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지
강 문 석
돌가루종이란 것이 있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은 이 말을 듣기 어렵지만 돌가루가 바로 시멘트였으니 순우리말로 시멘트포대 포장지를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제대로 된 종이가 귀하던 시절 돌가루종이는 포장지나 벽지를 넘어 글자를 적는 메모지로도 요긴하게 쓰였다. 사정이 그러했으니 사용한 달력으로 노트를 엮어 그 이면을 활용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10.26 직후 과도기 대통령을 맡았던 전임 총리가 달력 이면지를 버리지 않고 재활용했다는 기사가 당시 신문에 실렸었다. 그때는 이미 물자가 풍족해져 이면지를 쓰는 일이 드물었는데도 평생을 검소하게 살아온 공직자였기에 매스컴의 조명을 받았을 터이다.
그 무렵 공기업인 직장에서도 이면지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미 사용한 지면에다 진하지 않은 붉은색 계통의 ‘이면지 활용’ 도장을 찍어가면서 백지상태인 뒷면을 활용토록 종용했던 것이다. 사실 사무용품에서 금액으로 따진다면 종이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하지만 가나안농군학교에서 시작된 '두루마리 화장지 5칸 이내로 사용하기' 운동처럼 근검절약정신을 조직 구성원들에게 심어주기 위해서 이면지 사용을 권장했던 것이다. 당시 직장에서의 절약정신은 통상근무자들보다 교대근무자들 쪽이 유별나다할 정도로 높았다. 전력계통 운용을 감시하는 변전소나 급전소에서는 물자절약에도 그만큼 정신을 집중하고 있어서 좋은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여든을 바라보는 원로시인께서 새로 낸 시집을 보내왔다. 교육계에서 은퇴하여 20여년 세월에 50여 권이 넘는 시집을 출간한 시인의 문학적 열정은 누구도 따르기 어려울 터이다. 그의 작품 속에 ‘이면지’가 나온다. ‘… 삐이리 호르리 호르리요 / 삐 삐 삐이요르르 삐이요 / 이면지 활용으로 비록 거칠기는 하나 / 아무런 거짓도 꾸밈도 없는 것이 특징인 / 노래는 천상의 울림 / 지상을 가득 채우는 선율 / 그래서 또 하루는 철철 넘친다’ 이 시에서 ‘이면지 활용’은 좋은 것과 새것만 찾는 자본주의의 탐욕현상을 비판하였고 ‘거칠’다에서는 문명과 문화적 세련미에서 멀리 떨어진 원초성과 순수성을 지향하는 의미가 들어있다고 평자는 말한다. 시인이 부유하지 못한 삶을 꾸려가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근검절약정신이 몸에 배어 이면지를 쓰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직박구리가 부르는 노래에다 이면지를 대입한 시적 상상력은 놀랍기만 하다. 오늘 책장 속 서랍에 쌓아둔 이면지 절반을 들어냈다. 20년도 더 지난 것들로 좀처럼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 폐지였다. 어릴 때의 궁색했던 생활습관에다 군에서 서무행정을 볼 때도 종이는 항상 모자랐다. 거기에다 직장에서 몸에 밴 이면지 활용정신까지 더해져 만들어낸 결과물이 아닐 수 없었다. 매일 아침 아파트에 도착하는 4대 일간지에 든 광고전단과 문인단체나 작가가 보내오는 책 그리고 모임 안내장이 든 우편물의 봉투까지도 허투로 버리는 일이 없으니 보관한 폐지가 줄어들 턱이 없었다. 그런데도 택배로 도착하는 물품의 포장지까지 버리지 못하고 차곡차곡 쌓아놓는다.
이러한 종이 수집벽을 이해 못하는 아내는 내가 없을 때 도착하는 것들은 꿈자리 어지럽다고 얼른 없애버리는 모양이다. 그러다가 어떨 때는 답례인사에 필요한 주소나 전화번호까지 내버려서 낭패스러운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성당도 따라 생겼지만 성전건물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성당이 상가건물에 세를 들었다. 앞서 대도시에 살 때 절과 교회와 철학관이 층수를 달리하여 한 건물에 들어선 걸 진기한 풍경이라고 카메라에 담은 적이 있었다. 다행히 우리 성당이 세든 건물엔 다른 종교시설이나 점집 같은 건 없었다. 성당 바로 앞은 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가 들었고 어느 날 A4용지 3박스가 쓰레기로 버려져 있었다.
각종 도면까지 그리는 회사인지라 종이도 내가 사서 쓰는 용지보다 훨씬 두꺼웠다. 횡재를 한 기분이었다. 그 이면지를 가져다 쓰면서 프린터에 고장이 발생한 건 종이의 두께가 차이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비에게 프린터를 설치해준 아들 녀석은 왜 이면지를 쓰느냐고 난리였다. 프린터가 네 말대로 고급스러워졌다면 그만큼 고장도 나지 않아야 할 것 아니냐는 나의 질책에 “얘가 너무 예민해서 그래요” 프린터를 얘라며 알듯 말듯 한 말을 늘어놓는 아들에게 질리고 말았다. 하지만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어디 한번 해보자하고 그 이면지를 그대로 넣고 계속 썼더니 프린터도 못 말리는 노인네로 받아들였는지 아니면 그 정도의 두께는 소화할 수 있었는지 더 이상 작업지시를 거부하지 않았고 그 이면지는 남김없이 쓸 수 있었다.
책장에서 꺼낸 이면지 뭉치를 원로시인에게 택배로 보내드린다면 무슨 귀한 선물을 보내왔나 하고 놀라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먼저 편지로 전후 사정을 알려드린 후 이면지를 보내는 것이 도리일 것 같다. 현직 떠나온 지 20년 세월 동안 아무리 게을러도 컴퓨터 자판기가 없었다면 그 이면지들이 지금까지 남아있을 리 만무할 것이다. 종이에 직접 글자를 적는 일이 현저하게 줄어들다보니 이제 간단한 한자를 쓰려고 해도 얼른 떠오르질 않는다. 노년의 치매예방에도 도움이 된다니 가끔씩 쓰는 이러한 잡문이라도 지금부턴 자판을 두드리지 말고 직접 이면지에다 또박또박 적어나가야 하겠다. 눈앞에 가득한 이면지를 남기지 않고 세상살이를 끝내려면 황혼이 더 저물기 전에 부지런히 속도를 내야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