하십니다.
그러니 그들을 무시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는 그들을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외치십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여름 내내 많은 어린이들, 청소년들을 만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어른들처럼 속이 구리지 않습니다. 겉과 속이 다르지도 않습니다.
노회하지도 복잡하지도 않습니다.
단순하고 솔직합니다.
순수하고 반짝반짝 빛납니다.
그들은 이미 지상에서 천국을 살고 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강론>
(2024. 8. 17. 토)(마태 19,13-15)
<소외와 차별은 큰 죄입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마태 19,13-15).”
1) 여기서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하였다.” 라는 말은, ‘안수기도’를 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뜻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중이었거나, 아니면 휴식을 취하고 계시는 중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은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중단시키지 말라는 뜻이었거나, 아니면 예수님의 휴식을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위해서’ 사람들을 막은 것인데, 그것은 예수님을 위한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었습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라는 말이 더 있습니다(마르 10,14).
‘언짢아하시며’를 원문대로 직역하면 ‘화를 내시며’입니다.
제자들이 사람들을 막은 일은, 예수님께서 화를 내시면서 그들을 꾸짖으실 정도로 크게 잘못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2)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라는 말씀은, 어린이들이 오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말고 내버려두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인도해 주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만나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당신에게 오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은, 또는 교회는 ‘모든 사람’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해 주는 일을 해야 하고, 원한다면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사람들을 도와주는 ‘연결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교회의 가장 크고 중요한 사명인 ‘복음 선포’는, 바로 그 ‘연결 통로’가 되는 임무를 수행하는 일입니다.
‘복음 선포’를 하지 않는 교회는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연결 통로’의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로서 존재할 이유도 없고, 자격도 없습니다.
산상설교에 있는,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라는 말씀과, 최후의 만찬 때에 하신 말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을 당신에게
연결해 주는 통로가 되라는 임무를 주신 말씀입니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라는 말씀은,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들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하늘나라에는 소외와 차별이 전혀 없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늘나라에 없는 소외와 차별이 지상의 교회에 있다면, 그 교회는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3) 이 이야기에서 ‘어린이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과 작은 이들, 즉 소외계층에 속해 있는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교회는 ‘작은 이들’에게 특별히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고, ‘작은 이들’이 한 사람도 소외당하지 않고, 차별 당하지 않고, 기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적극 도와주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을 예수님께서 바라고 계시니, 신앙인들은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 현실을 보면, 교회 안에 ‘소외’와 ‘차별’이 분명히 있고, 그 소외와 차별 때문에 신앙생활 하기를 어려워하거나 포기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연결 통로’가 되기는커녕 예수님과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이 되는 경우가 실제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목소리가 큰 사람들, 즉 교회 내부의 기득권층 사람들의 죄이기도 하고, 공동체 전체의 죄이기도 합니다.
4) 사도들은 그 소외와 차별을 대단히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가령 여러분의 모임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누추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온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 한다면,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야고 2,1-4)”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여러분은 먹고 마실 집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1코린 11,20-22).”
가난한 이들이 교회 안에서 소외당하고 차별당하는 일은, 사도시대 때부터 있었던 일이고, 사도들은 그것을 대단히 심각한 문제로 생각했습니다.
소외와 차별은 사랑의 정반대 쪽에 있는 일이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화를 내시면서’ 아주 엄하게 말씀하신 가르침을 마음속에 깊이 새겼고, 그래서 교회를 다스릴 때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