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도 바빴던 2012년 2월 9일 두 번째 모교일.
# 점심 시간
점심을 먹고 나자마자 스마트 폰을 켠다.
‘원장님~"
"식사하셨어요?’
‘오늘 저녁에 스케쥴 있으세요??’
‘예술의 전당에서 7시 30분에 하는 음악공연 티켓이 한 장 남아 있어서 여쭤보는 겁니다.’
‘....’
‘일본의 현악 연주가들인 ’어쿠스틱 카페‘ 공연이예요.’
‘....’
갑자기 주루륵 일련의 메시지가 뜬다.
앗, ‘투란’ 으로부터 온 글이다.
‘오늘 저녁에 다른 모임이 있어 못가겠네요.’
간택되어진 것에 고마운 마음이야 정말로 태산 같지만 매월 두 번째 목요일엔 항상 저녁식사 모임이 있는 날이라 난 재빨리 참석 불가의 답장을 보낸다. 나는 진료 중엔 전화나 문자를 못 보지만 쉬는 시간에 확인되어지면 곧바로 답신을 보내는 차칸 남자다.
‘그럼 다음에 기회 되면 또 여쭤 볼게요.’
투란의 답신엔 서운한 기색이 역력하다. 아무리 땜빵이라고는 하지만 아쉬운 것은 내편이 훨씬 더 할터....
.......
‘잠깐! 기둘려 봐, 만약 우리 둘 만 간다면 모임 따윈 팽개치고... .....
가도록 할께’
나는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하여 엉뚱한 제안을 한다. 연주회에 여럿이 가던 중에 일행 한사람이 못가게 되어 나를 초청한 것이겠지 하는 생각에...
‘그래요? 정말 티켓은 두장 뿐인데...’
‘같이 가기로 한 사람이 시름시름 앓고 있어서...요’
아, 그렇게 되는 구나. ‘장난의 운명’이란 것이 바로 요거구나!
‘고오-뢔?’
‘그럼.... 오시는거죠?’
‘그래도 저녁 식사는 같이 못해.. 각자 해결해도 좋으면 갈께.’‘오늘 음식점을 내가 소개해서 식당에는 꼭 가 봐야 해.’
그러자. ‘삐빠따’를 실천하자. ‘삐빠따’란 삐지지 말고, 빠지지 말고, 따지지 말자는 새 시대의 나의 좌우명이다. 옳지, 저러콤 부를 땐 빠지지 말자!
‘그럼, 약속은 되었습니다.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 시작 10분전에 만나요. 7시 20분입니다.’
‘아라쩌요.’
# 그 날 오후
‘어쿠스틱 카페 Acoustic cafe?’
음악에 워낙 문외한이라 이 그룹에 대하여 들어 본 적은없어도 요즈음 청주 시내 길거리에서 공연 안내 현수막을 본 기억은 있다. 아마도 기타를 꽤 잘 치는 자 들이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스마트 폰에서 검색을 해 보니 그들의 자작곡 ‘라스트 카니발’과 ‘Hope for tomorrow’가 뜬다. 내가 좋아하는 재즈 풍의 클라식 음악이다. 재빨리 두 곡을 다운 받아 몇 번을 계속해서 들어 본다. 이럼으로써 오늘 공연하는 그들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춘다.
‘어쿠스틱 카페 Acoustic cafe’는 일본의 뉴에이지 연주 그룹으로 세 명의 멤버가 바이올린, 피아노, 첼로를 각기 연주한다. 1991년 데뷔하여 총 6집의 음반을 낸 한국에서도 인기가 많은 그룹'이라는 인터넷의 설명이다.
# 공연 직전
정말 오랜만에 가 보는 '청주 예술의 전당' 본관이다. 최근에는 부속 전시실까지 가 본적은 있어도 주 연주장엔 갈 기회가 없었다. 무척 혼잡하다. 현장에서 표를 사려는지 건물 내부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자리를 잡고 보니 객석은 거의 만석인데 웬일인지 우리 줄 옆자리 중앙 쪽으로 십 여석은 텅 비어 있다.
‘겨우 오십만 청주 인구로 어떻게 이 큰 공연장을 꽉 메울 수 있지? 값도 꽤 비싸던데...’ 하며 놀라움을 표현하자
‘시민들이 문화에 갈증이 있나 봐요. 그리고 우리처럼 소셜 커머스를 이용하면 표는 싸게 살 수 있어요.’라는 투란의 대답이다.
'갈증!' 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목이 마르다.
‘하지만 나에겐 그렇게 고상한 문화에 대한 갈증이 왜 없는 걸까?’라 생각하며 나름대로 갈등에 빠져 들고 있는데 갑자기 징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관람석 전등이 꺼진다. 그런데 난데없이 한 무리의 아주머니 군단이 어디선가 나타나더니 소란스레 옆자리를 메우기 시작한다. 서로들 ‘권사님’ ‘집사님’하며 호칭하는 것으로 보아 어느 교회에서 단체로 관람을 오신 듯하다. 그래도 다행히 연주자들이 무대에 서기 전에 자리를 다 잡으신다.
연주에 대한 논평은 하지 않겠다. 그럴 자격도 없거니와 그건 내 몫이 아니다. 이 그룹의작곡자이자 연주자인 츠루 노리히로는
“이 음악을 들으면 영상이나 풍경, 이야기를 떠 올리게 된다는 말을 자주 듣고 스스로도 이를 의식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런 점이 좋은 의미에서 사람의 마음을 활성화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라고 밝힌다.
# 1부 공연
연주가 시작되고 정확히 6분후.
옆자리에 착석한 아주머니 군단들 중 약 반 수 정도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낸다. 교인들이니 성경책을 찾아 읽으려나 했으나 뜻밖에도 밝게 빛나는 물건들을 들고 있다.
스마트폰이다!
휴대폰 문자판을 누르는 소리에 더해 동영상까지 보는 중이다.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에 무척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다. 어두운 연주회장 안에서의 옆 좌석 아주머니들의 스마트폰 불빛은 내 눈 뿐 아니라 마음까지 계속 어지럽힌다.
음악만이 고요히 흐른 연주회장이니만큼 옆자리의 친구들 끼리 말로 대화하지 못하고 서로 문자로 안부를 주고받는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 인생의 중요한 일이 계속 생겨나는지 스마트폰을 놓지 못하고들 있다. 스마트 폰이 없는 아주머니들은 가끔씩 두런두런 소리를 내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곤 했으니... 아아, 인내의 한계여. 그러나 누굴 탓하랴. 이 소란한 떼루아 역시 스마트폰을 이용해서 구입한 싼 티켓 때문이지 않을까?
# 연주회 중간 휴식 시간
1부가 끝나고 휴식시간이 되자마자 난 옆자리의 손님에게 조용하게 이야기를 한다.
다른 것은 그만두고 오직 ‘휴대폰 화면의 밝기를 좀 낮추어 주세요’라고.
그리고 나도 스마트 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한다.
"이 그룹을 일컬어 피아노 삼중주라고 하는가? 중학교 음악 시간 때 배웠는데.... 정확히 모르겠네?’
‘그런데 왜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의 세 악기가 합주하는 것을 피아노 3중주라고 하지?’
등등 의문이 생겼기 때문이다.
# 2부 공연
전반부와는 달리 내가 알고 있는 음악을 꽤 많이 연주한다. 이럴 땐 기분이 완존 좋다.
게다가 옆자리의 아주머니는 문자 날리는게 더 중요 한지 중간 휴식시간 시작되자 나가고 나서 공연이 끝날 때 까지 들어오질 않는다.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대신 그녀의 문자 메시지에 행운이 깃들기를 빌어 준다.
옆 자리의 투란이 수상하여 힐끗 쳐다보니 눈에 고인 물을 휴지로 닦고 있다. 악기 연주를 들으면서 흘리는 감수성이라니! 그런 꼴은 생전 처음 본다.
피아노 연주자가 입은 드럼통 모양의 치마가 퍽이나 인상적이고 연주장에 자리잡은 세 아기(바이올린 피아노 첼로)의 삼각형 구도가 이채롭다. 날으는 바이올린, 뛰는 피아노보다도 걷는 첼로가 훨씬 더 편안함을 준다.
# 공연이 끝난 직후
청중들은 고요히 박수를 친다.
그야말로 정중히 박수만 한다.
그러나 이 정도의 박수 소리에 연주자들은 성이 안 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앙코르 송’을 청하려면 일어나서 기립 박수를 쳐야 모양새가 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꿈적도 않고 앉아서만 박수를 친다. 고함 소리도 없이 조용히.
외국의 공연에서 휘파람 소리며 괴성과 함께 모두 일어나서 앙코르를 청하던 것을 기억한다.
이번 겨울, 런던에서 그 보잘 것 없는 플레이에 관객들이 모두 기립하여 박수로 축하해 주던 기억도 새삼 난다.
한국의 관객이 그런 것인가? 청주의 문화가 그런 건가? 하지만 나도 일어나서 청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연주자들이 앙코르를 받을 기분이 영 아닐 것이다.
무대에서 빠져 나간 연주자들도 되돌아 올 생각을 않는다. 이러다 점점 박수 소리도 잦아지고 그리하여 앙코르는 영 물 건너가지나 않을까 염려가 된다.
그러던 중 갑자기 기적이 일어난다!
우리 옆의 아주머니 군단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아주머니들이 우루루 일어나자 바로 다른 관객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나서 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일부는 고함소리와 함께 휘파람 소리도 낸다.
무대의 커튼 뒤에서 청중들의 반응을 살피고 있던 연주자들이 그 제서야 반색을 하며 앙코르 음악을 연주하러 제 자리로 돌아온다.
청중들이 다시 자기 자리에 앉고 연주자들도 제 자리를 찾아 악기들을 튜닝하고 있는 중에도 아주머니들은 일어서지도 앉지도 않은 채 엉거주춤 한동안 계속 서성인다. 연주에 감동을 무척 많이 받은 모양이다.
아, 이 앙코르는 위대하신 우리의 아주머니들 덕분이야! 라며 속으로 감사를 표하는 중 아주머니 한 분의 절규絶叫를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된다.
‘이럴까 봐 끝나자마자 일어나서 빨리 나가자고 내가 문자 날렸잖아!’
P.S.
이날의 마지막 앙코르 곡은 이들의 대표작 라스트 카니발Last Carnival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