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지燒紙>와 <녹천엔 똥이 많다>
이창동의 첫 소설집은 6월 항쟁의 여파가 등등한 87년 9월에 출판됐다. 표제작
<소지>를 비롯한 문제작으로 문단에 주목을 받았다. 80년대 리얼리즘을 논할
때 이창동은 매우 중요한 작가인데, 동아출판사가 월북 문인까지 포괄하여 명실공히
‘한국’ 소설이라는 이름 아래 편찬했던 《한국 소설사 대계》에 그의 이름과 작품이
한 꼭지를 차지한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이창동은 워낙 과작의
작가다. 이후 91년 이상문학상 추천 우수작(<운명에 관하여>)에 그의 이름이
보이다가 92년 두 번째 창작집인 《녹천엔 똥이 많다》가 출판된다.
내가 영화 감독 이전에 소설가로서 이창동을 만난 건 그에 대한 신뢰가 물씬 묻어
나는
몇 편의 평론과 《한국 소설사 대계》에 실린 그의 첫 소설 몇 편들, 그리고 동명으로
제작된 MBC 베스트극장 <녹천엔 똥이 많다>의 원작자로서였다.
어디선가 이창동이 80년 5월 비극이 있던 당시 대구에서 친구들과 고스톱을 치고
있었다는 얘길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 역사적 자괴감은 그가 어째서 이토록 삶의
날것으로서 리얼리즘에 천착하는지 이해하는 단초가 된다.〈소지〉에서 그는 남북
분단과 독재라는 십자 포화 속에 개인의 역사적 화해와 희망을 이야기한다. <녹천엔
똥이 많다>는 운동권 동생의 ‘완벽함’에 대비해 너무도 비루하고 ‘왜소한’
형에 대한 연민을 이야기한다.
그가 관심을 갖는 것은 궁극적으로 역사와 현실의 상흔에 찢긴 개인이다. 그것도
억압과 폭력에 대항하여 싸우는 개인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저항할 힘도 갖지 못한
작고 작은 개인이다. 이 문제의식은 고스란히 영화로 옮겨간다.
<박하사탕>과 <초록 물고기>
박하사탕에는 이창동 감독의 절망과 퇴행 심리가 잠복해 있다.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발상은 절망의 결과인 퇴행이다. 영호가 나 돌아갈래, 라고 절규할
때, 그것은 결코 되돌아 갈 수 없음을 역설한다. 관객은 역순으로 진행되는 에피소드들을
차례차례 거슬러 올라가면서 희망이 폐쇄되는 숨막히는 절망을 확인한다.
영화는 근본적으로 ‘판타지물’이다. 영화의 물적 토대가 이미 그렇게 영화의
성격을 규정한다. 그러나 이창동의 전업은 이러한 영화의 성격, 혹은 그때까지 한국
영화가 고수해왔던 어떤 금기들을 뛰어넘을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은 물론 한국적 상황이다. 뛰어난 리얼리즘 영화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적어도 한국에선 그 누구도 80년 광주를 이창동 ‘감독’과 같이 ‘직설성’으로
역사와 개인의 절망에 투여한 이는 없었다. 장선우의 <꽃잎>과 비교하면 이는
확연히 드러나는데 우리는 <박하사탕>에서 영호가 어떻게 파괴되어 가는지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내러티브에 차례로 접하고 그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반면,
<꽃잎>의 소녀(이정현)에 관해서는 그 과정이 짐작되고 추측될 뿐이다. 따라서
소녀의 비극은 우리의 인식에 근원적인 ‘불편함’을 안겨주지는 않는다. 불편함은
영상의 환영에 머물 뿐이다. 요컨대, 영호의 내러티브는 ‘소설’(헤겔 미학의 계승자인
루카치적 의미의)인 반면 소녀(이정현)의 내러티브는 ‘신화’인 것이다.
<초록 물고기>에서도 관객을 불편하게 하는 ‘절망’은 계속된다. 막동이의
죽음은 막동이가 품었던 희망이 소박하고 작은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절망적이다.
이창동은 한국 영화에 전복을 꾀하고자 했던 것일까? 실로 우리 영화가 이창동을
만나기까지 얼마나 오랜 세월이 필요했던 것일까.
예술가와 역사가의 두 눈
그러나 이창동은 장편의 작가가 아니었다. 단편 소설은 시의 속성을 띤 서사 장르다.
꼭 그렇진 않지만 분량의 속성이 서사성보다 심미성 지향을 규정하게 만든다. 그가
장편을 구성해내지 못했다는 경력은 곧바로 영화에도 반영이 된다. 그의 영화 내
플롯은 언제나 간명하다. 복합적인 서사 구조가 투영되어 두터운 역사성을 획득하는
장편 소설과는 거리가 멀다. 대신 그의 작품 곳곳에는 어떤 심미적인 취향과 치밀함이
돋보인다. 그 치밀함이 현실의 치밀한 재생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그의 리얼리즘이
온전할 수 있는 것일 뿐이다.
말을 바꾸면 그의 경로가 올곧게 리얼리즘을 고수할 수 있을 지는 미지수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창동이 새로 택한 장르인 영화의 속성과도 맞물리는 맥락이다.
신작 <오아시스>에서 그의 독특한 심미성은 도두라지는데, 한국 영화사에서
드문 풍경인 ‘환상’의 처리에서 빛을 발한다. 그의 환상은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다.
특별히 현실에 뿌리 박고 있는 그의 심미성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면에서 이창동이 대가임을 인정하더라도 못지 않게 그가 넘어야 할 산도
적지 않아 보인다. 그의 서사의 플롯은 너무 간명하여 서사 특유의 중층성이나 해석의
열린 구조를 보여주지 못한다. 즉, 지금까지 그가 했던 작업은 한 장르가 외면했던
역사에 대한 정면에서의 응시였다. 그러나 <오아시스>는 이러한 응시에서의
일탈을 보여준다. 그가 여전히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민과 문제 의식을 강고하게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문제의식을 그대로 풍요로운 서사의 복잡성으로 끌고
가지 못한다면 그의 서사 미학은 현실과의 구체성을 끝까지 유지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몫은 다음 세대 작가의 몫인 지도 모르겠다. 그의 단편 미학적인 시선이
현실에서의 그늘을 그대로 찍어 영화화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위대하다.
오아시스, 사랑이란 소통이다
종두는 사회 부적응자이고 공주는 장애인이다. 그 둘의 공통점은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소통이란 인간의 근원적인 조건이다. 단독자로서의 ‘인’이
아니라 관계를 통해 규정되는 ‘인간’의 조건인 것이다. 여기에는 소통의 규준에
관한 문제의식이 짙게 깔려 있다. 우리는 이러한 소통의 어려움 자체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더 나아가 ‘윤리적’ 차원에서 ‘악’으로 여기기까지 한다. 소통되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고 이해되지 못하면 배척된다. 그런데 과연 소통의 규준은 천부적인
것인가? 당연한 것인가? 그 규준은 어째서 관용스럽지 못한 것일까?
영화를 보며 내내 들었던 생각은 누구나 종두가 극대화한 사회 부적응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타인들과 완벽한 소통이란 불가능하다. 직장인은 물론이거니와 가족들과
애인과 친구들과 근본적으로 타자와 합일되지 못한다면 이러한 소통 불가능성은 대인관계에서
내제된 속성이다. 결국 우리가 사회 부적응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본래적으로 가진
소통 불가능성의 한 양태일 뿐이다. 이러한 상대성은 필연적으로 관용을 호출한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일정한 소통 체계를 공유하고 소통하는 ‘정상’인들이
이러한 ‘비정상’인들을 용인하기는커녕 그들을 억압하고 배제하면서 자신의 ‘정상성’을
획득하려 한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종두와 공주는 서로 소통한다. 그들은 서로 대화가 원활하지 못하지만
물리적인 소통 이상의 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바로 ‘사랑’이다. 그러나 이미
‘정상’의 규준에서 배제된 그들에겐 그들의 ‘관계’인 사랑조차 ‘비정상’으로
배제된다. 종두는 변태로 몰려 자신을 설득할 가능성 자체를 차단 당한다. 공주는
그의 육체적 요건 때문에 자신의 사랑을 증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그 둘은 소통한다.
보다 더 심오한 인간의 조건은 사회적 연결망에 접속된 범박한 ‘관계’가 아니라
이 세상 단 하나의 ‘사랑’일 지라도 ‘사랑’인 것이다.
희망을 이야기하기, 그 이프로 부족한
결론에서의 희망이란 결국 이러한 배타성이 여전히 온존하는 상황에서 얘기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과연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오아시스에 드리워진
나무 가지가 사라진다는 상징이 종두와 공주의 사랑을 보장해준단 말일까.1) 생각해
보라. 여전히 공주의 오빠는 종두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종두의 가족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설령 공주를 데리고 종두가 멀리 도망간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삶이 행복할
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다.
말하자면 전작들과 달리 이창동이 처음으로 꺼낸 희망은 그야말로 희망사항일
뿐이다. 그것은 현실이 보여주는 어떤 현실적 징후로서 희망이 아니라 감독의 바램이
미학적으로 투여된 자의적 표상일 뿐이다. 우리는 전작들과 달리 그 희망을 설득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구체성에 근거한 그의 서사가 순간 증발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구체성에 근거한 리얼리즘 서사에서 우리가 희망의 근거로 뽑아 올리는
것이 ‘진정성’ 개념이다. 역사의 진정성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살육과 비통의
역사를 언젠가는 화해와 자유의 역사로 밀어 올릴 것이다. 또한 사랑의 진정성은
많은 장애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행복을 획득하게 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더 이상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 무언가를 말해야 하고 무언가를
설득시켜야 한다.
문제는 어떻게 설득하냐는 것인데, 서사는 바로 이런 진정성을 통해 독자를 설득시켜야
한다. 독자는 비록 논리적이지 않더라도 진정성에 설복당해 희망의 징후를 수용하게
된다. 그 사랑이 더더욱 구체성에 입각해 있을수록 우리는 더더욱 그 진정성의 위력을
실감하게 된다.
<오아시스>는 그런 면에서 흠잡기 어려울 것이다. 문제는 조금 엉뚱한 데
있는 듯 싶다. 설경구의 연기는 물론 빼어나다. 그러나 전작에서의 캐릭터와 연관되어
그의 수위를 넘는 발성들이 종두라는 캐릭터가 지닌 내제적 ‘순수성’을 드러내는
데 방해를 하고 있는 듯 하다. 그것은 그들의 사랑이 ‘정상’과 달라서 생기는 거리감이
아니다.
이것은 감독의 의도인가? 진정성 개념에 대한 색다른 도전일까? 사랑이란 현실
속에서 (제약되어)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현실에 대항하여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의 근원이라는 것을 얘기하는 것은 아닐까? 요컨대 지금 종두와 공주의 미래를
비현실적인 것으로 의심하는 나의 관점, 종두의 캐릭터에 순수에 관한 전형성을 투영하는
나의 선개념, 이 모든 것들이 실은 닳고 닳은 세속의 편견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부연하기 - 여성성으로 미끌어져 들어가기
이창동의 서사에서 여자는 긍정적이다. 남자는 구별 짓고 군림하는 반면 여자는
받아들인다. <오아시스>에서도 종두의 형수는 특징적이다. 그녀는 종두가 싫다고
말하면서 종두의 상처를 치료해 준다. 그녀는 그가 싫어도 그를 받아들인다.
역사의 직접적인 상흔, 폭력은 남성들이 결과한 것이다. 영호는 그가 원치 않게도
‘남성’이라는 이유로 그 폭력을 고스란히 떠 안게 된다. ‘받아들임’의 여성성은
유약해 보이지만 역사의 직접적인 상흔 옆에서 이 피폐해진 자를 끌어안는다. 역사와
현실에서 폭력과 상처에 대한 연민을 본 자가 필연적으로 여성성으로 미끌어져 들어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여성성이 받아들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여성의
슬픈 역사적 위상(세계사에서 배제된)을 역설적으로 웅변하고 있음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다. (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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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기서 사랑에 대한 중요한 전제가
필요하다. 사랑이란 어떻게 구현되는가. 단지 두 사람만의 소통으로 구현되는가?
아니면 주변 환경 속에 구현되는가. 예컨대 종두와 공주의 사랑은 주변 환경과 무관하게
구현될 수 있는가? 여기서 전제란 사랑은 구체적 현실 위에서 구현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