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을 넘는 탈주와 흰빛의 질량
- 정승화 시인의 시들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정승화의 시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경계 지우기이다. 그의 시는 인간이 스스로 만든 윤리·도덕·신학·표기법이라는 울타리를 치열한 언어로 넘어서고자 한다. 동시에 이 탈주의 에너지는 파괴가 아니라 가장 완벽한 해방으로서의 공과 무의 경지에 닿으려는 수행적 움직임으로 형상화된다. 그러므로 그의 시적 여정은 다음의 두 긴장 사이에서 진동한다. 첫째는 불타는 열정의 언어가 끌고 가는 탈주의 추진력이고, 다음은 그 열정을 흰색의 방식 즉, 침묵·무관심·수용으로 환원시키는 절제. 이 양극의 진동이 바로 정승화 시의 미학적 균형을 만든다.
가자, 아이야
금을 넘자
저 건너 숲의 안쪽,
두 발 가진 생물은 출입이 금지된 곳으로 가자
식은 걸음이 안개를 모으며
어둠을 잃어버리고 모퉁이를 지운다
흉터가 없는 이들은 찾아낼 수 없는 곳
절망의 땅을 딛어 본 적 없는 이들은 발견할 수 없는 곳
온몸을 울음으로 채워본 적 없는 이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
그들은 모두 두 발로 걷지 않는다
…(중략)…
가자, 아이야
금을 지우면서 가자
- 「두 발로 걷지 않는다」
이 시는 정승화 시 세계의 핵심을 잘 보여준다. 화자는 “가자, 아이야 / 금을 넘자”라며 독자를 경계 바깥으로 유인한다. 이때의 넘어야 할 금은 단순한 법규의 선이 아니라, “절망의 땅을 딛어 본 적 없이 이들”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경계이다. “그들은 모두 두 발로 걷지 않는다.”는 표현은 정상의 규범적인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세계이다. 두 발의 보행은 문명화된 시선의 메타포이다. 정승화 시인은 그 관습을 박차고 새로운 세계, 즉 숲 안쪽의 언어로 울음, 상흔, 아이의 손, 잃어버린 젖 등의 원초적 감각을 다시 불러낸다. 이렇게 볼 때 경계의 바깥, 다시 말해 숲 안쪽은 무질서의 장소가 아니라, 오히려 슬픔과 연대의 비의祕儀가 진행되는 성소다. 그래서 이 시에서의 탈주는 곧 소명召命이다. 금을 넘는다는 것은 사회의 소수자인 아이·여자의 목소리를 되살리는 변혁적 행위다.
이 소수자의 목소리는 상처의 미세한 흔적을 더듬는다. 「푸른 점」이라는 시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 시는 정승화의 사유가 얼마나 정교한 미시적 감각과 함께하는지를 보여준다.
푸른 점은 흔적이 아니라 상처야
그 비밀장소에서 아직 붓꽃의 맥박 소리가 들리거든
그동안은 상처라고 불리는 거야
드디어 맥박 소리 비밀장소를 빠져나갈 때
그때 흔적이라고 말해주겠어
흔적은 마음을 밖으로 내보내는 일이거든
뾰족한 겨울에 찔려 눈雪이 내리는 것처럼
- 「푸른 점」 부분
이 시는 목덜미에 나타난 푸른 점에서 시상을 얻어 쓴 작품이다. “뾰족한 겨울에 찔려 눈雪이 내리는 것처럼” 목덜미의 “푸른 점은 “나비가 뺨을 통과하다 들킨 / 붓꽃의 비밀장소”이며, “붉은 기타 몸뚱이를 몰래 빠져나온 / 못된 악보의 푸른 상처”다. 이 상징들은 모두 도주하는 형상으로서의 흔적을 가리킨다. 그런데 시는 결정적인 구분을 제시한다. “푸른 점은 흔적이 아니라 상처야”라고” 말한다. 흔적은 이미 외부로 방출되어 해석 가능한 표식이지만, 상처는 아직 내부에서 맥박치는, 진행 중인 사건이다. 시는, 이 차이를 정확히 붙잡는다. “드디어 맥박 소리 비밀장소를 빠져나갈 때 / 그때 흔적이라고 말해주겠어.”라고 말하여 상처가 흔적으로 이행하는 과정은 고통의 비의가 언어로 번역되는 순간임을 말하고 있다. 고통스러운 현실과 상처로부터 탈주하는 것은 상처를 잊는 것이 아니라 흔적 안에 깃든 상처와 함께 가는 것이다.
네 개의 단락으로 구성된 「어떤 몽상가의 생애」는 신화적 이미지들의 탈주와 회귀를 보여주는 대작이다. 이 시는 신학·신화·사막·낙타·불길·은총·우상 같은 종교적 기표들을 불러내어 탈주의 의미를 새롭게 탐색한다. “숨결이 바람이 되었고 시선은 태양이 되었다”는 시의 구절에서 보듯, 주체의 기관들은 자연물로 변환된다. 이때 탈주는 인간 중심적 통치 언어를 벗어나 사물과 자연의 문법으로 이행하는 존재론적 변혁 행위이다. 탈주가 방탕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시인은 기도문의 언어로 탈주적 언어의 고삐를 조인다. 이 시 마지막 연에서 “방랑자의 시작이 끝난다”는 역설적인 문장이 기도와 탈주의 관계를 잘 말해준다. 그것은 끝없는 시작을 의미한다. 신앙은 방랑의 끝이지만 그것은 또 새로운 방랑을 여는 시작이기도 하다. 진정한 신앙, 진정한 기도는 율법과 신학적 도그마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끝없이 넘어서 다른 것이 되려는 노력 속에 있음을 시인은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가장 강렬한 종교적 이미지의 변주를 보여주는 작품은 신작시 「붉은 문설주 안」이다. 붉은 문설주는 신앙과 현실의 경계를 상징하는 사물이다. 이 경계에서 이 시는 유다의 입맞춤에서 출발해 “내 주머니엔 당신이 새겨진 은화가 가득”한 배반의 서사를 펼쳐 보여준다. 그런데 이 시가 독창적인 지점은 배반-형벌-회개의 도식에 갇히지 않고, 거래라는 현대적 상업 윤리를 통해 구원의 신학을 재구성한다는 데 있다. “내가 팔아버린 나를 당신은 자꾸 사들인다.”라는 구절이 이를 잘 보여주는데, 배반의 행위로 자신을 헐값에 매각한 나를, 신은 사랑의 초과 지불로 사들인다. 여기서 구원은 용서의 시혜가 아니라, 거래의 역전, 즉가치의 역학을 붕괴시키는 초과 지불이다. 그래서 “당신의 심장에 자꾸만 나를 쌓고 가둔다”는 표현은 감금이 아니라 넘치는 사랑에 내가 스스로 구속됨을 말한다. 이렇듯 이 시는 죄에 대한 처벌을 사랑의 미학적 역거래로 변환한다. 그 변환의 순간에, 시는 가장 뜨겁고도 가장 절제된 톤을 획득한다. 불이 나를 태우지 않고, 나의 돌이 신의 몸에 흡수되는 장면에서 해방은 죄책으로부터의 방임이 아니라, 나의 폭력을 신이 자발적으로 포용하며 흡수하는 또 다른 성만찬으로 완성된다.
신작시 「흰, 아이에게」는 정승화 시 세계의 윤리적 핵심을 가장 투명하게 드러낸다.
나는
흰보다 더 고요한 색을 알지 못했다
그 침묵은 모든 소리 이전의 공명이었다
흰보다 더 충만한 결핍을 알지 못했다
그것은 없음으로 가득한 충만이었고
무無의 가장 온전한 지금이었다
…(중략)…
아이야 나는 네게로 간다
흰의 질량으로, 기억되지 않는 사랑의 방식으로
사막 한 가운데 오아시스처럼
그 오아시스 곁의 나무 그늘처럼
…(중략)…
그러니 아이야
너는 그 오아시스에서 마른 목을 축이고
그 나무 그늘에서 땀을 닦아라
나는 기도한다
너의 순수가 결코 환상이나 기억이 되지 않기를
그것이 현실의 가장 진실한 흔적이 되기를
허물이 껍질처럼 벗겨지고 비상의 시각이 도래해도
나는 여기,
발화 이전의 동상처럼, 이름 없는 증언처럼
흰의 방식으로 서 있으리라
- 「흰, 아이에게」 부분
“나는 / 흰보다 더 고요한 색을 알지 못했다.” 여기서 흰은 비어 있음空이면서, 동시에 “없음으로 가득한 충만”이다. 시인은 흰을 “절대적인 무관심으로 / 모든 것을 수용하는 색”이라 정의한다. 무관심은 냉담이 아니라 판단을 일시 중지하는 판단정지이다. 흰은 “겹쳐지면서도 지워지지” 않고, “물러서면서도 바탕이 된다.” 즉 흰은 사라짐의 미덕을 통해 타자를 떠받치는 배경으로 작동한다.
아이에게 건네는 이 시에서 화자는 “흰의 질량으로, 기억되지 않는 사랑의 방식으로” 다가가겠다고 말한다. “기억되지 않는 사랑”은 주고도 갖지 않는 사랑이다. 마지막의 고백 “나는 여기, / 발화 이전의 동상처럼, 이름 없는 증언처럼 / 흰의 방식으로 서 있으리라”는 구절은 정승화 시의 해방 개념을 응축한다. 가장 완벽한 해방은 소유의 권리로부터의 해방, 이름의 소유로부터의 해방, 발화의 권능으로부터의 해방이다. ‘흰’은 말하기의 권세를 내려놓고, 존재가 스스로 말하도록 비워주는 태도다. 여기서 공과 무는 허무가 아니라, 타자가 현현할 공간을 열어놓는 적극적 행위이며 환대의 미덕이다.
이제 마침내 허공에서 단내가 난다
모든 것의 증인이 되는 시간에서
슬프지 않게 증발할 수 있다
나를 누설하는 모든 공간을 덮을 수 있다
마침내 나는
- 「마침내 나는」 부분
「마침내 나는」은 정승화 시인의 시학이 응축된 작품이다. 화자는 “허공의 파동에서 번역되지 않은 새의 지문을 읽”고자 한다. 그러나 “나의 어휘가 너무나 가난해서 / 죽어가는 문장 대신 꽃을 읽”는다. 이때 꽃은 실패의 대체물이 아니라, 실패를 통과한 다음의 정확성이다. 번역 불가능한 어떤 지문을 그대로 두는 대신, 시는 꽃으로 “허공의 일생”을 다시 쓴다.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경계에서 벗어난 무의 세계를 아름다운 꽃으로 변화시키는 이 마술적인 행위가 바로 정승화 시인의 시 쓰기의 철학이고 또한 시작법이다.
이렇게 써진 정승화 시인의 언어는 뜨겁다. 불, 사막, 태양, 피, 염소의 뿔, 못, 붉은 기타, 붉은 낙타—이 격정의 이미지들이 시 곳곳에서 분출한다. 그러나 이 불의 언어는 언제나 “21일 동안의 기도”, “흰의 질량”, “발화 이전의 동상” 같은 절제의 형식과 함께 온다. 그가 만들어내는 최고의 긴장은 바로 이런 균형감에 있다. 이 모든 균형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문장 내부의 정확한 단위 조절이다. 정승화 시인은 비유를 중첩하지만, 비유와 비유 사이에 “쉼표도 없이 비둘기처럼 / 머리 위를 선회”하게 놓아 공명의 여백을 확보한다. 의미가 폭주하지 않도록 리듬을 끊고, 다시 잇는다. 그래서 그의 시는 장식적 과잉으로 흐르지 않으면서도, 감각의 밀도를 유지한다.
정승화가 궁극적으로 겨냥하는 해방은 ‘무엇으로부터의’ 소극적 자유를 넘어 더 큰 무엇을 위해 비워내는 적극적 자유다. 「흰, 아이에게」에서 “기억되지 않는 사랑”이 그러했고, 「마침내 나는」의 “슬프지 않게 증발”이 그러했다. 증발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 소멸이지만, 그 소멸은 타자를 위한 온기의 배후가 된다. 흰은 무관심이지만, 바로 그 무관심 덕에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 지점에서 공과 무는 허무가 아니라 환대의 다른 이름이 된다.
정승화의 시는 우리를 설득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 곁에서 ‘발화 이전의 동상’처럼 서서, 우리가 스스로 말하도록 배경을 만들어준다. 그러므로 그의 해방은 찬란한 승리의 외침이 아니라, 조용한 공명이다. 아이에게, 타자에게, 심지어 신에게조차 공간을 돌려주는 행위, 즉 이것이 정승화 시인이 제안하는 시적 자유다.
정승화 시인의 시는 불의 사막과 흰의 그늘 사이를 왕복한다. 불의 사막에서 그는 “두 발”을 벗어 던지고, 우상과 신성, 모독과 구원의 언어를 시험한다. 흰의 그늘에서는 말의 권능을 내려놓고, 존재가 스스로 말하도록 비워준다. 이 왕복운동이 바로 “자유를 위한 탈주”의 운동이며,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의 과정이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승리의 깃발이 아니라, “흰 신발”이다. 이는 다시 걷기 위한 최소한의 도구, 타자에게 다가가기 위한 몸의 준비이다.
정승화의 뜨거운 언어는 절제의 기도를 통해 연소율을 조절한다. 그는 상처를 흔적으로 서둘러 봉인하지 않고, 맥박이 옮겨갈 때까지 기다리는 시인이다. 그는 자신을 팔아버린 우리를 다시 “자꾸 사들이는” 신의 역거래를 믿는 시인이다. 그래서 그는 “흰보다 더 고요한 색”을 백지로 펼쳐놓고, 그 위에서 타자의 첫울음을 다시 듣는 섬세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그의 시는 우리에게 묻는다. 금을 지우며 가겠느냐고. 두 발이 아니라 다른 감각으로, 상처의 맥박을 들으며, 불의 온도와 흰의 냉기를 번갈아 견디며. 그 길의 끝에서 우리는 알게 된다. 해방은 떠남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남겨두는 법을 배우는 일이며, 자신을 비워 타자가 들어설 자리를 만들어주는, 공과 무의 숭고한 기술이라는 것을 우리는 믿게 된다. 그리하여 모든 금(이며 인)이 만든 경계를 넘어 무의 세계에서 흰빛의 질량을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