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보다 예술
평범해 보이는 가정집 실내에 두 여자가 있다. 식탁에 앉은 백발노인은 손에 책을 들었고, 검은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자는 나가려는지 서서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있다. 노인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젊은 여자 쪽으로 고개를 들려 한다. 탁자 위에는 손도 안 댄 빵과 찻잔이 놓여 있다.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일까? 어떤 상황인 걸까?
‘세상 밖으로(1889년·사진)’는 19세기 핀란드 여성 화가 마리아 위크의 대표작이다. 언뜻 보면 노모와 딸의 일상을 그린 것 같지만, 사실 이 그림은 상당히 시사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림 속 젊은 여자는 지금 생계를 위해 집을 떠나는 중이고, 노모는 걱정하며 이런저런 당부를 하고 있다. 부모 세대 여성의 최고 미덕은 가정 안에 머무르며 자녀 양육을 하는 것이었다. 고향을 떠나본 적 없는 노인에겐 아마도 독서가 세상 여행의 전부였을 것이다. 하지만 딸 세대는 다르다. 남자에게 생계를 의존하기보다 나가서 직접 돈을 벌고 싶을 테다. 더 넓은 세상을 직접 보고 경험하고 싶을 것이다. 그림 제목이 ‘세상 밖으로’인 이유다.
사실 이 그림에는 화가 자신의 삶도 투영돼 있다. 헬싱키에서 태어난 위크는 핀란드 미술아카데미에서 미술을 공부한 후 22세 때 미술의 중심지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27세 때 파리 살롱전을 통과해 실력을 인정받은 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작품 활동을 했다. 여느 남성 화가들처럼 독립적이고 자유롭게 활동하며 스스로 명성을 쌓아 나갔다.
위크가 이 그림을 그린 건 영국 남부 세인트아이브스에서 지낼 때였다. 식탁 위 빵을 거부하고 집을 나서는 그림 속 딸은 안락한 집을 떠나 스스로 삶을 개척해 가던 화가 자신의 모습과 닮았다. 완성된 그림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동메달을 수상하며 화가에게 첫 명성을 안겨 주었다. 그 덕에 위크는 1905년 발간된 책 ‘세계의 여성 화가들’에 이름을 올렸다. 빵보다 예술을 선택한 용기에 대한 보상이었다.
이은화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