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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성군(密城君)
이침[ 李琛 ]
원본글 출처 이침의 비명(碑銘)
저자 서거정(徐居正)
군호 : 밀성군(密城君)
자 : 문지(文之)
시호 : 장효(章孝)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5 국척(國戚)
공(公)의 휘(諱)는 침(琛)이요, 자(字)는 문지(文之)인데, 세종 대왕(世宗大王)의 제12자이다. 어머니 신빈(愼嬪) 김씨(金氏)가 선덕(宣德) 경술년(庚戌年, 1430년 세종 12년)에 공을 낳았는데 총명이 뛰어났으므로 세종(世宗)께서 제자(諸子)들보다 남달리 사랑하였다. 나이 7세에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을축년(乙丑年, 1445년 세종 27년) 봄에 망족(望族) 민씨(閔氏)를 선택하여 배위(配位)로 삼았다. 경오년(庚午年, 1450년 문종 즉위년) 봄에는 영릉(英陵, 세종)이 승하하자 슬픔과 수척함이 예(禮)에 지나쳤다.
세조(世祖)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우애(友愛)가 깊었는데, 공에 이르러서는 더욱 돈독하였다. 세조가 즉위(卽位)해서는 모든 궐흠(闕欠)된 정체(政體)에 대해서는 반드시 공에게 자문하였다. 세조가 군정(軍政)에 뜻을 두어 삼군진무소(三軍鎭撫所)를 고쳐 도총부(都摠府)로 삼고 도진무(都鎭撫)를 고쳐 도총관(都摠管)을 삼되 종재(宗宰)와 중신(重臣) 중에서 가려서 제수했는데, 공이 제일 먼저 그 선발에 뽑혔다. 또 문소전(文昭殿)ㆍ사옹원(司饔院)ㆍ종부시(宗簿寺)의 도제조(都提調)를 명(命)하자 감리(監莅)를 밝게 하였다. 무인년(戊寅年, 1458년 세조 4년)에는 상정국(詳定局)을 열도록 명하고 또한 공에게 관리하도록 하였다.
갑신년(甲申年, 1464년 세조 10년)에 어머니의 상사(喪事)를 당하였는데 공의 형제 중에 혹은 일찍 죽기도 하고 혹은 병들기도 하였으므로 공이 홀로 여묘(廬墓)살이를 하면서 슬픔과 예(禮)를 다하고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공의 효성을 칭찬하였다. 복제(服制)를 마치고서도 좋은 명절을 만날 적마다 묘소에 올라가 고하고 뵈니, 광릉(光陵, 세조)이 그의 효성을 가상히 여겼다.
정해년(丁亥年, 1467년 세조 13년)에 적신(賊臣) 이시애(李施愛)가 남몰래 반역을 꾀하여 중앙과 지방에서 난을 선동하니, 조정에 있는 대신(大臣)도 혹은 체포되어 갇힌 자도 있었다. 광릉이 공을 명하여 의금부 도위관(義禁府都委官)으로 삼고 분별하여 다스리게 했고, 겨울에는 또 명하여 육시칠감 도제조(六寺七監都提調)로 삼으니 힘을 다해 사양해서 면직됨을 얻었다. 무자년(戊子年, 1468년 세조 14년) 봄에 광릉이 온천(溫泉)에 거둥할 적에 공에게 병부를 던져주어 유도(留都)하여 수위(守衛)하게 하였다.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그대로 도총관(都摠管)을 명하였다. 남이(南怡)와 강순(康純) 등이 모역(謀逆)하다가 일이 발각되자 임금이 공을 불러 은밀히 의논하니, 계획을 하여 협찬해서 마침내 남이와 강순 등을 체포하고 또 공을 명하여 의금부 도위관(義禁府都委官)을 삼아 국문(鞫問)을 하니, 간당(奸黨)들이 다 그 죄를 자복하였다. 훈로(勳勞)를 책록(策錄)하여 익대 공신(翊戴功臣) 철권(鐵券)을 주었다.
기축년(己丑年, 1469년 예종 원년)에 영릉(英陵)을 여주(驪州)에 천장(遷葬)하고 공을 도제조(都提調)로 삼았다. 이해에 공이 도총관(都摠管)으로 병권(兵權)을 장악하자 거듭 사직을 청하기를 매우 힘차게 하니, 임금이 그 뜻을 따르고 특명(特命)으로 공의 제3자 수안 도정(遂安都正) 이당(李)과 제4자 석양 도정(石陽都正) 이격(李䛿)에게 계품(階品)을 더하여 군(君)으로 봉했다. 금상(今上, 성종(成宗))이 즉위하여 공에게 호위한 공이 있으므로 훈로(勳勞)를 책록하여 좌리 공신(佐理功臣)의 호를 내렸다.
무술년(戊戌年, 1478년 성종 9년)에 여인의 시체가 도성(都城) 곁에 버려져 있었는데 칼로 찌른 상처가 매우 잔혹하였다. 유사(攸司)에 명하여 (죄인을) 추국(推鞫)하게 하였으나 그 실정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공을 의금부 도위관(義禁府都委官)으로 삼았는데 죄를 공평하게 판결하여 실정(實情)을 얻으니, 사람들이 모두 굴복하였다. 여름에 우연히 병에 걸려 점점 수척해 지니, 임금이 내의(內醫)와 중사(中使)에게 명하여 내리는 약이(藥餌)가 길에 연달았다.
기해년(己亥年, 1479년 성종 10년) 정월 1일에 집에서 졸(卒)하니, 향년 50세였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임금이 매우 슬퍼하고 조회를 정지하고 어찬[御膳]도 줄였으며 부의를 전례보다 더 주었다. 태상시(太常寺)에서 시호를 장효(章孝)라 하였다. 5월 초4일에 광주(廣州) 소재지 서쪽 기자산(其自山)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은 품성(稟性)이 단정하고 중후하며 마음이 너그럽고 부드러워서 종족(宗族)간에 돈목(敦睦)하며 인친(姻親)을 돈독히 사랑하였으므로, 가도(家道)가 화목하여 조금도 어긋나거나 불평함이 없었다. 사람을 대우하고 물건을 만남에 있어 온화한 기운이 겉으로 드러났다. 평생 노래하는 기생이나 매와 개로 사냥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담박하게 명리(名利)를 따르지 않는 것이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집에 있을 때는 급하게 말을 하거나 놀라는 얼굴빛을 하는 일이 없었고 노복들이 잘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일찍이 꾸짖거나 성내는 일이 없었다.
공은 종실(宗室) 중에 있을 때는 몸을 공손히 가지고 얼굴빛을 바르게 하여 우뚝하게 의표(儀表)가 되었다. 종친(宗親)간에 잘못하고 어기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엄하게 규탄하였으므로 감히 잘못 실수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임금이 매우 의지하고 중하게 여겼는데, 향년이 길지 못하여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아! 슬픈 일이다.
민씨(閔氏)는 풍덕 군부인(豐德郡夫人)에 봉하였는데, 증(贈) 숭록 대부(崇祿大夫)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민승서(閔承序)의 딸이다. 4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이계(李誡)는 가덕 대부(嘉德大夫) 운산군(雲山君)이고, 차남 이당(李譡)은 승헌 대부(承憲大夫) 춘성군(春城君)이며, 3남 이당(李)은 정의 대부(正義大夫) 수안군(遂安君)이며, 4남 이격(李䛿)은 정의 대부(正義大夫) 석양군(石陽君)으로 먼저 졸하였다. 장녀는 판관(判官) 하한문(河漢文)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참봉(參奉) 안우하(安友夏)에게 시집갔다.
운산군의 전취(前娶)는 주부(主簿) 곽득륜(郭得倫)의 딸인데 1녀를 낳았고, 후취(後娶)는 판관(判官) 정자숙(鄭自淑)의 딸인데 아직 아들이 없고 얼자(孽子) 하나가 있으나 어리다. 춘성군은 첨추(僉樞) 조무영(趙茂英)의 딸을 취했는데 아직 아들을 두지 못했고, 수안군은 경력(經歷) 안종도(安從道)의 딸을 취하여 1남 2녀를 낳았는데 다 어리다. 얼자(孽子) 하나가 있다. 판관(判官)은 아들이 없고, 참봉(參奉)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다 어리다.
공이 영릉(英陵)을 옮기는 일의 제조(提調)가 되었을 때에 나 서거정(徐居正)도 또한 부제조(副提調)가 되어서 4, 5개월을 모시고 지냈다. 공이 지닌 덕의 도량이 너그럽고 넓어서 모시는 하료(下僚)들에게 정성스럽고 지극하여 서거정같은 짧고 졸렬한 사람에게도 또한 한번 돌아다봐 주심을 받았으니, 그것을 감히 잊을 수 있겠는가? 서거정이 매양 공을 뵈니 온화하고 공손하고 덕이 장대하여 비록 지위가 어른인 종척(宗戚)이며 공이 높은 맹부(盟府)이지만 절대로 교만한 기색이 없이 더욱 삼가고 더욱 겸손하였다. 모든 의론(議論)에서 발표를 하고 조처를 베풂에 있어 명백하고 정대하였다. 우뚝하게 서서 나랏일로 염려를 하였으니, 종실(宗室)의 현인으로 공과 같은 자는 옛날 간책(簡策)에서 찾아봐도 또한 드물게 있는 분이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종자(宗子)의 벼리요 간성[維城]이다.” 하였는데, 공과 같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운산군은 서거정이 전에 외람되게 동료로 모셨다고 하여 그 비(碑)의 명(銘)을 요구하므로 의리상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종실(宗室)의 영걸이신 분은 밀성군(密城君)이시며, 사람들이 선(善)을 즐거워하는 것은 (한(漢)나라) 동평왕(東平王)과 같다고들 하네. 종자(宗子)는 나라에 벼리요 간성(干城)이라 함은 주(周)나라를 지키는 정간(楨幹)이 됨을 말함이요, 산하(山河)가 변할 때까지로 철권(鐵券)에 기록한 것은 한(漢)나라가 공신(功臣)과 회맹(會盟)함이네. 종친(宗親)으로나 인망(人望)으로나 덕의(德義)로나 공훈(功勳)으로나 부귀의 성대(盛大)함과 (공명의 현달(顯達)함이) 한 시대에 (으뜸이었고) 공족(公族)의 대표적 인물이었네. 하늘이 어찌 어질지 못해서 갑자기 죽게 하였단 말인가? 태상시(太常寺)에서 시호(諡號)를 주니 효장(孝章)이라 하였네. 공은 이미 끝났으나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을 것이네. 광릉(廣陵)의 서쪽 언덕이 공의 무덤으로 마땅하네. 끊은 듯한 그 언덕의 무덤 앞에 우뚝 세운 그 비석에다 새긴 내가 지은 명(銘) 아첨한 말이 아니니, 오래오래 밝게 전해지리.
국조인물고 이침 출처: 국역 국조인물고
이침 [李琛]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자 문지(文之), 시호 장효(章孝) 효희(孝僖)
출생 - 사망 1430년(세종 12) ~ 1479년(성종 10)
왕자 대표관직(경력) 오위도총부도총관, 도제조, 의금부도위관
조선전기 제4대 세종의 서자인 왕자.
본명은 이침(李琛). 자는 문지(文之). 세종의 다섯째 서자이며, 어머니는 신빈김씨(愼嬪金氏)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7세에 밀성군에 봉해졌으며, 총명과 지혜가 뛰어나 부왕의 남다른 사랑을 받았다. 세조는 밀성군이 언행을 삼가고 조심하며 우애(友愛)가 가장 돈독한 것을 높이 평가하고, 그에게 금군(禁軍)을 맡아 왕실을 호위하도록 하였다. 오위도총부도총관, 각 시(寺)의 도제조, 의금부도위관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468년(예종 즉위년)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각각 책록되었다. 시호는 장효(章孝)이며, 뒤에 효희(孝僖)로 고쳐졌다.
참고문헌
『선원보감(璿源寶鑑)』
『성종실록(成宗實錄)』
『종반행적(宗班行蹟)』
[네이버 지식백과] 밀성군 [密城君]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밀성군(密城君) 조선 세종의 왕자 휘 침(琛)
출생일1430년 사망일1479년 1월 1일 (음력)
부친세종 모친신빈 김씨
밀성군 이침(密城君 李琛, 1430년 ~ 1479년 1월 1일)은 조선 전기의 왕족, 종실이다. 조선 세종의 서5남으로 생모는 신빈 김씨이다. 자는 문지(文之), 시호는 장효(章孝), 효희(孝僖)이며, 본관은 전주이다.[1] 조선 후기의 문신 이극강, 이수록, 이경여, 이민장, 이민적, 이민서 이건명, 이이명, 이관명 이휘지 이헌구 등과 독립운동가 이창호(李昌鎬), 이건호(李建鎬), 이중각(李重珏) 등이 있다.
첫 시호는 장효였다가 뒤에 효희로 시호가 개시되었다.
생애
세종대왕의 서5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청주김씨 김원(金元)과 삭녕고씨의 딸 신빈 김씨이다. 계양군 증 등의 친동생이 된다.
1442년 밀성군에 봉해졌으며[2] 1444년 민승서(閔承序)의 딸과 혼인하였다.[3] 슬하에 운산군(雲山君), 춘성군(春城君), 수안군(遂安君), 석양군(石陽君) 등 4남을 두었다. 1452년 밀성군이 병이 들자 이복형인 문종이 안평대군에게 명하여 승려들을 모아 흥천사에서 기도하게 하자 밀성군의 병이 나았다.[4] 문종은 크게 기뻐하며 밀성군의 처형 두 사람에게 관작을 내리게 하였으며,[4] 내의 전순의(全循義)에게도 안장을 얹은 말을 하사하였다.[5] 1467년(세조 13)에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지냈다.[6] 1468년(조선 예종 즉위년) 11월에 예종으로부터 숙부의 예우를 받게 되었다. 1469년 남이의 옥사 때 익대공신(翊戴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세종대왕의 영릉을 경기도 광주군에서 여주군으로 이장하는데 도제조로 참여하였다. 그해 오위도총부도총관에 임명되었다.
밀성군은 이복동생 중 수춘군(壽春君)을 불쌍히 여겨 남몰래 제사를 지냈다 한다. 그리고 그 뒤에는 밀성군의 셋째아들인 수안군 상이 수춘군의 제사를 봉사하다가 그 후 1691년(숙종 17) 사육신 등이 신원되면서 수춘군도 신원, 복권되면서 수춘군의 봉사손을 정하는데 밀성군 집안에서 제사지낸 사연을 누군가 숙종에게 아뢰어 숙종은 밀성군 후손으로 입계함이 좋을 것 같다 하고 왕명을 내려 수안군을 수춘군의 후계로 삼게 했다 한다. 1469년 성종 즉위 후 1470년(성종 1) 순성경제명량좌리공신에 책록되었다. 그의 장남 운산군은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중종을 옹립한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사후
시신은 경기도 광주군 서부면 초이리 3-4번지(현, 하남시 초이동 307-8번지) 기자산(其自山)에 안장되었다. 하남시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되었다. 바로 시호가 내려져 첫 시호는 장효(章孝)였는데, 뒤에 효희(孝僖)로 개정되었다. 뒤에 그의 묘소 뒷편 언덕에 장남 운산군 계의 묘소가 조성되었다.
평가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 문종, 세조 등의 총애를 받았으며 익대공신 2등, 좌리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사신은 밀성군의 인품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이침(李琛)은 현명하고 분명하여 일을 처리하는 재간이 있어, 세조(世祖)가 재능과 덕량이 있다고 여겼다. 모든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명하여 종실(宗室) 속에 임하게 하여 가장 위임(委任)을 받았으며, 치산(治産)하는 데 부지런하여 가산(家産)이 아주 부유하였다.” 하였다.[1]
가족관계
부 : 세종
모 : 신빈 김씨
형 : 계양군 증(璔)
형 : 의창군 공(玒)
동생 : 익현군 연(璭)
동생 : 영해군 당(瑭)
동생 : 담양군 거(璖)
부인 : 풍덕군부인 여흥 민씨(豊德郡夫人 驪興閔氏) - 판윤(判尹) 증찬성(贈贊成) 민승서(閔承序)의 딸
장남 : 운산군 계(雲山君 誡)
차남 : 춘성군 도효공 당(春城君 悼孝公 譡) → 태조 8번째 왕자 의안대군의 봉사손(奉祀孫) 으로 출계
3남 : 수안군 상(遂安君 言+賞) → 이복 동생인 수춘군에게 출계
4남 : 석양군 격(石陽君 䛿)
각주
1《조선왕조실록》성종 100권, 10년(1479 기해 / 명 성화(成化) 15년) 1월 1일(무오) 1번째기사
2《조선왕조실록》 세종 97권, 24년(1442 임술 / 명 정통(正統) 7년) 7월 3일(신유) 1번째기사
3《조선왕조실록》 세종 105권, 26년(1444 갑자 / 명 정통(正統) 9년) 8월 24일(경오) 5번째기사
4《조선왕조실록》 문종 12권, 2년(1452 임신 / 명 경태(景泰) 3년) 3월 12일(을사) 2번째 기사
5《조선왕조실록》 문종 13권, 2년(1452 임신 / 명 경태(景泰) 3년) 4월 13일(정축) 4번째기사
6《조선왕조실록》 세조 41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1월 2일(기사) 1번째기사
참고 문헌
세종실록
정복규의 성씨칼럼 < 성씨 전문기자 > 의 글에서 일부 발췌
세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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