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죄인을 먼저 회개하게 하옵시고…”
도대체 정상(正常,-이 말도 되지 않는 구분에 인류의 소수자는 얼마나 억압되었는지!)의 범주에 들지 않는 비정상(非正常, 이 말 역시 正常을 정상(頂上)으로 살찌운 언어는 아닌가?)은 얼마나 많이 이 말들을 들어왔는가? 중세 마녀사냥에서 지금 왼손잡이에 이르기까지…
그렇다면 무엇을 회개하란 말인가? 정상이 아닌 비정상이기에 죄인이며 정상의 범주에 들지 않기에 회개하라는 것인가? 여기 정상의 범주에 들지 못하는 한 쌍의 남녀가 있다. 그들의 데이트는 부정되며, 사랑은 범죄로 취급당하며, 존재 자체가 사회에서 격리된다. 비정상들의 오아시스는 말 그대로 유토피아가 되고 마는 것인가?
1. 비정상들의 오아시스는 어디에 있는가?
전과가 폭력에 강간미수, 과실치사면 비정상 이래도 보통 비정상이 아니다. 이런 비정상인 홍종두(설경구)는 그의 형 말마 따나 ‘어른이 되기’에는 그리고 ‘사회에 적응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존재이다. 이 남자 주인공과 뇌성마비 장애인 한공주(문소리)는 발음도 정확하지 않고, 혼자서는 걸을 수도 없는, 그래서 또 다른 ‘어른이 되기’와 ‘사회에 적응하기’에는 너무 불가능한 존재이다. 이런 여자 주인공, 이들의 오아시스는 어디에 있을까? 어른이 아닌, 적응할 사회조차 없는 곳, 그곳은 방에 걸린 조악한 스킬 자수의 그림 속 오아시스이지만 현실 정상 사회의 나무(트리) 그림자로 위협받는 그런 곳이다.
<초록물고기>와<박하사탕>의 이창동 감독이 만든 세 번째 영화 <오아시스>는 음주운전으로 환경미화원을 치여 죽인 형을 대신해 감옥에 갔다 돌아온 약간 지능이 낮은 사회 부적응자 종두와 그 피해자의 딸인 뇌성마비 장애인 공주와의 사랑을 그린 영화이다. 주인공 종두가 출감 후 인사차 들른 공주의 집에서 거울에 비추인 빛을 받은 종두는 공주에게 관심을 가진다. 공주는 거울로 햇빛을 반사해 그 빛 속에서 비둘기와 나비로 공중을 날아 다니는 상상을 한다. 거울로 반사된 빛에 표현된 비둘기와 나비가 공주의 오아시스인가?
처음에는 평화를 상징한 비둘기였다. 그 온전한 거울(비둘기)을 깨뜨리고 조각난 파편의 거울로 만들었던 나비, 그 나비는 그리스로마 신화의 ‘에로스와 프시케의 사랑’에서 프시케의 상징인 나비였다. 그 나비를 만들던 빛으로 종두를 비추었던 두 사람의 만남은 평화가 깨어진 후 기댈 수 있는 것은 사랑이라는 상징일까? 아무튼 그 사랑의 빛을 쪼인 종두는 공주에게 호감을 가진다. 공주도 자신에게 처음으로 꽃을 선물했으며 이쁘다고 ‘마마’로 자신을 불러준 종두에게 애정을 느끼며 둘은 작고 이상한(이 정상사회가 보기에는) 사랑을 만들어 나간다.
이들의 첫 데이트인 근사한 외식은 경제권이 없어 종두가 훔친 형수의 돈으로부터 시작되며 식당에서는 거절당하고, 시켜먹는 짜장면이 전부이다. 자유롭게 노래를 부를 수 없어 울부짓는 “걸어서 저 하늘까지”와 “내가 만일”의 노래가사는 걷지 못하는 공주의 상상 속에서 화합하며 아름다운 소리로 들려온다.
혼자 있는 공주의 아파트를 찾아가 빨래를 해주며, 어머니 생일잔치에 공주를 데려가는 종두의 사랑은 정상인의 사랑과 패턴과 다를 바 없다. 아니, 다르다고 한다면 어쩌면 공처가의 소질이 보인다고나 할까! 그러나 패턴은 같아도 ‘사회에 부적응적인 미숙한 존재’는 용서받을 수 없는 법. 종두가 공주와 한 몸을 이루려는 그 순간 장애인용 아파트에 공주의 명의를 빌려 입주하고 허름한 아파트에 공주만 남겨놓았던 오빠부부가 공주의 집으로 찾아와 둘의 사랑은 완성을 보지 못하고 경찰에 신고 당하여 잡혀간다. 종두는 강간 미수범으로 몰려 경찰에 심문 당하고, 심문에서조차 자신을 변호하지 못하는 모자란 종두는, 진실을 밝히려 고함치려하지만 뒤틀린 입으로는 사랑하는 애인을 구하지 못해, 자해행위에 가까운 몸부림을 치는 공주를 보며 어리숙한 모습으로 끌려간다.
다시금 가족과 함께 경찰서로 종두를 심방한 목사는 처음 종두를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 죄인을 먼저 회개하게 하옵시고…”하며 기도를 시작한다. 회개할 하늘을 또다시 한번 쳐다보고 종두는 도망친다. 마지막으로 해야할 일이 있었던 것이다. 처음 출옥하여 이사간 집을 찾으려 전화하기 위해 여중생들에게 100원짜리 동전하나 빌리지 못한 종두, 무전취식하고 경찰서에 잡혀 들어가서야 동생을 만났던 종두는 이제는 길에서 여학생을 위협하여 핸드폰을 빌려 전화를 한다. 어쩌면 비정상은 사랑을 하기 위해서도 나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공주는 자신의 방에 비치는 그림자를 무서워한다. 오아시스 스킬 자수를 가리는 그 나뭇가지는 두 사람의 사랑을 방해하는 그 무엇인가? 여하튼 종두는 그 나뭇가지를 미친 듯이 잘라버리고 공주 역시 호응하듯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는다. 도망가서 마지막으로 해야 했던 일은 바로 오아시스를 가리던 그 나뭇가지 그림자를 없애기 위해 창 밖의 나무를 잘라버리는 것이었다. 영화의 마지막은 햇살이 비치는 환한 방을 청소하는 공주가 교도소에서 종두가 보내온 편지를 읽는 장면이다. <초록물고기>와<박하사탕>에서 ‘돌아갈 순수’를 그리워했다면 <오아시스>에서는 ‘다가올 순수’를 그리워하며 엔딩하는 것이다.
2. 뿌리들의 반항-홍경래는 반역자가 아니고 장군인가?
감독은 연출의 변에서 영화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관성과 객관성의 충돌 … 일상과 판타지와의 경계, 영화와 현실과의 경계. 나는 관객을 내가 만든 싸구려 판타지의 세계로 깊숙이 끓어 들이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그들을 그 경계선 밖으로 멀리 밀어내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아시스는 ‘경계에 관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나와 남과의 경계, 우리와 우리가 배척하는 것과의 경계, 정상인과 장애인과의 경계, 그리고 다시 사랑이란 판타지와 일상과의 경계, 영화라는 판타지와 현실과의 경계, 경계선에 서서 그 충돌을 경험하는 것은 불편하고 때로 고통스런 일이지만 그러나 진정 소통을 원한다면 그 자리를 피할 수 없지 않겠는가?”1)
문제설정을 경계에 두고 있단 말인데, 그러나 그에게 철학적 상상력이 있다면 자신이 각본을 썼고, 한 장면, 한 장면을 찍었던 이 영화에 엄청난 철학적 함의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았을까? 연출의 변에서는 아직 모르고 있다는 이야긴데, 아무튼 그 엄청난 철학적 함의는 무엇일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9세기초인 조선 후기에 사회, 경제적인 역량이 성장함에 따라 여러가지 사회모순에 대한 저항의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홍종두가 자신의 조상이라고 이야기 한 홍경래와 우군칙 등은 세상을 구원할 정진인(鄭眞人)을 받들어 사업을 벌인다는 참위설(讖緯說)2)을 주장, 지역 차별과 정치적 모순을 바로잡아야 한다며 농민반란을 일으켰다. 그 홍경래 장군의 자손이라 자신을 소개하는 홍종두는 반역의 피를 물려받았지 않았을까? 물론, 한공주에게 홍경래는 장군이 아니고 반역자라고 듣는다. 그럼,
“이름이 공주라고? 공주치곤 얼굴이 좀 그러네... 뭐, 나도 만만치 않다고? 에이 그럼 섭하지 마마”
라고 답하는 종주는 기표를 뒤집어엎음으로 뿌리들의 반항을 시작한다. 조상 홍경래가 지역 차별과 사회모순에 대해 민란을 일으켰다면 종두는 이제 리좀적 반항을 트리라는 몰적 집계와도 같은 수목형 모델(arborescent model)에 대항하는 것이다. 그 시작은 ‘정상의 사회적 이성’이 명명한 이름을 거부함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즉 리좀인 뿌리들은 자신들의 호칭부터 바꾸는 것이다. ‘마마’와 ‘장군’으로...
3. 트리와 리좀
종두는 출감후 형의 부탁으로 짜장면 배달을 시작한다. 배달나간 노름판에서 노름꾼의 노래를 따라 부른다. 뿌리인 리좀이 정상인 트리를 따라하면 욕듣는 것일까? 그래서 비정상의 사랑은 범죄가 되며, 격리되는 이 사회, 이것이 정상인가?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서문에서 서구의 사상적 전통을 수목형 모델(트리)로 규정한다.3) 나무(트리)를 보면 굵은 줄기가 하나 있고, 거기에서 가지가 뻗어나오고, 다시 가지에서 작은 가지가 뻗어나온다. 이 나무 모양의 조직이 철학을 비롯한 인간 사고와 사회조직의 모델이라는 것이다. 즉 진화조직의 계통수는 문자 그대로 나무이고, 전형적인 근대 조직인 군대도 지휘관에서 가지가 갈라져 나오는 나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수목형 모델인 트리를 비판하며 대안으로 들뢰즈와 가타리는 근경적 사고방식을 제안하고 있다. 근경, 즉 리좀은 땅속으로 뻗는 줄기를 뜻하며 스스로 뿌리이기도 한 식물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중심을 갖지 않는 상호 이질적인 선이 서로 교차하고, 다양한 흐름이 방향을 바꾸며 뻗어나가는 이 리좀을 들뢰즈와 가타리는 땅속에 뿌리를 박고 지상으로 줄기를 뻗는 수목형 구조에 대립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뿌리와 줄기의 구분 자체가 불가능한 리좀을 반수목적 사고 방식의 은유로 도입한다.
예컨대 인간의 뇌신경조직은 리좀이고, 스크럼, 패스, 펀트의 흐름으로 이루어지는 럭비나 크세나키스(Iannis Xenakis)4)의 ‘미케네 á’ 의 음계도 또한 리좀적이다. 한미디로 들뢰즈는 인간의 사고, 국가를 위시한 사회조직의 배후에서 이것을 규정하고 있는 나무모양을 비판하고, 지식의 영역뿐 아니라 조직론, 공간에 있어서도 트리에 대항하여 리좀을 복권시키려 한다는 것이다.5) 따라서 리좀적 사고는 고정된 체계나 구조가 없고 중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비위계적이며 어떤 궁극적 근원이나 일자에 환원될 수 없는 다원성이 그 특징이다.
종두와 공주가 첫데이트에서 올라간 아파트 옥상에서 바라본 하늘은 너무 파랗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하늘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고, 하늘을 공유하듯이 밥도 나눠 먹는 것일진대, 뿌리들에겐 하늘도 그저 바라볼 수 없는 세상이다.
깨끗한 흰색을 좋아하고 여름보다는 겨울을 좋아하는 공주는 여름을 싫어하는 이유에 “파리, 모기 진짜 싫어”로 답한다. 어쩌면 뿌리들의 피를 빨아먹고 트리를 건축해온 우리 문명에의 은유가 아닐까?
어머니의 잔치에 공주를 데려온 종두에게 동생이 한마디한다. “생각좀 하고 살어” 종두는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답한다. 그래,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생각’해온 문명이 ‘사유’해온 지성이 지금 이 정도라면 차라리 몸의 언어로 진솔하게 말하는 것이 어떨까? 뿌리를 두남두라고 강요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뿌리의 녹녹지 않음을 잊지 말게나 트리여! 사고여! 이성이여!.
출감 후 간신히 찾아온 집, 형을 대신해 감옥에 들어갔지만, 형수의 말 한마디는,
“삼촌 정말 미안한 말인데요, 삼촌이 안 계실 때는 집안이 편안했어요. 전 삼촌이 싫어요.”
역시나, 트리는 리좀의 분열성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싫어하며 정주적 편안함6)을 즐기고자 하는 것이다.
옆집 공주의 식사를 챙겨주는 여자의 남편은 공주의 집에서 정사를 벌인다. 공주가 보지만, “재가 보잖아”의 물음에 “에이, 괜찮아”로 화답한다. 정상(트리)의 눈에는 비정상(리좀)은 보이지 않는 것일까? 정신의 고상함을 추구하는 정상이 스스로의 함정에 빠진 꼴이다. 왜냐하면 공주는 정신만큼은 홍경래의 난을 역사인식으로 알고 있었으니까. 정신의 고상함이여, 필요할 때는 둘러대고 필요 없을 때는 “‘에이, 괜찮아’인가?” 썩어빠질 합리성의 잣대가 자신들의 얼굴에 침뱉는 것임을 왜 알지 못하는가!
그래서 결론은 이것이다.
공주의 방에 걸려있는 오아시스(비정상)를 가리는 나뭇가지 그림자 때문에 그 나뭇가지를 치는 종두는 정상과 이성, 합리성의 이름으로 뭉친 성숙된 어른, 이 사회의 적응된 우리를 향해 외치는 저항의 음성이다. 바로 트리에 대한 저항인 것이다. 그래서 오아시스인 비정상의 유목의 세계를 지키는 세례요한인 것이다.
그렇다면 공주는 어떤가? 라디오의 볼륨을 크게 하여 종두가 와있음을 안다고 외친다. 보는 것으로 이데아를 추구해왔던 이성주의자들인 ‘트리’에 소리로 화답한다. 몸 속 깊이 우러나는 소리로, 그 몸의 언어가 우리를 구원할 그때까지 공주의 외침은 우리의 눈에서가 아니라, 귀를 통해 온 몸의 구석구석의 세포에까지 새겨지기를 바라며…
4. 비정상의 사랑은 변태인가?
이 사회의 뿌리들, 그 뿌리들인 비정상이 정상을 생존케 하며, 살아 숨쉬게 이끌어온 유지틀이다. 그러나 그 유지틀을 살천한 정상의 언어는 변태로 취급한다. 취조를 받는 종두는 형사에게 “너 변태야?”라는 말을 듣게 된다. 두 사람의 사랑은 정상인으로 불리워지는 이들에겐 변태로 불려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을 읽는 정상적인 연인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게 됨이 이 영화 덕분이 아닐까? 아마도…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범죄가 아니라서 다행입니다.”
(최병학)
----------------------------------------------------------------
1) 영화 『오아시스』의 홈페이지를 참조하라. http://www.oasis2002.com/연출의 변/
2) 참위설(讖緯說)은 중국 한 대(漢代)의 미래예언서로 알려진 경전 하도낙서(河圖洛書)에 그 연원을 두고 있으며,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을 바탕으로 일식, 월식, 지진 등의 천지이변(天地異變)이나 은어(隱語)에 의하여 인간사회의 길흉화복을 점쳤다.
3) Gilles Deleuze and Felix Guattari, A Thousand Platea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Minnesota University Press, 1987〔1980〕), 김재인 역, 『천개의 고원』(서울: 새물결, 2002).
4) 크세나키스 (Xenakis, Iannis, 1922- ) 그리스의 작곡가로 루마니아의 브라일라에서 출생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테네공과대학에 다니면서 반나치스 저항운동에 참가하고, 전후 그리스에서 정치활동을 하다가 체포된 후 1947년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프랑스에서는 건축가로서 르 코르뷔제 아래서 일하는 한편, 1950년 파리음악학원에 들어가 O.메시앙에게 사사하고 그 후 다시 H.셰르헨에게 사사하였다. 작곡가로서 그는 당시 전위음악에서 지배적이었던 세리에르기법(技法)을 비판하고 수학의 확률론을 도입한 음향운동의 구성을 주장하였으며, 1955년 도나우에싱겐 음악제에서는 오케스트라를 위한 《메타스타시스 Metastasis》(1957)를 발표하여 크게 주목을 받았다. 이어 1962년에는 작곡과정에 컴퓨터를 도입하여 현악4중주곡 《ST/4》(1957) 등 일련의 작품을 발표하고 그 후에도 음악을 인간의 높은 지적 활동이라고 한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논리적 사고에 의하여 뛰어난 작품을 작곡하였다. 주요작품으로는 이 밖에도 《피토프라크타 Pithoprakta》(1957) 《에온타 Eonta》(1964) 《아크라타 Akrata》(1965) 등이 있다.
5) 황원권, 『현대철학산책』(서울: 백산서당, 1996), p.350.
6) 이런 면에서 본다면 종두는 들뢰즈의 정주민-유목민 구분에서 유목민적이다. 경찰서와 짜장면 배달, 카센타, 공주의 집 등 머물 곳이 없는…
* 본 글은 비회원이신 최병학님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