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군이 전날 레바논 베이루트 공습 와중에 시아파 이슬람 정파 헤즈볼라 운동 지도자 셰이크 하산 나스랄라(64)를 살해했다고 28일(현지시간) 밝혔다. 헤즈볼라도 확인도 부인도 안하다가 이날 오후 8시(한국시간)쯤 그의 사망을 공식 확인했다. 고인의 뒷배가 돼줬던 이란의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 하메네이는 닷새의 공식 추모 기간을 선언하며 보복하지 않고 넘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며 "'저항의 축'은 모든 자원을 동원해 레바논과 헤즈볼라의 편이 돼 달라"고 당부했다.
안토니오 구테레스 유엔 사무총장은 "극적으로 긴장이 고조되는 데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데이비드 라미 영국 외무장관은 즉각 휴전을 거듭 촉구했다. 미구엘 디아즈 카넬 쿠바 대통령은 나스랄라가 "비겁한 선택적 암살"에 당한 것이라고 분노를 표했다. h유럽연합은 레바논과 이스라엘 영공하는 모든 비행 편을 운항하지 말도록 했다.
나스랄라는 중동에서 가장 널리 알려지고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지만 노출되면 이스라엘에 암살 당할까봐 몇 년 동안 공석에 나타나지 않아 많은 것이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라고 영국 BBC가 전했다. 아내 파티마 야신과의 사이에 5남매를 뒀지만 장남은 이스라엘 공격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 외에는 개인사가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는 이란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헤즈볼라를 오늘날의 정치적, 군사적 세력으로 키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 이 그룹을 지지하는 이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그의 영도 아래 헤즈볼라는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 투사들은 물론 이라크와 예멘에 전사들까지 훈련시키는 데 도왔고 이란으로부터 미사일들과 로켓들을 입수해 이스라엘 공격에 사용해 왔다.
그는 레바논을 점령한 이스라엘군과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전사 조직에서 레바논 군대보다 더 강한 무력 집단으로 진화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레바논 정치권력의 중재자, 건강과 교육, 사회적 서비스의 제공자이며, 이란의 지역 패권 장악에 중요한 일익을 담당했다.
1960년에 태어난 나스랄라는 베이루트 동쪽 부르즈 함무드 구역에서 자랐는데 그의 부친 압둘 카림은 청과물상이었다. 그는 아홉 자녀의 맏이였다. 나스랄라는 레바논이 1975년 내전으로 빠져들자 아말 운동에 가입, 시아파 전사로 탈바꿈했다. 이라크의 성스러운 도시 나자프에 잠깐 머무를 때 시아파 강론에 참석한 뒤 레바논에 돌아와 아말에 재가입했다가 1982년 다른 이들과 함께 결별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전사들의 공격에 대한 대응으로 레바논을 침공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 새로운 그룹이 이슬라믹 아말인데 베카 계곡에 주둔하고 있던 이란 혁명수비대의 군사적, 조직적 지원을 받았고, 가장 빼어나고 효율적인 시아파 무장전사 조직으로 성장해 나중에 헤즈볼라가 된다. 1985년 헤즈볼라는 미국과 소련을 이슬람의 근본적인 적들로 규정하며 무슬림의 땅을 점령하고 있는 이스라엘 섬멸을 호소하는 "공개 서한"을 발행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창설을 알렸다.
나스랄라는 조직이 성장함에 따라 헤즈볼라의 서열 안에서 자신의 지위를 계속 끌어올렸다. 그는 투사로 복무한 뒤 발베크 책임자가 됐으며, 그 뒤 전체 베카 지역을, 나중에 베이루트를 총괄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서른두 살이던 1992년 헤즈볼라 지도자가 됐다. 전임 압바스 알무사위가 이스라엘 헬리콥터 공격으로 암살된 뒤였다. 그의 첫 행동은 무사위 살해에 대한 보복에 나선 것이었다. 그는 북부 이스라엘에 대한 로켓 공격을 명령해 한 소녀를 살해했고, 튀르키예 주재 이스라엘 대사관에서 한 이스라엘 보안 관리를 자동차 폭탄으로 제거했으며,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이스라엘 대사관을 자동차 폭탄으로 공격해 29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나스랄라는 또 이스라엘군과 저강도 전쟁을 벌여 2000년 레바논 남부에서 철군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맏아들 하디를 이스라엘 병사들과의 교전 도중에 잃는 아픔을 겪었다. 이스라엘군이 철군하자 나스랄라는 이스라엘을 상대로 거둔 아랍의 첫 승리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헤즈볼라는 무장 해제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며 "모든 레바논 영토가 보존돼 셰바 농장 지대도 포함해 보존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2006년까지는 상대적으로 조용했는데 8명의 이스라엘 병사들이 살해되고 두 명이 납치돼 이스라엘이 대대적 공세에 나서자 헤즈볼라 전사들은 국경 넘어 공격을 시작했다. 이스라엘 군용기들이 남부와 베이루트 남쪽 근교에 있는 헤즈볼라 진지들에 폭탄을 떨어뜨렸고 헤즈볼라는 이스라엘에 4000기의 로켓을 발사했다. 1125명의 레바논인들, 대부분 민간이들과 119명의 이스라엘 병사들과 45명의 민간인들이 34일의 충돌 와중에 목숨을 잃었다.나스랄라의 집과 사무실들도 이스라엘 군용기들의 타깃이 됐지만 그는 상처 하나 없이 목숨을 구했다.
2009년 나스랄라는 헤즈볼라의 "정치적 비전"을 담은 새 정치 선언을 발표했다. 1985년 문서에 있던 이슬람 공화국 언급을 삭제했고, 대신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한 강경 노선을 유지하고 레바논 남부에서 금지하는 유엔 결의안에 상관 없이 헤즈볼라가 무기들을 보관할 필요가 있다고 규정했다. 그는 "사람들은 진화한다. 온 세상도 지난 24년 넘게 바뀌었다. 레바논은 변화했다. 세계 질서가 바뀌었다"고 말했다.
4년 뒤 나스랄라는 헤즈볼라가 이란이 지원하는 동맹을 돕기 위해 시리아에 전사들을 파견,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의 반군 진압을 돕는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 진입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것은 우리의 싸움이며,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말했다.
레바논의 수니파 지도자들은 헤즈볼라가 시리아 전쟁에 끌어들였다고 규탄해 종파간 긴장이 극적으로 고조됐다. 2019년에는 레바논의 경제 위기가 극심해져 정치 엘리트를 겨냥해 부패와 낭비, 행정 오류와 방치에 저항하는 대중 시위가 빈발했다. 나스랄라는 처음에는 개혁을 위한 외침에 동조했으나 시위가 정치 체계를 전면적으로 전복하자는 과격한 구호를 내세우자 태도가 바뀌었다.
지난해 10월 7일 하마스가 전례 없는 공격으로 다음날 가자지구 전쟁이 촉발되자 헤즈볼라와 이스라엘의 간헐적인 충돌은 점점 고조됐다. 헤즈볼라는 팔레스타인과의 연대를 표시한다며 이스라엘 목표물들을 타격했다. 지난해 11월 나스랄라는 하마스의 공격이 "결단과 실행 두 관점에서 모두 100% 팔레스타인적"이라면서도 헤즈볼라와 이스라엘의 싸움이 "매우 중요하고 의미있다"고 대중 연설을 통해 밝혔다.
그 그룹은 이스라엘 북부와 이스라엘이 점령한 골란 고원에 8000발 이상을 퍼부었고 무장 차량들을 향해 대탱크 미사일들을 쏘았고 폭발물을 탑재한 드론들로 군사 목표들을 타격했다. 이스라엘 방위군(IDF)은 레바논 내 헤즈볼라 거점들에 공습과 탱크, 박격포탄 발사로 응징했다.
가장 최근 연설을 통해 나스랄라는 이스라엘이 헤즈볼라 대원들이 사용하는 수천 대의 무선 호출기(페이저, 삐삐)와 워키토키 장비들을 폭파시켜 32명이 죽고 수천 명이 다치게 한 일과 관련 "모든 레드라인을 넘어섰다"면서 "전례 없는 타격"을 입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 뒤 얼마 안돼 이스라엘은 헤즈볼라에 대한 공격 강도를 극적으로 높여 일련의 공습을 감행, 800명 가까이 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