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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식에게 듣는다---충주 석종사 혜국 스님
유체이탈(有體離脫)을 체험하다
산비탈에서 뒤로 나뒹굴면서 속으로 ‘사람 살려!’ ‘사람 살려!’ 하는데 조금 있으니까 편안해요.
그 다음에는 의식이 끊긴 것 같은데……. 얼마나 지났는지……
내가 제주도에 계신 어머니를 찾아 갔더라고요. 얘기가 좀 그런데 ……
부처님을 찾아뵈어야 하는데 어머니를 찾아간 거예요. 어머니는 제주도에 살았지요.
나는 태백산 암자인데 …… 정말 영혼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없이 생생한 현실로 보여졌어요.
진짜로 간 걸로 생각했어요.
“어머님! 저 왔습니다”
하니까 그 전에는 내가 왔다고 하면 난리가 나는데 그 때는 쳐다보지도 않아요.
아들이 행방불명 됐다며 절에 불공하러 간다고 쌀을 고르고 계셨어요.
“어머니 저 왔습니다.”
쳐다보지도 않고 쌀만 골라요. 그래서 ‘이상하다 별일 다 있네’ 싶었어요.
그 다음 생각에 ‘송암 스님한테나 가버려야지’했어요. 성철 스님한테도 안 가고 우리 스님한테도 안 가고…….
- 그 순간에요?
네. 송암 스님한테나 갔다오자 싶었어요. 송암 스님이 전라도 광양 백운암에 사실 때예요.
거기 가보니까 앉아서 참선하고 있더라고요.
“스님! 혜국이 왔습니다” 하니까 노장이 들은 척도 안 해요.
그러다가 저승으로 갔어요. 우여곡절을 거쳐서 간 저승에서는 “내 명이 다 안되었다.”고 하더라고요.
돌아가야 된다며 뭘 따라가라고 해서 따라 나오다가 다리에 오르는데 다리가 끊어져 버렸어요.
그래 가지고 ‘집에 가야지’했죠. 집이라는 게 태백산 도솔암이에요.
도솔암을 걸어 올라가는데 한도근 처사하고 김 처사라는 심마니를 만났어요.
당시 이 심마니 처사님들이 태백산 도솔암 근처에 산삼 캐러왔다가 내 시신을 발견한 거예요.
한도근 처사가 지금 원일 스님 친아버지예요.
머리가 길고 다 떨어진 누더기를 입고 엎어졌는데 처음에는 동삼으로 봤대요.
산삼이 오래된 걸 동삼이라고 하는데 동삼이 오래 되면 사람이 되어서 자고 그런대요. 다 그렇게 믿어요.
동삼 하나 얻으면 팔자 고친대요. 거기에 간단히 차려놓고 절을 하고 그랬대요.
‘어서 동삼으로 돌아가시소. 우리 정성이 모자란 모양인데 삼의 모습을 보여주시오’하고 빌었대요.
두 시간이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어 자세히 보니까 피가 보글보글 끓고 있더래요.
그 때는 사람들이 나를 혜국 스님이라고 안 부르고 도솔암에 오래 산다고 ‘도솔 스님’이라고 그랬어요.
“도솔 스님이다! 도솔 스님 죽었다”하고는 나를 엎고 뛸 때 나와 마주친 거예요.
제가 한 처사에게 “이 스님이 누구냐?”, “어떻게 나하고 같이 생길 수가 있느냐?”하고 물었어요.
들은 척도 안하고 내려가길래 나도 따라 내려갔어요.
도솔암 아래 황평에 그분 딸 집이 있는데 거기에 눕혀 놓자 동네 사람들이 몰려 들었어요.
숟가락으로 쌀뜨물을 먹이는 한 처사에게 “이 스님이 누구냐?”고 아무리 물어도 듣지를 못해요.
- 계속 따라가신 거네요?
따라갔지요. 황평에 가서 그 스님 얼굴을 보며
“스님! 어떻게 나하고 닮을 수가 있소? 손가락 없는 것까지 닮았소.”하는데 그 때 혼이 쏙 들어간 거예요.
눈을 뜨면서 첫 마디가 “아까 그 스님 어디 있느냐?”고 하니까
“스님 없었습니다. 스님 혼자였습니다” 그래요. 그래도 내가 자꾸 스님을 찾으니까
“스님이 잘못 됐구나! 정신이 이상해졌구나!”하며 다 걱정을 하더라고요.
그 때 ‘아, 이 몸이 내가 아니구나’ 싶고 성철 스님께 죽비로 “보이나?” 하시던 그 때처럼 전율이 일어나요.
‘영혼이 돌아다니다가 왔구나, 진짜 내가 아니구나’ 그리고 일어나서 다시 도솔암으로 향했어요.
도솔암에 올라와서 발우를 보면서 성철 스님께 큰절 삼배를 올리고
‘제가 오늘부터 발우를 잘 올려놓을 겁니다’했지요.
‘이제 정말, 이 몸은 내가 아니다, 죽어도 전혀 말 안 할 거니까 내 몸 누구한테 주고
팔고 싶으면 진짜로 마음대로 하라고 하이소!’ 했습니다.
그래도 졸음은 마찬가지예요. 또 잠이 오는 거예요. 진짜 죽겠어요. 좌절이 오는 거예요.
그러면서 또 몇 달 지나고 정말 죽을 각오를 하고 그렇게 해 나가는데
중간에 그런 일을 당하고 나서 공부는 되더라고요.
이 몸이 내가 아니라는 걸 ‘어째서……’ 하고 화두를 잡고 앉아 있으면
그 전에 “내가 글을 볼 걸 잘못했나’하는 잡념도 없어지고,
‘성철 스님이 ‘보이나?’ 할 때 지금 들었으면 달려들 수도 있을건데, 영혼이 보는 건데’ 그런 생각을 한 거지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그게 아니에요. 더 얻어터질 뻔 했어요.
철야 정진 끝에 경계를 체험하고 성철 스님과 문답하다
그 놈이 보고, 그 놈이 돌아다니는 건데 공부는 되기 시작한 거예요. 신심이 난 거예요.
“이 몸은 내가 아니다 정말로 중 노릇을 잘 해봐야지’ 하고
‘어째서, 어째서……’ 하며 몇 시간 시간이 지나갈 때가 있어요.
그러다 보니 자신이 서는데 그러다가 또 좌절이 오는 거예요.
졸고 또 졸고 하다가 어느 날 저녁에 다짐을 하고 올려놨는데 눈을 뜨니 해가 뜨고 있더라고요.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벌떡 일어났는데 그 때 물이 와장창 했어요.
그 와장창하는 소리에 찰나간에 내가 없어져 버리더라구요. 거기에서 뭔가 달라진 거예요.
이제 됐구나! 그 길로 달려 나와서 온 산을 헤매고 다녔어요.
- 이제 됐다고요?
다람쥐가 도망가는데
“이놈아, 도망다니는 바로 너도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그러면서 그 길로 도솔암을 뛰쳐나온 거예요.
태백산을 나와 역시 해인사 성철 스님께 제일 먼저 갔어요.
가니까 그 때 성철 스님이 백련암에 올라가 계셨어요. 원명 스님이 시좌를 봤을 때에요.
그 때가 1973년쯤 될 거예요.
“스님! 일 다 해 마치고 왔습니다.”
“뭐, 니가 깨달았다고? 어흥, 이 소리가 어디에서 나왔노?”
“스님! 그 소리 가지고 몇 명이나 속여 먹였습니까? 거기에 속을 줄 압니까?”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고 한데 너는 어디에서 주워왔나?”
“스님! 그런 거 가지고 속이려고 하지 말고 스님 살림살이를 내보이십시오.”
“덕산탁발화(德山托鉢話)를 일러라” 하는데 막히데요.
‘덕산탁발화’를 말하면서 ‘일러라’ 하는데 막혀서 멍하고 있으니까
“아나?”
“스님! 환한데 모르겠습니다.”
“짜쓱이 양심은 있구나. 환한데 몰라? 환하다는 소리는 빼! 어디 가지 말고 여기에 있어. 3년은 더 해야 돼!”
하시고는 영각을 비우라고 하시더군요.
- 3년을 더 하라고요?
“3년은 더 해야 돼! 3년 동안 나가지 마라!”고 하시대요.
그래서 있어 볼까 했는데 지금도 살아 계시는 스님인데 어떤 스님이
“스님이 여기 있으면 입장이 곤란해진다. 수좌들이 내놓으라고 할 때마다 내놔야 하니까 나가 줬으면 좋겠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사실 나가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거든요. 다른 선지식을 만나서 확인받고 싶었던 거지요.
경봉 스님과 문답하다
- 성철 스님께서 3년간 있으라고 한 건 뜻이 있는 말씀 일텐데요.
그 어른만 그런 게 아니라 경봉 스님도 그러시더라고요.
백련암을 내려와 그 길로 통도사 극락암으로 경봉 스님에게 쫓아갔어요.
극락암에 가니까 대중들이 산행을 갔고 송암 스님만 시자 소임을 맡아 계시더라고요. 경봉 스님은 누워 계셨어요
“뭐, 혜국이 깨달았어? 손 내봐라”
손을 내놓으니까 ‘탁!’ 때리고는
“이 소리가 네 손에서 났느냐, 내 손에서 났느냐?”
“아이고, 어린애 달래는 소리 하지 마시고 스님 살림살이나 내놓으십시오.”
“육자 선지식을 이르라” 그러셨어요
내가 바로 “무자 소식을 일러라” 하니까 노장님이 벌떡 일어나더니 제 멱살을 잡고 흔들어 대요.
“여사미거에 마사도래라 일러라” 하는데 막히대요.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막힐 수밖에……. 정확해요.
법신변사(法身邊事)에서 깨달으면 법신변사는 환한데 향상구에서는 막혀요. 법칙이에요.
역도를 100㎏ 드는 사람은 130㎏은 못 들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는 경봉 스님이 “수좌! 내가 오 처사 나가라고 할테니 1,000일만 살아. 3년만 살아라.” 하셨어요.
송광사 구산 스님과의 법연
그런데 그 말을 듣고도 또 송광사 구산 스님께로 간 거예요. 구산 스님께서는,
“저 앞산에 바위가 눈이 열렸구나. 눈 열린 소식을 일러라.”
“눈 열린 소식 이르라고 하는 사람에게 물으십시오.”
그리고는 노장님이 원을 그려놓고 한 가지 더 물었는데 그건 바로 답을 했는가 봐요.
노장님도 “여사미거에 마사도래라” 똑같은 걸 물어보는 거예요.
왜 똑같은 말을 물어보느냐고 그러니까 노장님이 중간에 말을 잘 못했어요.
제가 “스님! 귀 좀 빌려 주십시오. 어떻게 모든 사람이 들으라고 말합니까?” 하니
노장님이 귀를 내미는데 제가 올려 부쳤어요.
- 구산 스님한테요?
“미친 놈!” 하시는데 나는 냅다 뛰어나왔어요. 모르는 건 모르는데도 기분이 좋았어요.
혼자 기분이 좋아 전국을 그렇게 돌아다녔어요.
나무 아래에서도 자고 저 멀리 불영사 계곡으로까지 돌아다녔어요.
그런데 그 직후 구산 스님께서 나를 그렇게 찾았답니다. 그 양반은 기회를 안 놓친 거예요.
그러나 저러나 난 그렇게 돌아다니다 보니 점점 환했던 것이 희미해져 가요.
머리는 이만큼 긴 채로 누더기를 걸치고 미친 놈이지. 그래도 좋아서 제주도까지 가서 거기에서 머리카락을 깎았어요.
그런데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도인 취급을 해요.
그래서 다시 도솔암으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그 때까지는 내가 생각해도 좀 잘 살았다 싶었는데,
그 뒤부터 들락날락하고 다시 공부는 안 되더라고요. 그저 앉으면 휙 시간이 지나가리라 생각했는데 안돼요.
자신만만하고 다른 사람 식이 보이고, 모든 것이 훤했던 것이 희미해져 가요.
확실히 그 때 봤던 산이 산이 아니고 물이 물이 아닌 그 세계는 분명하고,
‘야! 이걸 진짜로 다시 해봐야 되겠다’ 싶었는데 그게 안 돼요.
태백산 도솔암 전반기는 정말 애를 썼고 후반기는 유야무야 들락날락하면서 별로 재미를 못 봤어요.
그래서 거기에서 나오게 된 거지요.
- 그러니까 당대 선지식이셨던 성철 스님, 경봉 스님, 구산 스님 친견해서 문답하고 전국을 주유하다가
다시 도솔암으로 들어오셨군요? 그 때가 1970년대 중반인가요?
1970년대 초반이에요.
- 저녁에 선정에 드셔서 아침에 태양을 보고 뭔가 체험을 하신거군요?
해가 분명히 졌는데 내가 앉아서 몇 시간만 지나도 좋다고 했는데 해뜰 무렵까지 간 거예요.
그러면 몇 시간이야 ‘와!’ 손바닥을 치면서 벌떡 일어나는데 발우가 떨어졌으니까 ‘꽝’ 하는데 내가 없어져요.
그냥 그게 좋아서 뛰쳐나온 거예요. 그게 찰나예요. ‘꽝’ 하는 순간에 찰나예요.
- 그런 공부 이야기를 젊은 분들이 많이 알아야지요.
하고 싶지도 않아요. 요즘은 모든 게 믿어지지 않는 세계니까. 나는 진짜 내가 직접 당한 일이고 처절했어요.
요즘이야 어디 그런 걸 믿나요? 나는 내 상좌들 보고
‘너희들이 나보다 선근은 낫다고 하는데 나만큼 밤까지 애쓰는 사람 못 봤다’ 그런 얘기를 하지요.
송광사 구산 스님 회상에서 다시 정진하다
- 다시 도솔암으로 들어가서 하시다가 어디로 가셨나요?
송광사에 구산 스님한테 붙들려 갔어요.
구산 스님께서 사람을 보내가지고 어느 날 어디 나와 있을 테이니 잠깐 왔다 가라 하셨어요.
가니까 열을 내시며 잔소리 말고 빨리 들어오라고 해서 송광사에 들어간 거예요.
그렇게 해서 송광사에 들어간 이후로 구산 스님과 인연이 이어졌어요.
스님 입적하실 때까지 거기에서 몸은 떠났다 해도 늘 편지를 보내고 사랑을 보내서 떠나지 못했어요.
- 구산 스님 입적하실 때까지요?
입적하시기 얼마 전에도 불러서 갔더니 뭘 써놓고 저더러 가져가라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당신 입던 누더기를 나한테 물려 주면서 “이건 네가 입고 살라”고 해서 받았지요.
하여간 입적하시기 얼마 전에도 제가 칠불암 선원에 있었는데 편지를 보내셨어요.
그 노장님은 떠나기가 어려워요. 그분 대단해요. 제자들 붙드는 데는 …….
- 그러시면 구산 스님 회상에서는 몇 년 지내신 거예요?
많이 살았지요. 거기에서 제일 오래 살았을 거예요. 5, 6년 이상 살았으니까.
계속 산 게 아니라 나왔다가 붙들려가고 3년 결사는 한 번 했는데, 그 외에는 나왔다가 불려갔어요.
그 노장님은 직접 찾아와요. 함양 용추사 은신암에 가 있을 때나
소백산 토굴, 제주도 남국선원 조그마한 토굴에 있을 때는 당신이 직접 오셨어요.
참 놀라워요. 대단한 분이셨어요.
- 3년 결사는 언제 하신 건가요?
거기에서 그렇게 살다가 자꾸 사중 대중에서 여러 가지 말이 나와서
내가 왜 이렇게 살 필요가 있나 싶어서 나왔어요.
오대산 상원사에서 무여 스님하고 같이 들어가서 살다가 1974년인가 1975년 그쯤 되었을 거예요.
그 때 상원사가 험하게 살 때예요. 한암 스님 좋은 가풍이 없어지고……. 봉암사도 그랬고 상원사도 그랬어요.
무여 스님이 오대산 스님이거든요. 잘 지내보려고 나하고 약속을 해서 상원사에 들어갔는데 아주 힘들었어요.
그 때 구산 스님 편지가 왔어요. 뭐 때문에 나갔느냐, 나간 이유라도 밝혀라 하길래
‘스님, 다른 말씀드릴 건 없고 나와 살아 보니 오대산이 힘들어서 방 하나 주시면 제가 거기에서 3년을 지내 보겠습니다’ 하니까 노장님이 3년 결사를 한다고 소문을 얼마나 내놓았든지 혜암 스님, 적명 스님, 무여 스님, 지금 봉암사 선원장 정광 스님,
돌아가신 휴암 스님, 일장 스님 등 하여간 기라성 같은 스님이 다 모였어요.
그래 가지고 3년 결사를 했는데 첫 철에 깨졌지요.
뭐 때문에 깨졌나 하면 서옹 스님이 종정을 하면서 승군단을 창설한다고 해서 법정 스님하고 나는 절대 반대였어요.
다른 대중은 다 해서 구산 스님이 가라고 해서 갔다 왔지요. 그런데 다녀와서 여러 가지 때문에 대중들이 들고 일어나서
입승이셨던 혜암 스님이 가버리셨어요. 입승이 가시고 그 다음에 해제하고 누구누구 가고, 다 깨졌지요.
- 승군단(僧軍團)에 안가시고 반대하신 뜻은 무엇인가요?
일단은 승군단이라고 하는 게 수행자로서 총칼 들고 그렇게 한다는 것은 세속(世俗)으로 가는 것이지.
보살행도 아니고 속인화 되는 것이지요. 보살행으로 속화한 거라면 당연히 속화되어야 하고 속인 쪽으로 가야지만,
세속화 되어서 수행을 버려두고 세속의 총칼을 잡으러 간다는 것은 나는 도대체 이해가 안 되었어요. 그래서 끝까지 안 갔어요.
- 3년 결사가 첫 철에 깨지고도 계속 남아 계셨습니까?
계속 있었어요. 결국 거의 나 혼자 3년을 끝냈지요. 그러니까 구산 스님이 그런 걸 인정을 해요.
당시 봉암사·상원사 선원 분위기
- 아까 봉암사하고 상원사가 당시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안 잡혔다고 하셨잖아요.
봉암사는 당시 공부 분위기가 안 잡혔었던가 보지요?
지금처럼 봉암사가 저렇게 잡아 살기 시작한 게 도범 스님이 주지할 때쯤일 거예요. 지금처럼 수좌들이 하나의 긍지처럼 된 것은 1980년 넘어서입니다. 그 이전에는 원력을 세운 분들이 많았지만, 대중 분위기는 쉽지 않았지요.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요.
- 오대산 상원사는 당시에 어땠습니까?
상원사는 한암 스님이 잘 사시다가 가신 이후로 거의 선방을 못 했어요. 어영부영 쉬는 장소처럼 되어 버리고 그러다가
능혜 스님이 주지로 들어가면서 선방을 해보겠다고 해서 무여 스님 하고 내가 들어갔는데 힘들었어요.
그 다음부터 차츰차츰 나아지더니 정념 스님이 주지할 때 상원사 선방이 완전히 자리를 잡았지요.
어느 곳이든 대중을 이루어 살면 이런저런 갈등이 생기기 마련인데,
당시 상원사 선원 같은 경우 좀 자유롭게 살려는 분들이 많았어요.
무여 스님이 입승 맡고 내가 찰중 소임이었는데 몇몇 대중이 아주 말썽을 부렸어요.
무여 스님이 본래 월정사가 본사여서 상원사를 제대로 선방으로 만들어 보려고 작심하고 노력했는데 갈등이 계속 되었어요.
그러다가 ‘도저히 안되겠다, 차라리 어른 있는 데 가서 공부나 하자.
차라리 공부 잘 한다고 해서 시비 듣는 게 낫지 이런 데서 못 하겠다.’
그래서 구산 스님 계신 송광사에 간 거예요. 태백산에서는 붙들려 갔지만, 오대산에서는 내가 자원해서 편지를 올렸어요.
다시 송광사로 들어 가다
- 송광사에는 구산 스님이 계시니까
그런데 그 노장은 공부를 잘 하면 너무 드러내서 칭찬해 버리기 때문에 내가 보기에도 말 듣게 해요.
왜 그러냐 하면 제가 장좌불와하던 끝이라서 잘 안 누웠어요. 안 누워져요.
누우면 허리가 아파서 앉아 있으니까 노장이 놀래서 인삼이 귀할 때였는데 당신 드시라고 한 인삼을
시자도 몰래 11시 반부터 12시 사이에 달여서 한 그릇 가져다 내 방 앞 마루에 놓고는 ‘똑, 똑, 똑’ 하고 가요.
그러면 나는 그걸 먹고 빈 그릇을 놔두면 도로 가져 가셨지요. 하루는 조느라고 못 봤더니 확 쏟아 버리더라고요.
그걸 당신이 하루도 안 빠지고 6개월을 하셨어요. 세상에 비밀이 있나요. 대중들이 그걸 알게 되었어요. 가만이 있나요.
노장이 두부 한번 사 먹자고 해도 시주물 아낀다고 안된다 하시던 분인데 …….
- 그렇겠네요. 대중들 말이 많았겠습니다.
인삼 달여 먹이고 그렇게 해서 알게 됐지요. 그래 가지고 그게 저를 힘들게 만들어요.
노장이 그런 건 생각 안 하고 앞에 놓고 그래 버리는 거지요.
- 대중들 앞에 놓고 법문하시면서 칭찬도 하시고 그러셨겠네요.
“혜국이 한 쪽 눈 열렸다”고 하면 지나가던 사람이 “저기 애꾸눈 오네” 하며 빈정거렸지요. 그런 게 아주 힘들었어요.
그래도 공부한다고 말 듣는 그게 더 낫더라고요. 상원사는 하도 시끄럽게 하고 나와서 …….
축서사 무여 스님과의 인연
- 축서사 무여 스님과 아주 절친하시다고요?
무여 스님은 나하고 오래 살았거든요.
상원사부터 시작해서 송광사 3년 결사, 봉암사, 대승사, 칠불, 도솔암, 망월사에서 같이 살았지요.
열 손가락으로 못 셀 정도로 같이 다녔어요.
그래서 무여 스님 가는 데 내가 있고 내가 가는 데 무여 스님이 있다고 할 정도로 도반이라기보다 존경하는 사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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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