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길 잃은 양들에게 가서 정의를 뿌리고 신의를 거두어들여라.”
- 교우촌 현상, 한국교회의 뿌리
호세 10,1-3.7-8.12; 마태 10,1-7 /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2024.7.10.
오늘 독서 말씀에서, 드디어 호세아는 죄가 쌓일 대로 쌓인 북 이스라엘의 임금과 백성을 심판하시겠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농부가 포도밭에 포도나무를 심듯이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히브리 노예들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셨는데, 포도 열매가 무성하게 맺기는 커녕 제때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처럼 거짓의 열매만 주렁주렁 달렸다는 것입니다. 하여, 이스라엘은 죗값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멸망할 것이고, 그 대신에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 정의의 씨앗을 뿌리고 신의의 열매를 거두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예언된 새로운 하느님 백성의 못자리가 열두 사도 공동체였습니다. 이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하셨던 대로,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해야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그렇게 해서 세워진 인류 역사의 새 포도원이었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온 하늘 나라였고 세상과는 대조적인 사회였습니다. 열두 사도의 공동체로 시작된 교회는 예수님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생겨났습니다. 민족사적으로는 가장 암울했던 시점에 활약하셨던 예수님께서 역사적 상황의 암울함에 맞먹는 비중으로 역사적으로 비장한 선택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 이래로 이어져 내려온 혈연으로서의 이스라엘 민족은 의미가 없고, 믿음으로 모인 새 하느님 백성이 하느님의 나라를 이룩하는 사명을 짊어지게 된 것입니다.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신 예수님께서는 생애 마지막 순간에 최후의 만찬을 드시며 이들을 사도로 삼고 열두 사도 공동체라는 주춧돌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자 성찬례를 제정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뜻도, 파스카 축제일을 골라서 성찬례를 세우신 뜻도 모두 교회가 파스카 전통을 계승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상호 섬김으로 당신을 기억하여 행하기를 바라는 유언을 남기신 이 파스카 예절에 예수님 선택의 진수가 담겨 있습니다. 그 옛날 모세가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시켜 하느님 안에서 자유인이 되게 한 파스카 탈출 사건처럼,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이제는 이집트가 아니라 온 세상에서 파스카 과업의 추진엔진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놀라운 역사의 섭리는 그로부터 시대로는 천8백여 년이 흐르고, 지역으로는 아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서 시작된 복음이 지구 반바퀴를 돌아서 이 대륙의 동쪽 끝인 한반도에서 열매를 맺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국 천주교회의 교우촌입니다. 반만년 한민족의 역사 안에서는 물론이요 전체 가톨릭교회의 역사나 인류 문화의 전체 역사 안에서도 한국 천주교회의 이 교우촌은 하나의 ‘역사적 현상’으로 불리울 정도로 적어도 세 가지 점에서 매우 특이합니다.
첫째, 배우지도 못하고 가진 것도 없었던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과 다른 세계관과 가치관으로 무장하고 집단적으로 백 년 간이나 존속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한민족의 반만년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적이었습니다. 피지배계급이 집단으로 무장 항거를 했던 민란들은 여러 차례 있었으나 모두 진압당했습니다만, 이 교우촌이 배출하여 오늘날 시복·시성되신 순교자들의 존재야말로 교우촌의 정신과 가치가 살아남았음을 입증하는 생생하고도 공식적이며 보편적인 증거입니다.
둘째, 천주교 교우촌의 생활양식과 행동양식은 철저하게 천주교 교리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조선 조정이 온 행정력을 동원하여 백 년 간이나 조직적이면서도 잔인한 방식으로 박해를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100% 평화적인 방식으로 저항했다는 점에서 또한 그렇습니다.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이름도 없이 치명할지언정 배교하지 않은 순교자들이나, 비록 치명의 기회를 얻지는 못했어도 역시 곤궁함과 박해라는 이중의 위기 속에서 용케 살아남아 신앙을 후손들에게 물려준 교우들이나 모두 다 위대한 존재들입니다. 살아남아 교우촌을 일군 교우들은 만민평등과 남녀동등의 가치를 실현함은 물론이고,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5가구를 1통으로 편성, 통내 가호에 연대 책임을 부과하여 거주지 이탈, 절도 등을 방지하고 아울러 세금 수취의 편의를 꾀한 행정 제도)으로 감시하는 세상의 눈을 피해 심산유곡으로 흘러 들어간 궁핍한 살림이면서도 빈부차별을 극복하고자 가진 것을 서로 나누었으며, 작물을 재배할 땅이 없어서 옹기를 굽든 담배를 재배하든 공동으로 생산하며 공동으로 분배함으로써 공동체의 질서를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치명자의 자녀들을 대부·대모가 중심이 되어 교우촌이 대신 길러주는 일도 필수였습니다. 게다가 비록 교우가 아니더라도 주변의 가난한 이들에게 애덕을 실천했던 교우촌은 살아남은 교우들이 구현했던, 그야말로 ‘가까이 다가온 하늘 나라’로서 서로 사랑하는 교우들의 공동체였습니다. 교우촌은 공소회장들이 주동이 되어 공동 기도는 기본이요 사랑과 나눔과 정의라는 가치를 구현했던 공동체라는 점에서, 왕과 신하들이 백성을 죽이고 양반과 관리들이 백성을 가렴주구로 착취하던 당시 조선 사회와는 분명히 대조적이었던 새로운 나라 그 자체였으며, 하늘 나라라는 또 다른 세상을 갈망하던 그 자체로도 또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김대건 신부가 신앙을 배우고 사제 성소를 받은 환경도, 최양업 신부가 돌본 사목대상도 바로 이 교우촌이었습니다.
셋째, 순교자들은 순교행위만으로도 위대한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하겠지만 살아남아 신앙을 물려준 교우들 역시 승리자로 맞갖은 예우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교우촌을 이루어 조선 조정의 박해에 저항한 천주교가 끝내 신앙과 선교의 자유, 그리고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얻어내고 일제의 식민통치라는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새로 건국되는 나라의 헌법으로 보장받기에 이르게 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 교우촌이 한민족의 문명을 앞당겼습니다. 교우촌의 후예로서 하느님 사랑과 나라 사랑으로 교우촌의 가치를 민족 앞에서 사회적으로 드러낸 인물로서는 안중근 토마스를, 그리고 그 가치를 나라의 헌법에 보장시킨 활동에 있어서는 장면 요한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교우촌 현상에 대해 한국의 일반 역사학계에서 정당한 평가를 충분히 받고 있지 못하고 있으며 정작 천주교 신자들 안에서도 잊혀져 가고 있습니다만, 앞으로 한민족과 한국 천주교회 그리고 천주교 신자들이 떠맡아야 할 민족 복음화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라도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뿌리요 맥이 되어준 교우촌 현상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하고 사도들에게 명령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한 점 한 획도 사라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고 교우촌 현상이 이 말씀을 구현했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후덥지근한 장마철 더위가 연일 계속되는 가운데 무능하고 무도한 대통령을 탄핵하자는 국민들의 국회 청원이 11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이는 집권한 지 겨우 2년 만에 국격이 떨어지고 안보가 불안해지며, 나라 빚이 늘어나고 수출을 비롯한 경제 사정마저 엉망으로 망친 정권에 대해 분노한 민심이 나타난 것입니다. 하지만 어찌 어찌해서 대통령 한 사람이 쫓겨난다 해서 나라가 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행정과 사법, 언론의 책임을 진 자들이 공익보다 사익을 앞세우고 있는 한, 호세아의 경고적 예언처럼, 열매를 제 때에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신세는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믿는 이들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처럼 각자의 삶과 일에서 바람직한 나라의 모습을 앞당겨 실현해야 합니다. 최고선의 가치를 바탕으로 하여 공동선의 가치를 실현하여 한민족의 문명을 앞당겨 실현했던 교우촌의 맥을 이어 나가는 것입니다. 말씀의 교우촌, 성사적 실천의 교우촌, 사랑의 교우촌을 세워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우리 교회의 정체성을 민족 사회 안에 세워서 하느님의 빛을 비추는 길입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에게 당부하신 말씀을 상기시켜 드립니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