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바비'가 제주도 부근에 도착했다는 뉴스를 본다. 마라도 바다 소식을 실시간 으로 듣게 되니 마라도에 빠져 살던 그때가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마라도에 가면 언제나 반겨주던 삼대할망 안주인한테 안부전화를 했다. ' 바비'탓에 모든 게 전시상황일 거란 생각과는 달리 너무나 고요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히려 다른 태풍 때보다 바람이 세지 않다고 한다.
시골여행을 하다 들일 하시던 연세 드신 할아버지를 만나게 될 때가 있었다. 오랜 세월 농사를 지어오신 그분 께서는 이른 봄 논두렁을 보면 그 해 농사가 풍년 일지, 흉년 일지를 아신다고 했었다. 어떻게 그걸 아실 수 있으시냐는 내 질문에 할아버지께선 흙을 보면 알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셨었다. 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른 봄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무 등걸에 귀를 대면 나무들이 뽑아 올리는 물소리를 듣는다. 호기심 많은 나도 나무에 귀를 갖다 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자연을 가까이하다 보면 보통사람들이 들을 수 없다는 봄 새싹 돋는 소리를 듣게 된 때가 있었다. 마른풀들, 켜켜이 쌓인 낙엽들 아래에서 싹이 돋아나는 소리를.
제주 여행을 하다 보면 아주 먼발치에서 해녀들을 볼 수 있었다. 그때마다 많이 궁금했었다. 물질로 평생을살아 온 그들은 바닷속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내실까. 마라도 여행에서 그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삼대할망'집을 내 집처럼 드나들 만큼 친숙해졌으니 바닷속 이야기를 듣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물질을 오랫동안 해 온 해녀들은 일기예보가 있기 일주일에서 열흘 전 즈음에 바닷속 이상 징후를 읽는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평생을 바다와 함께한 삶인지라 바닷속을 훤히 꿰고 있을 해녀들. 태풍이 일기 전 바닷속에 이상 징후를 농사를 지어오신 그 어른이 흙의 소리를 듣듯, 해녀들도 분명 풀어놓을 바닷속 이야기가 많을 거라는 생각했지만 무척 놀라웠다. 바닷속에서 평생을 보내온 해녀가 아니더라도 섬사람으로 살다 보니 그들처럼 아는건 아니더라도 일기예보 3일 전 정도의 바다 표정에서 태풍이 올 것을 알게 된다고 했다. 태풍 '바비'는 어떤 신호를 보내왔을까 무척 궁금했다. 오늘 아침 전화를 해 본 이유이기도 하다.
"이번 태풍은 아무런 느낌이 오지 않았다고 하시네요. 아주 가끔 아주 강한 태풍이 오거나, 그냥 소멸될 약한 태풍은 어떤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이번 태풍이 그렇다고 하네요. 지금 마라도는 바람이 그리 세지 않아요. 다른 태풍에 비해. 이럴 때 우린 두려워해요." 너무 강하거나 아주 약하면 오히려 이상 징후가 감지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해녀들은 물속을 직접 피부로 느껴서 안다고 하지만 섬사람들은 어떻게 느낄까? 그분은 대답했다. 바다를 보면 띠가 생기는 게 보인다고. 그 띠를 보면 태풍이 올 것을 알게 된다고.
우리나라 최남단 천연기념물 423호로 지정된 마라도 여행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왕복 배표를 사서 도착하면 , 자장면 한 그릇 혹은 회맛을 보고 섬 한 바퀴를 걷고 나면 다시 제주도행 배를 탄다.
마라도 여행을 계획하고 파도 때문에 배가 뜨지 않는 날이 흔해 되돌아 서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나의 경우 한 번도 배가 뜨지 않은 날이 없었다. 마라도 여행은 언제나 순조로웠다.
나의 마라도 첫 여행은 평화스러운 풍경사진 하나에 매료되어서였다. 큰 나무 한그루 없는 자그마한 섬, 바람에 흩날리는 키 작은 풀들, 전복 모양을 밑그림으로 설계한 작은 성당. 하늘에 닿은듯한 십자가. 섬 한 바퀴를 도는데 40분이면 족한 아주 작은 섬. 내가 서 있는 방향에 따라 섬 바깥 풍경 또한 다르게 보이는 곳. 어린 왕자의 소혹성에 서 있는 듯한 착각하기에 딱 좋을만한 섬 마라도.
선착장에 도착했을 때, 만난 젊은 여자. 그녀가 팔고 있는 홍삼에 눈길이 갔다. 해삼을 무지 좋아하는 나는 처음 본 엄청난 크기의 해삼에 꽂혔다. 그녀는 마라도에 낚시 여행을 온 타지 사람이었다. 그녀가 묵고 있는 민박집을 소개했고, 그 집에 가면 해삼을 먹도록 요리해 줄 거라고 했다.서둘러 그 집으로 향했다. 주인과 여행자가 하나가 되는 곳, 그곳이 마라도였다. 젊은 여자는 바쁜 민박집주인 대신 해삼을 팔러 선착장에 앉았고, 해삼 한마리로 인해 나 또한 이집의 객이자 주인이 되었다.
여행은 어느 장소를 알아 가는 게 아니라 그곳을 지키며 사는 사람을 알아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풍경에 매료되면 그 여행의 참맛을 느낄 수 없었다. 마라도의 오후 네시, 마지막 제주행 배가 떠난다. 계절마다 다르다는 걸 한참 후에야 알았다. 마지막 뱃고동 소리가 들리면 마라도는 고요하다. 모든 상점도 문을 닫는다. 그 시각 이후에는 섬만 남는다. 난 그 고요가 좋았다. 장사를 마친 주민들이 가끔 산책을 하는 걸 볼 수 있을 뿐, 신경 쓸 이방인은 없다. 낚시를 하기 위해 마라도를 찾는 사람은 어느 바위 아래에서 낚시에 빠져있고. 어느새 나는 섬이 될 수 있었다.
3대째 물질을 하고 살아 3대할망이라는 간판을 단 이 집. 곧 4대 할망이라는 간판으로 바뀌지 않을까. 시할머니, 시어머니를 거쳐 지금은 시누이들이 물질을 하고 있는데 장성한 아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海男으로 살겠단다. 심폐기능이 남달라야 물질을 할 수 있다는데 이 청년의 심폐기능이 아주 적합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육지에서 공부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해남을 선택한 청년, 4대째 가업을 이어가기로 했단다.
누구보다 마라도를 사랑하는 삼대할망 집 안주인과 그 여동생, 그들의 표정은 평화스럽다. 민박집과 식당을 운영하는 언니, 여행객들에게 커피 향을 맡게 해 주는 동생. 그들에게 듣는 바다이야기는 참 아름답다. 가장 아름다운 밤 풍경은 어디서 봐야 하고, 그 방향에서 보는 제주도는 어떤 불꽃놀이보다 더 아름다운 불빛을 볼 수 있단다. 큰 나무 한그루 없는 마라도 여행은 여름은 피해 오라는 이야기도 해 준다. 결혼해서 3년만 고향에서 살다 나가자는 남편 따라 들어온 고향 마라도, 그 3년이 30년이 넘었다며 웃는다. 지금은 고향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한다. 마라도를 사랑하고, 바다를 사랑하기에 바다를 읽지 싶다. 그 바다의 소리를 듣지 싶다. 태풍이 시작되는 즈음의 바다를 보며 그녀는 이야기한다. 지금 마라도 바다는 파도가 높아요. 그 높은 파도의 바다는 정말 아름다워요.
태풍 '바비'가 조용히 지나가길 바라며....
첫댓글 그림자 지나가는 소리는 언제 쯤 들을수 있을 까?
ㅎㅎㅎㅎ 피부로, 눈으로 듣죠뭐.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