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 애니메이션 영화감독, 타무라 시게루를 아냐고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고개를 흔들며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고 한다. 이성강 감독이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알아도, 타무라 시게루 감독은 알지 못한다고 한다.
모를 수밖에 없다. 이 감독이 가장 최근에 만든 작품이 1998년 개봉한 ‘고래의 도약(Glassy Ocean)’이니 말이다. 나온지 10년도 더 됐다. 그 후로는 애니메이션 작품 활동이 없었다. 나도 오래전 TV 채널 투니버스(Tooniverse)를 통해 우연히 그의 작품을 접하지 않았더라면, 여태 모르고 살아왔을 것이다.
타무라 시게루 감독의 애니메이션 작품은 단 3개뿐이다. 은하의 물고기, 판타스마고리아, 고래의 도약. 이렇게 말이다. 이 세 작품은 감독은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동화(童話)의 느낌이 배어있다는 것이다. 타무라 시게루 감독은 동화책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했기 때문에, 그 특유의 느낌을 영화에도 고스란히 찾아볼 수 있다. 애니메이션이니까 당연 동화스러워질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라는 생각이 들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뛰어넘은 무언가가 타무라 시게루 감독의 작품에 있다.
그의 작품은 빠르고 공격적인 것을 최대한 지양한다. 정적(靜的). 긴장감 있고 스릴 넘치는 액션은 찾아보려 해도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달리는 동작조차 그의 영화 안에서는 찾기 힘들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움직임이 크지 않고 느릿느릿하다. 그는 영화에 많은 내용을 담지 않는다. 오히려 비운다. 하지만 한 가지, ‘꿈’ 만큼은 꼭 담아낸다. 그렇기에 잔잔하고 여유롭지만 어머니 품 같이 따뜻하고, 털실같이 포근하다. 분명 디지털 기법으로 제작된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자극하는 그 느낌이 정말 좋다.
타무라 시게루의 첫 작품은 ‘은하의 물고기(1993)'로 세계 최초로 HD(고선명) 제작된 애니메이션으로 23분의 짧은 시간동안 신비한 모험 이야기를 들려준다. 스토리는 단순하다. 별을 잡아먹는 물고기(성어) 때문에 하늘의 별자리들이 위험해 진 것을 알아차린 노인과 소년 ‘유리’가 유성으로 만든 작살을 들고 성어를 퇴치하러 가는 이야기이다. 성어를 찾아 가는 여정도 그가 그린 작품 안에서는 꿈결같이 아름답다.
두 번째 작품인 '판타스마고리아(1995)'는 은하의 물고기와는 다르게 구성된 작품이다. 은하의 물고기가 뚜렷한 하나의 스토리를 가지고 진행되었다면, 판타스마고리아는 옴니버스 식으로 구성된, 한 소행성에서 일어나는 일상(총 15개의 에피소드)을 담아낸 작품이다. 이 또한 한국에서 개봉하지 않았다. 검색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해도 제대로 된 정보가 뜨지 않아 블로그나 카페 등에서만 리뷰를 볼 수 있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다. 게다가 화질이 좋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들의 움직임도 뻣뻣하고 부자연스럽다.(DVD를 사서 처음 실행했을 때 그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담겨있는 내용은 가끔씩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고, 흥미로운 것이었다.
판타스마고리아 소행성의 일상은 소박하지만 신비롭다. 무지개를 깎아서 일곱 빛깔 그림물감을 만드는 공장의 이야기, 계절마다 다른 별자리를 하늘에 투영하는 별자리 투영사 이야기, 거대한 전구가 빛나던 날의 이야기 등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판타스마고리아의 일상은 지구와는 상이하게 다른 환경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지만, 보고 있으면 묘하게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비록 처해 있는 상황은 달라도 판타스마고리아 행성 사람들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은 우리 인간들과 별반 다른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한 편의 이야기가 끝날 때 마다 ‘꿈 속의 여정 끝에서 발견한 소행성 판타스마고리아. 이것은 이 별에서 일어나는 소박한 이야기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로 이어지는 나레이터의 차분한 목소리는 끝맺음을 알리면서도 강한 여운을 남겨주고 있다.
세 번째 작품인 '고래의 도약 - Glassy Ocean -(1998)'은 ‘바다는 유리로 되어 있다’라는 전제를 깔고 있는 작품이다. 시간이 현재보다 느리게 간다면, 그리고 바다가 유리(유리도 액체의 일종이라 한다)로 되어있다면, 우리는 바다 위에 서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이런 바다가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이 작품에서 타무라 시게루 감독은 유리로 된 바다의 질감을 생생하게 살려내기 위해 많은 고생을 했다. 투명한 에메랄드 빛 바다의 모습, 그것이 여기에 담겨 있다. 시간이 현재보다 느리게 가는 유리 바다에서 일어난 고래의 도약. 이 모습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고래가 있는 곳으로 모여든다. 모여든 사람들이 고래가 도약하는 장면을 보면서 떠올리는 기억, 추억들이 한 올 한 올 엮어 하나의 큰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이 작품의 특징은 등장하는 인물들의 움직임보다 카메라의 움직임이 더 많다는 것이다. 도약하는 고래를 완벽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카메라를 360도 회전시켜 보여주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하는데, 신비로운 분위기의 음악과 어울리면서 웅장한 느낌을 준다. 지금 보아도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신비롭고도 아름다운 장면이다.
또 ‘고래의 도약’에서는 ‘판타스마고리아’에서 등장했던 ‘유리 바다’와 ‘유성우가 떨어지던 날’ 두 에피소드를 엮어 ‘유리 바다에 별이 떨어지던 날’에 대한 짧은 이야기를 보여 주기도 했다. 화질 면에서 전작인 판타스마고리아보다 훨씬 발전했고, 움직임이나 카메라 시선 처리도 부드러워졌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타무라 시게루 작품들은 한결같이 영상과 음악의 절묘한 어우러짐을 통해 동화같은 이야기를 보여준다. 때때로 공감대를 형성해 주기도 하고, 메말랐던 감성을 적신다. 굳이 논리적으로 따져보거나 분석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보고 난 후의 기분좋은 느낌을 만끽하면 된다.
나는 타무라 시게루 감독의 세 작품을 모두 DVD로 구입했다. 마음에 여유가 없을 때나 힘들고 지칠 때 이 세 편의 애니메이션을 보면 마음이 안정되고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는 현실도피와는 다르다. 그저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서가 아닌, 잠시 동안의 여유를 즐긴 후 다시 현실과 부딪힐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나는 매사를 긍정적으로 밝게 살아 올 수 있었다.(실제로, 중학교 때 비관적인 내 가치관이 긍정적으로 바뀐 것은 타무라 시게루 감독의 ‘고래의 도약‘을 보고 나서였다)
타무라 시게루의 작품은 지친 이들을 쉬게 해 주는 기분 좋은 휴식처가 되어 준다. 우리가 잃어버린 ‘여유’와 ‘감성’을 그의 작품에서 찾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있게 추천해 주겠다. 여유를 찾고 싶다면 타무라 시게루의 작품을 꼭 보라고 말이다.
고래의 도약 OST - 워터피플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