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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년다이어트 원문보기 글쓴이: 박카스아가씨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그의 어머니(방효열)는 온갖 궂은일을 다 하며 자녀를 키웠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방씨 성을 가진 모든 여성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방씨가 시집가면 뉘 집에 가나 그
집이 잘돼"라고 어머니 자랑을 했던 그가 나와 특별히 친했던 까닭이 내 어머니가 방씨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강서에서 소학교를 마치고 성적이 하도 우수하여 평양사범에 입학하였다.
백선엽은 어려서부터 군인이 되고 싶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국민학교 교사 노릇을 한동안 했지만,
군인이 되고자 하는 그 꿈을 버릴 수가 없어 새로 탄생한 만주국의 봉천(심양) 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던 때 백선엽은 만주군의 중위로 해방을 맞이하였다. 김일성이 평양에서
적위대(붉은군대)를 창설하던 무렵, 백선엽은 조선민주당을 세운 조만식 밑에서 비서 일을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뜻하는 바가 있어 그 겨울에 월남하여 남한에 생긴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학하여
그 이듬해 육군 중위로 임명되어 제5연대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국방경비대 내에서 대대장, 연대장을 거쳤고 1948년 12월에는 대령으로 진급되었다.
6·25 직전까지는 사단장으로 근무했고 6·25가 터진 뒤에는 준장으로 진급해 군단장에 임명되었다.
전쟁 와중에 육군 참모총장, 계엄사령관을 역임하다가 대한민국 최초의 육군 대장으로 진급되었다.
우리나라 역사에 처음 대장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별을 단 그 많은 장성 가운데서 서북 출신일 뿐 아니라 아무런 배경도 없는 백선엽을 발탁한 대통령
이승만의 혜안에 새삼 감탄한다. 우남 이승만은 소박하다 못해 투박하고, 남의 마음을 살 만한
매끄러운 말을 한마디도 할 줄 모르는 백선엽에게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차지할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누리게 한 것이다.
6·25전쟁에서 용맹을 떨친 사병과 장성은 많다. 그러나 만일 1950년 8월과 9월에 벌어진 다부동 전투에서
제1사단장 백선엽이 발휘한 뜨거운 애국심이 없었더라면 대구는 인민군 수중에 들어갔을 것이고 낙동강과
부산도 모두 인민군에 의해 점령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칠곡 부근에 진지를 구축하고 인민군의
남진을 저지해야 했던 백선엽의 제1사단은 미국 제1기병사단과 공동 작전을 펴게 되었는데 여러 날
굶주린 데다가 피로가 겹친 군인들이 고지를 이탈하는 일이 속출하고 있었다.
그 정보를 접한 백선엽은 낙동강 전선을 지키기 위해 다부동의 고지를 사수해야만 했다. 사단장 백선엽이
병사들을 이끌고 앞장서 나가면서 부하들에게 "내가 후퇴할 낌새를 보이면 너희가 나를 쏴라"는 엄명을
내리고 선두에서 그 고지를 향해 돌진하였고 다부동 고지를 지킴으로써 대한민국을 지킬 수가 있었다.
칠곡군 가산면에 다부동전투 전적비와 기념관이 세워진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1960년 5월 군 내부의 ''하극상'' 현상이 벌어지는 것을 목격하고 백선엽은 퇴역을 결심하였다.
그 이듬해 5·16 군사혁명이 터졌다. 군을 떠난 백선엽으로서는 만감이 교차하는 복잡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가 군의 요직에 있을 때 박정희를 남로당 총책으로 몰았던 김창룡 등이 그를 군에서 숙청하려고 했을 때
박정희의 유능함을 잘 알고 있던 백선엽은 적극적으로 그의 구명운동에 나섰던 것이다.
백선엽을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람으로 한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오늘 그는 나이가 99세가 되었지만
생각하는 것은 어린아이와 같이 천진난만하다. 군대에 있으면서 그는 별을 여러 개 달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 운동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가 받은 훈장을 다 달고 외출을 한다면 군복의 앞자락이 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겁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자기의 무공을 자랑해 본 적이 없다. 몇 해 전
그에게 별을 하나 더 달아 주자는 국민 열망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을
조금도 그는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육군 참모총장을 비롯하여 군의 모든 요직을 두루 거쳤지만, 누구에게도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다. 예비역에 편입된 뒤에는 중화민국 대사, 프랑스 대사, 캐나다 대사 등을 역임했지만,
그가 외교관이 되려고 노력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교통부 장관에 임명됐기 때문에 서울시
전철 1호선 완공이 가능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는 한 번도 자랑하지 않았다.
그 뒤에 충주비료 등 국영 기업체 사장도 지낼 만큼 다양한 경력을 가졌지만 백선엽의 인생 좌표는
"대한민국을 위해서라면 나는 지옥에라도 가겠다"라는 한마디뿐이다. 백선엽을 만날 때마다
나는 큰 산을 대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이태백의 시 한 수를 읊어
장군 백선엽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한다.
홀로 경정산과 마주 앉아(獨坐敬亭山)
뭇새들 높이 날아 다 사라지고 /외로운 구름 한 점 흘러가는데 /아무리 서로 봐도 싫증 안 나는
/그대 경정산 있을 뿐일세.
출처 :
▲1950년 10월, 평양 점령 후 대동강에서 밀번 美 육군 1군단장과 작전을 협의하는 백선엽 장군.
1950년 8월 백선엽 장군은 전사에 길이 남을 다부동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그는 퇴각하려는 부하들에게
"우리가 물러서면 나라가 망한다. 내가 앞장서겠으니 나를 따르라. 만약 내가 후퇴하거든 나를 쏘라."고
독려하며 전투를 지휘해 낙동강 전선을 지킨 일은 너무나 유명한 일화이다.
▲6. 25 전쟁 후에 한국의 1사단 사령부를 방문한 맥아더 원수와 배웅하는 백선엽 1사단장
▲펀치볼 부근을 시찰한 유엔군수뇌부 좌로부터 콜린스 대장, 리지웨이 대장, 밴플리트 대장,
바이어스 소장, 백선엽 소장
▲1951년 7월10일 개성에서 열린 휴전회담에 한국군 대표로 출발하기에 앞서 촬영한 기념사진.
좌로부터 머크제독, 크레이기 공군소장, 백선엽소장, 조이 해군소장,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 호디스 육군소장
▲1954년 32살의 나이로 제7대 육군참모총장에 오른 백선엽 장군
우리 국민에 공산주의자의 실체를 똑똑히 알려준 것이 여수· 순천 반란사건이었다. 몸서리쳐지는
캄보디아의 killing field가 이때 이미 저질러졌다. 공산당의 실체를 비로소 알게 된 국민들은 일제하 ‘
아카’를 떠올려 이들을 빨갱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김대중 시절에 와서 여순 반란사건이 반란
주체와 경위를 알 수 없는 여수·순천 10·19 사건으로 바뀌어졌다.
여순 반란사건은 제주 4·3 사건 진압을 위해 출동하게 된 국방경비대 14연대에 숨어있던 좌익이
시작한 반란이지만, 진행되는 과정에서 지역에 숨어있던 좌익이 가담하여 확대되었다.
이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분은 당시 토벌을 지휘했던 백선엽 장군이다.
여순사건으로 군내의 빨갱이가 발각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대대적 숙군이 진행되었다. 숙군은
백선엽 정보국장이 주도했다. 종북 주사파가 유난히 ‘친일군인’ 백선엽 장군을 노리는
이유가 이것이다. 1949년 5월 군내에 숨어 있던 좌익 강태무 표무원이 위험을 느껴 각각 대대를 이끌고 월북
했다. 이 상태에서 6.25 전쟁이 일어났다면 국군은 싸우기도 전에 붕괴하고 말았을 것이다.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이다.
좌파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논리로 문화를 통해 역사를 왜곡한다. 특히 영화는 젊은이에
강력한 인상을 준다. 애국세력은 이에 대한 대책을 우선 강구해야 한다.
● 장관의 操身
“20사단을 해체하는 결정을 한 모양이다.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장관은 이런 문제에 간여해서는 안 되며 군사문제는 합참의장과 육군 참모총장에 맡겨야 한다. ”
20기보사가 홍천으로 옮기는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다. 지금까지 별 문제가 없었는데 20사단이
광주사태 진압작전에 참여한 데에 대해 청와대가 시비를 걸자 문제가 터진 것 같다.
정경두 장관은 20기보사를 홍천의 11기보사로 통폐합하고 20사단을 해체하는 결정을 한 모양이다.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장관은 이런 문제에 간여해서는 안 되며 군사문제는 합참의장과
육군 참모총장에 맡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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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정경두 장관은 공군참모총장에서 합참의장이 되고 국방장관에 발탁된 인물이다. 군출신
장관은 출신군을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에 더욱이 타군에 함부로 간여해서는 안 된다. 역대 국방장관은
육군 출신이 많았는데 이들은 해·공군에 시시콜콜 간여하지 않았다. 공군 출신의 이양호 장관이나
해군 출신의 윤광웅 장관도 자제할 줄 알았다.
명저 『군인과 국가』에서 문민통제의 교리를 정립한 헌팅턴이 규정하였던 장관의 요건―군의
대변자(Military Spokesman), 기업 경영자적 역할(Business Manager), 정책 전략가(PolicyStrategist)을
국방장관은 언제고 깊이 생각해야 되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도량, 지혜, 통찰력, 그리고 판단력이며,
특히 주의할 것은 사령관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일은 현직의 합참의장과 참모총장에 맡겨야 한다. 앞으로 민간인이 장관으로 온다고 하면
이런 일은 장관이 개입할 일이 아니다. 군 출신 장관은 그가 익숙한 군사문제에 간여하려는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 818 구도에 따르면 군령은 합참이 담당하나, 부대배치는 군정사항도
포함하기 때문에 육군본부도 관여해야 한다.
선배 장군들도 이런 일에 함부로 간여해서는 안 된다. 하려면 20사단장, 참모총장, 국방장관을
거친 이종구 장군 정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전사 연구자로서 관련사실을 소개한다. 11사단은 6.25 전쟁에서 1사단의 다부동 전투, 6사단의
용문산 전투, 9사단의 백마고지 전투와 같은 큰 전투를 치르지 않았는데, 전쟁 말기 육군을 20개
사단으로 확장할 때 생긴 부대이기 때문다. 11사단은 오히려 거창 학살사건의 오명을 썼던 부대다.
물론 당시 관계자들은 모두 처벌을 받았고 현재 11사단 장병이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사단장 최덕신은 정전회담 수석대표를 거쳐 군단장까지 승진하고 516 후 외무장관도 지냈다.
후 주 서독 대사가 되었다가 동백림 사건 처리로 정부에서 내쳐진 최덕신은 친북노선으로
기울어져 1970년대에는 북침설을 제기하다가 1986년 북한에 망명 했다. 부친 최동오가 설립한
화성의숙에 김일성(당시:김성주)이 다닌 연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20사단은 수기사에 이어 기계화부대의 대표적 부대다. 신형 탱크가 먼저 배치되고 국군의 날
행사에 참여한다. 서울 인근에 있어 충정부대로 분류되어 사단장도 박준병, 이종구, 민병돈 등
유력한 장군들이 맡아 왔으며, 광주사태 진압에도 참가하였다.
양평 주민들은 20사단이 나가는데 별로 관심이 없는 데, 오히려 이들 부대들이 나가면 수도권의
좋은 택지가 될 것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과 순서에 따라서, 그리고 관련사항을
포괄적으로 참조하여 처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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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제는 하다하다 태극기 부대까지 들어온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