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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소개)
시인은 1950 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문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3 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1982 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새벽편지', '별들은 따뜻하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등이 있으며, '소월시문학상',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작가의 말)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이후 시가 씌어졌다. 사람은 누구나 다 시인이다. 사람의 가슴속에는 누구나 다 시가 들어 있다. 그 시를 내가 대신해서 한 권의 시집으로 묶었다. 당신의 가난한 마음에 이 시집의 시들이 맑은 물결이 되어 흘러가기를.
1998 년 6월 정호승
사랑한다
밥그릇을 들고 길을 걷는다 목이 말라 손가락으로 강물 위에 사랑한다라고 쓰고 물을 마신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리고 몇날 며칠 장대비가 때린다 도도히 황톳물이 흐른다 제비꽃이 아파 고개를 숙인다비가 그친 뒤 강둑 위에서 제비꽃이 고개를 들고 강물을 내려다본다 젊은 송장 하나가 떠내려오다가 사랑한다 내 글씨에 걸려 떠내려가지 못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남한강
얼어붙은 남한강 한가운데에 나룻배 한 척 떠 있습니다 첫얼음이 얼기 전에 어디론가 멀리 가고파서 제딴에는 먼바다를 생각하다가 그만 얼어붙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나룻배를 사모하는 남한강 갈대들이 하룻밤 사이에 겨울을 불러들여 아무데도 못 가게 붙들어둔 줄을 나룻배는 저 혼자만 모르고 있습니다
꽃 지는 저녁
꽃이 진다고 아예 다 지나 꽃이 진다고 전화도 없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지는 꽃의 마음을 아는 이가 꽃이 진다고 저만 외롭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꽃 지는 저녁에는 배도고파라
석련(돌 석, 연꽃 연)
바위도 하나의 꽃이었지요 꽃들도 하나의 바위였지요 어느 날 당신이 나를 찾은 후 나의 손을 처음으로 잡아주신 후 나는 한 송이 석련으로 피어났지요 시들지 않는 연꽃으로 피어났지요
바위도 하나의 눈물이었지요 눈물도 하나의 바위였지요 어느 날 당신이 나를 떠난 후 나의 손을 영영 놓아버린 후 나는 또 한 송이 석련으로 피어났지요 당신을 향한 연꽃으로 피어났지요
수련
물은 꽃의 눈물인가
꽃은 물의 눈물인가 물은 꽃을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고 꽃은 물을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한다 새는 나뭇가지를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고 눈물은 인간을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한다
발자국
눈길에 난 발자국만 보아도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눈길에 난 발자국만 보아도 서로 사랑하는 사람의 발자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은 발자국들끼리 서로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것을 보면남은 발자국들끼리 서로 뜨겁게 한 몸을 이루다가 녹아버리는 것을 알면 눈길에 난 발자국만 보아도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윤동주의 서시
너의 어깨에 기대고 싶을 때 너의 어깨에 기대어 마음놓고 울어보고 싶을 때 너와 약속한 장소에 내가 먼저 도착해 창가에 앉았을 때 그 창가에 문득 햇살이 눈부실 때 윤동주의 서시를 읽는다 뒤늦게 너의 편지에 번져 있는 눈물을 보았을 때 눈물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기어이 서울을 떠났을 때 새들이 톡톡 안개를 걷어내고 바다를 보여줄 때 장항에서 기차를 타고
가난한 윤동주의 서시를 읽는다 갈참나무 한 그루가 기차처럼 흔들린다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인가 사랑한다는 것은 산다는 것인가
정동진
밤을 다하여 우리가 태백을 넘어온 까닭은 무엇인가 밤을 다하여 우리가 새벽에 닿은 까닭은 무엇인가 수평선 너머로 우리가 타고 온 기차를 떠나보내고 우리는 각자 가슴을 맞대고 새벽 바다를 바라본다 해가 떠오른다 해는 바다 위로 막 떠오르는 순간에는 바라볼 수 있어도 성큼 떠오르고 나면 눈부셔 바라볼 수가 없다 그렇다 우리가 누가 누구의 해가 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서로의 햇살이 될 수 있을 뿐 우리는 다만 서로의 파도가 될 수 있을 뿐 누가 누구의 바다가 될 수 있겠는가 바다에 빠진 기차가 다시 일어나 해안선과 나란히 달린다 우리가 지금 다정하게 철길 옆 해변가로 팔짱을 끼고 걷는다 해도 언제까지 함께 팔짱을 끼고 걸을 수 있겠는가 동해를 향해 서 있는 저 소나무를 보라 바다에 한쪽 어깨를 지친 듯이 내어준 저 소나무의 마음을 보라 네가 한때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기대었던 내 어깨처럼 편안하지 않은가 또다시 해변을 따라 길게 뻗어나간 저 철길을 보라 기차가 밤을 다하여 평생을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은 서로 평행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 굳이 하나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기보다 평행을 이루어 우리의 기차를 달리게 해야 한다 기차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늘 혼자 남는다 우리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울지 않는다 수평선 너머로 손수건을 흔드는 정동진의 붉은 새벽 바다어여뻐라 너는 어느새 파도에 젖은 햇살이 되어 있구나 오늘은 착한 갈매기 한 마리가 너를 사랑하기를
고래를 위하여
푸른 바다에 고래가 없다면 푸른 바다가 아니지 마음속에 푸른 바다의 고래 한 마리 키우지 않으면 청년이 아니지 푸른 바다가 고래를 위하여 푸르다는 걸 아직 모르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모르지 고래도 가끔 수평선 위로 치솟아올라 별을 바라본다 나도 가끔 내 마음속의 고래를 위하여 밤하늘 별을 바라본다
리기다 소나무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한 그루 리기다소나무 같았지요 푸른 리기다소나무 가지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던 바다의 눈부신 물결 같았지요
당신을 처음 만나자마자 당신은 가장 아름다운 솔방울이 되길 원했지요 보다 바다 쪽으로 뻗어나간 솔가지가 되어 가장 부드러운 솔잎이 되길 원했지요 당신을 처음 만나고 나서 비로소 혼자서는 아름다울 수 없다는 걸 알았지요 사랑한다는 것이 아름다운 것인 줄 알았지요
당신
당신을 만나러 서울구치소로 가는 밤길에 함박눈이 환히 길을 밝힙니다 눈송이들은 눈길을 달려가는 어른 쥐들의 눈동자인 양 어여쁘고 당신이 기대어 잠들던 벽돌은 길이 되어 추운 나무뿌리들의 가슴을 쓰다듬고 있습니다 언젠가 당신을 만나고 돌아오던 날 눈길에 십자고상 하나 던져버렸던 일이 부끄럽습니다 이제 곧 나무를 떠난 나뭇잎들은 돌아옵니다 적게 가질수록 더 많이 갖게 된 나뭇잎들은 썩어 다시 싹을 틔웁니다 당신은 상처입을 때까지 사랑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아직도 바람에 흔들리는 까닭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새벽별들이 가끔 나뭇가지에 걸려 빛나는 것은 당신을 사랑하는 나무뿌리들의 고요한 기쁨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마음
깊은 숲 속에 커다란 호수가 하나 있었고, 그 호수에 큰 뱀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 호수에 외로운 청년 한 사람이 와서 쓸쓸하게 서 있다가 돌아갔다. 뱀은 그 청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가 만약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저 불쌍한 청년을 위로해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청년은 호숫가에 자주 찾아왔다. 늘 골똘한 생각에 잠겨 오랫동안 호숫가를 거닐다가 돌아갔다. 뱀은 갈수록 청년에게 마음이 끌렸다. 어떻게 하면 청년의 아내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밤을 새웠다. 하루는 뱀이 호수를 지키는 신을 찾아갔다. "저는 저 외로운 청년의 아내가 되고 싶습니다. 부디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 신은 뱀을 아름다운 여자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한 가지 단서를 붙였다. "이제 저 청년을 따라가서 그의 아내가 되어라. 그러나 네가 아기를 낳으면 다시 뱀이 되어 호수로 돌아와야 한다." 뱀은 청년과 깊은 사람을 나누었다. 꿈 같은 세월이 흘러 지나갔다. 뱀은 마침내 아기를 낳게 되었다. 이제 다시 본디의 뱀이 되어 호수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뱀은 눈물을 흘리며 청년에게 자초지종을 다 고백했다. 그리고 자기의 아름다운 한쪽 눈을 뽑아 아기의 장난감으로 남기고 다시 호수로 돌아갔다. 청년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열심히 아기를 보살폈다. 아기의 손엔 늘 어머니의 눈을 쥐어 주었다. 이상하게도 그 눈알을 가지고 놀면 아기가 탈없이 잘 자랐다. 그런데 한번은 아기가 그 소중한 어머니의 눈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청년은 하는 수 없이 아기를 안고 호숫가로 가 뱀을 불렀다. 그러자 뱀이 나타나 나머지 하나 남은 눈알을 마저 뽑아 주면서 말했다. "저는 이제 앞 못보는 장님입니다. 부디 잃어버리지 마시고 소중히 간직하세요.
겨울잠자리
진눈깨비가 슬슬 내리는 강기슭 마른 갈대 끝에 앉아 엄마! 하고 소리치는 아이들의 소리를 듣고도 가는실잠자리는 어쩌지 못했던 것이다 살얼음이 살짝 언 겨울강을 건너다가 아이들 몇 명이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고도 가는실잠자리는 오직 갈대 끝에 앉아 파르르 날개만 떨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해 가을의 어느 푸른 날처럼 신나게 저공비행을 하면서 아이들의 손을 힘차게 잡아 끌어올리고 싶었으나 그만 차가운 바람에 떨며 갈댓잎만 몇 번 흔들고 말았던 것이다 진눈깨비를 맞으며 낚싯배를 타고 강 깊숙이 죽은 아이들의 시체를 찾던 사람들이 시체를 찾다 말고 하나 둘 강가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새우깡을 안주 삼아 몇 차례 소주잔을 돌리는 것을 보고 가는실잠자리는 몇 번이고 실 같은 꼬리만 도르르 말아올렸던 것이다 더러 담배꽁초를 강물에 내던지거나 말없이 소주만 연거푸 들이켜는 남자들 곁에 퍼질고 앉아 여자들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자꾸 울음을 터뜨려 가는실잠자리는 그만 죽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겨우내 온몸에 친친 감았던 햇살을 풀어 잠시 여자들의 목에 목도리인 양 걸어주는 일 외에는 탁탁탁 불똥이 튀는 모닥불 위로 스스로 몸을 던지는 진눈깨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가는실잠자리는 슬펐던 것이다
가을폭포
술을 마셨으면 이제 잔을 놓고 가을폭포로 가라 가을폭포는 낙엽이 질 때마다 점점 더 깊은 산 속으로 걸어들어가 외로운 산새의 주검 곁에 누워 한 점 첫눈이 되기를 기다리나니 술이 취했으면 이제 잔을 놓고 일어나 가을폭포로 가라 우리의 가슴속으로 흐르던 맑은 물소리는 어느덧 끊어지고 삿대질을 하며 서로의 인생을 욕하는 소리만 어지럽게 흘러가 마음이 가난한 물고기 한 마리
폭포의 물줄기를 박차고 튀어나와 푸른 하늘 위에 퍼덕이나니 술이 취했으면 이제 잔을 놓고 가을폭포로 가서 몸을 던져라 곧은 폭포의 물줄기도 가늘게 굽었다 휘어진다 휘어져 굽은 폭포가 더 아름다운 밤 초승달도 가을폭포에 걸리었다
목련
목련은 피고 아들은 죽었다 진홍가슴새의 가슴에 피가 흐른다 흰나비 한 마리가 눈물을 떨구고 간다 나는 고속도로 분리대 위에 쓰러져 잠이 든다 술취한 마음은 찢겨져 갈기갈기 도마뱀처럼 달아나고 고맙게도 새벽에는 봄비가 내린다 아들은 잡놈이었다 봄비를 맞으며 서둘러 서울로 도망간 무엇을 위하여 죽어야 할 줄도 모르고 죽은 아들은 잡놈이었다 꽁초를 찾아 불을 붙인다 고속도로 분리대 위에 다시 드러눕는다 사람들은 쓸쓸하지 않으면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이제 내 가슴에 아들을 묻을 자리는 없으나 아버지는 항상 아들을 용서해야 한다 비는 그치고 고속도로는 안개에 싸인다 낡은 트럭이 푸성귀 몇 점을 떨어뜨리고 달아난다
아버지들
아버지는 석 달치 사글세가 밀린 지하셋방이다 너희들은 햇볕이 잘 드는 전세집을 얻어 떠나라 아버지는 아침 출근길 보도 위에 누가 버린 낡은 신발 한 짝이다 너희들은 새구두를 사 신고 언제든지 길을 떠나라 아버지는 페인트칠할 때 쓰던 낡은 때묻은 목장갑이다 몇 번 빨다가 잃어버리면 아예 찾을 생각을 하지 말아라 아버지는 포장마차 우동 그릇 옆에 놓인 빈 소주병이다 너희들은 빈 소주병처럼 술집을 나와 쓰러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아버지는 다시 겨울이 와서 꺼내 입은 외투 속에 언제 넣어두었는지 모르는 동전 몇 닢이다 너희들은 그 동전마저도 가져가 컵라면이라도 사먹어라 아버지는 벽에 걸려 있다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진 고장난 벽시계다 너희들은 인생의 시계를 더이상 고장내지 말아라 아버지는 동시상영하는 삼류극장의 낡은 의자다 젊은 애인들이 나누어 씹다가 그 의자에 붙여놓은 추잉껌이다 너희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깨끗한 의자가 되주어라
아버지는 도시 인근 야산의 고사목이다 봄이 오지 않으면 나를 베어 화톳불을 지펴서 몸을 녹여라 아버지는 길바닥에 버려진 붉은 단팥이 터져나온 붕어빵의 눈물이다 너희들은 눈물의 고마움에 대하여 고마워할 줄 알아라 아버지는 지하철을 떠도는 먼지다 이 열차의 종착역이다 너희들은 너희들의 짐을 챙겨 너희들의 집으로 가라 아버지는 이제 약속할 수 없는 약속이다
약현성당
서울역을 떠돌던 부랑자 한 사람이 중림동 약현성당 안으로 기어들어와 커튼에 라이터를 켜대었을 때 성당이 불길에 휩싸였을 때
불이야!
봄을 기다리던 제비꽃이 땅 속에서 소리쳤다 아무리 소리쳐도 성모님은 가만히 불길을 보고만 있었다 천장이 뚫리고 종탑이 무너져내려도 성모님은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불이 꺼진 뒤 무너진 종탑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성당을 찾아온 부랑자들에게 애초부터 밥을 해주지 말아야 했다고 미사를 드렸다 그때 제비꽃은 들을 수 있었다 무너진 종탑에서 울리는 성당의 종소리를 그들을 미워하지 말자 그들을 돌보지 못한 우리의 책임이 크다고 울리는 성당의 종소리를
오병이어
소나기를 퍼부은 날이었다 서울역 광장에 물고기 두 마리가 떨어져 퍼득거렸다 누가 놓고 갔는지 따뜻한 보리떡 다섯 개도 바구니에 담겨 있었다 낡은 비닐봉지처럼 이리저리 쓸리던 행려자들이 신발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우르르 달려들었다 서울역은 그대로 밥상이 되었다 햇볕은 뜨거웠으나 물고기를 줄지 않았다 아무리 먹어도 보리떡은 줄지 않았다 밤이 되자 서울역 시계탑에 걸린 배고픈 초승달도 길게 줄을 서서 떡과 물고기를 얻어먹었다 유난히 달빛이 시원한 밤이라고 사람들은 떠들어대었다 그 뒤 해마다 여름이면 한 차례씩 서울역 광장에 소나기가 퍼부었다 소나기를 맞으며 밥과 국을 담은 들통을 들고 부리나케 수녀님들이 달려오면 밤 깊은 서울역 지하도 행려자 무료급식소에 밤새도록 무지개가 떠서 아름다웠다
서울의 성자
오늘도 내가 남보다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금 당장 서울 지하철 교대역으로 가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자기만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서울의 교대역에 모이는 맹인들을 찾아가 보십시오 어둠침침한 지하철 정거장 통로 끝 낡은 비닐가방 속에 손을 넣고 백 원짜리 동전을 헤아리거나 혹시 누가 볼세라 역 기둥에 몸을 숨기고 물도 없이 꾸역꾸역 김밥을 먹고 있거나 손수건을 꺼내 정성들여 하모니카를 닦고 있거나 검은 색안경을 낀 채 흰 지팡이를 짚고 꾸부정하게 서서 열차를 기다리는 서울의 성자 그들을 찾아가 위안을 얻으십시오 찬 먼지바람을맞으며 김밥을 다 먹고 차례대로 구파발행 전동차에 몸을 싣는 더듬더듬 흰 지팡이를 두드리며 하모니카를 다시 부는 하모니카를 불다가 그대로 외로운 하모니카가 되어 버리는
첫마음
사랑했던 첫마음 빼앗길까봐 해가 떠도 눈 한번 뜰 수가 없네 사랑했던 첫마음 빼앗길까봐 해가 져도 집으로 돌아갈 수 없네
꽃다발
네가 준 꽃다발을 외로운 지구 위에 걸어놓았다 나는 날마다 너를 만나러 꽃다발이 걸린 지구 위를
걸어서 간다
문득
문득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성산포 앞바다는 잘 있는지 그때처럼 수평선 위로 당신하고 걷고 싶었어요
풍경 달다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 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자국눈
지상에 내리는 눈 중에서 가장 어여뿐 눈은 자국눈이다 첫사랑처럼 살짝 발자국이 찍히는 자국눈이다 어머니 첫사랑 남자를 만날 때마다 살짝살짝 자국눈이 내렸다지 그 남자가 가슴에 남긴 발자국이 평생 자국눈처럼 지워지지 않았다지
첫눈이 가장 먼저 내리는 곳
첫눈이 가장 먼저 내리는 곳은 너와 처음 만났던 도서관 숲길이다 아니다 네가 처음으로 무거운 내 가방을 들어주었던 버스 종점이다 아니다 버스 종점 부근에 서 있던 플라타너스 가지 위의 까치집이다 아니다 네가 사는 다세대주택 뒷산 민들레가 무더기로 피어나던 강아지 무덤 위다 아니다 지리산 노고단에 피었다 진 원추리의 이파리다 아니다 외로운 선인장의 가시 위다 아니다 봉천동 달동네에 사는 소년의 똥무더기 위다 아니다
초파일 날
네가 술을 먹고 토하던 조계사 뒷골목이다 아니다 전경들이 진압봉을 들고 서 있던 명동성당 입구다
아니다 나를 첫사랑이라고 말하던 너의 입술 위다 그렇다 누굴 사랑해본 것은 네가 처음이라고 말하던 나의 입술 위다 그렇다
철길에 앉아
철길에 앉아 그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철길에 앉아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때 멀리 기차 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기차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코스모스가 안타까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기차가 눈 안에 들어왔다 지평선을 뚫고 성난 멧돼지처럼 씩씩거리며 기차는 곧 나를 덮칠 것 같았다 나는 일어나지 않았다 낮달이 놀란 얼굴을 하고 해바라기가 고개를 흔들며 빨리 일어나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 싶었다 너를 전화를 받지 않는다 불국사 종루 근처 공중전화 앞을 서성거리다가 너에게 전화를 건다 석가탑이 무너져내린다 공중전화카드를 꺼내어 한참 줄을 서서 기다린 뒤 다시 또 전화를 건다 다보탑이 무너져내린다 다시 또 공중전화카드를 꺼내어 너에게 전화를 건다 청운교가 무너져내린다 대웅전이 무너져내린다 석등의 맑은 불이 꺼진다 나는 급히 수화기를 놓고 그대로 종루에 달려가 쇠줄에 매달린 종매가 되어 힘껏 종을 울린다 너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입산
너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너는 산으로 들어가버렸다 너를 향해 급히 달려갔다 너는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가버렸다 나는 한참 길가에 앉아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시들어가는 민들레 꽃잎을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나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길은 끝이 없었다 지상을 떠나는 새들의 눈물이 길을 적셨다 나는 그 눈물을 따라가다가 네가 들어간 산의 골짜기가 되었다 눈 녹은 물로 언젠가 네가 산을 내려올 때 낮은 곳으로 흘러갈 너의 깊은 골짜기가 되었다
후회
그대와 낙화암에 갔을 때 왜 그대 손을 잡고 떨어져 백마강이 되지 못했는지
그대와 만장굴에 갔을 때
왜 끝없이 굴 속으로 걸어 들어가 서귀포 앞바다에 닿지 못했는지
그대와 천마총에 갔을 때
왜 천마를 타고 가을 하늘 속을 훨훨 날아다니지 못했는지
그대와 감은사에 갔을 때
왜 그대 손을 이끌고 감은사 돌탑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는지
그대와 운주사에 갔을 때
운주사에 결국 노을이 질 때
왜 나란히 와불 곁에 누워 있지 못했는지
와불 곁에 잠들어 별이 되지 못했는지
별똥별
별똥별이 떨어지는 순간에
내가 너를 생각하는 줄
넌 모르지
떨어지는 별똥별을 바라보는 순간에
내가 너의 눈물을 생각하는 줄
넌 모르지
내가 너의 눈물이 되어 떨어지는 줄
넌 모르지
꿈
눈사람 한 사람이 찾아왔었다
눈은 그치고 보름달은 환히 떠올랐는데
눈사람 한 사람이 대문을 두드리며 자꾸 나를 불렀다
나는 마당에 불을 켜고 맨발로 달려나가 대문을 열었다
부끄러운 듯 양볼이 발그레하게 상기된 눈사람 한 사람이
편지 한 장을 내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밤새도록 어디에서 걸어온 것일까
천안 삼거리에서 걸어온 것일까
편지 겉봉을 뜯자 달빛이 나보다 먼저 편지를 읽는다
당신하고 결혼하고 싶었습니다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었습니다
수선화에게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절벽에 대한 몇 가지 충고
절벽을 만나거든 그만 절벽이 되라
절벽 아래로 보이는 바다가 되라
절벽 끝에 튼튼하게 뿌리를 뻗은
저 솔가지 끝에 앉은 새들이 되라
절벽을 만나거든 그만 절벽이 되라
기어이 절벽을 기어오르는 저 개미떼가 되라
그 개미떼들이 망망히 바라보는 수평선이 되라
누구나 가슴속에 하나씩 절벽은 있다
언젠가는 기어이 올라가야 할
언젠가는 기어이 내려와야 할
외로운 절벽이 하나씩 있다
바닷가에 대하여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잠자는 지구의 고요한 숨소리를 듣고 싶을 때
지구 위를 걸어가는 새들의 작은 발소리를 듣고 싶을 때
새들과 함께 수평선 위로 걸어가고 싶을 때
친구를 위해 내 목숨을 버리지 못했을 때
서럽게 우는 어머니를 껴안고 함께 울었을 때
모내기가 끝난 무논의 저수지 둑 위에서
자살한 어머니의 고무신 한 짝을 발견했을 때
바다에 뜬 보름달을 향해 촛불을 켜놓고 하염없이
두 손 모아 절을 하고 싶을 때
바닷가 기슭으로 기슭으로만 끝없이 달려가고 싶을 때
누구나 자기만의 바닷가가 하나씩 있으면 좋다
자기만의 바닷가로 달려가 쓰러지는 게 좋다
나무들의 결혼식
내 한평생 버리고 싶지 않은 소원이 있다면
나무들의 결혼식에 초대받아 낭랑하게
축시 한번 낭송해보는 일이다
내 한평생 끝끝내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다면
우수가 지난 나무들의 결혼식 날
몰래 보름달로 떠올라
밤새도록 나무들의 첫날밤을 엿보는 일이다
그리하여 내 죽기 전에 다시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은은히 산사의 종소리가 울리는 봄날 새벽
눈이 맑은 큰스님을 모시고
나무들과 결혼 한번 해보는 일이다
결혼에 대하여
만남에 대하여 진정으로 기도해온 사람과 결혼하라
봄날 들녘에 나가 쑥과 냉이를 캐어본 추억이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된장을 풀어 쑥국을 끓이고 스스로 기뻐할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일주일 동안 야근을 하느라 미처 채 깎지 못한 손톱을 다정스레 깎아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콧등에 땀을 흘리며 고추장에 보리밥을 맛있게 비벼먹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어미를 그리워하는 어린 강아지의 똥을 더러워하지 않고 치울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 나무를 껴안고 나무가 되는 사람과 결혼하라
나뭇가지들이 밤마다 별들을 향해 뻗어나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고단한 별들이 잠시 쉬어가도록 가슴의 단추를 열어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은 전깃불을 끄고 촛불 아래서 한 권의 시집을 읽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책갈피 속에 노란 은행잎 한 장쯤은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오면 땅의 벌레 소리에 귀기울일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깊으면 가끔은 사랑해서 미안하다고 속삭일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결혼이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사랑도 결혼이 필요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이며
결혼도 때로는 외로운 것이다
반지의 의미
만남에 대하여 기도하자는 것이다
만남에 대하여 감사하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아름답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순결하자는 것이다
언제나 첫마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언제나 첫마음을 잃지 말자는 것이다
사랑에도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결혼에도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꽃이 진다고 울지 말자는 것이다
스스로 꽃이 되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가난하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영원하자는 것이다
2.
우박
하늘에 무슨 슬픈 일이 저리 있어서
또 누구의 서러운 죽음 있어서
저리도 눈물마저 단단해져서
배추밭에 우박으로 쏟아지는가
나는 퍽퍽 구멍 뚫리는 배추잎이 되어
쏟아지는 우박마다 껴안고 나뒹군다
하늘에 계신 누님의 눈물 같아서
하늘에 계신 어머님의 눈물 같아서
온몸이 아프도록
온몸에 숭숭 구멍이 뚫리도록
달팽이
비가 온다
봄비다
우산도 없이
한참 길을 걷는다
뒤에서 누가
말없이
우산을 받쳐준다
문득 뒤돌아보니
달팽이다
달팽이
내 마음은 연약하나 껍질은 단단하다
내 껍질은 연약하나 마음은 단단하다
사람들이 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듯이
달팽이도 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는다
이제 막 기울기 시작하는 달은 차돌같이 차다
나의 길은 어느새 풀잎에 젖어 있다
손에 주전자를 들고 아침 이슬을 밟으며
내가 가야 할 길 앞에서 누가 오고 있다
죄없는 소년이다
소년이 무심코 나를 밟고 간다
아마 아침 이슬인 줄 알았나 보다
나비
누구의 상장(죽을 상, 글 장)인가
누구의 상여가 길 떠나는가
나비 한 마리가 태백산맥을 넘는다
속초 앞바다
삼각파도 끝에 앉은 나비
잠자리
잠자리 날개에 낮달 걸리다
잠자리 날개에 초승달 걸리다
어머니 새벽같이 일어나 쌀을 안칠 때
잠자리 날개에 이슬 맺히다
장독대 정한수에 목을 축이다
개미
달빛 아래 개미들이 기어간다
한평생 잠들지 못한 개미란 개미는 다 강가로 나가
일제히 칼을 간다
저마다 마음의 빈자리에 고이 간직한 칼을 꺼내어
조금도 쉬지 않고 간다
달빛은 푸르다
강물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개미들이 일제히 칼끝을 치켜세우고
자기의 목을 찌른다
개미
개미 한 마리가
죽은 개미 한 마리를 끌고 간다
개미 두 마리가
죽은 무당벌레 한 마리를 끌고 간다
개미 다섯 마리가
죽은 지렁이 한 마리를 끌고 간다
개미 열 마리가 죽은 나뭇잎을 끌고 가다가
강물에 빠졌다
다시 개미 한 마리가
사람 시체 하나를 끌고 간다
아마 나의 시체인가 보다
밤벌레
겨울밤 창밖에 눈은 내리는데
삶은 밤 속에 밤벌레 한 마리 죽어 있었다
죽은 태아처럼 슬프게 알몸을 구부리고
밤벌레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날부터 나는 삶은 밤은 먹지 않는다
누가 이 지구를 밤처럼 삶아 먹는다면
내가 한 마리 밤벌레처럼 죽을 것 같아서
등잔불을 올리고 밤에게 용서를 빌었다
나뭇잎을 닦다
저 소나기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가는 것을 보라
저 가랑비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가는 것을 보라
저 봄비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기뻐하는 것을 보라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 고이고이 잠드는 것을 보라
우리가 나뭇잎에 앉은 먼지를 닦는 일은
우리 스스로 나뭇잎이 되는 일이다
우리 스스로 푸른 하이 되는 일이다
나뭇잎에 앉은 먼지 한번 닦아주지 못하고 사람이 죽는다면
사람은 그 얼마나 쓸쓸한 것이냐
소록도에서 온 편지
팔 없는 팔로 너를 껴안고
발 없는 발로 너에게로 간다
개동백나무에 개동백이 피고
바다 위로 보름달이 떠오르는 밤
손 없는 손으로 동백꽃잎마다 주워
한 잎 두 잎 바다에 띄우나니 받으시라
팔 없는 팔로 허리를 두르고
발 없는 발로 함께 걷던 바닷가를
동백꽃잎 따라 성큼성큼 걸어오시라
싸락눈
오는 게 아니야
오시는 거야
내리는 게 아니야
내리시는 거야
어머니
뒤주에서 됫박으로 퍼내시던
쌀 같으니까
지구에
배고픈 사람이
더이상 없으니까
오동도
오늘도 그녀는 오지 않았다
내가 보고 싶다고
막차라도 타고 올라오겠다고
편지해놓고
오동도만 올라와서 서울역에
동백꽃 향기만 가득하다
질투
가을날 가랑비가
가랑잎만 사랑한다
나는 너무너무 질투가 나서
가랑비가 그칠 때까지
가랑잎으로
나뒹굴었다
가을
돌아보지 마라
누구든 돌아보는 얼굴은 슬프다
돌아보지 마라
지리산 능선들이 손수건을 꺼내 운다
인생의 거지들이 지리산에 기대앉아
잠시 가을이 되고 있을 뿐
돌아보지 마라
아직 지리산이 된 사람은 없다
사막
들녘에 비가 내린다
빗물을 듬뿍 머금고
들녘엔 들꽃이 찬란하다
사막에 비가 내린다
빗물을 흠뻑 빨아들이고
사막은 여전히 사막으로 남아 있다
받아들일 줄은 알고
나눌 줄은 모르는 자가
언제나 더 메말라 있는
초여름
인간의 사막
나뭇잎 사이로
나뭇잎 사이로 걸어가라
모든 적은 한때 친구였다
우리가 나뭇잎 사이로 걸어가지 않고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겠는가
고요히 칼을 버리고
세상의 거지들은 다
나뭇잎 사이로 걸어가라
우리가 나뭇잎 사이로 걸어가지 않고
어떻게 눈물이 햇살이 되겠는가
어떻게 상처가 잎새가 되겠는가
새벽
바람 부는 새벽
여기저기 코스모스 모가지가 꺾여져 있는 철로가
어린 개 한 마리가
철길에 똥을 누다가 문득 별을 바라본다
죽음이란 보고 싶을 때
보지 못하는 것
별똥별처럼 기차는 사라지고
개들도 어머니가 보고 싶다
거지인형
엄마는 겨울이 춥다고 한다
나는 엄마가 있어서 따뜻한데
엄마는 올겨울이 외롭다고 한다
나는 엄마가 있어서 외롭지 않은데
그리운 목소리
나무를 껴안고 가만히
귀 대어보면
나무 속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행주치마 입은 채로 어느 날
어스름이 짙게 깔린 골목까지 나와
호승아 법 먹으러 오너라 하고 소리치던
그리운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귀뚜라미에게 받은 짧은 편지
울지 마
엄마 돌아가신 지
언제인데
너처럼 많이 우는 애는
처음 봤다
해마다 가을날
밤이 깊으면
갈대잎 사이로 허옇게
보름달 뜨면
내가 대신 이렇게
울고 있잖아
마음의 똥
내 어릴 때 소나무 서 있는 들판에서
아버지 같은 눈사람 하나 외롭게 서 있으면
눈사람 옆에 살그머니 쪼그리고 앉아
한 무더기 똥을 누고 돌아와 곤히 잠들곤 했는데
그날 밤에는 꿈속에서도 유난히 함박눈이 많이 내려
내가 눈 똥이 다 함박눈이 되어 눈부셨는데
이제는 아무 데도 똥 눌 들판이 없어
아버지처럼 외롭고 다정한 눈사람 하나 없어
내 마음의 똥 한 무더기 누지 못하고
외롭고 쓸쓸하다
새벽의 시
나는 새벽이 되어서야 알았다
나뭇잎이 나무의 눈물인 것을
새똥이 새들의 눈물인 것을
어머니가 인간의 눈물인 것을
나는 새벽이 되어서야 알았다
나무들의 뿌리가 서로 얽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라는 것을
새들이 우리의 더러운 지붕 위에 날아와
똥을 눈다는 것이
그 얼마나 고마운 일이라는 것을
나는 새벽이 되어서야 알았다
거리의 노숙자들이 잠에서 깨어나
어머니를 생각하는 새벽의 새벽이 되어서야
눈물의 고마움을 알게 되었다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잠이 든 채로 그대로 눈을 맞기 위하여
잠이 들었다가도 별들을 바라보기 위하여
외롭게 떨어지는 별똥별들을 위하여
그 별똥별을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어린 나뭇가지들을 위하여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가끔은 외로운 낮달도 쉬어가게 하고
가끔은 민들레 홀씨도 쉬어가게 하고
가끔은 인간을 위해 우시는 하느님의 눈물도 받아둔다
누구든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새들의 집을 한번 들여다보라
간밤에 떨어진 별똥별들이 고단하게 코를 골며 자고 있다
간밤에 흘리신 하느님의 눈물이
새들의 깃털에 고요히 이슬처럼 맺혀 있다
손가락 글씨
산길을 걷다가
하얗게 내린 눈 위에 오줌을 눈다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오줌줄기가 유난히 굵고 세차다
다람쥐가 내 오줌 누는 모습을 보고
재빨리 상수리나무 위로 기어올라가
꼬리를 한껏 치켜세우고
오줌 누는 나는 지켜본다
나는 바지를 급히 추스른 뒤
하얗게 쌓인 눈 위에
손가락 글씨를 쓴다
다람쥐야 미안하다
새똥
어느 봄날
울다가 잠에서 깨어나
홀연히 새들의 발자국을 뒤따라갔다
발자국은 바람 부는 골목을 지나
나뭇가지를 지나
지붕도 없는 둥지 안으로 이어졌다
나는 둥지 속에 새새끼처럼 몸을 틀고 들어앉아
해질 무렵
어미새가 돌아와 벌레를 먹여주면
한껏 입을 벌려 받아먹곤 했다
그리하여 봄이 지나고
가을이 지난 뒤
나는 사람이 먹는 쌀밥을 먹고도
새똥을 누었다
자살에 대하여
창밖에 펄펄 흩날리던 눈송이가
창문 안으로 슬쩍 들어와
아무도 모르게 녹아버린다
누구의 죽음이든 죽음은 그런 것이다
굳이 나의 함박눈을 위해 장례식을 할 필요는 없다
눈발이 그치고 다시 창가에 햇살이 비치면
그때 잠시 어머니를 생각하면 된다
나도 한때 정의보다는 어머니를 사랑했으므로
나도 한때 눈물을 깨끗이 지키기 위해
눈물을 흘렸으므로
나의 죽음을 위해 굳이 벗들을 불러모을 필요는 없다
나의 죽음이 너에게 위안이 된다면
너 이외에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던
나의 죽음이 너에게 기쁨이 된다면
눈이 오는 날
너의 창가에 잠시 앉았다 간다
종소리
사람은 죽을 때에
한번은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고 죽는다는데
새들도 죽을 때에
푸른 하늘을 향해
한번은 맑고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고 죽는다는데
나 죽을 때에
한번도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지 못하고
눈길에 핏방울만 남기게 될까봐 두려워라
풀잎도 죽을 때에
아름다운 종소리를 남기고 죽는다는데
안개꽃
얼마나 착하게 살았으면
얼마나 깨끗하게 살았으면
죽어서도 그대로 피어 있는가
장미는 시들때 고개를 꺾고
사람은 죽을 때 입을 벌리는데
너는 사는 것과 죽는 것이 똑같구나
세상의 어머니들 돌아가시면
저 모습으로
우리 헤어져도
저 모습으로
봄비
어머니 장독대 위에
정한수 한 그릇 떠놓고 달님에게 빌으시다
외로운 개들이 짖어대던 정월 대보름
어머니 촛불을 켜놓고 달님에게 빌다가 돌아가시다
정한수 곁에 타다 만 초 한 자루
우수가 지나고
봄비에 젖으시다
3.
세한도
영등포역 어느 뒷골목에서 봤다고 하고
청량리역 어느 무료급식소에서 봤다고 하는
아버지를 찾아 한겨울 내내
서울을 떠돌다가
동부시립병원 행려병동으로 실려가
하루에도 몇 명씩 죽어나가는 행려병자들을 보고 돌아와
늙은 소나무 한 그루 청정히 눈을 맞고 서 있는
아버지의 텅 빈 방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다
바람은 차고 달은 춥다
솔가지에 내린 눈은 더이상 아무 데도 내릴 데가 없다
젊은 날 모내기를 끝내고 찍은
아버지의 빛바랜 사진 옆에 걸려 있는
세한도 속으로
새 한 마리 날아와 앉아 춥다
우물
길을 가다가 우물을 들여다보았다
누구 낮달을 초승달로 던져놓았다
길을 가다가 다시 우물을 들여다보았다
쑥떡이 든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홀로 기차를 타시는 어머니가 보였다
다시 길을 떠났다가 돌아와 우물을 들여다보았다
평화시장의 흐린 형광등 불빛 아래
미싱을 돌리다 말고
물끄러미 네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너를 만나러 우물에 뛰어들었다
어머니가 보따리를 풀어
쑥떡 몇 개를 건네주셨다
너는 보이지 않고 어디선가
미싱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성의(성스러울 성, 옷 의)
자정 넘은 시각
지하철 입구 계단 밑
냉동장미 다발이 버려져 있는
현금인출기 옆 모서리
라면박스를 깔고
아들 둘을 껴안은 채
편안히 잠들어 있는 여자
가랑잎도 나뒹굴지 않았던
지난 가을 내내 어디서 노숙을 한 것일까
온몸에 누더기를 걸치고
스스로 서울의 감옥이 된
창문도 없는 여자가
잠시 잠에서 깨어나 옷을 벗는다
겹겹이 껴입은 옷을 벗고 또 벗어
아들에게 입히다가 다시 잠이 든다
자정이 넘은 시각
첫눈이 내리는
지하철역 입구
검은 민들레
봄은 왔다
다시 서울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밤새도록 술상을 두드리던 나무젓가락처럼
청춘은 부러지고
이제 내 마음의 그림자도 너무 늙었다
사람과 사람의 그림자 사이로 날아다니던
새들은 보이지 않고
고한역은 열차도 세우지 않는다
밤새워 내 청바지를 벗기던 광원들은
다 어디로 흘러가 새벽이 되었는지
버력더미에 이슬이 내리는
눈부신 폐광의 아침
진폐증에 걸린 똥개 한 마리가
기침을 하고 지나가는 단란주점 옆
피다 만 검은 민들레의
쓸쓸한 미소
나의 조카 아다다
봉천동 산동네에 신접살림을 차린
나의 조카 아다다
첫아이가 벌써 초등학교에 입학했다는 아다다의 집을
귤 몇 개 사들고 찾아가서 처음 보았다
말없이 수화로 이어지는 어린 딸과 엄마
그들의 손이 맑은 시내를 이루며
고요히 나뭇잎처럼 흐르는 것을
양파를 푹푹 썰어넣고
돼지고기까지 잘게 썰어넣은
아다다의 순두부 찌개를 먹으며
지상에서 가장 고요한 하늘이 성탄절처럼
온 방안에 가득 내려오는 것을
병원에 가서
청력검사 한번 받아보는 게 소원이었던 아다다
보청기를 끼어도 고요한 밤에
먼데서 개 짖는 소리 정도만 겨우 들리는 아다다
대문 밖에서 초인종을 누르면
크리스마스 트리의 꼬마전구들처럼
신호등이 반짝이도록 만들어놓은 아다다
불이 켜지면 아다다는 부리나케 일어나 대문을 연다
애기아빠는 타일공
말없이 웃는 눈으로 인사를 한다
그는 오늘 어느 신도시 아파트 공사장에서
타일을 붙이고 돌아온 것일까
아다다의 순두부 찌개를 맛있게 먹고
진하게 설탕을 탄 커피까지 들고 나오면서
나는 어린 조카 아다다의 손을 꼭 잡았다
세상을 손처럼 부지런하게 살면 된다고
봉천동 언덕을 내려가는 동안
아다다의 손은 계속 내게 말하고 있었다
겨울 한라산
맹인들이 한라산을 오른다
흰 지팡이를 짚고 눈 속을 헤쳐
한라산에 사는 백록을 만나러 간다
한란의 꽃줄기 같은 안마사 미스 김도
하모니카를 불며 하루종일 지하철을 떠도는 김씨도
국립서울맹학교 국어교사 박 선생도
한 발자국 두 발자국 한라산을 오른다
눈 밟은 소리가 맑다
바람을 타고 눈발이 흰 지팡이를 따라 밝게 사선을 긋는다
나는 잠시 그들의 발 아래 눈처럼 밟힌다
밟힌다는 것이 이렇게 편안한 때는 처음이다
어리목에서 내려온 노루들이 그들의 뒤를 따른다
어느새 성산포가 뒤따라 올라온다
백록이 서둘러 걸어 내려와 손을 잡는다
서귀포 앞바다가 한눈에 다 보인다
길 떠나는 소년
저녁해 지는 나주 남평역
역마당에 널린 붉은 고추에 해는 기울고
건들건들 완행열차가 숨을 멈춘다
물방개야 소금쟁이야 잘 있어라
지하철을 타고
날마다 하모니카를 불고 다닌다는
눈먼 아버지는 소식이 없고
답십리에서 파출부로 일한다는 엄마도 소식이 없어
개똥벌레야 왜가리야 잘 있어라
외할머니 몰래 나도 서울로 간다
저녁 열차에 가득 햇살을 싣고
길 떠나는 소년의
외로운 가을
밤눈
막차를 타고 대치역에서 내린다
겨울은 막차보다 더 먼저 와
슬슬 밤눈으로 내린다
나는 어둠침침한 은마아파트 사잇길로 걸으며
젊은 신부에게 성체를 받아먹듯
혀를 내밀어 눈을 받아먹는다
한 소년이 가냘픈 어깨에
메밀묵 상자를 메고 내 앞을 지나간다
고개를 치켜들고 불꺼진 창을 향해
메미일 무욱! 찹싸알 떠억! 하고 소리친다
고전적 소년이다
희뿌연 보안등 불빛 사이로 눈송이만 흩날릴 뿐
아무도 소년을 부르지 않는다
소년의 목소리만 위성방송 안테나에 걸려 사라진다
'위험한 정사'를 보는
늦은 밤의 불빛만 몇 점 보일 뿐
소년의 어깨 위로 밤눈만 쌓인다
쓰레기통처럼
쓰레기통처럼 쭈그리고 앉아 울어본 적이 있다
종로 뒷골목의 쓰레기통처럼 쭈그리고 앉아
하루종일 겨울비에 젖어 본 적이 있다
겨울비에 젖어 그대로 쓰레기통이 되고 만 적이 있다
더러 별도 뜨지 않는 밤이면
사람들은 침을 뱉거나 때로 발길로 나를 차고 지나갔다
어떤 여자는 내 곁에 쪼그리고 앉아 몰래 오줌을 누고 지나갔다
그래도 길 잃은 개들이 다가와 코를 박고 자는 밤은 좋았다
세상의 모든 뿌리를 적시는 눈물이 되고 싶은 나에게
개들이 흘리는 눈물은 큰 위안이 되었다
더러 바람 몹시 부는 밤이면
또다른 고향의 쓰레기통들이 자꾸 내 곁으로 굴러왔다
배고픈 쓰레기통들이 늘어나면 날수록
나는 쓰레기통끼리 서로 체온을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쓰레기통끼리 외로움을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길바닥
내 집을 떠나 길바닥에 나앉은 것은
푸른 하늘을 끝없이 날던 종다리가 잠시 길바닥에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내 집을 떠나 길바닥에 나앉은 것은
봄바람에 흩날리던 민들레 홀씨가 길바닥에 내려앉아 드디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 너를 떠나 기어이 길바닥에 나앉은 것은
길바닥에 나앉아 마음놓고 우는 아이만큼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을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 너를 떠나 길바닥에 나앉아 밤마다 개미집에 잠드는 것은
개미집에 켜진 조그만 등불 하나가 밤새도록 밤을 밝히기 때문이다
내 길바닥에 나앉아 눈을 뒤집어쓰고 고요히 기다리는 것은
눈내린 길바닥마다 수없이 새들의 발자국을 찍고 싶기 때문이다
새벽김밥
먼동이 튼다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눈부시다
누가 나뭇잎을 향해 오체투지를 하나 보다
한석봉은 아직도 나뭇잎에다 글씨를 쓰고 있다고
너도 열심히 나뭇잎에다 글씨를 쓰면서 살아가라고
돌아가신 어머니는 아직도 눈물로 말씀하시고
새벽 종소리가 들린다
종소리 사이로 햇살이 눈이 부시다
누가 종소리를 향해 오체투지를 하나 보다
나는 이제 산 아래 칼을 버리고
태어나자마자 버러졌던 길을 향해 떠난다
어머니가 싸주신 새벽김밥을 들고
또다시 길 위에 버려지기 위해
나의 혀
한때는 내 혀가
작설이 되기를 바란 적이 있었으나
가난한 벗들의
침묵의 향기가 되기를 바란 적이 있었으나
우습도다
땀 흘리지 않은 나의 혀여
이제는 작살이 나기를
작살이 나 기어가다가
길 위에 눈물이나 있으면 몇 방울 찍어 먹기를
달팽이를 만나면 큰절을 하고
쇠똥이나 있으면 핥아먹기를
저녁안개에 섞여 앞산에 어둠이 몰려오고
어머니가 허리 굽혀 군불을 땔 때
여물통에 들어가 죽음을 기다리기를
내 한때 내 혀가
진실의 향기가 되기를 바란 적이 있었으나
산낙지를 위하여
신촌 뒷골목에서 술을 먹더라도
이제는 참기름에 무친 산낙지는 먹지 말자
낡은 플라스틱 접시 위에서
산낙지의 잘려진 발들이 꿈틀대는 동안
바다는 얼마나 서러웠겠니
우리가 산낙지의 다리 하나를 입에 넣어
우물우물거리며 씹어 먹는 동안
바다는 또 얼마나 많은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겠니
산낙지의 죽음에도 품위가 필요하다
산낙지는 죽어가면서도 바다를 그리워한다
온몸이 토막토막난 채로
산낙지가 있는 힘을 다해 꿈틀대는 것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바다의 어머니를 보려는 것이다
겨울잠자리
진눈깨비가 슬슬 내리는 강기슭 마른 갈대 끝에 앉아
엄마! 하고 소리치는 아이들의 소리를 듣고도
가는실잠자리는 어쩌지 못했던 것이다
살얼음이 살짝 언 겨울강을 건너다가
아이들 몇 명이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고도
가는실잠자리는 오직 갈대 끝에 앉아 파르르 날개만 떨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해 가을의 어느 푸른 날처럼 신나게 저공비행을 하면서
아이들의 손을 힘차게 잡아 끌어올리고 싶었으나
그만 차가운 바람에 떨며 갈댓잎만 몇 번 흔들고 말았던 것이다
진눈깨비를 맞으며 낚싯배를 타고 강 깊숙이
죽은 아이들의 시체를 찾던 사람들이
시체를 찾다 말고 하나 둘 강가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새우깡을 안주 삼아 몇 차례 소주잔을 돌리는 것을 보고
가는실잠자리는 몇 번이고 실 같은 꼬리만 도르르 말아올렸던 것이다
더러 담배꽁초를 강물에 내던지거나
말없이 소주만 연거푸 들이켜는 남자들 곁에 퍼질고 앉아
여자들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자꾸 울음을 터뜨려
가는실잠자리는 그만 죽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겨우내 온몸에 친친 감았던 햇살을 풀어
잠시 여자들의 목에 목도리인 양 걸어주는 일 외에는
탁탁탁 불똥이 튀는 모닥불 위로
스스로 몸을 던지는 진눈깨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가는실잠자리는 슬펐던 것이다
가을폭포
술을 마셨으면 이제 잔을 놓고 가을폭포로 가라
가을폭포는 낙엽이 질 때마다 점점 더 깊은 산 속으로 걸어들어가
외로운 산새의 주검 곁에 누워 한 점 첫눈이 되기를 기다리나니
술이 취했으면 이제 잔을 놓고 일어나 가을폭포로 가라
우리의 가슴속으로 흐르던 맑은 물소리는 어느덧 끊어지고
삿대질을 하며 서로의 인생을 욕하는 소리만 어지럽게 흘러가
마음이 가난한 물고기 한 마리
폭포의 물줄기를 박차고 튀어나와 푸른 하늘 위에 퍼덕이나니
술이 취했으면 이제 잔을 놓고 가을폭포로 가서 몸을 던져라
곧은 폭포의 물줄기도 가늘게 굽었다 휘어진다
휘어져 굽은 폭포가 더 아름다운 밤
초승달도 가을폭포에 걸리었다
목련
목련은 피고 아들은 죽었다
진홍가슴새의 가슴에 피가 흐른다
흰나비 한 마리가 눈물을 떨구고 간다
나는 고속도로 분리대 위에 쓰러져 잠이 든다
술취한 마음은 찢겨져 갈기갈기 도마뱀처럼 달아나고
고맙게도 새벽에는 봄비가 내린다
아들은 잡놈이었다
봄비를 맞으며 서둘러 서울로 도망간
무엇을 위하여 죽어야 할 줄도 모르고 죽은
아들은 잡놈이었다
꽁초를 찾아 불을 붙인다
고속도로 분리대 위에 다시 드러눕는다
사람들은 쓸쓸하지 않으면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이제 내 가슴에 아들을 묻을 자리는 없으나
아버지는 항상 아들을 용서해야 한다
비는 그치고 고속도로는 안개에 싸인다
낡은 트럭이 푸성귀 몇 점을 떨어뜨리고 달아난다
아버지들
아버지는 석 달치 사글세가 밀린 지하셋방이다
너희들은 햇볕이 잘 드는 전세집을 얻어 떠나라
아버지는 아침 출근길 보도 위에 누가 버린 낡은 신발 한 짝이다
너희들은 새구두를 사 신고 언제든지 길을 떠나라
아버지는 페인트칠할 때 쓰던 낡은 때묻은 목장갑이다
몇 번 빨다가 잃어버리면 아예 찾을 생각을 하지 말아라
아버지는 포장마차 우동 그릇 옆에 놓인 빈 소주병이다
너희들은 빈 소주병처럼 술집을 나와 쓰러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아버지는 다시 겨울이 와서 꺼내 입은 외투 속에
언제 넣어두었는지 모르는 동전 몇 닢이다
너희들은 그 동전마저도 가져가 컵라면이라도 사먹어라
아버지는 벽에 걸려 있다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진 고장난 벽시계다
너희들은 인생의 시계를 더이상 고장내지 말아라
아버지는 동시상영하는 삼류극장의 낡은 의자다
젊은 애인들이 나누어 씹다가 그 의자에 붙여놓은 추잉껌이다
너희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깨끗한 의자가 되어주어라
아버지는 도시 인근 야산의 고사목이다
봄이 오지 않으면 나를 베어 화톳불을 지펴서 몸을 녹여라
아버지는 길바닥에 버려진
붉은 단팥이 터져나온 붕어빵의 눈물이다
너희들은 눈물의 고마움에 대하여 고마워할 줄 알아라
아버지는 지하철을 떠도는 먼지다
이 열차의 종착역이다
너희들은 너희들의 짐을 챙겨 너희들의 집으로 가라
아버지는 이제 약속할 수 없는 약속이다
약현성당
서울역을 떠돌던 부랑자 한 사람이
중림동 약현성당 안으로 기어들어와
커튼에 라이터를 켜대었을 때
성당이 불길에 휩싸였을 때
불이야!
봄을 기다리던 제비꽃이
땅 속에서 소리쳤다
아무리 소리쳐도 성모님은
가만히 불길을 보고만 있었다
천장이 뚫리고 종탑이 무너져내려도
성모님은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불이 꺼진 뒤
무너진 종탑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성당을 찾아온 부랑자들에게
애초부터 밥을 해주지 말아야 했다고
미사를 드렸다
그때 제비꽃은 들을 수 있었다
무너진 종탑에서 울리는 성당의 종소리를
그들을 미워하지 말자
그들을 돌보지 못한 우리의 책임이 크다고 울리는
성당의 종소리를
오병이어
소나기를 퍼부은 날이었다
서울역 광장에 물고기 두 마리가 떨어져 퍼득거렸다
누가 놓고 갔는지
따뜻한 보리떡 다섯 개도 바구니에 담겨 있었다
낡은 비닐봉지처럼 이리저리 쓸리던 행려자들이
신발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우르르 달려들었다
서울역은 그대로 밥상이 되었다
햇볕은 뜨거웠으나 물고기를 줄지 않았다
아무리 먹어도 보리떡은 줄지 않았다
밤이 되자 서울역 시계탑에 걸린
배고픈 초승달도 길게 줄을 서서
떡과 물고기를 얻어먹었다
유난히 달빛이 시원한 밤이라고 사람들은 떠들어대었다
그 뒤 해마다 여름이면 한 차례씩
서울역 광장에 소나기가 퍼부었다
소나기를 맞으며 밥과 국을 담은 들통을 들고
부리나케 수녀님들이 달려오면
밤 깊은 서울역 지하도 행려자 무료급식소에
밤새도록 무지개가 떠서 아름다웠다
서울의 성자
오늘도 내가 남보다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금 당장 서울 지하철 교대역으로 가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자기만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서울의 교대역에 모이는 맹인들을 찾아가 보십시오
어둠침침한 지하철 정거장 통로 끝
낡은 비닐가방 속에 손을 넣고 백 원짜리 동전을 헤아리거나
혹시 누가 볼세라 역 기둥에 몸을 숨기고
물도 없이 꾸역꾸역 김밥을 먹고 있거나
손수건을 꺼내 정성들여 하모니카를 닦고 있거나
검은 색안경을 낀 채 흰 지팡이를 짚고 꾸부정하게 서서
열차를 기다리는 서울의 성자
그들을 찾아가 위안을 얻으십시오
찬 먼지바람을 맞으며 김밥을 다 먹고
차례대로 구파발행 전동차에 몸을 싣는
더듬더듬 흰 지팡이를 두드리며 하모니카를 다시 부는
하모니카를 불다가 그대로 외로운 하모니카가 되어버리는
위안의 성자
그들을 찾아가 큰 위안을 얻으십시오
마더 테레사 수녀의 미소
여든일곱 생신을 맞아
인도 캘커타 사랑의 선교회 본부 건물 발코니에 나와
몰려든 축하객들에게 두 손을 모으고 답례하는
마더 테레사 수녀의 웃는 사진이
동아일보 일면 머릿기사로 나왔다
나는 아침밥을 먹다가 그 사진을
몇 번이나 들여다보았다
테레사 수녀의 그 웃음이
합죽한 입가에 번진 수줍은 그 미소가
아흔에 돌아가신 내 경주할머니의 미소 같아서
평생을 첨성대 앞 채마밭에서 김을 매시던
반월성 들판에서 쑥을 캐시던
외할머니의 맑은 미소 같아서
그 사진 정성스럽게 오려놓았다
시를 쓰는 내 책상 앞에 붙여놓았다
진정한 사랑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상처 입을 때까지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사랑은 어느 계절에나 열매 맺을 수 있다는
그분의 말씀 다시 한번 떠올리면서
(해설) 사랑과 외로움의 먼 길
홍용희(문학평론가)
영화 '스노우 맨'(The Snow Man)을 본 적이 있는가. 중년의 사내가 눈이 펑펑
쏟아진 어느 겨울날에 있었던 자신의 소년시절의 이야기를 회고한다. 파스텔화의
애니메이션으로 재현되는 회상의 나라에서 소년은 자기가 만든 눈사람이 조종하는
오토바이를 타고 순백의 신비로 가득 찬 밤을 달린다. 고요한 눈의 나라에서 깊은
잠에 들었던 토끼, 다람쥐, 말, 새들이 깨어나 소년과 눈사람의 일행을 좇는다. 다시
소년은 눈사람의 손에 이끌려 꿈속에 묻힌 지상 위로 날아올라 밤하늘의 숲을
여행한다. "아이들은 하늘을 향해 소리치지만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 없네"라는
경쾌한 음율의 메아리 속에서.
이 영화는 맑고 투명한 순수성에 의해 섬세한 우주의 리듬과 감응하고 교신하는
소년의 드넓은 풍요의 세상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소년은 그 자체가 곧 흰
눈이고 짐승인 자연이다. 그래서 그는 몸의 더듬이로 어른들이 보고 듣지 못하는
자연의 내면적 울림과 풍경의 깊은 신비를 느끼고 호흡한다.
눈사람처럼 순백한, 그래서 눈사람과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소년의 내밀한 서정
세계, 정호승의 시심의 우물은 여기에 있지 않을까. 마침 그는 두번째 시집 '서울의
예수'에서 직접 다음과 같이 눈사람과 교감하는 맑은 영혼의 소년을 서정적 자아로
내세워 노래한다.
사람들이 잠든 새벽 거리에
가슴에 칼을 품은 눈사람 하나
그친 눈을 맞으며 서 있습니다.
품은 칼을 꺼내어 눈에 띠고 갈면서
먼 별빛 하나 불러와 칼날에다 새기고
다시 칼을 품으며 울었습니다.
용기 잃은 사람들의 길을 위하여
모든 인간의 추억을 흔들며 울었습니다.
(중략)
사람들이 오가는 눈부신 아침 거리
웬일인지 눈사람 하나 쓰러져 있습니다.
햇살에 드러난 눈사람의 칼을
사람들은 모두 다 피해서 가고
새벽별빛 찾아나선 어느 한 소년만이
칼을 집어 품에 넣고 걸어갑니다.
'눈사람'에서
이 시의 중심축은 눈사람과 소년의 은밀한 교감이다. 눈사람이 새벽거리에서 울고
있다. 세상 사람들의 잃어버린 용기와 추억을 깨우기 위해 별빛을 새긴 칼을 가슴에
품은 채, 자신의 몸을 눈물로 녹이고 있다. 눈부신 아침 햇살이 비치면서 분주한
일상이 시작되자 눈사람은 그만 거리에 쓰러지고 만다. 이때 "새벽별빛 찾아나선
어느 한 소년만이" 눈사람의 "칼을 집어 품어 넣고" 걸어간다. 여기에서 별빛 같은
꿈을 품은 채 "용기 잃은" 세상의 길을 떠나는 소년은 바로 시인의 잠재적 자아로
해석된다. 이 시의 정황이 아름답고도 슬픈 동화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도
눈사람과 교통하는 소년의 감성에 의해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정호승의 시세계의 가장 큰 미학적 특징은 이와 같은 순정한 소년의 감성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지금까지 애잔하게 노래해온 가난, 소외, 불행,
고통의 대상에 대한 연민과 동정의 음색이 공통적으로 동화적인 환상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특징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시의 캔버스에는 별, 들풀, 꽃, 잎새,
풀벌레, 눈, 나무들의 기쁨, 슬픔, 우울의 빛깔과 소리들이 살아 어우러져 있다. 그는
많은 시편에서 이러한 자연의 화음을 통해 인간사의 슬픔과 회한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그의 시세계는 상처와 고통의 비극적인 역사와 맞서면서도 맑고 아름다운
서정의 결을 일관되게 유지한다. 그의 순결한 동심의 정서가 침묵 속에 묻혀 있던
자연의 섬세한 마음결을 깨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의 주조음을 이루는
소년의 미성은 유아적 퇴행이 아니라 풍성한 성숙이다. 그는 여린 미성의 가슴으로
돌아감으로써 작고 약하지만 소중하고 아름다운 미세한 생명의 울림을 재발견하고
인식하는 풍성한 언어세계를 얻고 있다.
이번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에서 역시 그는 결 고운 서정으로 사랑과
외로움의 숙명을 오래한다. 특히 여기에서 그는 다섯번째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에서부터 전면으로 부각된 사랑의 본성과 존재원리에 대한 체득이
우주적 교감의 영역으로 확산되는 면모를 보여준다. 그는 미성의 감수성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존재원리로서의 사랑과 외로움의 진경을 열어보이고 있다.
시인의 사랑의 담론은 먼저 스스로 사랑의 마법권에 나포되면서부터 시작된다.
사랑은 이성적인 논리와 질서의 영역 밖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첫 만남의 찰나에
이미 그에게 사랑은 밀물처럼 밀려와 영혼과 육체를 흠뻑 적셔버린다.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한 그루 리기다소나무 같았지요
푸른 리기다소나무 가지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던 바다의 눈부신 물결 같았지요
당신을 처음 만나자마자
당신은 가장 아름다운 솔방울이 되길 원했지요
보다 바다 쪽으로 뻗어나간 솔가지가 되어
가장 부드러운 솔잎이 되길 원했지요
당신을 처음 만나고 나서 비로소
혼자서는 아름다울 수 없다는 걸 알았지요
사랑한다는 것이 아름다운 것인 줄 알았지요
'리기다 소나무' 전문
"당신을 처음 만"나는 순간 화자는 이미 사랑의 행위 주체자가 되어 있다.
화자에게 사랑의 대상으로 떠오른 당신은 "리기다소나무"이고 "눈부신 물결"이다.
당신은 아름답고 신비한 절대적 존재자인 것이다. 이제 화자는 당신의 육체인
"리기다소나무"의 "솔방울" "솔가지" "솔잎"이 되길 원한다. 화자는 사랑이란 내가
곧 당신이 될 때 완성된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당신을 처음 만나고 나서"
"혼자서는 아름다울 수 없다는 걸 알았지요^456,34^사랑한다는 것이 아름다운 것인
줄 알았지요"라고 간곡하게 진술한다. 시적 화자에게 사랑은 이제 삶의 운명의
별자리가 된다. 그에게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고 "사랑한다는 것은 산다는
것"(윤동주의 서시)이다. 따라서 그의 사랑의 담론은 곧 자신의 곡진한 삶의 언어가
된다. 그렇다면 시인이 살아가는 사랑의 길은 어떠한 진경으로 펼쳐져 있을까. 그의
삶의 운명의 행로와 연관되는 이러한 물음 앞에 그는 평행선으로 연속된 철길의
풍경을 그려보여 준다.
기차가 밤을 다하여 평생을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은
서로 평행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 굳이 하나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기보다
평행을 이루어 우리의 기차를 달리게 해야 한다
기차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늘 혼자 남는다
우리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울지 않는다
'정동진'에서
철도 레일은 서로 마주보고 그리워할 뿐 끝까지 합일되지 못하는 비극적인 운명을
존재원리로 한다. 서로 평행을 이룬 철도 레일의 긴장이 무너질 때 달리는 기차바퀴
소리도 그만 막을 내리게 된다. 사랑도 이와 같아서 서로에 대한 연속적인 그리움과
기다림만이 있을 뿐, 완전한 합일의 성취는 끝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랑이란
애초부터 대상과의 합일을 향한 애달픈 기다림과 꿈의 과정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화자는 "우리 굳이 하나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기보다^456,34^평행을 이루어
우리의 기차를 달리게 해야 한다"고 체념적인 어조로 진술한다. "우리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이 "울지 않"듯이, 우리들의 사랑도 지속되기 위해서는 서로 무연하게
바라만 보면서 헤어질 수 있는 내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사랑한다는
것이 아름다운 것인 줄 알"(리기다소나무)면서부터 그만 외로움의 신열을 앓고 있다.
기실 아름다운 사랑의 이면은 가슴 시린 외로움이었던 것이다. 사랑의 열도가
높아질수록 그만큼 외로움의 그늘도 짙어진다. 그렇다면, "당신"과 만났던 충만한
사랑의 추억은 곡두 같은 신기루였을까? 평행선으로 이어진 철도 레일이 서로
만나는 접점의 인상은 현실 밖의 몽상의 영역에서나 가능하듯이, 절대적인 사랑의
대상과의 강렬한 만남의 기억도 찰나적인 환각의 세계였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사랑이 고통의 시련을 가져올수록 시인에게 "사랑했던 첫마음"의 희억은 더욱
간절하게 떠오른다.
사랑했던 첫마음 빼앗길까봐
해가 떠도 눈 한번 뜰 수가 없네
사랑했던 첫마음 빼앗길까봐
해가 져도 집으로 돌아갈 수 없네
'첫마음' 전문
화자의 "사랑했던 첫마음"을 지속시키기 위한 안간힘이 천진스런 동요의 형식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동요는 인간의 가장 정직하고 순수한 내면의 노래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 시의 동요적 양식은 시인의 가장 절박하고 진실한 마음의 언어의
직접적인 드러남이라고 할 것이다. 화자는 "사랑했던 첫마음"의 지속적 체험을 위해
"해가 떠도 눈 한번" 뜨지 못하고, 해가 져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면서
전전긍긍하고 있다. 시적 화자에게 자신의 운명의 지침을 바꾸어놓은 "사랑했던
첫마음"의 기억은 그로 인한 고통이 커질수록 눈부신 그리움의 절대적인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사랑했던 첫마음"의 애절한 기억은 항상 그의 삶의 길을
지속시키는 내적 힘으로 존재한다. 그에게 사랑은 아름다운 삶을 위한 절대적인
목적이며 과정의 전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사랑의 시작이 논리적 범주로 규정될 수
없었듯이 사랑의 과정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 사랑은 끊임없이 외로움의 먼 길을
펼쳐놓고, 외로움은 또다시 사랑을 찾아가는 뜨거운 추동력으로 작용한다.
너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너는 산으로 들어가버렸다
너를 향해 급히 달려갔다
너는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가버렸다
(중략)
길은 끝이 없었다
지상을 떠나는 새들의 눈물이 길을 적셨다
나는 그 눈물을 따라가다가
네가 들어간 산의 골짜기가 되었다
'입산'에서
사랑은 끊임없이 유예되는 부재를 통해 현존한다. "너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면 천천히 "산으로 들어가"고, "급히 달려"가면 급히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가"버린다. 그리하여 존재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찾아가는 먼 길일
뿐이다. 사랑을 찾아가는 먼 길이란 바로 외로움의 먼 길을 뜻한다. 이 길의
종착지대는 "지상을 떠나는 새들의 눈물"이 젖어 있는 죽음의 세계이다. "나는 그
눈물을 따라가다가" 기어코 "네가 들어간 산의 골짜기가" 되고 만다. 여기서 나의
변신물인 "골짜기"란 영원한 외로움과 기다림의 고착물이다. 이토록 처절한
외로움의 운명은 물론 "너를 향"한 사랑 때문이다. 이제 사랑과 외로움은
동의어이다. 그래서 시인은 결혼 반지의 의미에 대해서도 "사랑에도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며, "결혼에도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반지의 의미)을
가리킨다고 처연하게 노래한다.
시인이 노래하는 사랑은 외로움이 내재되어 있어 가슴 시린 슬픈 음영이 드리워져
있고, 외로움은 사랑이 내재되어 있어 항상 더운 열기를 뿜어낸다. 이러한 사랑의
이율배반적인 속성에 대한 그의 인식은 은밀한 자연의 존재원리에 대한 직관으로
확장되어 간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수선화에게' 전문
이 시의 등장인물은 두 사람이다. 한 사람은 울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이를
바라보며 위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한 사람이다. 외로움에 지쳐 울고
있는 자신에게 또 다른 자신이 외로움의 본령을 환기시키면서 스스로 마음을 달래고
있는 것이다. 전자가 실재적 자아라면 후자는 예술적 자아이다. 이 시의 정황을
서술적으로 풀어서 읽어보자. 예술적 자아가 실재적 자아에게 말한다.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며 외로움으로 슬퍼하지 말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어차피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울음은 중지되지 않는다.
인간 실존이 가엾고 안타까워서 실재적 자아는 더욱 서러워진다. 다시 예술적
자아가 말한다. 인간뿐만이 아니라 삼라만상 모두가 외로움에 떨고 있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산 그림자가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오는 것도,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도 모두 외로움 탓이다. 이렇게 읽어보면, 결국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인간 삶의 숙명에 대한 언명은 모든 내밀한 우주적 존재원리의
속성에도 동시적으로 적용된다. 이러한 우주적 삶의 원리로 열린 시적 직관은 미적
거리를 두고 대상을 관찰하는 예술적 자아의 감득을 통해 개진되고 있다는 점에서
용이하게 객관적인 설득력을 확보한다.
실제로 정호승의 시세계에서 시의 영토에 들어온 자연물들은 시적 자아의
성정(본성 성, 정 정)을 표현하는 단순한 질료가 아니라, 그 자체의 고유한 내성을
드러내고 더 나아가 시의 생성 주체로 작용하기까지 한다. 다시 말해 그의
시세계에서 풀, 나무, 꽃, 곤충 등은 단순히 자동인형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영혼과
개성을 지닌 창조물로 등장한다. 다음 시편은 그 한 단면을 보여준다.
꽃이 진다고 아예 다 지나
꽃이 진다고 전화도 없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지는 꽃의 마음을 아는 이가
꽃이 진다고 저만 외롭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꽃 지는 저녁에는 배도 고파라
'꽃 지는 저녁' 전문
이 시의 생성 주체는 "지는 꽃의 마음"이다. 상대방이 전화를 못한 것은 "지는
꽃의 마음"의 우수에 깊이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꽃이 진다고
저만 외롭나"라고 원망한다. 화자 역시 "지는 꽃의 마음"에 감응되어 고독에 떨고
있는 것이다. 꽃은 이슬로 갈증을 풀며, 해와 달을 중심 축으로 하는 우주적
리듬과의 상호 공명 속에서, 쉬임없는 자기조직화 운동을 통해 피어난 우주
생명체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꽃의 슬픈
기운에 감응되어 함께 가슴 앓이를 하고 있다. 사람들이 낙화의 정경 앞에서 느끼는
우수는 마치 형제의 고통이 나의 고통으로 전이되듯이 낙화의 마음이 사람들에게
전이된 탓이리라.
물론 이러한 우주 생명의 언어와의 교감은 시인의 자연친화적인 순백한 감성으로
인해 가능하다. 그는 "나무를 껴안고 가만히^456,34^귀 대어보"(그리운 목소리)기도
하고, "산낙지의 잘려진 발들이 꿈틀대는 동안^456,34^바다는 얼마나
서러웠겠니"(산낙지를 위하여)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내 한평생 끝끝내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다면^456,34,456,34^밤새도록 나무들의 첫날밤을 엿보는 일이다"(나무들의
결혼식)라고 말하기도 한다. 정호승 시의 가장 특징적인 맑고 온화한 시적 화법은
이러한 유소년 같은 감수성의 감각기관을 열어 자연의 리듬과 상호 공명하는 데서
가능하다.
내 마음은 연약하나 껍질은 단단하다
내 껍질은 연약하나 마음은 단단하다
사람들이 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듯이
달팽이도 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는다
이제 막 기울기 시작하는 달은 차돌같이 차다
나의 길은 어느새 풀잎에 젖어 있다
손에 주전자를 들고 아침 이슬을 밟으며
내가 가야 할 길 앞에서 누가 오고 있다
죄없는 소년이다
소년이 무심코 나를 밟고 간다
아마 아침 이슬인 줄 알았나 보다
'달팽이' 전문
이 시에서 시적 주체인 나는 달팽이다. 소년의 발에 밟혀 생을 마감하는 달팽이의
독백적 진술을 시인이 옮겨놓은 형국이다. 이를테면, 식물의 임상실험에서 뿌리를
뜨거운 물 속에 담그자 보리싹이 흰 종이의 기록장치 위에 끝없는 눈물의 얼룩을
그려대는 것과 흡사한 이치이다. 이 시는 "손에 주전자를 들고 아침 이슬을 밟으며"
가는 소년의 섬세한 감수성이 감득하는 달팽이의 언어인 것이다. 물론 여기서
소년은 내밀한 자연의 정신세계와 동기감응(같을 동, 기운 기, 감동할 감, 응할
응)하는 시인의 잠재적 자아이다. "죄없는 소년"의 감각이 자연의 마음결과
교신하고 있는 것이다. 외로움의 정서란 사람뿐만 아니라 생성과 소멸의 우주적
순환원리 속에 살아가는 모든 삼라만상의 공통되는 존재론적인 원형질이다.
달팽이는 죽음을 통해 외로움으로부터 해방되었을까. 그렇다면 죽음의 세계에서는
진정한 사랑의 합일이 가능한 것인가. 사랑은 죽음의 대가를 지불해야 성취되는
것인가. 그래서 삶이 외로움이라면 죽음은 사랑인가. 이러한 물음 앞에서 영원한
하나를 꿈꾸지만 늘 좌절하는 삶의 철길 위에 선 시인은 다음과 같이 걷잡을 수
없는 후회에 빠진다.
그대와 낙화암에 갔을 때
왜 그대 손을 잡고 떨어져 백마강이 되지 못했는지
그대와 만장굴에 갔을 때
왜 끝없이 굴 속으로 걸어 들어가 서귀포 앞바다에 닿지 못했는지
그대와 천마총에 갔을 때
왜 천마를 타고 가을 하늘 속을 훨훨 날아다니지 못했는지
그대와 감은사에 갔을 때
왜 그대 손을 이끌고 감은사 돌탑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는지
그대와 운주사에 갔을 때
운주사에 결국 노을이 질 때
왜 나란히 와불 곁에 누워 있지 못했는지
와불 곁에 잠들어 별이 되지 못했는지
'후회' 전문
시적 자아는 죽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 삶의 세계에서 진정한 사랑의 합일이
유예될수록 죽지 못한 것에 대한 그의 후회도 강렬해진다. 그대와 함께
백마강이 되고, 서귀포 앞바다가 되고, 천마가 되고, 돌탑이 되고, 별이 되었더라면
영원한 사랑은 이미 성취되었지 않았겠는가. 사랑은 외로움을 낳고 외로움은 다시
죽지 못한 후회를 낳는다. 시인이 다섯번째 시집에서 단호하게 던졌던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라는 언명은 사랑의 완전한 성취와 승화에 대한 스스로의 갈망으로
풀이된다. 이렇게 보면, 사랑의 율법에서 죽지 않는 삶이란 곧 외로움의 길이다.
삶의 불연속적인 단절, 분열, 고립의 세계라면 삶의 지배원리로부터 벗어난
죽음(열반)은 연속적인 통합, 합일, 혼돈의 세계이다. 이성적인 삶의 논리에서
사랑이 규정될 수 없었던 까닭은 사랑의 서식처가 미분화된 죽음(열반)의 세계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외로움의 실존이란 삶의 세계에 언뜻 얼굴을 비친, 죽음의
세계를 사는 사랑의 주술에 나포된 형국은 아닐까. 자연의 내밀한 화음과 공명하는
정호승의 "길 떠나는 소년"(길 떠나는 소년) 같은 섬세한 시적 감수성은 이와 같은
외로움과 사랑의 본성에 대한 해법의 길을 묻고 또 묻는다.
* (뒷표지의 글)
* 그의 눈과 마음속에는 사랑이 출렁인다. 대상을 찾고, 그리하여 그가 눈과
마음으로 바라보는 모든 것들은 사랑으로 가득하다.
그가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까닭은 한없이 다 주고 싶어하는 그의
사랑을 다 줄 수 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주로 줄수록 늘어나는 것이니까.
사랑은 아름다움이고, "혼자서는 아름다울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랑, 그것이 곧
인간 속의 신성(신 신, 본성 성)이므로, 그의 눈과 마음에서 출렁이는 것은
신성이다. (최승자 '시인')
* '나무들의 결혼식에 초대받아 낭랑하게 축시 한번 낭송해보고 싶다'는 시인,
'산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 이라고 나직이 속삭이는 별과 새벽의 시인 정호승
님의 새시집을 읽으면서 무척 행복했습니다.
시인이 유난히 좋아하는 첫눈처럼 순결한 설레임과 애틋하믕로 가득한 고백들.
시인 자신의 모습만큼이나 고요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삶의 모든 것을 끌어안는
아름다운 노래를깊이 절제되어 더욱 향기를 풍기는 이 시집의 잘 익은
시들을 여러 벗들에게도 맛보게 하고 싶습니다.
(이해인 '수녀, 시인')
위안의 성자
그들을 찾아가 큰 위안을 얻으십시오 마더 테레사 수녀의 미소 여든일곱 생신을 맞아 인도 캘커타 사랑의 선교회 본부 건물 발코니에 나와 몰려든 축하객들에게 두 손을 모으고 답례하는 마더 테레사 수녀의 웃는 사진이 동아일보 일면 머릿기사로 나왔다 나는 아침밥을 먹다가 그 사진을
몇 번이나 들여다보았다 테레사 수녀의 그 웃음이 합죽한 입가에 번진 수줍은 그 미소가 아흔에 돌아가신 내 경주할머니의 미소 같아서 평생을 첨성대 앞 채마밭에서 김을 매시던 반월성 들판에서 쑥을 캐시던 외할머니의 맑은 미소 같아서 그 사진 정성스럽게 오려놓았다 시를 쓰는 내 책상 앞에 붙여놓았다 진정한 사랑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상처 입을 때까지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사랑은 어느 계절에나 열매 맺을 수 있다는 그분의 말씀 다시 한번 떠올리면서 (해설) 사랑과 외로움의 먼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