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 강점관련 주요일지>는 미군강점 60년 동안 일어났던 역사적인 사건들을 정리한 일지입니다.
지난 60년간 주한미군을 통해 미국이 한국을 강제점령하고 예속해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역사적인 사건들을 일지에 담았습니다. 이를 통해 주한미군 철수의 정당성, 당위성, 절박성을 알리고자 합니다. 더불어 미국의 한반도 예속화정책을 반영하는 사건들을 살펴보고 이에 반대하여 한국 민중이 전개했던 반미자주화투쟁을 기록하여 반미자주화운동의 정당성도 함께 알리고자 합니다.
이 일지는 한 달을 주기로 <정세동향>에 실리고 있으며, 매주 금요일 인터넷을 통해서도 공개되고 있습니다. 인터넷 공개자료에 한해서 중요한 사건들에 대한 해설도 첨부됩니다.
주한미군 철수원년, 자주통일 원년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투쟁하고 계시는 모든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1945년(해방과 분단, 미군진주)
9월18일 트루먼, 조선이 즉각 독립국으로 되는 것에 반대한다고 발표
1950년(한국전쟁)
9월 15일 맥아더 지휘아래 인천항에 상륙작전 개시(설명 ①)
9월 15일 맥아더 38선 돌파 지속적 북진명령 지시(설명 ①)
**설명
① 더글라스 맥아더의 본모습
60년동안 반공, 반북이데올기의 포로로 살아왔던 대한민국 사회에서 맥아더는 한국전쟁에서 ‘북한의 남침’을 저지하고 대한민국을 지켜낸 민족의 영웅으로 군림하여 왔다.
오죽했으면 인천의 자유공원에 동상까지 세워 맥아더를 기리고 있겠는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이를 지휘한 맥아더 장군을 기념하기 위해 우리 정부가 일종의 보답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아니면 미국의 압력이 결합된 작품인지도 모른다.
9월 8일은 맥아더가 이끄는 미군이 남한을 강점한 지 60년이 되는 날이며 9월 15일은 맥아더가 이끄는 유엔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전개한지 55년이 되는 날이다. 한국전쟁과 분단의 상처가 사회 곳곳에 남아 있는 지금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평가를 한다는 것은 오히려 대한민국 내에서의 갈등을 유발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겠다.
실제 최근 맥아더 앞에서의 투쟁이나 강정구 교수의 글과 관련하여 냉전수구세력들이 색깔공세를 펴고 있다. 그러나 역사상 최고의 호전광이라 할 수 있으며, 특히 한국전쟁 시기에 양민학살을 배후에서 조종해서 수많은 민간인을 살육한 맥아더라는 인물이 대한민국에서 ‘민족을 구한 영웅’으로 군림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만은 바로잡아야 하겠다. 맥아더는 우리 국민이 추앙하기에는 너무도 거리가 먼 인물이기 때문이다.
미군 강점과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었던 9월을 맞이하여 맥아더라는 인물에 대해 재평가하는 것은 과거의 역사를 바로잡고 우리의 현실을 돌이키는 과정으로써 의미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또한 맥아더라는 인물과 맥아더 동상이 한미 동맹의 상징으로 군림하고 있는 조건에서 맥아더에 대한 재평가는 한미동맹, 주한미군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라는 의미를 함께 갖는다.
1. 맥아더는 점령군의 사령관으로 한반도를 강점하고 민족의 자주 독립 국가 건설을 짓밟은 인물이다
1945년 9월 8일 미군은 ‘해방군’을 환영한다며 마중 나온 인천 시민들의 피를 밟으면서 한반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것도. 9월 8일 미군은 공군의 엄호 하에 완전무장을 하고 마치 적진에 상륙하듯 무시무시하게 인천에 상륙했으며 미리 일본 군경을 동원해, 한국인들에게 일체의 외출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많은 시민들이 ‘해방군’인 미군에 대한 반가운 마음으로 이들을 환영하고자 외출했고, 결국 경비구역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의 총격을 받아 상당수의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한국인들이 이에 항의하자, 미군 당국은 정당한 공무집행이라고 오히려 살인을 저지른 일본 경찰을 두둔하였던 것이다.
그 하루 전날인 9월 7일 태평양 방면 미 육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조선 인민에게 고함’이라는 포고 제 1호를 발표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제 1 조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최고 통치권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 하에 시행된다.
제 3 조 모든 주민은 본관 및 본관의 권한 하에서 발포한 일체의 명령에 즉각 복종하여야 한다. 점령군에 대한 반항행위 또는 공공의 안녕을 교란하는 행위는 감행하는 자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엄벌에 처할 것이다.(강조 - 필자 주)
맥아더의 포고문에 나와 있듯이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으로 이 땅을 강점하였다. 또한 조선인민위원회, 건국준비위원회, 조선인민공화국 등 자주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이미 조직되어 활동하던 우리 민중의 자주적인 통치 기구를 강제로 해산시키면서 ‘최고 통치권’을 발휘한다. 미국은 점령 이후 곧 미군정을 선포하고 일체의 민족 자주권을 박탈했다.
맥아더가 말했던 ‘공공의 안녕을 교란하는 행위’는 단지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행위 즉 미군의 한반도 강점에 반대하는 행위를 말한다. 김구 선생, 여운형 선생 등 민족 지도자는 말할 것도 없이 외세를 반대하고 자주독립 국가 건설을 위해 노력하였던 수많은 민중들을 친일파를 동원하여 혹은 미군이 직접 ‘가차없이 엄벌에 처’했다. 역사 이래 점령군도 이런 잔인무도한 점령군은 없었다.
맥아더는 그 점령군의 최고우두머리인 ‘총사령관’이었던 인물이다.
2. 맥아더는 일본이 약탈해간 우리 문화재 10만점에 대한 반환을 반대한 인물이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수많은 우리의 문화재를 일본에 빼앗긴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본의 약탈자들과 관변 고고학자들은 일제 강점기에 왕과 왕비의 무덤을 파헤쳐 금 세공품과 옥 장식, 청자, 돌조각품, 탑 등 유물을 닥치는 대로 약탈해 간 것은 물론, 사찰들에서 값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 귀한 사리함들을, 도서관에서도 수 만점의 서책들을 일본으로 실어 날랐다. 약탈된 문화재들 가운데에서 개성에 있는 고려 귀족들의 무덤에서만 발견되는 청자와 같이 최고로 엄선된 물품들은 천황에게까지 진상되었다. 8.15 해방이후 우리 민족은 빼앗긴 우리 문화재를 되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일제의 문화재 약탈 문제가 끝내 덮여진 데는 당시 주변국들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개입되었다. 특히 미국은 전후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일본의 아시아 침략 문제는 물론이거니와 일본이 약탈해간 우리 문화재의 반환문제 또한 자기들의 입맛대로 유야무야 처리하였다.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은 2002년 2월 4일자 아시아판에서 약탈 문화재를 반대한 핵심 인사는 바로 일본 점령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였다고 폭로하였다. 미국의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굴한 1948년 라디오 연설 녹취록을 보면 맥아더가 ‘나는 군사행동과 점령의 결과로 상실되거나 파괴된 문화재의 원상복귀에 관해서는 소수의견일지라도 아주 강력히 반대한다’고 발언하였다.
맥아더는 문화재 반환 문제가 ‘우리(미국-필자 주)에 대한 일본인들의 감정을 악화시키고 일본이 이데올로기적 압력에 취약하도록 만들며 전복적인 행동에 적합한 토양을 제공할 우려가 있다’고 자신의 반대 이유를 설명하였다.
3. 맥아더는 대한민국의 이익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제국주의 군대의 사령관일 뿐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맥아더를 기리는 가장 큰 이유는 한국전쟁에서 대한민국을 ‘북한의 남침’으로부터 지켜주었다는 것이다. 그가 ‘우리의 영토와 주권을 찾아준 영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무지의 소치이다.
맥아더는 제국주의 미국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제국주의 군대의 사령관일 뿐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이라는 맥아더의 군사 행동은 ‘대한민국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 미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승리의 주역이 됨으로써 국제 질서의 전면에 나서게 된 미국은 소련을 정점으로 하는 공산주의 세력과의 냉전을 선포하면서 세계 패권을 장악하게 된다. 냉전 정책의 일환으로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은 일본을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으로 전환시켰으며 대한민국을 아시아 진출의 교두보로 삼았다. 한국 전쟁이 어떻게 발발되었든 간에 한국전쟁에서의 승리는 동북아시아의 전략에 있어 미국에게 관건적인 문제였다. 그래서 미국은 1950년 7월 7일 16개국으로 구성된 유엔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 맥아더를 임명한 것이다. 공군의 98%, 해군의 83.3%, 지상군의 88%가 미군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은 한반도가 ‘공산화’되는 것을 막고 동북아 진출의 교두보를 사수하기 위한 미국의 이익에 기반해서 전개된 작전이지 대한민국을 지키거나 나아가 우리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미국이 쏘아대는 포탄으로 해서 수많은 인천 시민들이 살상당했다. 상륙작전 이틀 전인 13일 하루 동안 인천을 향해 95,000파운드의 네이팜탄을 퍼부었으며, 15일 상륙 전 45분 동안 로켓발사함을 포함하여 19척으로 구성된 공격함대는 인천항에 모두 2,845발을 쏘아댔다. 아무리 전쟁중이었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예고도 없이 시민들이 거주하는 도시에 융단폭격을 가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작전이며 그런 작전을 명령한 사령관이 과연 올바른 사령관인가의 질문에 대한 답은 명확하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맥아더는 미군에게 아래와 같은 명령을 하달한다.
“서울을 탈취하라. 그곳에는 아가씨도, 부인도 있다. 3일 동안 서울은 제군의 것으로 될 것이다.”
무슨 말인가? 물론 유엔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한 발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기 진작 발언치고는 지나치다. 맥아더의 이 말을 들은 유엔군 소속 군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오로지 서울 탈환에 대한 결의만을 다졌을까. 탈환 후의 ‘전취물’을 유린하는 상상은 하지 않았을까. 그 상상은 서울 탈환 후 행동으로 옮겨 지지 않았을까.
4. 맥아더는 핵폭탄 투하까지 주장했던 세계 최대의 호전광이다
맥아더는 ‘이런 자식이 되게 하소서’라는 기도문으로 유명할 정도로 절실한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있다. 비록 군인이기는 하지만 극히 평화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그러나 앞서 2장에서 언급하였듯이 전쟁 승리를 위해서는 민간인의 죽음 따위에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 정도의 호전광이자 냉전주의자였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유엔연합군과 한국군이 파죽지세로 북쪽으로 돌진하고 있을 때 중국군의 한국전쟁 개입여부가 최대의 관건이 되었다. 미국 정부에서조차 중국의 국경선 일대까지는 진격하지 말 것을 명령할 정도였다.
1950년 10월 15일 중국군의 참전 여부를 논의하기 위해 미국 대통령 트루먼과 맥아더가 회담을 가졌는데, 회담을 갖기 직전 이승만과 맥아더는 몇 차례의 서신을 주고받았다.
<이승만이 맥아더에게>
본인은 소련은 몰라도 중공이 한반도에 개입할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봅니다. 이번에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더라도 이 가능성을 긍정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귀하가 긍정함으로써 북진을 방해하는 작전상의 제한이 가중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맥아더가 이승만에게>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본인은 믿을만한 정보통의 보고를 받고 있습니다. 중공군은 반드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가능성을 겉으로는 긍정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숨어서 압록강을 넘을 것입니다. 조금도 모르는 것으로 할 것입니다. …… 중공의 잠재적인 군사력을 때릴 만한 기회는 지금 아니고서는 없을 것입니다. 전력은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필요하다면 원폭도 불사할 것입니다.
10월 15일 한 시간 동안 이루어진 회담에서 트루먼이 중공군의 개입가능성에 대해 질문에 맥아더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럴 가능성은 없습니다.”
마침내 중국군은 인해전술로 한국전쟁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맥아더는 1950년 12월 3일 서부, 동부 전선의 모든 유엔군 부대는 38선으로 총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중국군이 개입할 가능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으면서도 자시의 북진작전에 제동이 걸릴까봐 ‘개입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해 온 맥아더는 이제 말을 바꾸어 ‘중공군이 개입했으니 이길 가망이 사라졌다. 이기고 싶으면 중공을 때려잡아야 한다’는 확전의 논리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맥아더는 미국 정부에 원자폭탄 사용을 건의했다. 맥아더는 나중에 이렇게 회고하였다.
“나는 만주의 숨통을 따라 30~50발의 원자탄을 줄줄이 던졌을 것이다. 그리고 50만에 달하는 중국 장개석 국민군을 압록강에 투여하고 동해에서 황해까지 60년 내지 120년 동안 효력이 유지되는 방사성 코발트를 뿌렸을 것이다.”
트루먼도 한반도와 만주지역에 원폭 투하를 신중히 검토했다. 최근에 공개된 미 극비문서를 통해 미국은 개전 초기부터 종전까지 몇 차례에 걸쳐 원폭 투하를 고려했음이 밝혀졌다.
미국의 원폭투하계획은 세계적인 반전 여론과 소련의 상응한 조처를 우려한 영국의 저지로 무산되었고, 원폭투하를 주장한 강경론자 맥아더는 해임되고 리지웨이가 임명되었다.
맥아더의 만주폭격 구상이 실현되었다면 이는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일이었다. 원자폭탄을 투하해야 할 목표지점으로 한두 곳이 아니라 무려 26곳을 선정하여 보고하면서 즉각적인 원자폭탄 투하를 승인해 줄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
5. 맥아더는 노근리 양민학살을 사주한 살인마이다
다음은 9월 28일 ‘서울 수복’ 직후 중앙청에서 열린 환도식에서 맥아더와 이승만이 38선 돌파를 놓고 나눈 대화이다.
이 : 장군, 38선 돌파를 주장해온 장군의 굳은 의사를 믿어도 되겠습니까?
맥 : 물론입니다. 군사상의 추적권은 승자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이 : 국군은 내일 38선에 도달합니다. 그 추적권을 인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맥 : 대통령 각하, 이틀 동안만 여유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김일성에게 항복을 권유할 생각입니다. 이에 불응하니까 38선을 돌파를 할 수밖에 없다는 형식을 취할 작정입니다.
이 : 하지만 사기충천한 현지 부대가 무슨 실수를 저지를지 모르는데 그것은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맥 : 현지부대가....... 알았습니다. (정일권 회고록 중)
추적권을 달라고 이승만이 맥아더에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미 1950년 7월 18일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맥아더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눈에 띄는 대목은 인용문 마지막의 대화 내용이다. ‘현재 부대가 무슨 실수를 저지를지 모르는데 양해해 달라’는 이승만의 이야기에 맥아더는 ‘알았다’고 답변하였다.
물론 이 대화는 38선을 넘는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의 대화이기 때문에 남측지역보다는 북측지역에서의 학살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러나 그 지역이 어디가 되었건 ‘알았다’는 맥아더의 답변이 무슨 치밀한 학살계획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당시 총사령관이 그러한 사실을 묵인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만은 분명하다.
맥아더는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은 1950년 7월 26일부터 29일 사이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일대에서 미국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 2대대 H중대의 병사들이 비무장상태의 무저항 피난민에 대한 경직된 통제작전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미 공군의 폭격과 기총소사, 그리고 미군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 2대대 병사들의 장시간 억류와 사격으로 빚어진 피난민 학살사건이다.
여기서는 당시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에 대한 부분만 다루도록 하겠다.
한국전쟁 초기 1950년 7월 미군 상륙까지 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 미 공군은 통상 수준을 뛰어넘는 규모의 육군지원 임무를 수행했다. 당시 전황을 감독하고 중요한 전략방향을 결정한 총사령관 맥아더는 인민군 집결지역이나 여타 전술적 목표지점으로 판단된 미8군의 작전지역에 통상적인 명령체계를 벗어나 직접 공군의 지원작전을 지시했다. 전략의 핵심은 접전지역에 물적 자원을 최대한 동원하는 것으로 필요한 지점이라고 판단되면 어디든 공군은 지상군의 작전을 지원했다. 물론 실제 운용에 있어서는 무차별 공습이었다.
지상군의 요청을 받은 공대지 지원사격과 폭격도 매우 빈번히 발생했다. 이것은 육군병력에 비해 월등한 우세를 자랑하는 미군이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한 1950년 7월 18일 이후부터는 더욱 더 강화되었을 것이다. 그 양상과 성격에 대해 최근 출간된 ‘The Bridge at No Gun Ri’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6월말부터 맥아더 사령부는 한국 양민들이 아직도 살고 있는 북한 인민군 배후를 향해 폭격을 퍼부으라고 명령하였다. 7월 들어 미군당국은 미육군을 향해 도로를 따라 이동하는 피난민들에 대해 기총공격을 가하라고 명령하였다.”
1907년 헤이그조약의 경고문인 “적대행위는 교전중인 무장군인들에 대해서만 한정되어야 한다”는 것도 무시한 명령이었다. 사실 1950년 9월 2일 맥아더 명의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미군이 적군인 인민군 포로는 제네바 협약에 의해 처리했지만, 보호대상인 피난민에 대해서는 특별한 보호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맥아더는 이 보고서에 나타난 것처럼 피난민을 보호하지 않았다는 수동적인 책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7월 24일 당시 일본 동경에 있던 맥아더의 지시에 응하여 제1기병사단은 ‘피난민들을 이동시키고 있으며’ ‘만약 북쪽으로 향하는 피난민이 있다면 적으로 간주하겠다는 전단을 살포했다’고 보고했기 때문이다. 노근리 사건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7월 26일 정오 제8군 사령관 워커는 극동군 최고사령관 맥아더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전선을 통과하는 어떤 피난민의 이동도 불허할 것이다(no movement of refugees will be permitted through the battle lines)"고 밝히고 있다.
맥아더의 작전 방침을 반영하여 노근리 사건 발생 하루 전인 1950년 7월 25일 미 해군 항공모함 밸리 포지호의 작전보고서에 의하면 해군 함재기들은 8~10명 이상 규모의 어떠한 한국민들에 대해서든 간에 전투원으로 간주하고 공격하라는 육군의 지시에 따라 ‘흰 옷 입은 사람들’을 공습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노근리 사건 발생 첫날인 7월 26일 오전 10시 미 제8군사령부의 라디오 메시지 형식은 “어떠한 피난민도, 반복한다 - 어떠한 피난민도 어떤 경우라도 전선을 통과하게 해서는 안된다”(No, repeat no refugees will be permitted to cross battle lines at any time)라는 명령을 모든 전선에 내렸다. 즉 맥아더 극동군 사령부 - 미 8군 - 제1기병사단(제24, 25사단 포함) - 각각 예하 연대와 대대로 이어지는 명령지휘체계에 의해 피난민들에 대한 사살명령이 내려졌으며 여기에 미 공군 전투기와 해군 함재기들이 동원되었음을 잘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증거는 미국정부는 물론이고 맥아더 또한 한국전 초기 피난민 학살에 대한 책임을 벗어날 수 없게 만든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맥아더는 총사령관으로서 피난민들을 보호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보호하지 않은 소극적인 범죄 행위만 한 것이 아니라 국제협정을 어겨가면서까지 양민에 대한 폭격을 직접적으로 지시하고 명령한 적극적인 범죄행위를 범한 것이다.
6. 대한민국에서 맥아더에 대한 평가는 전면 재조정되어야 한다.
지난 60년이 넘는 세월동안 우리는 반공 반북 이념의 포로로 살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의 친일 행적, 수많은 양민을 죽인 살상 행위 등도 ‘북한의 남침 저지’라는 대명제 앞에서는 반론의 여지가 없었다. 맥아더는 대한민국이 반공 반북의 독가스 속에서 신음할 때 가장 큰 수혜를 받아온 인물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을 물리치고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기 위해 파견된 이여송이라는 명나라 장수가 있었다. 위와 같은 논리라면 이여송 또한 ‘우리 민족을 구한 영웅’으로 떠받들어져야 한다. 이여송이 평양에서 왜군을 격파한 것이나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전세를 역전시킨 것이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지금 이여송을 ‘영웅’으로 일컫지는 않는다.
물론 이여송이라는 인물도 당시에는 왜군을 물리쳐준 영웅으로 여겨졌다. 조선시대의 지배층들은 그를 재조지은(再造之恩), 즉 다 망한 나라를 다시 살려낸 은혜를 베푼 인물로 추앙했다. 오죽했으면 평양성 전투 승리의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에서 이여송의 공적을 기리는 송덕비를 세우고 생사당(生祠堂), 즉 살아 있는 인물을 위한 사당을 짓기로 결정했을까?
맥아더에 대한 재평가는 곧 주한미군에 대한 재평가를 의미한다.
인천의 자유공원에 맥아더 동상이 세워진 것은 1957년 10월 3일의 일이다.
당시의 이승만 정권이 맥아더 동상을 세움으로써 추구했던 정치적 목표가 이여송을 기리면서 추구했던 선조와 당시 지배층들의 그것과 동일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승만과 위정 집권자들의 목표는 정확하게 미국의 대한반도 전략과 맞아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인천에 맥아더 동상이 세워진 1957년은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과 한반도의 정세에 있어서 중요한 변화가 있었던 시기이다. 베트남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적 행동을 개시하면서 미국은 주한미군의 군사력을 대규모로 증강하게 된다. 1957년 미국은 정전협정 13조 공식폐기를 일방적으로 선포하고 58년부터 대한민국에 핵폭탄, 어네스트 존 미사일, 팬텀기 등을 배치하였다. 당시 맥아더 동상의 설치가 미국의 주문에 의해서였건 이승만 정권의 독자적인 결정이었건 ‘북한의 남침에서 우리를 구한 민족의 은인’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면서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과 주한미군의 군사력 증강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했음은 분명하다. 그 맥락에서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맥아더가 선정되었을 뿐이다.
9월 8일은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한지 60년이 되는 날이며, 9월 15일은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지 55년이 되는 날이다.
맥아더가 우리 민족의 영웅이 될 수 없듯이, 주한미군 역시 우리나라의 보호자가 될 수 없다. 따라서 맥아더에 대한 재평가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며, 그 과정은 주한미군에 대한 재평가가 병행되었을 때 올바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역사는 발전하고 시대는 변화하게 마련이다. 한때 ‘영웅’이었던 이여송이 이제는 기억속에도 존재하지 않는 인물인 것처럼 맥아더가 ‘민족의 영웅’으로 인정받던 시대는 끝났으며, 남북 관계가 발전하고 있는 현 시대에 주한미군의 존재 역시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할 일이다. 분단시대에 맥아더와 주한미군이 누렸던 ‘영광’이 6․15 공동선언 시대에 와서도 유지될 수는 없는 일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