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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1일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마태오 20,1-16
심판 이후에 받게 될 영광에 대한 기대가 지금 행복을 좌우한다
존 뉴턴은 반항적이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에 참여하며 노예들을 가혹하게 다루었고 고난과 도덕적 타락으로 가득 찬 소란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1748년 3월, 그의 배 그레이하운드(Greyhound)는 북대서양에서 격렬한 폭풍에 휘말렸습니다.
배는 심하게 손상되어 침몰할 것이 확실해 보였습니다.
배의 키잡이였던 뉴턴은 폭풍 속에서 배를 조종할 때 배 밖으로 떠내려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키에 몸을 묶어놓아야 했습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이 시련 동안 뉴턴은 심오한 영적 각성을 경험했습니다.
배가 파도에 부서지자 뉴턴은 어렸을 때 돌아가신 어머니의 종교적 가르침을 떠올렸습니다.
배의 운명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였을 때 뉴턴은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며 절박한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기적적으로 그레이하운드는 폭풍에서 살아남았습니다.
뉴턴은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과 같은 사람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것입니다.
지금은 그런 기대를 할 수 없었고 정말 지옥에 갈 사람처럼 살아왔습니다.
그는 점차 이전 삶의 방식을 버렸고, 1754년에는 노예무역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성공회 신부가 되어 노예 폐지 운동에 영향력 있는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그가 쓴 찬송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에 그의 마음이 잘 나타납니다.
“놀라운 은혜, 감당할 수 없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잃었던 나를 찾았고, 눈먼 날 보게 하셨네. 놀라운 하느님의 은혜….”
오늘 복음에서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고 하십니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아침에 만난 이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습니다. 아홉 시에도, 열두 시와 오후 세 시, 그리고 다섯 시쯤에도 나가 그렇게 하였습니다.
주인은 다섯 시부터 온 이들에게 먼저 한 데나리온씩 주며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세 시에 온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와서 일한 이들은 조금 더 받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들에게도 한 데나리온밖에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불평합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그러자 주인은 그들을 꾸중합니다.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일해놓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적게 받았다고 불평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로 첫째였다가 꼴찌가 되는 이들입니다.
한 데나리온으로 그들을 포도밭에서 일하게 한 이유는 그들을 행복하게 하려는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존 뉴턴과 같은 사람은 어떨까요? 지옥에 갈 줄 알았고 또 지옥의 사람처럼 살았던 뉴턴은
늦었을 때 주님께 돌아왔고 자신과 같은 죄인을 살리신 놀라운 하느님의 은혜를 노래하였습니다.
그가 나중에 성공회 사제로 살았지만, 그의 봉사는 자신이 받은 은혜에 비해 너무 작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힘이 들 수 없었습니다.
지금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 높은 자리에 앉습니다.
그러려면 더 높은 영광을 기대해야 합니다.
저 같은 경우도 ‘비르짓다의 7기도’를 바치면서 연옥에 가지 않고 순교자의 지위에 오른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달랑 그 기도를 한다고 피를 흘리며 순교하신 분들의 영광이 주어진다는 것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때문에 지금 내가 하는 봉사는 그 은혜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 때문에 진짜 하늘 나라에서 그런 지위에 오를 것을 압니다.
지금부터 행복하려면 한 데나리온의 값을 무한히 큰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자신이 갔어야 할 지옥을 보고 체험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구원이라는 한 데나리온의 값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평생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 결코 힘들게 느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롤의 ‘스크루지 영감’은 자신이 죽고 난 후의 무덤과 비석에 사람들이 침을 뱉는
미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젠 자신의 무덤에 많은 이들이 꽃을 놓아주는 상상을 합니다.
그리고 그 기대만큼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이전 수전노의 지옥의 삶이 아닌 천국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더 큰 영광을 기대합시다.
그리고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한 데나리온의 값이 하느님 아드님의 피 값임을 믿읍시다. 그러면 그분 안에 머물기 위해 그분 뜻을 따르는 삶이 전혀 고생스럽게 느껴지지 않고 항상 부족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이 행복이 진짜 영원한 행복을 보증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21일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마태오 20,1-16
누군가가 주님으로부터 관대한 사랑을 받았다면 함께 기뻐해주고 축하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포도밭 일꾼’ 비유에 대한 교부들의 해석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이른 아침에 불린 일꾼들은 아담과 에녹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아홉 시에 불린 일꾼들은 노아와 셈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열두 시에 불려간 일꾼들은 할례의 법이 세워진 아브라함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오후 세시에 불려간 사람들은 모세와 다윗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오후 다섯 시에 불려간 사람들은 이민족 사람들이었습니다.
저같이 게으름뱅이며 늑장부리기의 대가에게는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이든 이방인이든, 빨리 온 사람이든 늦게 온 사람이든 상관하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한 데나리온, 곧 성령의 은총을 선물하심으로써, 우리 모두가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되게 하십니다.
우리 각자의 영혼에 하느님의 인장을 찍으시며 불멸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맨 먼저 포도밭에 와서 하루 온종일 일한 사람들의 불평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 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마태오 복음 20장 12절)
이 사람들의 투덜거림에서 또 다른 한 얼굴이 떠오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등장하는 첫째 아들의 얼굴이지요.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루카 복음 15장 29~30절)
이 대목에서 우리는 주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철저하게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은총의 햇빛과 단비를 선물로 주시는 크신 하느님이십니다.
아무리 죽을죄를 저지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끝끝내 회개하기를 인내롭게 기다리십니다.
주님께서 내게 베푸신 크신 은총과 축복에 깊이 감사하고 찬미 드리면 그만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받은 더 큰 은총과 축복을 보고 시기질투하거나 배 아파하지 말아야하겠습니다.
누군가가 주님으로부터 관대한 사랑을 받았다면 함께 기뻐해주고 축하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 역시 맨 먼저 포도밭에 온 사람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큽니다.
맨 먼저 온 사람들은 어쩌면,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먼저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저 감지덕지하면서 겸손하게 살았어야 했는데, 먼저 불림 받았다는 것에 대한 우월감, 자만심으로 가득했고, 그 결과 주님으로부터 큰 질타를 받은 것입니다.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마태오 복음 20장 14~15절)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강론>
(2024. 8. 21. 수)(마태 20,1-16)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은총은 ‘내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입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마태 20,1-5).”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 20,9-16).”
1) 여기서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라는 말은, 뒤의 20절-23절에 있는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의 이야기에 연결됩니다.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마태 20,20-21).”
제베대오의 두 아들은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입니다.
두 사도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요청한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두 사도가 요청한 것입니다.
두 사도의 요청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열두 옥좌’를 주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에 연결됩니다(마태 19,28).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는 열두 옥좌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첫 제자들이고, 예수님께서 어떤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 사도만 데리고 가신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두 사도는 자기들이 예수님의 최측근 제자로서 열두 옥좌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 생각은 포도밭에 맨 먼저 온 이들이, 늦게 온 이들보다 품삯을 더 받기를 기대한(요구한) 것과 같습니다.
2) 또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라는 말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의 말과 비슷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루카 15,29-30).”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에 나오는 ‘맨 마지막에 온 이들’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과 같고, ‘맨 먼저 온 이들’은 ‘큰아들’과 같습니다.
두 비유는 모두, ‘맨 먼저 온 이들,’ 또는 ‘큰아들’과 같은 사람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타이르는 가르침입니다.
동시에 주님께서 ‘맨 마지막에 온 이들’, 또는 ‘작은아들’과 같은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것을 시기하거나 항의하지 말고, 그 자비에 동참하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3) ‘구원의 은총’은 노동의 대가로 요구하는 품삯이 아니라, 주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자비’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일꾼들, 품삯’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신앙생활을 ‘노동’으로, 또 은총을 ‘품삯’으로 생각하는 것을 꾸짖기 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신앙생활은 결코 노동이 아니고, 은총은 품삯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은총입니다.
그리고 ‘은총’은 주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4) 태어나자마자 유아세례를 받고 평생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이 들어가는 하느님 나라와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회개한 사람이 들어가는 하느님 나라는 다른 나라가 아니라 같은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더 좋은 나라가 따로 있을 수 없고,
덜 좋은 나라가 있을 수도 없습니다.
<성당에 일찍 와서 잘 준비하고 미사 참례를 한 사람이 받아먹는 성체와 늦게 온 사람이 먹는 성체가 다를 수 없고, 일찍 왔다고 성체를 두 개씩 주는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평생 마음껏 살다가 죽기 직전에 회개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생각이고, 그런 진정성 없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미사 시간이 다 지나가도록 밖에서 놀다가 영성체 때가 되어서야 성당에 들어와서는 성체를 받아먹어도 되겠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도 역시 어리석은 생각이고, 만일에 실제로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성체 모독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