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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아홉, 세상을 다시 시작하다.
리스타트. 01
-“문디 가시나야, 그래서 나올래 말래”
“안 나간다니까 왜 이리 사람을 귀찮게 하는데?”
-“니년 서울물좀 먹었다고 친구가 니볼라꼬 왔는디 이리 버려두기냐?”
“니가 나볼라고 왔나, 형식이 볼라고 왔재 끊으라!”
내 나이 스물아홉. 이제 서른을 앞둔 나는 참 많은것이 달라져 있었다.
중·고등학교를 대학을 위해 쉼없이 공부하며 달렸고, 대학에 막 입학한 스물. 중·고등학교때 못해본걸 하겠다며
이것 저것, 안해본것 없이 노느라 1년을 뭘 했는지도 모르게 보냈으며, 그 후 현실을 깨닫고 취업을 위해
또 그 지긋지긋한 공부를 했다. 공무원 시험이다 뭐다 5년간 준비하다 물만 오지게 먹고 결국 그쪽은 나의
취향이 아님을 뒤늦게서야 알고 나는 다시 백조가 되었다. 다들 5년 공부했으면 이제 붙을때도 되지 않았냐고
헛공부 한것이 아니냐고 하는데 나는 피똥싸가며 공부하는 그 순간만큼은 열심히 했다고 자부한다.
집.독서실.학원 이렇게 세군데만을 다니며 공부했던 나였다. 그 좋아하던 술도 끊어가며 공부했다.
그런데도 나는 시험에 붙지 못했고, 처음 2년은 오기 때문에 도전했고, 그 다음 해는 부모님 뵐 면목이 없어
더 열심히 노력했고, 그 다음해는, 이제 정말 이것 아니면 나는 그 어떤것도 할수 없다는 생각에 죽을힘을
다해 공부했다. 그리고 마지막, 바로 그제까지, 나는 이제 정말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공부했으나 결국 결과는
5년간 숱하게 그래왔던 것처럼 실패였다.
어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이제 너무 힘드니 그만두겠다며 엉,엉 울고 나서야 부모님도 이제야 포기하라는
말을 내게 해주셨고, 바로 나는 어제 그 지긋지긋한 공부속에서 해방이 된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왜 이리도 기분이 허한지. 무릎을 괴고 앉아 멍하니 창문 밖을 쳐다봤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0년이란 시간이
흘렀는데 나는 아무것도 이루어 낸것이 없다. 대학교 입학하기 전, 나의 인생 계획을 세웠을때 아마 지금의
나는 멋진 신랑을 만나 예쁘게 신혼생활을 해가고 있어야 했다. 아마 내가 원하는 직업을 가진채로 말이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건 꿈이였으며 망상이였다. 현실은 스물 아홉의 나를 아직도 사회생활의 ‘사’자 조차
겪어보지 못한 애송이로 만들었다.
에휴- 한유결. 이제 어떻게 살래. 시험 준비할때야 부모님이 꼬박꼬박 생활비를 주셨다고 하지만 시험까지
떼려친 마당에 부모님께 또 다시 손을 벌릴순 없고..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가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렇게 고민하고 있을 시간도 없다. 하루라도 빨리 내게 맞는 직업, 아니 그따위 필요없다. 그저 돈을 벌수
있는 길을 선택해야만 한다!
.
.
.
“J대를 졸업했네요?”
“예? 예..”
이력서를 여기저기 살펴보던 남자가 묻는다. 뭐야 의외라는듯한 그 눈빛은? 아마 스물 아홉이란 나이가 되도록
제대로 된 직업조차 찾지 못하고 이 쬐끄만 회사의 경리일이나 보겠다고 와있는 내가 한심스러운거겠지···.
어디 전문대라도 졸업한 모양으로 보였나본데, 이거 왜이래? 이래뵈도 나 J대 출신이야. 서울에서 중상위권에
속한다는 J대!
“하긴 요즘 세상이 대학따지며 사람 받아준답니까? 자기 특성이 중요한것이지. 요즘엔 S대 나오고도 나이
마흔이 다되도록 사법고시 공부한다고 고시원에 박혀있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것에 비하면 한유결씨는
이제 파릇파릇하고 싱싱한 잎새지요!”
“아..네..네..”
“그래, 그래도 대학에서 배운것이 있을텐데 여기서 이 일하는데엔 조금 불편하지 않겠어요?”
“아니요! 상관없습니다! 일만 시켜주시면 뭐든 잘할수 있어요!”
나도 모른다. 당신 말대로 내가 잘할수 있을지는. 하지만 하나 확실한건 나는 하루라도 빨리 돈을 벌어야 하고,
내 능력으로, 아니 정확히 말하면 대학하나만 내새워서는 내가 들어갈수 있는 회사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것이다.
“그래요? 알겠어요. 그럼 월요일부터 출근하도록 합시다”
“네? 정말요? 아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일사천리로 해결된 나의 첫 직장구하기. 이렇게 빨리 해결될 문제였는데 어째서 나는 몇 년을 어렵게 고민
했을까? 어째서 50만명의 대학 졸업생중에 단 4만명만이 취업을 하는것일까? 왜? 훗. 회사를 나와 앞으로
내 회사가 될 건물을 돌아봤다. 조금 낡은듯 보이는 3층 건물이였지만 대 만족이다. 얏호! 오늘은 이 기념으로
술이나 잔뜩 마셔야지!
.
.
.
“네에? 뭐라구요?!”
-“회사에 사정이 생겨서 유결씨의 출근이 무기한 보류되었어요. 미안해요. 더 좋은 직장 찾길 바랄게요”
“이봐요 이보세요! 야!!!!”
매정하게 끊긴 전화를 나는 한없이 바라봤다. 뭐? 회사에 사정이 생겨서 뭐가 어째? 이보쇼! 그런 말은 적어도
3일전에는 해줘야 하는거 아니야?! 바로 내일 당장 출근한다는 그 기쁨에 거금 20만원을 들여 정장까지 샀단
말이얏!! 한번 입어봐서 환불도 안될텐데···. 이 돈이면 나의 한달치 생활빈데. 눈이 점점 흐려지더니 눈물이
차올랐다. 억울하다 억울해. 이틀간 취직됐다는 기쁨에 오랜만에 대학 친구들에게까지 연락해서 술을 쐈던
나였다. 그 돈만 해서도 거의 십만원이다. 삼십. 아니 정확히 29만 7천 800원을 나는 3일만에 날렸다.
젠장.
“하윤아..술좀 사주라..”
내가 힘없이 전화해서 말하자 대학 친구였던, 그리고 유일하게 지금까지 나의 벗인 하윤이는 흔쾌히 허락
했고, 하윤이가 직장에서 돌아올 시간에 맞춰 나는 하윤이네 집 근처에서 하윤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윤이의 아파트 입구에 멍하니서서 애꿏은 땅만 발로 쳐대고 있는데 저 멀리서 딱 봐도 고급차로 보이는
승용차 한 대가 매끄럽게 들어오더니 내 앞에,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파트 입구 앞에 멈춰선다. 쩝.
누군지는 몰라도 차 한번 겁나게 좋은거 몰고 다니네···.
“고마워요. 그럼 내일 뵈요”
부러우면 지는거란 생각이 들어 차가 멈춰서자 마자 고개를 땅으로 박아버렸다. 그러나 곧,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에 나는 땅을 치던 발도 멈추고 고개를 올려 그 여자를 쳐다봤다. 맙소사! 그 고급승용차에서 내린건
다름아닌 나의 친구 하윤이였다. 나는 멍하니 하윤이와 고급 승용차를 번갈아 쳐다봤다. 하윤이가 창문을
통해 손을 흔들면 차는 다시 매끄럽게 출발한다. 어쩜. 출발할 때 엑셀 밟는 소리도 안나. 저게 말로만 듣던
소리도 없이 움직인다는.. 하윤이는 그렇게 사라지는 차를 한참이나 보더니 곧 아파트 앞에 멍해진 나를
발견했는지 내게로 다가온다. 오..오지마! 내가 아는 나의 친구 하윤이가 아니야 넌 누구냐!
“벌써 왔어?”
“뭐.뭐야! 나 알아?”
“왜이래 한유결?”
“난 너 몰라!”
“..이게 어디서 굴러먹던 개그를 배워와서는.. 술 안먹을거야? 먹기 싫음 쌩까던가”
“아.알아! 내 친구 손하윤! 안다구!”
“진작 그럴것이지. 빨리 따라와”
그러나 결국 2만원짜리 술앞에서는 나도 한없이 약해지고 만다. 앞서 걷는 하윤이를 총총 뒤따르며 겨우
하윤이의 옆에 서서 발걸음을 맞춰 걸었다. 그리고 한번, 두 번, 세 번, 하윤이를 힐끗 쳐다봤다.
고얀년. 여우같은년. 어디서 저런 차를 물었지? 나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 오호라. 니년이 나 배알이 뒤틀려
죽는꼴이 보고 싶어서 오늘 술을 사준다고 흔쾌히 허락했구나? 암. 해가 서쪽에서 뜨나 했어 어째?
“뭐야 왜 그렇게 쳐다봐?”
그래놓고서 내가 힐끗 대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도도하게 정면을 바라보는 하윤이의 콧날을 어찌나 눌러주고
싶은 충동이 드는건지. 하지만 300만원이 넘는 하윤이의 고급 실리콘을 물어줄 돈이 나에겐 없었으므로 조용히
그 충동을 무시하고 물었다.
“누구야? 아까 그 차?”
“아~ 우리 전무님?”
“우.리 전무님?”
그 말이 하고 싶어 얼마나 참았을지 안봐도 뻔하다. 말하는거나 느낌상 꽤 만난 사이 같은데 먼저 나한테
말했다가는 친구고 뭐고 절교할까봐 말도 못하고 있었겠고······. 눈에 선해 손하윤.
“뭐야 빨리 불어”
“우리 회사 전무이사야. 만난지 이제 두달정도?”
“왜 미리 말 안했어?”
“정말 마지막이라고 모든걸 걸겠다고 하면서 죽을것 처럼 공부하는 너한테 어떻게 말하냐?
친구 하나 잃으라고?”
“지랄한다. 자랑하고 싶어 그동안 얼마나 참았을까?”
“아니거덩요!”
“아니긴. 했냐?”
“뭐.뭘!”
“꼴에 내숭은 그거 해봤냐고!”
“모.몰라! 그런걸 묻고 그러냐!”
“아이고. 하긴 손하윤 불여우가 두달이 다되도록 안했을 리가 없지.
눈 높은 손하윤이 두달동안 만날정도면 얼굴도 꽤 반반하겠다. 거기다 능력좋아요 차도 있어요
하루 빨리 잡으려고 안달려 들었음 다행이다”
“한유결!!”
지가 승질내면 어쩔꺼야 사실인데. 아무렴 하윤이도 할말이 없는지 크게 내 이름만 한번 외치고서는 투덜대며
술집안으로 들어간다. 잠시 멈춰서서 불여우년을 속으로 씹어주고는 따라 술집으로 들어갔다.
“이모 여기 골뱅이랑 이슬 하나만요”
내 의사는 묻지도 않고 주문먼저 한 하윤이를 째리며 맞은편에 앉았다. 몇주 안본사이에 좀 더 예뻐진것 같은
하윤이년을 빤히 쳐다보자 하윤이가 헛기침을 하며 내 시선을 애써 외면한다.
“사랑이 좋긴 한갑네. 얼굴 핀것좀봐”
“큼.큼..”
“아드레날린이 막 분비해서 미치겠냐?”
“한유결 자꾸 그럴래?”
“누군 좋~겠다. 남자 있어요 직장 있어요. 에효 내 신세는 이게 뭐냐”
“너 내일 출근한다며. 왜그래?”
“헷. 출근?”
먼저 갖다준 소주를 따르고 짠도 하지 않고 입에 소주를 털어넣자 하윤이가 사태의 이상함을 느꼈는지
더 이상 묻지 않고 가만히 나를 쳐다본다.
“에효. 내팔자에 출근은 무슨. 째깐해도 잘나가던 회사가 갑자기 내가 출근한다니까 사정이 어렵댄다.
그래서 내 출근이 무기한 보류 되었단다. 뭐 이런 좆같은 경우가 있냐?”
“어머. 그래서? 그 회사 망한거야?”
“그거야 모르지. 진짜 회사가 부도가 난건지 아니면 나보다 훨배 능력좋은 년이 이력서를 낸건지······.”
“야 그 회사도 무책임하다. 출근하라고 해놓고 하루전에 짜르는 경우는 뭐냐?”
“짤린거 아니거든!”
“무기한 보류라며, 그거나 그거나”
“죽을래?!”
꼴에 자존심은 있다고 절대 짤린건 아니라고 우기는 나를 하윤이는 한심하게 쳐다보더니 이내 소주를 가져
가더니 내 잔에 따라주고는 자기 잔에도 마저 채우고는 잔을 내민다. 한숨을 내쉬고는 나도 잔을 들어 가볍게
잔끼리 뽀뽀를 시키고는 입에 술을 털어넣었다. 캬. 술맛한번 쓰네···.
“야 너네 회사에 청소부라도 할거 없냐?”
“엥? 미쳤냐 한유결?”
“뭐가..”
“너 이제 스물 아홉이야. 젊지도 않다만 아직 늙지도 않았어. 다른 직장 찾아보면 돼지 무슨 청소부야?”
“엄마 아빠 뵐 면목이 없어서 그런다. 큰딸내미라고 있는게 서른이 다되도록 남자도 없어요 직장도 없어요
얼마나 애가 타시겠냐. 그럴바엔 차라리 청소라도 해서 돈이라도 벌어야지”
“유관이가 잘하잖아”
내게는 한 살 터울의 남동생 하나가 있다. 한 유 관. 우리집의 보석이자 우리집의 기둥이며 그리고 우리 집의
실질적인 주주나 마찬가지다. 평생 공무원이신 아빠덕에 내가 돈을 벌지 않아도 당장 입에 풀칠도 못할만큼
어려운 사정은 아니지만 그래도 60을 바라보고 계시는 부모님께 이나이 먹도록 용돈은 커녕, 그 흔한 빤스
한 장도 사주지 못했다. 5년간은 공부라도 했기에 덜 미안했지만 그것마저 떼려친 마당에 청소가 왠말이냐
자존심? 그런것도 없다. 물론 잘나신 동생님 유결이가 부모님을 잘 모시겠지만 그래도 눈치가 보이는건
사실이다. 이제 곧 장가갈 남동생에게 누나로써 집한채라도 사주면 좋으련만······.
“너 또 유관이한테 집한채라도 해주면 좋을텐데 생각했지?”
“헥. 귀신이다 귀신 돗자리 깔아라”
“야. 요즘 세상에 동생 결혼한다고 집 해주는 누나가 어딨냐? 냉장고나 하나 사주면 잘해주는거지”
“나 대학공부 시켜준거 유관인거 모르냐?”
“그게 유관이가 시켜준거냐? 너희 아버지가 시켜준거지”
“무튼. 나 5년동안 공부한다고 돈 안벌때 돈 벌어서 우리 부모님 모신거 유관이잖아.
그게 그거지.”
“아들이 해야할 일이야. 그게 뭐 어때? 경제적인 능력이 되는 자식이 부모님 모시면 돼지
그게 첫째고 둘째고 뭐 나이순대로 해야할 일이냐?”
하윤이 말도 틀린건 없다. 열손가락 깨물어 안아픈 손가락 없다고 자식은 다 같은 자식인데 큰딸이라고
더해드리고 둘째라고 덜해드리고 그런게 어딨겠는가. 그래도 큰딸이라는 그 무거운 짐을 안고 태어난 이상
두손놓고 가만히 있을수는 없었다.
“정 그러면 우선 알바라도 해봐. 알바라도 하면서 직장 구해보면 돼잖아”
“누가 스물 아홉먹은 여자를 알바하라고 써주겠냐?”
“그럼 어디 학원 강사라도 알아보던가. 15년간 공부만 했는데 제일 자신있는것도 공부고”
“요즘에는 S대 나오고도 임용고시 안보고 학원으로 강사뛴단다. 수입이 더 짭짤하다고..
니가 학원 원장인데 S대 나온 년이랑 J대 나온 년이랑 누굴 받아주겠냐?”
“밑져야 본전이라고 그래도 한번 알아보기나 해봐라. 혹시 아냐?”
“아서라 아서.”
“청소부 한다고 설치는것보단 괜찮은거 아니냐? 어 감사합니다~”
하윤이가 말을 하는 도중 나온 골뱅이를 보며 나는 침을 삼켰다. 직장이고 뭐고 우선, 오늘은 먹자. 좀 먹고
스트레스좀 풀자!
“좀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학원 다니는거...무리겠냐?”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술병도 세병을 다 비워갈때쯤 내가 조용히 물었다. 잠시 내 말뜻을 이해하려는
듯이 가만히 있던 하윤이가 곧 이해가 갔는지 들고 있던 젓가락은 자리에 놓는다. 그 행동에 씁쓸하게
웃으며 소주를 다시 입에 털어넣었다.
“한유결. 아직도야?”
“뭐가..”
“야. 아직도 못버렸어? 너 이제 스물 아홉이다. 스물 아홉. 요즘엔 두 세 살 꼬맹이들때부터 시작해.
모르냐? 문 메이슨? 걔 봐라 몇 살이냐? 그런데 스물 아홉 니가 이제 시작하겠다고?”
“......”
“애초에 버릴꿈은 버리는게 좋아. 그냥 닥치고 학원이나 알아봐. 내가 언니한테 언니 학원에 선생자리
비었는지 물어볼테니까. 정 안되면 삼촌한테라도 내가 빌어서 삼촌 샵에 자리 마련해줄테니까 가서 알바라도
뛰어 알았어?”
“....”
“한유결 알았어 몰랐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래. 너무 늦었겠지? 지금와서야 연기를 한다는건 아무래도 불가능
하겠지?
꼬마야. 네 꿈이 뭐니?
저요? 저는 연기하는게 꿈이예요!
그래? 생긴게 참 예쁘게 생겨서 연예인 되면 인기 짱이겠다! 나중에 이 아저씨 몰라보면 안된다!
네!
그래. 나에게도 꿈은 있었다. 어렸을때 철없을때 누구나 선망하고 한번쯤은 꿈꿔본다는 배우. 그것이 내 꿈이
였다. 어느 부모가 그렇듯 당신 자식이 미래가 불투명한 연예인이 되고 싶다는데 그러라고 흔쾌히 허락하겠는가
아. 아마도 30억쯤 되는 돈을 당신 돌아가시면서 남겨주실 능력이 되시는 부모라면 말이 달라질지는 몰라도,
많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네식구 먹을만큼은 벌며 사셨던 우리 부모님이였기에 당연히 반대하셨다.
완강한 반대에 잠시 꿈을 묻었던적이 있었으나 단 한번도 잊지는 않았다. 스크린 속에서 나의 연기하는 모습을
사람들이 봐준다는것. 그리고 내가 기뻐하면 같이 기뻐해주고 슬퍼하면 같이 울어주는것. 내 연기를 보며
또 하나의 삶을 발견해주고 동화되어 가는것. 공부란 것에, 그리고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혀서 찢어지고
2인자가 되어버린 나의 소중한 꿈.
.
.
.
“어떻게 오셨어요?”
다음날, 숙취도 제대로 하지 못한 내가 일어나서 모자만 대충 눌러쓰고 향한곳은 바로 명동의 한 연기학원
이였다. 아마 내가 지금 여기 와있다는걸 부모님이나 하윤이가 안다면 내 머리끄댕이를 잡고 날 죽이려
들겠지?
“네? 아, 저기 여기 원장님좀..뵐수 있을까요?”
“원장님요? 아 상담받으러 오셨구나?! 저 따라오세요!”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연습을 하던 중이였는지 거울 앞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트레이닝복을 입은 한 여자가
앞장선다. 얼굴도 엄청 곱게 생긴게 분명 연습생일것이다. 상담이란 말에 옹기종기 앉아있던 무리들이 고갤돌려
나를 쳐다보는게 느껴진다. 등줄기가 사늘해지는게 굉장히 떨린다.
똑-똑. 여자가 얼굴만큼 고운 손으로 문을 두드리고.
“원장님 손님 오셨어요!”
말과 함께 문이 열리고 들어가란듯한 눈빛을 해보인다. 여자에게 고맙다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방 안으로
들어오자 의자에 앉아있던 중년의 여성이 보고있던 것을 내려두고 고개를 들어 나를 잠깐 쳐다보더니 일어난다.
“어떻게 오셨나요?”
“아. 저기 저는 그러니까..”
내 우물쭈물 거리는 대답에 여자는 잠시 인상을 짓더니 보기만 해도 엄청나게 중압감이 느껴지는 걸음걸이로
내게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그저 걸어만 왔을뿐인데 이렇게나 떨리다니. 긴장해서 침을 꿀꺽 삼켰다.
여자는 나를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쳐다보더니 쇼파에 앉는다.
“앉아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따라 쇼파에 앉았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여자의 시선에
몸 여기저기가 뚫릴것만 같다.
“연기 배우러 왔나요?”
“네? 아. 그냥 저는 어 그러니까..”
“배우 되기는 일찌감찌 포기하세요.”
“예?!”
여자의 말에 나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듯한 고통을 맛보았다. 내가 척 보기만 해도 배우를 하기엔 글러먹게
생긴건가? 아니면 하윤이 말대로 너무 늦은건가?
“그렇게 자기 의사하나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서 어떻게 사람들에게 대사를 전달할거죠?”
“....”
하지만 여자는, 내가 평범하게 생겨서도 그리고 나이가 많아서도가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방금까지만 해도 울렁거렸던 가슴이 뛰는것이 느껴졌다. 심장이. 심장이 대학을 갓 입학해서 캠퍼스를
둘러보던 스무살의 나처럼 뛰고 있었다.
“어떻게 작품속의 다른 사람이 되어 그 사람의 감정, 표정 그리고 생각 모든 것을 보여줄건가요?
얼굴이 예쁘다고 해서 모두 배우가 되는것은 아니예요. 더군다나 내 학원, 그리고 내가 키운 내 제자중에서는
더더욱 없어요. 얼굴만 예쁜 배우는······. 그런데 딱 보아하니 당신이 그럴것 같군요. 그만 돌아가요”
나에게 스물 아홉이란 이유만으로 꺼져가던 희망을 살려준것도 이 여자였고, 할수 있다는 그리고 보여주고
싶다는 오기도 가져다 준것도 이 여자였다. 차갑게 돌아서는 여자를 잠시 멍하니 보다가 나는 이내 생각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어떻게 겪어보지도 않고 아시죠? 제가 그런 제자가 될거란걸요?”
내 말에 자리로 돌아가려던 여자가 멈추는것이 보인다. 좋았어!
“비록 제가 제 의사하나 전달하지 못했을지 몰라도 그건 다른 이유에서입니다. 원장님이 생각하시는 만큼
겁쟁이라서가 아니라 단지 처음이라 낯설어서, 그것뿐입니다. 그러니까 저를 너무 과소평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여자는 천천히 몸을 돌려 나를 쳐다본다.
“배우에게 처음이라 낯설어서 따윈 없습니다. 처음이여도 매일 겪는 일처럼, 항상 그래왔다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행동해야 하는것. 그게 배우입니다.”
“저는 아직 배우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배우려고 이곳에 온거구요”
한참을 말이 없다. 긴장감만 도는 방 안에서, 나는 그 여자를 그리고 그 여자는 나를 말없이 쳐다본다.
절로 침이 삼켜진다. 맘에 안들면 뭐라고 대답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그러면 나도 더 이상 이렇게 구차하게
할 필요 없이 일어나겠건만.. 어차피 연기 학원이라고 여기만 있는것도 아닌데 어째서 내가 이렇게까지 발목을
잡는건지는 모르겠다. 다만 저 여자에게서 흘러나오는 포스가
‘당신이 스물 아홉이든 서른 아홉이든 상관 없어요. 단지 연기, 그것만이 중요할 뿐이에요’ 라고 말해주는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초후, 곧 여자가 얼굴에 미소를 띄운다. 뭐지?
“그래요 내가 원하는 자세는 그겁니다. 어서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