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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0일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마태오 19,23-30
100배가 주어진다고 믿는 곳이 천국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늘 나라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십니다.
즉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반면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하늘 나라는 행복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하늘 나라의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부자들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신학생 때 2주간 행려자들을 위한 서울에 있는 한 무료 급식소에서 봉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무료 급식소라고는 하지만 돈을 200원씩 받았습니다. 없는 사람은 안 내도 되지만 아예 받지 않으면 행려자들의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입니다.
가끔 식사 후에 그들끼리 밖에 나가 싸웁니다. 제가 있을 때의 싸움은 신문지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들에겐 이불 역할을 하는 그런 신문지가 전 재산입니다.
한 노숙자는 신문지를 많이 가지고 있었고 한 사람은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 없는 사람이 많은 사람 것을 하나 슬쩍 한 것입니다.
저는 ‘과연 그들이 가난한 사람인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답은 ‘아니다’였습니다.
그들은 부자였습니다.
욕심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왜 욕심이 많을까요?
자신이 내어주는 것이 100배로 돌아옴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늘 나라는 내가 어느 환경에 있는지에 대한 믿음으로 결정됩니다.
같은 아이라도 고아가 있고 부모가 있는 자녀가 있습니다.
고아는 이 세상에서 자기 것을 내어놓아도 100배로 돌아온다고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녀는 부모에게 조금만 효도해도 100배로 돌아온다고 믿습니다.
부모가 있어도 가난할 수 있지만 그 아이는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고, 좋은 고아원에 있어도 100배의 보상을 믿지 않는 아이는 그 집착 때문에 지옥에 삽니다.
사실 그런 아이는 가진 것마저 빼앗깁니다.
우리는 이솝 우화의 ‘개와 그림자’를 잘 압니다.
한 마리의 개가 고기를 물고 가다가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물에 비친 고기가 더 크다고 착각합니다. 욕심을 부린 개는 물속의 고기를 차지하려다 결국 자신이 물고 있던 고기를 떨어뜨려 잃어버리고 맙니다.
만약 100배로 돌려주는 세상이라고 믿으면 ‘불쌍하면 내가 주려고 했는데 이미 먹을 것이 있으니 줄 필요가 없겠네!’라고 하며 자신의 것을 잃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하늘 나라로 사는 사람의 마음을 살펴봅시다.
워런 버핏은 2011년 포춘지 9월호에 ‘나의 기부 서약’을 실었습니다.
여기에 그가 내어놓는 무엇이든 100배로 돌려받는다는 믿음이 숨어있습니다.
“저는 재산의 99%를 자선단체에 기부하겠습니다.
규모로 보면 큰 액수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매일 같이 저보다 많은 기부를 하고 있습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교회나 기타 기관에 기부금을 내고 있습니다.
제 주식의 1% 이상을 저희를 위해 사용한다 해도 저희는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지도 더 편안해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부한 나머지 99%는 다른 이들의 건강과 복지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제 가족이 걸어갈 길은 명확합니다.
저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만 취하고 나머지는 사회의 필요를 위해 나누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보상을 믿는 사람들이 나눌 줄도 압니다.
그런데 정말 저렇게 많은 복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워런 버핏이 가진 돈의 1%를 가진 사람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1%도 조 단위의 액수이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많게 되는 이유는 이미 지옥에 살기 때문입니다.
제가 유학 가서 말도 못 할 때 그 상황이 지옥 같으니 계속 내 것만 찾고 있었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일부러라도 빼앗으려고 하십니다. 그리고 정말 100배가 주어지는지 보게 될 때 그 사람은 앞으로도 천국에 살 수 있습니다.
‘약속’이란 영화에서 박신양이 술에 취하여 노숙자의 가방을 빼앗으려고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노숙자는 자신의 전 재산인 가방을 필사적으로 움켜쥐지만 결국 빼앗기고 맙니다.
가방을 털어보니 신문지와 더러운 옷 몇 벌만 들어있습니다.
주인공은 웃으며 가방과 나머지 것들을 그의 앞에서 엎어버리고 대신 행려자에게 수표를 한 장 줍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이 보따리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아? 먹다 남은 사과, 가자 부스러기, 곰팡이 쓴 떡, 순 못 먹는 것들만 잔뜩 싸가지고 맨날 얻어먹으면서 지 것 빼길까봐 보따리 꼭 끌어안고 사는….
내가 거지야. 희주는 어떤지 알아? 나한테 주기만 해. 나만 쳐다봐. 절벽 꼭대기에서 눈 꼭 감고 그냥 자기를 내던지는 거야! 이런 사랑 받아봤어?”
주님을 이렇게 억지로라도 빼앗으려고 하십니다. 그래야 당신께서 더 큰 것을 주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신학생이 되거나 수녀원에 들어가면 바로 100배로 받는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많은 부모님이 생기고 많은 자녀가 생기며 많은 집이 생기고 죽기까지 돈 걱정은 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단지 내가 별거 아닌 것을 바쳤다는 이유 하나로. 그리고 그분은 대신 “모든 것”을 내어주십니다.
이것을 느끼며 사는 동안은 이 세상에서부터 천국을 살게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20일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복음: 마태 19,23-30
베르나르도야? 너 여기 무엇 하러 왔느냐?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성인은 12세기를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당시 그의 역할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12세기를 자신의 두 어깨에 짊어졌다.”라는 말까지 돌 정도였습니다.
베르나르도의 지혜와 경륜은 하늘을 찔렀는데 당대 교황님들을 비롯해 많은 왕들이 그에게 조언과 상담을 청했습니다.
단 한번이라도 그를 만나 본 사람들은 ‘사람의 모습을 한 천사’라며 우러러 보았습니다.
동시에 베르나르도는 가톨릭 신앙의 옹호자, 수도생활 쇄신의 선구자, 교회 분열을 저지하는 든든한 보루, 탁월한 성서학자, 위대한 명 설교자, 그러면서도 겸손한 수도자로서의 삶을 동시에 살아갔습니다.
그는 ‘가톨릭교회의 마지막 교부’ 또는 ‘꿀과 같은 혀를 가진 박사’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1090년 프랑스 귀족 가문의 촉망받는 자녀로 태어난 베르나르도는 다정다감하고 신앙심 깊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22살의 나이에 시토회에 입회해서 수도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출중한 인품과 지도력, 그리고 놀라운 언변과 감수성의 소유자였습니다.
입회하기 전 그는 여러 형제들과 친구들을 영적으로 잘 지도하고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30명이나 되는 동료들을 하나로 모았고 의기투합한 그들은 당시 개혁파 수도원으로 ‘뜨고 있던’ 시토회에 동반 입회를 하게 됩니다.
초기 양성 기간을 마친 베르나르도는 장상의 지시에 따라 동료 수도자 12명과 함께 그 유명한 클레르보 계곡으로 내려갑니다.
척박한 황무지였던 클레르보에 작고 소박한 수도원을 건립한 베르나르도는 오랜 기간 동안
철저한 고행과 단식, 집필과 일에 전념합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았고, 숨을 쉬었으며, 또 그 결실을 형제들과 나누었습니다.
점차 클레르보는 수도생활 개혁의 원천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메마른 골짜기였던 클레르보는 점차 빛과 생명의 계곡, 기쁨과 구원의 골짜기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베르나르도의 성덕에 감화를 받고 클레르보로 몰려왔습니다.
베르나르도는 가톨릭교회 쇄신에 대한 강한 열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병약한 몸을 이끌고 교회의 개혁을 위해 목숨을 바쳐 헌신했습니다.
교황청의 폐단과 고위성직자들의 세속화를 신랄하게 경고했습니다.
교회 당국으로 부터 공인받은 순회 설교자로서 수많은 지역을 다니며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했습니다.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난 베르나르도는 스스로에게 그 유명한 질문 한 가지를 던졌습니다.
“베르나르도야? 너 여기 무엇 하러 왔느냐?”
그가 남겨준 수도자로서의 모범을 바라보며 같은 수도자로서 큰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는 교도권으로부터 부탁받은 중요한 임무를 완수하는 즉시 고향 집으로 달려가듯이 부지런히 클레르보로 돌아와 평범한 수도자로서의 삶을 계속했습니다.
그가 수도원으로 돌아올 때는 절대 혼자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누군가를 데리고 왔는데 그의 삶에 매료된 나머지 수도 생활을 선택한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강론>
(2024. 8. 20. 화)(마태 19,23-30)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회개하면, 낙타도 바늘구멍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때에 베드로가 그 말씀을
받아 예수님께 물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그리고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태 19,23-30)”
1) 여기서 ‘부자’는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재물을 섬기는 사람들과 하느님을 섬기면서도 재물에 대한 애착심이 너무 커서 마음이 재물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사람들을 모두 가리킵니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라는 말씀은,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 라는 뜻입니다.
<‘어렵다.’가 아니라 ‘불가능하다.’입니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란 것은 그들도 그때까지는 당시의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부유함’을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복’으로 생각했는데,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복을 많이 내려 주신 사람들도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면, 누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인가?” 라는 뜻입니다.
2)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라는 말씀은, “부유하든지 가난하든지 간에 사람의 힘만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원래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이 그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다.” 라는 뜻입니다.
들어오라고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사람들만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면서, 하느님께 자비를 간청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자격을 충분히 갖추었는데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셔서 못 들어가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라고 걱정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지극히 공정하신 분이기 때문에, 억울하다고 하소연할 일도 없을 것이고, 부당하다고 항의할 일도 없을 것입니다.
<각자 뿌린 대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3)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 라는 말씀은, 부자인 채로는 못 들어간다는 뜻이고,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곧 ‘회개’입니다.
부자들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재물을 섬기던 생활을 버리고 하느님만 섬기면, 그렇게 해서 하느님께서 그 회개와 변화를 인정해 주시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4)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라는 말을 ‘낙타와 바늘구멍’에 관한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저희는 바늘구멍을 빠져나갈 수 있습니까?”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의 말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버렸음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이는 말인데, 예수님의 답변은 당신을 따른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나를 따른 너희도” 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모든 것을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신앙인이(제자가)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은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버림’보다 ‘따름’이 먼저입니다.
만일에 버리기만 하고 따르지 않는다면, 반대로, 따르면서도 버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모두 헛일이 될 뿐입니다.>
5)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열두 옥좌’는, 군림하고 세도를 부리는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자리’입니다(마태 20,26).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재림하신 예수님의 통치권에 참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사도들도 심판관이 될 것이라는 말씀으로, 또는 사도들에게 어떤 특별한 지위나 권한이 생긴다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통치권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사도들’로만 한정하지 않고 ‘성도들’로(신앙인들로) 확대해서 표현했습니다.
“여러분은 성도들이 이 세상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1코린 6,2ㄱ)”>
‘백배’ 라는 말은, 풍성하고 충만한 은총을 상징합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지상에서의 처지와 하느님 나라에서의 처지가 역전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