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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안다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2)
사람이 눈병[眼疾]이 났는데, 안질[눈병]이 있는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니까.
허공에 아주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 이것을 空華라고 한다.
그런데 하늘에 꽃이 어떻게 해서 피었을까?
허공에는 본래 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눈병[眼疾]에서 난 것이다.
비피병목(譬彼病目) 견공중화(見空中華) 급제이월(及第二月)이라,
비유하면 눈병이 있는 사람이 공중에 꽃을 보는 것이나 두 개의 달을 보는 것과 같다.
공실무화(空實無花) 병자망집(病者妄執)이라,
허공에는 진실로 꽃이 없으나 눈병이 난 이가 허망하게 집착한다.
그래서 허공은 본래 꽃이 없다. 그런데 그 꽃이 왜 생겼을까? 그것은 자기 눈에서 왔다.
그러면 이 몸에는 생로병사가 있고 고통이 있는데, 이 몸에 고통은 어디서 왔을까?
그것은 법신을 잃어버린 데서 왔다. 법신을 잃어버리니까.
이 몸에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을 그대로 느끼게 된다.
그리고 마음은 망상심(妄想心)만을 마음이라고 하는데 그 망상심은 어디서 왔을까?
기신론(起信論)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홀연념기(忽然念起) 명위무명(名爲無明)이라,
홀연히 한 생각[망념(妄念)]이 일어나서 망상을 가지고 마음이라고 여기니까.
그 참 지혜(智慧)를 잃어버린 데서 이것이 왔다.
그래서 이런 것을 무명이라고 번뇌라고 한다. 그러면 여기서 어떻게 깨달아야 할까?
이런 무명(無明)과 번뇌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 불교인데, 그럼 어떻게 깨달아야 하는가?
‘깨닫는다.’라고 하는 것은 수분각(隨分覺)과 구경각(究竟覺) 이런 것이 있다.
“자기가 자기를 보는 것이다.” 자신이 자기를 보는 게 깨닫는 것이다.
또 ‘깨닫는다.’라고 하는 것은 “자기 집에서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한다.
☞ 수분각(隨分覺) ; 불법을 듣고 무명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는 네 단계
[凡夫覺=不覺, 相似覺, 隨分覺, 究竟覺] 중 셋째 단계.
모든 법이 다 마음속에 있음을 깨닫고 진여의 법신을 하나씩 하나씩 깨달아 가는 단계를 이르는 말이다.
자기 집에서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깨닫는다.’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 눈이 자기 눈을 보는 것이다.” 내 눈이 내 눈을 보려면 어떻게 하면 볼 수 있을까?
자기 눈을 가지고 다른 것은 다 볼 수 있는데, 자기 눈이 자기 눈을 본다는 것이다. 이게 깨닫는 것이다.
내가 나를 보는 것, 내 집에서 내 집으로 가는 것, 자기 집에서 자기 집으로 가는 것이다.
그리고 눈이 눈을 보는 것이다.
가르침이 참 묘하다. 그러면 이런 것을 깨달음이라고 한다.
크게 보면 그렇고, 과정으로 보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뜻이 있는데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의 육조대사 구결(口訣)에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강의유이 일자외각 관제법공(覺義有二 一者外覺 觀諸法空)이라, 깨달음의 뜻이 둘이 있다.
첫째는 外覺인데, 밖으로 깨닫는 것이다. 그러면 밖으로 어떻게 깨달을까?
관제법공(觀諸法空), 제법(諸法)이 공(空) 함을 보는 것인데 그게 깨닫는 것이다.
밖으로 깨달음이 있으면 일체만물이 공상(空相)이다. 공상이라고 하는 것은 불생불멸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觀諸法空, 諸法이 空 함을 보는 것이다. 이게 외각(外覺) 밖으로 깨닫는 것이다.
또 내각(內覺) 안으로 깨닫는 것이 있다. 안으로 깨닫는 것은 무엇일까?
이자내각 지심공적(二者內覺 知心空寂)이라, 마음이 공적 함을 아는 것이다.
그런데 밖으로 空 함을 본다고 하는데, 다 空 한데, 하나 空 하지 않는 것이 있다.
‘空 하다’고 보는 마음은 있다. 이것은 空이 아니다.
그러니까. 外覺만 가지고는 ‘○○도 不生不滅’이고 ‘○○도 不生不滅’이고
‘○○도 空’이라고 해봐도 그 ‘空’이라고 하는 생각 하나는 남아 있다.
공부하고, 수행하고, 기도하고, 정진하는 사람도 전부 밖으로 空 함을 아는데 여기에 떨어져서 큰일 난다.
다 여기에 걸려 있다. 不生不滅이라고 하는데,
그 不生不滅이라고 하는 마음이 떡 남아 있으면 한 생각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生滅이다.
그러면 거기서 더 들어가서 內覺을 해야 하는데, 內覺은 안으로 깨닫는 것이다.
그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까지도 空 함을 알아야 한다. 知心空寂, 마음이 空寂 함을 아는 것이 內이다.
이게 깨달음의 단계이다. 그리고 기신론같은 데서는 본래한 생각이 일어나는 그 무명심(無明心)
이게 미세망념(微細妄念)인데, 미세망념을 살피니까. 깨치니까. 더는 미세망념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아주 미세한 그 무명 망상까지 멀리, 멀리 다 여의어서 미세망념을 다 여의어서
득견심성 본래망상(得見心性 本來妄想)을 일으키기 이전에 그 참마음,
본래의 마음을 본다. 이게 깨닫는 것이다.
망상을 일으켰으니까. 그 망상 첫째 망상은 밖으로 모든 색성향미촉법과 좋게 보이고,
나쁘게 보이고, 좋지도 나쁘지도 않게 보이는 걸 구하러 가는 게 망상이다.
그러다가 어느 한순간 “아 이렇게 해서는 끝이 없구나.” 안으로 자기 청정본심(淸淨本心)을 찾아가야겠다.
이렇게 해서 밖으로 욕심을 내던 그 망상이 안으로 참마음을 찾으러 들어간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망상인데, 이미 일어난 업이 있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청정본심(淸淨本心)을 찾아서 가는데, 그것이 수행(修行)이다.
그러다가 청정본심과 딱 마주칠 때가 있다. 이것을 등각(等覺)이라고 한다.
거의 청정본심하고 같아진다고 해서 등각(等覺)이라고 한다.
그러면 청정본심과 그 망상이 하나가 된다. 이게 득견심성(得見心性) 심성(心性)을 본다.
그래서 이것을 구경각(究竟覺: 보살의 수행이 원만하여 궁극적이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는 경지)이라고 한다.
깨닫기 전에는 깨달으려고 하는 마음이 있고, 그 번뇌 없는 마음을 얻으려고 하는 뜻이 있었는데,
나중에 가면 망상도 없어지고, 번뇌도 없어지고, 본심이라고 할 것도 따로 없는, 그냥 하나가 된다.
이것을 묘각(妙覺)이라고 하고 구경각(究竟覺)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원각경(圓覺經)에서는 비유로 말하기를, 조금 유쾌한 비유는 아니다.
사람이 자기 목을 자기가 매어서 죽을 때,
처음에는 자기 손으로 자기 목을 매니까. 목을 매는 손이 다르고, 매어지는 목이 다르다.
그게 오래되면 숨이 다 한[盡]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요? 손도 없고 목도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이렇게 하라고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비유가 그렇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자기 손도 있고, 목도 있었다. 목은 매어지고, 손은 매니까. 목과 손이 다르다.
숨이 다 한[盡] 다음에는 손도 없고 목도 그냥 없어진다.
그래서 깨닫기 전에는 번뇌심(煩惱心)이 있고, 청정심(淸淨心)이 있는데,
깨달은 다음에 淸淨心을 본 다음에는 煩惱心과 淸淨心이 없다.
이것을 심체이념(心體離念) 그 마음에서 망념을 여윈 게 깨달음이다. 이렇게 이야기한다.
청정도인(淸淨道人)은 번뇌(煩惱)이니 지혜(智慧)이니 이런 구분이 없다.
청정도인(淸淨道人)은 무슨 수행(修行)이다. 修行이 아니다. 구분이 없다.
그래서 도인에게 큰마음 먹고 “도(道) 닦으러 왔습니다.” 그러면
도인이 볼 때는 아주 이상하고 새삼스럽다.
“이 사람아 도는 왜 닦으려고 하는가?” 도를 닦으려고 하는 마음이 흉악(凶惡)한 망상이다.
그러면 도인은 “멀쩡한 날에 도를 닦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게 구경각(究竟覺)이라고 하는 것이 이런 경지이다. 그래서 이런 것을 마치 이런 것이다.
‘사람이 자기 눈을 볼 수 없다.’라고 해서 자기 눈을 보려고 한다면
불견자안 갱욕구견(不見自眼 更欲求見), 자기 눈을 보지 못하고 다시 보려고 하면,
기시자안 여하갱견(旣是自眼 如何更見), 이미 자기 눈인데, 어찌 다시 또 자기 눈을 볼 수가 있겠는가?
내가 내 눈을 본다고 하는데, 이게 妄想이다. 이미 내 눈인데, 어떻게 내 눈을 보겠는가?
그러면 무엇인가? 약지부실 즉위견안(若知不失 卽爲見眼), 눈을 잃지 않는 줄 알았으면 곧 눈을 본 것이다.
만약 자기 눈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면 이것이 바로 자기 눈을 본 것이다.
내가 내 눈을 보는 방법은 내가 내 눈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눈을 잃어버린 사실이 없다.’
이것을 아는 것이 바로 자기의 눈을 본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모든 것을 보는 것은 전부 자기 눈을 보는 것이다.
이게 조금 어려운 이야기인데, 지금은 몰라도 앞으로 알 사람이 있으니까. 걱정할 것은 없다.
그러면 내가 내 눈을 보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미 내 눈인데, 또 무엇을 본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무엇인가?
지금까지 ‘내 눈을 잃어버린 사실이 없다.’라는 것을 알면, 그게 바로 내 눈을 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늘을 보는 것도 바로 그게 내 눈이고, 땅을 보는 것도 내 눈이고, 모든 것이 내 눈이다.
이게 자기 눈을 보는 방법이다. 그래서 내가 내 마음을 찾는다.
이러니까. 이미 내 마음인데, 어디 가서 찾는다는 것인가?
‘내 마음이 전혀 달라짐이 없다.’라고 하는 것을 안다면 그게 바로 내 마음을 보는 것이다.
이렇게 알고 나면 ‘하늘도 내 마음이고, 땅도 내 마음이고, 사람도 내 마음이고, 내 눈으로 본다.
라고 하는 것을 알고 나면 모든 것을 보는 것은 내 눈이고,
그렇듯이 ‘내 마음으로 모든 것을 다한다.’라고 하는 것을 알고 나면 일체가 내 마음이다.
이것을 견성(見性), 깨달음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말씀은 보조국사 수심결에 있는 법문인데,
이렇게 말씀하셨다.
기시자심 하갱구회(旣是自心 何更求會),
이미 자기의 마음이니, 어찌 다시 자기 마음을 알기를 구하겠는가?
이미 다 자기 마음이다. 마음을 찾는 것도 내 마음이고, 생각하는 것도 내 마음이다.
그래서 깨달음의 경지는 망상(妄想)과 진심(眞心)이 다 없어지는 것이다.
망상도 없고 진심도 없고 다 없어지는 것이다. 비유로 말하면 손도 목도 다 없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완전하게 죽는 것이다. 설 죽으면 아주 고약해진다. 죽으려면 아주 푹 죽어야 한다.
설 죽으면, ‘나 죽겠네.’ ‘나 죽겠네.’ 이것은 안 죽은 것이다. 그러니까. 道도 마찬가지다.
닦으려면 푹 닦아야지, 마음이 空 한 줄을 모른다든지, 겨우 色이 空 한 것만 안다든지,
이 생각[思]을 일으키는 걸 가지고 道 삼는 것이 아주 어설픈 것이다.
道라고 하는 건 생각[思]을 일으키는 것이 道가 아니다.
망념을 여의어서 진심도 망심도 없는 그 경지를 구경지(究竟覺)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것을 경책하는 것이다.
이미 자기 눈인데, 어찌 다시 보기를 바라겠는가? 하는 것처럼 이미 자기 마음인데,
어찌 다시 자기 마음을 알려고 하겠는가?
약욕구회 변회부득(若欲求會 便會不得), 만약 자기 마음을 알려고 한다면 곧 알 수가 없다.
그러면 참으로 자기 마음을 안다고 하는 건 어떤 것인가?
단지불회 시즉견성(但知不會 是卽見性),
다만 내 마음은 내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견성(見性)이다.
이것이 자기 심성(心性)을 보는 것이다.
이것이 보조 지눌(普照 知訥) 스님의 유명한 법문이다.
내가 내 마음을 아는 것은 단지불회(但知不會) 내 마음은 내가 알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알지 못하는 것인 줄을 아는 것, 자꾸 내 마음을 알려고 하면 이것은 내 마음을 모르는 것이다.
내 마음은 내가 알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을 아는 그것이 見性이다. 내 눈은 내가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아는 그것이 자기 눈을 본 것이다.
내가 내 눈[眼]을 보는 방법은 내 눈이 없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 그것이 내 눈을 보는 것이다.
이렇게 알고 나면, 나무도 내가 내 눈으로 보고, 눈이 본 것이다.
사람을 보는 것도 사람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눈[眼]이 본 것이다.
그래서 내 마음도 이미 내 마음인데, 내가 어찌 내 마음을 또 알겠는가?
내 마음은 내가 알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는 걸 확실히 아는 그것이 見性이다.
이것이 단지불회 시즉견성(但知不會 是卽見性)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앞의 말은 다 빼고 선방이나 도인들은 뒤의 두 구절만 사용하는데,
다만 알지 못할 줄 아는 그것이 견성(見性)이다.
이렇게 알지 못할 줄을 알아야 하는데, 자꾸 알 줄만 아는 것이다. 모를 줄을 모른다.
즉 마음을 드러내서 무엇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마음을 가라앉히면 다 해결되는데, 한 생각을 일으키면 해결이 안 된다.
그것을 無明이라고 한다. 모든 문제는 마음 한 번 일어난 데서 다 일어났고,
모든 문제의 해결은 마음 한 번 가라앉히는 데서 사라진다. 그래서 다만 모를 줄을 아는 그것이 見性이다.
깨달음이 이렇게 쉽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알아내는 것이 절대 아니다.
망상(妄想)을 쉬는 그것이 깨달음이다. 쉬면 밝아진다. 못 쉬면 어두워진다.
이것이 도(道)이다. 쉬면 밝아지는데, 못 쉬면 어두워진다.
그래서 생각이 앞을 가려서 어둡지, 생각이 푹 쉬면 밝고 환해진다.
이것이 자기가 자기 눈을 보는 것과 같다. 내가 나를 보는 것과 같다.
내 집에서 내 집에 가는 것과 같다. 내 집에서 내 집으로 가려면 어떻게 하는가?
간다는 생각 하지 말고 자기 집을 아름답게 꾸미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부지런히 공덕만 지으면 된다는 것이다.
중국의 규봉밀(圭峰密) 선사라고 하는 스님이 있었는데, 그분이 법문하신 내용이 있다.
원각경(圓覺經) 대소권(大疏券)4. 속장 14. 267上 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단괴공리유화(但怪空裏有華) 불각안중유예(不覺眼中有翳),
다만 허공속의 꽃이 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자기 눈 속에 백태(白苔)가 끼는 병[疾]이 있는 것은 깨닫지 못한다.
참 무서운 법문이다.
눈 병난 사람이 허공에 꽃이 있는 것만 이상하게 생각하고 자기 눈 속에 병이 있는 것은 깨닫지 못한다.
외혐신심고뇌(外嫌身心苦惱) 불지내축미정(不知內畜迷情),
밖으로 몸과 마음에 고통이 있는 것은 싫어하고, 안으로 어리석은 생각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밖으로 허공의 꽃이 보이는 것은 눈병[眼疾] 온 것이고,
또 고통이 오는 것은 자기 어리석은 생각에서 오는 것인데,
이것을 깨닫는 것이 하나하나 깨달아 가는 것이고, 이 망상이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 구경각(究竟覺)이다.
- 종범 스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