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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 경지의 꿈
2024년 8월 11일 칠석 법회 수기 교훈
어느 젊은 부부의 일화로 평범한 한직장인이 I M F이후 직장 을 잃고
치킨집을 열어 열심히 일하는데 형제인 동생의 횡포와 성공한듯 형
을 무시 하는 서러움속에서 하루 하루 지내는중 매출이 없어 유지가
어려운 상황의 연속이라 가게를 접어야지 하고있는데 동생의 무시와
행패로 동생 과의 인연을 정리 하게되고 가게 정리 날 만을 기다리는
와중에 뜻밖의 꼬마 손님이 문앞에서 1000원 짜리 한장을 들고 서성
거리메 이유를 묻자 홀로집에 계신 어머니의 선물이 필요 한데1000원
한장 가지고 살게 없아 그런다는 말에 두부부는 이벤트 핑계로 아이에
심적 부담을 덜어주며 치킨 두마리를 정성스레 포장해 주었는데 그후
일주일후에 그아이 엄마가 써놓은 게시글이 화재가 되며 치킨 본사의
후원과 주변 사람들의 사랑의 마음이 발동되여 사업도 성공하고 행복
한 삶에 주인공이; 되는 일화는 우리 들의 삶에 많은 가르침과 교훈 을
주기에 충분하다 생각되여 공유 해보려 함니다
1) 하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 참고 인내하는 기다림 ( 운기 칠삼 )
*좋은 인연 승화 시켜려면 기다림, 믿음 , 헌신,만이100프로 충전(인)
2) 동생과의 인간관계 정리 (대운이 들어올 조짐 알아 차리는 지혜)(과)
3) 모든 사물을 자비에 마음으로 보는 부처님 일대사 인연 의 가피(응)
4) 감사함과 고마운 마음으로 주변의 보시공덕을 함으로 행복유지(보)
*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은 사례는 아니므로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보세요
하지만 인연의 기도 날 (칠석) 을 함께 하며 한번쯤 음미해볼만해서요
삼사체험 법문의 추가 설명븐을 수록 하여 이해를 견고히 한다
2024년 7월 29일 오전 8:04 231 읽음(대원 경지의 꿈을 꾸고7월 28일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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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大圓)은 아주 크고 둥글다는 뜻이고
경지(鏡智)는 거울같이 밝게 비추는 지혜라는 뜻입니다.
제8식 아뢰야식(阿賴耶識)이 바뀌면 대원경지가 됩니다.
아뢰야식(阿賴耶識)을 藏識 含藏識이라 하며
장(藏) 함장(含藏)은 우주의 온갖 정보 즉 나의 과거
몇 만 억 생의 정보가 저장되었다는 뜻입니다.
시간과 공간 전체가 크고 원만한 거울과 같은
지혜라는 뜻입니다.
지어온 행위대로 맑고 밝은 거울 앞에 모양이 드러나듯
우리의 행위와 업보를 훤히 비추어 보는 지혜가
대원경지입니다.
거울이 비추어주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비쳐지는 것입니다.
웃는 얼굴엔 웃는 얼굴이 비치고
찡그린 얼굴엔 찡그린 얼굴이 비쳐집니다.
우주허공의 커다란 거울이 겹겹이 우리의 모습을 비춰줍니다.
옛날에 남편이 장에서 동경(銅鏡)을 하나 사와서
아내에게 주었는데 아내가 들여다보니
웬! 예쁜 여자가 비추는 것을 보고 남편에게 화를 냈지요.
웬 여자를 숨겨놓고 다니느냐고
남편이 거울을 들여다보니 웬 사내놈이 들어있느냐고
서로 싸우는 것과 같지요
거울 속 자신의 예쁜 얼굴을 다른 여자로 착각하고
자신의 늠름한 얼굴을 다른 남자로 착각하여
자신인줄 모르고 서로 싸우는 세계가
중생들의 세계입니다!
거울 속에 모습이 자신인줄 확실히 아는 것이
대원경지입니다.!
천강유수천강월 (千江流水千江月)
천개의 강에 흐르는 물에 천개의 달이 비춘다
허공에 떠 있는 달은 하나이지만 물에 비치는 달은
물의 수만큼 많습니다.
어느 유생이 스님께 물었습니다
부처님은 한분인데 어느 절로 오십니까?
저녁에 오면 알려 주지요.
절에 있던 모든 그릇에 물을 담아 마당에 놨습니다.
달이 그릇 그릇마다 다 들어 있어요.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으로 비추어 집니다.
부처님과 아라한 성인들이 갖추어진 지혜입니다.
우주 삼라만상과 허공이 거울과 같이 보일 때
부처님의 慈悲光明!
자비에는 엄청난 광명(光明)이 비춥니다.
세존좌도량 (世尊座道場)
비여천일출 (譬如千日出)
세존이 앉아계신 도량에는
천개의 태양이 비추는 것과 같다!
마하반야바라밀 1
진목대사의 누이 아들과 며느리에 일타스님 글
(도움을 주혀해도 그릇을 먼져 만들어야)
석가모니불의 화신으로 추앙받았던
조선시대 중기의 고승 진묵대사(1562~1633)는
많은 이적을 남기신 대 도인이었다.
스님 에게는 누이동생이 하나 있었고
누이동생이 낳은 외동아들이 찢어지도록 가난 하게 살고 있었다.
이 조카가 가난을 면하기 위해서는 복을 쌓아야한다고
생각 하신 스님은 7월 칠석날 조카 내외를 찾아가
단단히 일러 주었다.
"애들아 오늘 밤 자정까지 일곱 개의 밥상을 차리도록 해라.
내 특별히 칠성님들을 모셔다가 복을 지을 수 있도록 해 주마"
진묵스님이 신통력을 지닌 대도인임을 아는 조카는
‘삼촌이 잘 살게 해주리라’ 확신하고
열심히 손님맞이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집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맛있는 음식을 푸짐하게 장만하여 마당에다 자리를 펴고 일곱 개의 밥상을 차렸다.
밤 12시 정각이 되자 진묵스님이 일곱 분의 손님을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오는데 하나같이 거룩한 모습의 칠성님은 아니었다.
한 분은 째보요 한 분은 곰보 또 다른 분은 절름발이요
곰배팔이요 장님이요 귀머거리였다.
거기에다 하나같이 눈가에는 눈곱이 잔뜩 붙어있고
콧물이 줄줄 흐르고 있는 것이다.
‘삼촌도 참, 어디서 저런 거지를 영감들을 데리고 왔노?
쳇, 덕을 보기는 다 틀려버렸네.’
조카내외는 기분이 크게 상하여 손님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부엌으로 들어 가 솥뚜껑을 쾅쾅 여닫고
바가지를 서로 부딪치고 깨면서 소란을 피웠다.
이에 진묵스님의 권유로 밥상 앞에 앉아 있던 칠성님들은
하나, 둘 차례로 일어나 떠나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마지막 칠성님까지 일어서려 하는데
진묵스님이 다가가 붙잡고 사정했다.
“철없고 박복한 조카가 아니라 나를 봐서
한 숟갈이라도 드십시오.”
일곱 번째 칠성은 진묵스님의 체면을 보아 밥 한술을 뜨고
국한 숟갈을 먹고 반찬 한 젓가락을 집어 드신 다음 떠나갔고 진묵스님은 조카를 불러 호통을 쳤다.
"에잇, 이 시원치 않은 놈!
어찌 너는 하는 짓마다 그 모양이냐?
내가 너희를 위해 칠성님들을 청하였는데
손님들 앞에서 그런 패악을 부려 다 그냥 가시도록 만들어
도무지 복 지을 인연조차 없다니...
"그래도 마지막 목선대군이 세 숟갈 잡수셨기 때문에
앞으로 3년은 잘 살 수 있을게다.“
이튿날 조카는 장에 갔다가 돼지 한 마리를 헐값에 사 왔는데
이 돼지가 며칠 지나지 않아 새끼를 열두 마리나 낳았고
몇 달이 지나자 집안에는 돼지가 가득하게 되었다.
또 돼지들을 팔아 암소를 샀는데
그 소가 송아지를 두 마리를 한꺼번에 낳았다.
이렇게 하여 진묵스님의 조카는 3년 동안 아주 부유하게 살았다.
그런대 만 3년째 되는 날
돼지우리에서 불이 나더니 불이 소 외양간으로 옮겨 붙고
다시 안채로 옮겨 붙어 모든 재산이 사라지고 말았다.
3년의 복이 다하자 다시 박복하기 그지없는 거지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복은 특별한 권능 자가 내리는 것 아니라
이 복은 내가 짓고 내가 받는 것이다.
복을 담을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갖추어져 있고
또 정성을 다하면
저절로 다가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
- 일타스님 법문중에서
삼재(三災)는 무엇인가?
소삼재와 대삼재가 있습니다.
소삼재는
중생들이 살아가는 가운데 겪게 되는
배고픈 기근재(饑饉災)
질병의 질역재(疾疫災)
전쟁의 도병재(刀兵災)입니다.
대삼재는
우주적 삼재로 성주괴공(成住壞空)에 따른
괴겁(壞劫)에 일어나는 징조(徵兆)로
온 지구가 물로 차는 수재(水災)
지구가 태양과 같이 타는 화재(火災)
지구가 날아가는 풍재(風災)로
지구의 종말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정초에 삼재풀이 한다는 삼재는
누구나 12띠에 9년 주기로 들어와 3년을 머물게 되는데
그 원리는 12포태법에 의합니다.
1 포(胞:음양교접)
2 태(胎:태에 안착)
3 양(養:배속에서 길러지고)
4 생(生:태어나고)
5 욕(浴:목욕 시키고)
6 대(帶:성장하고)
7 관(冠:관대를 두르고)
8 왕(旺:왕성해지고)
9 쇠(衰:늙고 쇠퇴)
10 병(病:병들고)
11 사(死:죽고)
12 묘(墓:묘에 들어감)중에
병(病).사(死).묘(墓)에 드는 해가 삼재(三災)인데
병사(病死)는 고통스럽지만 묘(墓)지에 들어가면
오히려 편안함으로
병(病)은 들어오는 삼재!
사(死)는 머무는 삼재!
묘(墓)는 나가는 삼재!
복(福)삼재는 괜찮고
다음해인 겁살(劫殺)운이 더 나쁘다고 합니다.
중생의 삼재는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탐진치(貪瞋痴) 삼독에서 오는 마음의 삼재입니다.
마음을 편히 하여 병고액란 소멸되고 만사형통 하소서
마하반야바라밀 🙏
*분별하고 집착하는 마음 내려놓으면
여래를 보게 됩니다
매 순간 성불하고 있음에도 알지 못하는 것은
분별의식 때문 수행을 대단하게 여기지만
있는 그대로 알아가는 과정일 뿐
‘화엄경’ 공부는
경문을 바로 이해해 여래를 보기 위한 목적!
“이때 세존께서 미간 백호상으로부터 대광명을 뿜어내어
비추시니 이름이 여래출현이라.
그 광명이 허공법계 일체 세계를 널리 한 곳도 빼놓는 곳 없이 비추어서 오른쪽으로 열 바퀴를 돌고 여래의 무량 자재를 나타내며 한량없는 보살대중을 깨우쳤느니라.”
‘여래출현품’에서는 방광이 두 번 나오는데
한 번은 미간백호상 광명이고 한 번은 구중광명
입안에서 하는 광명입니다.
“여래방광이 시방법계를 널리 다 비추고 열 바퀴를 돈다”는 것은 어느 곳이든지 여래 광명이 비추지 않는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책상에도 여래광명이 비추고 이 경전에도 비추고 여러분의 모든 몸에 다 비추고 화면으로 참가하는 모든 대중에게
다 비추어서 광명이 없는 곳 없이 다 비춥니다.
광명은 무슨 일을 하는가
여래와 다른 생각을 하는 그런 생각들을 그 광명으로
다 없앱니다.
여래는 한 가지 두 가지로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무량법 한량없는 법으로 출현하신다고 했습니다.
화엄이라는 것은 인행과 과덕이 원만 구족한 상태입니다.
인행이 있으면 과덕이 있고 과덕이 있으면 인행이 있어서
그 무량법 하나하나가 전부 여래 출현이 됩니다.
이것을 화엄의 총별(總別) 원융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총은 십이고 별은 하나인데 열이라고 하는 숫자에는 반드시 그 하나가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열을 볼 때는 하나하나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하나를 볼 때는 열이 안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를 떠난 열이 없고 열을 떠난 하나가 없다
이것이 총과 별이 원만구족 원융무애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래가 출현하는 것은
무량한 인연으로 출현하는 것이지 한 두 가지 인연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언제 성불을 하는가라고 하는데 지금 순간순간
성불하는 것입니다.
화엄법문 듣는 이 순간에 성불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지만 하나를 볼 때는 열이 안보이듯이
지금 성불하고 있는 것을 모릅니다.
그것이 화엄입니다.
그것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사람과 꿈을 깬 사람이
같은 방에 누워 있는데 꿈꾸는 사람은 꿈꾸는 동안
자신이 편안한 방에 있다는 걸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꿈을 깨고 나서야 압니다.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방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있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수행은 남의 집에 가서 머슴 사는 것이 아닙니다.
또 수행은 맨땅을 파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은 즐거운 것이고 수행은 있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행한다고 하니까 엄청난 것을 하는 것 같고
대단한 것 같다고 하는데 대단할 것도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 방에 있는 것을 꿈꾸다가도
자기 방 그대로 아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일체 국토.일체 중생.일체 처소에서
전부 여래신을 봅니다.
여기 경탁 위 물잔이라는 그릇이 상입니다.
이것을 의식으로 분별하면 그릇입니다.
이 그릇에는 자성이 없습니다.
지혜로 보면 그릇은 없고 여래신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못 보는가.
그것을 의식으로 상으로 분별하고 거기서 집착하니까
모르는 것입니다.
얼음과 물이 있는데 얼음이 물인 겁니다.
얼음이라고만 보면 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물이 보이지 않아도 물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여래신을 그렇게 본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화엄경’을 공부하려면 전부 소초(疏鈔)를 갖고
공부를 했습니다.
1960년대 사찰 강원에서는 목판으로 찍은 고서로 공부했습니다.
1970년대 이후 영인본이 나왔습니다.
원본은 비싸서 사지 못하고 영인본으로 공부했습니다.
그 이후로 한글대장경이 나왔습니다.
경에는 경문(經文)이 있고 경의(經意)가 있고
경지(經志)가 있습니다.
‘화엄경’은 80권입니다.
경문만 해석하는 것을 문해간경(文解看經)이라고 하는데
이것도 쉬운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든다면, ‘십주품’에서 여래십력(如來十力)을 이야기하는데
처(處) 비처(非處)라고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해석이 전부 다릅니다.
그런데 어떤 해석이 옳은 것인가
경문에 있는 것으로 아는 게 옳은 것입니다.
사전에 나와 있는 설명이 아니라 경문에 의해서
경문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옳습니다.
‘십주품’ 게송에는 “삼세인과명위처(三世因果名為處) 아등자성위비처(我等自性為非處)”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처(處)를 아는 지혜는 삼세인과를 아는 지혜입니다.
이것이 옳은 해석입니다.
또 비처(非處)를 아는 지혜는 우리 자성을 아는 지혜입니다. 이렇게 경문에 의해서 경문을 이해하는 것이
‘문해간경’의 옳은 태도입니다.
그다음 의해간경(意解看經)이 있습니다.
‘의해간경은 경의 뜻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런데 해석이 전부 다릅니다.
예를 들면 의상 스님은
‘화엄경’의 경문을 전혀 해석하지 않으셨습니다.
‘화엄경’과 ‘십지경론’을 종합적으로 모아서 ‘일승법계도합시일인’이라 했고
그 내용은 ‘원교종요(圓敎宗要)’라고 했습니다.
종(宗)이라는 건 뿌리와 같다는 것이고
요(要)라는 것은 줄기입니다.
이것이 의상 스님이 펼친 의해입니다.
다른 경문 자체는 전혀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중국 청량 법사는 ‘대방광불화엄경’ 일곱 글자를
한 자 한 자에 각기 열 가지 뜻을 담아
총 70가지 의미로 설명하셨습니다.
고려 말 순지 스님은
“대방광은 비로자나.불은 문수보살.화엄은 보현보살”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시대 ‘화엄사기’를 보면
“대방광은 체와 용이다.
대는 체이고 방광은 용이다.
불화엄은 인과다. 불은 과이고 화엄은 인이다”고
설명하는 것이 ‘의해간경’입니다.
경지(經志)는 견불간경(見佛看經)입니다.
경이라고 하는 것을 등불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등불은 등인(燈人) 등불을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등을 들려면 등체(燈體)가 있습니다.
등의 몸체입니다. 등체에서는 등광(燈光)이 비칩니다.
그런데 등은 그걸 들고 다니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
뭔가 중요한 걸 보려고 등불을 들고 다니는 것입니다.
이것을 등조(燈照)라고 합니다.
등이 비추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등조가 무엇을 말하는가
어둠 속에 있는 보물을 보는 것입니다.
등불을 통해서 어둠 속의 보물을 본다는 것은
곧 경전 속에 들어있는 경지(經志)를 깨닫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경을 보는 자세입니다.
경을 외우고 경만 보다가 끝내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경을 통해 경지를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범행품’에서는 여러 가지 관법을 이야기합니다.
관법이 깊어지면 “지일체법 즉심자성 성취혜신
부유타오(知一切法 即心自性 成就慧身 不由他悟)”라,
일체 법이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관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다음 혜신(慧身)을 성취하는 것 이것은 깨달음입니다.
다른 사람을 말미암아 깨닫는 것이 아니라
관(觀)을 통해서 다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관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야마궁중게찬품’에 보면
“약능견불신(若能見佛身) 청정여법성(淸淨如法性)
만약 불신이 청정하기가 법성과 같음을 본다면”
이 말은 법성을 보면 불신을 본다는 겁니다.
또, “차인어불법(此人於佛法) 일절무의혹(一切無疑惑)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이 사람은 불법에 의혹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관행 공부를 해서 마음의 번뇌 망상이
밝아지기 전에는 의혹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관행이 없으면 의심은 떨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경지를 깨닫는 방법이고 ‘견불간경’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경전을 보는 방법은
문해간경.의해간경.견불간경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견불은 곧 관행으로 경지를 보는 것입니다.
‘야마궁중게찬품’에 있는 경문을 한 구절 더 소개하겠습니다. “약견일체법(若見一切法) 본성여열반(本性如涅槃)”
“일체법의 본성이 대열반과 똑같다”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제가 들고 있는 이 그릇은 형상입니다.
이 상의 법성 본성이 대열반입니다.
물이 얼음을 떠나지 않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시즉견여래(是則見如來)
구경무소주(究竟無所住)’라
“법성에서 대열반을 보면 여래가 구경에는 머무는 데가 없다”고 합니다. “무소주(無所住)를 본다”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화엄경’ 공부는 관행만 하는 것도 아니고
경문도 이해하고 뜻도 이해하되 마지막으로 여래를 보는
견불을 하는 것입니다.
‘여래출현품’ 마지막 부분에
‘견문공양제여래(見聞供養諸如來)
소득공덕불가량(所得功德不可量)’라는 게송은
“부처님을 형상불이라도 보고 명호라도 듣고 공양을 올리면
그 얻는 공덕이 한량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염불문입니다.
염불문에서는 제일 처음 하는 것이 공불(供佛)입니다.
그다음에 예경하는 예불(禮佛)이고,
그다음이 항상 생각하는 염불(念佛)입니다.
이런 행이 자꾸 깊어져서 더 들어가면 견불(見佛)
부처를 봅니다.
초지보살(初地菩薩)이 되면 견불합니다.
견불이 되면 그다음에는 불(佛)에 머무는 주불
그다음에는 마지막 현불이고 현불이 곧 방광입니다.
길이 이렇게 모두 정해져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간경 공부도 길을 잘 따라가야 합니다.
이 법문은 영축총림 통도사에서 봉행된
‘화엄산림대법회’ 25차 법회에서
宗梵 스님이 ‘여래출현품’을 주제로 설한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법보신문)
-중앙승가대 전 총장 종범 스님-
초파일 법문
/
시간가니 세월 가고
그렇게 한해두해 가면서
나이를 먹는다
나이 많아져 저세상 가는데
예외는 없다
/
아쉽고 후회 원망스러워도
그건 내 욕심이고 마음인데
세월가니 다 부질없구려
다시 돌아 갈수는 없지만
그렇다면 천사처럼 살까
/
깨우치기 까지는 많은 시간
경험 연륜이 필요한거 같다
무슨 말을 해도 집착과 욕심
완전 버릴 수는 없고
순리대로 참을 뿐이로다
/
걍 "그러려니"하고 잘 참고
잘 다스리는 게 인생인가
구차한 이유.변명하면 뭐하나
주변 두루두루 살피면서
내가 부처가 된 이후로 지내온 많은 세월은
한량없는 백천만억 아승지로다.
自我得佛來 所經諸劫數
無量百千萬億阿僧祗
이 구절은
법화경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 있는 말씀인데
법화경의 골자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내가 성불한 뒤로 얼마만한 세월이 경과했느냐' 하면
숫자로써 형용할 수 없는 한없이 많은
세월이 경과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보통으로 봐서 이것은 이해가 안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인도에 출현해서 성불하여 열반하신 지
지금부터 2천 5백여 년밖에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부처님 말씀이 자기가 성불한 지가
무량백천만억 아승지 이전이라고 했을까?
어째서 숫자로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옛날부터라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
사실에 있어서 부처님이
2천 5백년 전에 출현하여 성불하신 것은 방편이고
실지로는 한량없는 무수한 아승지겁 이전에
벌써 성불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알아야 불교에 대한 기본자세.근본자세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보통 물으면 '성불이다',
즉 부처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으례껏 그렇게 말하지만 실제로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실제 내용은 중생이 본래부처(本來是佛)라는 것입니다.
깨쳤다는 것은 본래부처라는 것을 깨쳤다는 말일 뿐
중생이 변하여 부처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 전에는 자기가 늘 중생인 줄로 알았는데
깨치고 보니 억천만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본래로
성불해 있더라는 것입니다.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본래로 성불해 있었는데
다시 무슨 성불을 또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도 '성불한다.성불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 중생을 지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하는 말일 뿐입니다.
부처님이 도를 깨쳤다고 하는 것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한 본래모습 그것을 바로 알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부처님 한 분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일체 중생.일체 생명.심지어는 구르는 돌과 서 있는 바위
유정 무정(有情 無情) 전체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다 성불했다는 그 소식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사바세계'라 합니다.
모를 때는 사바세계이지만 알고 보면 이곳은
사바세계가 아니고 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이대로가 극락세계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목표는
중생이 변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고
누구든지 바로 깨쳐서
본래 자기가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했다는 것
이것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동시에 온 시방법계가 불국토(佛國土) 아닌 곳
정토(淨土) 아닌 나라가 없다는 이것을
깨치는 것이 불교의 근본목표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구원'이라는 말을 합니다.
'구원을 받는다'
'예수를 믿어 천당 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구원이라는 말이 해당되지 않습니다.
본래 부처인 줄 확실히 알고 온 시방법계가 본래 불국토며
정토인 줄 알면 그만이지
또 무슨 남에게서 받아야 할 구원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불교에는 근본적인 의미에서
절대로 구원이란 없습니다.
이것이 어느 종교도 따라 올 수 없는
불교의 독특한 입장입니다
실제 어느 종교 어느 철학에서도
이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불(佛)! 부처란 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을 이르는 말입니다.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했다고 하는 것은
본래부터 모든 존재가
불생불멸 아닌 것이 없다는 그 말입니다.
사람은 물론 동물도.식물도.광물도
심지어 저 허공까지도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또한 모든 처소 시방법계 전체가 모두 다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즉 정토이며 불국토인 것입니다.
즉 모든 존재가 전부 다 부처고
모든 처소가 전부 다 정토다 이말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사바세계가 있고 중생이 있는가?
내가 언제나 하는 소리입니다.
아무리 해가 떠서 온 천하를 비추고 환한 대낮이라도
눈 감은 사람은 광명을 못 봅니다.
앉으나 서나 전체가 캄캄할 뿐 광명을 못 봅니다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우주법계 전체가 광명인 동시에 대낮 그대로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전체가 부처 아닌 존재 없고
전체가 불국토 아닌 곳이 없습니다.
마음의 눈만 뜨고 보면!!!
그러나 이것을 모르고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은
'내가 중생이다'
'여기가 사바세계다'라고 말할 뿐입니다.
근본 병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눈을 떴나, 눈을 감았나 하는 여기에 있습니다.
눈을 뜨고 보면 전체가 다 광명이고
눈을 감고 보면 전체가 다 암흑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전체가 다 부처이고
전체가 다 불국토이지만
마음의 눈을 감고 보면 전체가 다 중생이고
전체가 다 사바세계 지옥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것저것 말할 것 없습니다.
누가 눈감고
캄캄한 암흑세계에 살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누구든지 광명세계에 살고 싶고
누구든지 부처님 세계에 살고 싶고
누구든지 정토에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시 바삐 어떻게든 노력하여
마음의 눈만 뜨면 일체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가고 오고 할 것이 없습니다.
천당에 가니 극락세계에 가니 하는 것은
모두 헛된 소리입니다.
어떻게든 노력해서 마음의 눈만 뜨면
일체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내가 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했더라.
본래부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방편으로 열반을 나타내지만
실제는 내가 죽지 않고 항상 여기서 법을 설한다.
爲度衆生故 方便現涅盤
而實不滅度 常住此說法
이 구절은 앞의 게송에 계속되는 구절인데
무슨 뜻인가 하면
부처님께서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래겁이 다하도록 절대로 멸하지 않고
여기 계시면서 항상 법문을 설한다는 것입니다.
'여기'라 함은 부처님 계신 곳을 말함이지
인도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한국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부처님이 나타나 계시는 곳은 전부 여기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천백 억 화신을 나타내어
시방법계에 안나타나는 곳이 없으시니까
시방법계가 다 여기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상주불멸이라고 하였습니다.
항상 머물러 있으면서 절대로 멸하여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상주불멸.미래에도 상주불멸
현재에도 상주불멸 이렇게 되면 일체 만법이
불생불멸 그대로입니다.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원토록 화장찰해(華藏刹海)
무진법계.극락정토 뭐라고 말해도 좋은 것입니다.
이름이야 뭐라고 부르든 간에
과거.현재.미래를 통해서 부처님은 항상 계시면서
설법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석가모니라고 하는
개인 한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인가?
아닙니다.
삼라만상 일체가 다 과거부터 현재 미래 할 것 없이
항상 무진법문을 설하고 있으며
무량불사(無量佛事)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진장)
심지어는 저 산꼭대기에 서 있는 바위까지도
법당 안에 계시는 부처님보다 몇 백배 이상 가는 설법을
항상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위가 설법한다고 하면 웃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위가 무슨 말을 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 참으로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눈만 뜨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귀도 열립니다.
그러면 거기에 서 있는 바위가 항상 무진설법을 하는 것을
다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무정설법(無情說法)이라고 합니다.
유정(有情) 즉 생물은 으례 움직이고 소리도 내고 하니까
설법을 한다고 할 수 있지만
무정물(無情物)인 돌이나 바위.흙덩이는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무슨 설법을 하는가 하겠지만
불교를 바로 알려면 바위가 항상 설법하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그 뿐 아닙니다.
모양도 없고 형상도 없고 보려고 해도 볼 수 없는
허공까지도 항상 설법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온 시방세계에 설법 안 하는 존재가 없고
불사(佛事) 안하는 존재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을 알아야만 불교를 바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누구를 제도하고 누구를 구원한다고 하는 것은
모두 부질없는 짓입니다!
오직 근본요(根本要)는 어디 있느냐 하면
본래면목(本來面目). 본래부터 성불한 면목
본지풍광(本地風光).본래부터가 전체 불국토라는 것
이것만 바로 알면 되는 것이지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참 좋은 법이야.
우리 모두가 불국토에 살고.우리 전체가 모두
부처라고 하니 노력할 것이 뭐 있나
공부도 할 것 없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아무래도 안 좋은가.'
이렇게도 혹 생각하겠지만 이것은 근본을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본래 부처이고 본래 불토(佛土)이고
본래 해가 떠서 온 천지를 비추고 있지만
눈감은 사람을 광명을 볼 수 없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이지만 눈감고 있으면 캄캄한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마알간 거울에 먼지가 꽉 끼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거울은 본래 깨끗하고 말갛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있는대로 다 비춥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먼지가 꽉 끼어 있으면 아무 것도
비추지 못합니다.
명경(明鏡)에 때가 꽉 끼어 있으면
아무 것도 비추지 못하는 것 여기에 묘(妙)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래 부처라는 이것만으로는 안됩니다.
내가 본래 부처다 내가 본래 불국토에 산다
이것만 믿고 '내가 공부를 안해도 된다'
'눈뜰 필요없다', 이렇게 되면 영원히 봉사를 못면합니다.
영원토록 캄캄 밤중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자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무슨 자신을 가질 수 있느냐 하면
설사 우리가 눈을 감고 앉아서 광명을 보지 못한다고 해도
광명 속에 산다는 것 광명속에 살고 있으니
눈만 뜨면 그만이라는 것
설사 내가 완전한 부처의 행동을 할 수 없고
불국토를 보지 못한다고 해도 본래 부처라는 것
본래 불국토에 산다는 그런 자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흠이라는 것은
눈을 뜨지 못하여 그것을 보지 못하고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쓰지 못한다고 하지만
전후좌우에 황금이 꼭 차 있는 것을 알 것 같으면
눈만 뜨면 그 황금이 모두 내 물건 내 소유이니
얼마나 반가운 소식입니까?
이것을 철학적으로 말하면
'현실 이대로가 절대다'하는 것입니다.
즉 현실 이대로가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전에도 얘기한 바 있습니다.
현실 이대로가 절대이고 현실 이대로가 불생 불멸인데
이 불생불멸의 원리는 자고로 불교의 특권이요
전용어가 되어 있다고.
그러나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원자물리학에서도 자연계는 불생불멸의 원리 위에
구성되어 있음을 증명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고 해서
불교가 수승하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원래 그런 원리가 있는데 요즘 과학이
실험에 성공함으로써 불교에 가까이 온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미 2500여 년 전에
우주법계의 불생불멸을 선언하셨고
과학은 오늘에 와서야 자연의 불생불멸을 실증함으로써
시간의 차이는 있으나 그 내용은 서로 통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근본존재는
무량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하여
무량아승지겁이 다하도록
무량불사를 하는 그런 큰 존재입니다.
다만 병이 어느 곳에 있느냐
눈을 뜨지 못하여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1981.6.30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하신
성철스님 법문 (月刊 海印에서 拔萃)
프레임 법칙
한 친구가 물었다.
“자네는 기도 중에 담배를 피워도 된 다고 생각하나?”
“글쎄 잘 모르겠 는데 신부님께 한번 여쭤보는게 어떻겠나?”
신부님에게 다가가 물었다.
“신부님 기도 중에 담배를 피워도 되나요?”
신부는 정색하면서 대답했다.
“기도는 신과 나누는 엄숙한 대화인데 절대 그럴 순 없지."
친구로부터 신부님의 답을 들은 다른 친구가 말했다.
“그건 자네가 질문을 잘못했기 때문이야.
내가 가서 다시 여쭤보겠네.”
다른 친구가 신부에게 물었다.
“신부님 담배 피우는 중에는 기도를 하면 안 되나요?”
신부는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도는 때와 장소가 필요 없다네.
담배를 피는 중에도 기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지.”
이처럼 동일한 내용도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다는 점
"프레임(frame)의 법칙"입니다!
여대생이 밤에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술집에서 일하는 아가씨가
낮에 학교를 다니면서 열심히 공부한다고 하면
사람들의 반응이 어떨까?
원하는 답을 얻으려면 질문을 달리 하십시오!
질문이 달라지면 답이 달라집니다!
나는 과연 어떤 프레임에 매달려 있지는 않은지?
또 다른 각도로 생각해봅니다.
'프레임의 법칙이란,!
똑같은 상황이라도 어떠한 틀을 갖고
상황을 해석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행동이 달라진다'는 법칙입니다.
꼭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아버지! 옛날에 어떻게 사셨어요?
과학기술도 없고!인터넷도 없고!
컴퓨터도 없고! 드론도 없고!
휴대폰도 없고! 카톡도 없고!
페이스북도 없었고!
아버지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 세대가 오늘날
인간미도 없고! 품위도 없고!
연민도 없고! 수치심도 없고
명예도 없고! 존경심도 없고!
개성도 없고! 사랑도 없고!
겸손도 없이 살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는 안 살았지!
너희들은 우리를 늙었다고 하지만
우리는 참 축복 받은세대란다.
우리 삶이 그 증거야.
헬멧을 쓰고 자전거 를 타지 않았고!
방과 후에는 우리 스스로 숙제 했어!
해질 때까지 들판에서 뛰놀고!
페이스북이나 카톡 친구가 아니라 진짜 친구랑 놀았다!
목이 마르면 생수가 아닌 샘물을 마셨고!
친구들이 사용한 잔을 함께 사용해도 아픈 적이 없었다!
빵 과자를 많이 먹어 비만하지도 않았고!
브렌드 신발 없어도 맨발로 뛰어 놀았다!
여보시요! 저기요 저기요!
지금 사는 게 재미 있습니까?
지금 꿀이 뚝뚝 떨어집니까?
뭐. 그래봤자 어디 젊은날만 하겠어요?
싱싱하던 시절이 그립죠!
암요! 암! 아무려면!
그래도 지금 두 다리로 멀쩡히 걸어 다니고
봄날 꽃구경 다니고 맛난 거 찾아 다니면
당신은 큰 행운 입니다.
삶의 필름을 잠시만 되 돌려보면
몇 달 사이에도 주변에 황당한 일이
정말 많이 생기 더라고요.
그것도 며칠 전에도 멀쩡하게
아침 마다 인사 카톡 보내던 놈이
연락 두절 되고요.
즈그 자식들 잘 산다고 마구마구
떠벌리며 골목 골목 누비며 폐지줍던
그영감 쟁이도 요즘 모습 감췄고요.
옛날 소주 한잔 마시다가 진보니 보수니 거품 물고
정치 얘기 하던 골통 그놈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죠.
산 좋다고 주말마다 건강 챙기며
이산 저산 등산 가자 조르던 절친
그놈 졸지에 심장마비로 저세상 가버렸죠.
당구 300에 어떤 짠돌이
난데 없이 신장 이상이 생겨 투석하며
두문 불출 괴로운 방콕 삶이구요.
빌딩 몇채 가졌다고 어깨에 힘주던
술값 밥값 계산의 달인도 요양원 직행했죠.
이런 일이 부쩍부쩍 요즘 왜 그렇게 많이 벌어 지죠?
생각해 볼 수록 결코 남의 일이 아닙니다.
나와 그대에게서 일어나는 반복 되는 일상의 일입니다.
오늘은 쬐메 유식 하게 한문과
운율에 맞춰 서리 읇어 보겠습니다.
流水不復回 (유수불복회)
흐르는 물은 다시 돌아 오지 않고
行雲難再尋 (행운난재심)
떠도는 구름은 다시 볼 수 없네.
老人頭上雪 (노인두상설)
늙은이의 머리 위에 내린 하얗게 쌓인 눈은
春風吹不消 (춘풍취불소)
봄바람이 불어와도 녹지 를 않네
春盡有歸日 (춘진유귀일)
봄은 오고가고 하건만
老來無去時 (노래무거시)
늙음은 한번오면 갈 줄을 모르네
春來草自生 (춘래 초자생)
봄이오면 풀은 저절로 나건만
靑春留不住 (청춘유불주)
젊음은 붙들어도 머물지 않네
이 위에 글은 우리 들의 현실이고 현장 아닌가요?
그러니까!
지금같이 이빨 성할때 맛난 것 많이 먹고!
걸을 수 있을 때 열심히 다니고!
눈으로 볼 수 있을 때 실컷 구경하고!
귀로 들릴 때 듣고 들어야 하며!
베풀 수 있을 때 남에게 베풀며!
즐길 수 있을 때 마음껏 즐기는 게 최고 입니다!!!
이것이 인생길 후반 잘 사는 방법 아닌가요!
人生이란 따지고 보면
지금같이 늦 인생을 즐기 사는 게 최고 입니다.
언젠가
못 보고 못 듣고! 못 먹고 못 입고 못 걷고!
내손으로 아무 것도 못할 그런날이 올겁니다!
오늘 즐거움을 미루지 말고 누구를 미워도 말고
부르면 번개처럼 나와 줄 그 사람과 신나게 즐기세요!
우리 나이에는 정확한 내일은 없습니다.
오늘의 지금 이 순간이 인생 최고의 날입니다!
꽃이 화려한들 무슨 소용입니까!
우리는 지금도 움직여야 꽃피는 봄날이 된답니다!
인생은 일장춘몽이라!!!
멋진글 공유합니다
방하착
한 스님이 탁발을 하러 길을 떠났는데
산세가 험한 가파른 절벽 근처를 지나게 되었다.
그때 갑자기 절벽 아래서
'사람 살려!' 라는 절박한 소리가 실낱같이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오는 절벽 밑을 내려다보니
어떤 사람이 실족을 했는지
절벽으로 굴러 떨어지면서
다행히 나뭇가지를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려
살려달라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이오?' 라고
스님이 물어보니 다급한 대답이 들려왔다.
'사실은 나는 앞을 못보는 봉사 올시다.
산 넘어 마을로 양식을 얻으러 가던 중
발을 헛딛어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졌는데
다행히 이렇게 나뭇가지를 붙잡고
구사일생으로 살아 있으니 뉘신지 모르오나
어서 속히 나좀 구해주시오
이제 힘이 빠져서 곧 죽을 지경이오!' 하는 것이었다.
스님이 자세히 아래를 살펴보니
그 장님이 붙잡고 매달려 있는 나뭇가지는
땅 바닥에서 겨우 사람 키 하나 정도 위에 있었다.
뛰어 내려도 다치지 않을 정도의 위치였던 것이다.
그래서 스님이 장님에게 외쳤다.
'지금 잡고있는 나뭇가지를 그냥 놓아 버리시오.
그러면 더 이상 힘 안들이고 편안해 질 수 있소!'
그러자 절벽 밑에서 봉사가 애처롭게 애원했다.
'내가 지금 이 나뭇가지를 놓아버리면
천길 만길 낭떠리지로 떨어져 즉사할 것인데
앞 못보는 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어
제발 나좀 살려주시오~'
라고 애걸복걸 했다.
그러나 스님은 봉사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살고 싶으면 당장 그 손을 놓으라고 계속 소리쳤다.
그런 와중에 힘이 빠진 봉사가 손을 놓치자
땅밑으로 툭 떨어지며 가볍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잠시 정신을 차리고 몸을 가다듬은 장님은
졸지간에 벌어졌던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파악하고
멋적어 하며 인사 치례도 잊은 채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렇다! 우리도 앞 못보는 장님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봉사가 붙잡고 있는 나뭇가지가 오직 자신을 살려주는
생명줄 인 줄 알고 죽기살기로 움켜쥐듯이
끝없는 욕망에 집착하며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놓아버리면 곧 죽고 못살 것 처럼
아둥바둥 발버둥치는 청맹과니 같이
눈뜬 장님이 바로 우리들이 아닌지!
썩은 동아줄과 같은 물질을 영원한 생명줄로 착각하고
끝까지 붙들고 발버둥치는 불쌍한 우리네 중생들!
방하착(放下着)은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 놓아라
또는 마음을 편하게 가지라는 뜻이다.
우리 마음 속에는
온갖 번뇌와 갈등 스트레스 원망 집착 등이 얽혀있는데
그런 것을 모두 홀가분하게 벗어 던져버리라는 말이
방하착이다!
방하착(放下着)!
중국 당나라 때
배휴(裴休)라는 유명한 정승이 있었다.
그는 쌍둥이로 태어났다.
그것도 등이 맞붙은 기형아로 태어나자
부모가 칼로 등을 갈라 살이 많이 붙은 아이를 형으로
살이 적게 붙은 아이를 동생으로 삼았다.
부모는 형과 동생의 이름을 '도'자로 짓되
형의 이름은 '법도 도'로 하고 동생은 '헤아릴 탁'이라고 불렀다.
배휴는 어릴 때의 형인 배도가 장성한 다음 새로 지은 이름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읜 배도와 배탁은
외삼촌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일행선사(一行禪師)라는 밀교의 고승이
집으로 찾아와서 그들 형제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외삼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저 아이들은 누구입니까?"
"저의 생질들인데 부모가 일찍 죽어 제가 키우고 있습니다."
"저 아이들을 내보내시오."
"왜요?"
"저 아이들의 관상을 보아하니 거지상이요
그냥 놓아두면 저 아이들로 말미암아 이집이 가난해집니다.
그리고 저 아이들이 얻어먹는 신세가 되려면
이 집부터 망해야 하니 애당초 그렇게 되기 전에 내보내십시오."
방문 밖에서 외삼촌과 일행선사의 대화를 엿들은 배도는
집을 떠났다.
집을 떠난 형제는 머리를 맞대고 상의하였다.
"우리가 이렇게 산다면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의 혼령도 편안하지 못할 것이다.
산으로 들어가서
숯이나 구워 팔면서 공부도 하고 무술도 익히자."
"먹을 양식꺼리 만치 숯을 팔고 남은 것은 나누워 주었다.
이렇게 꾸준히 숯을 보시하자
처음에는 의아하게 생각하던 마을 사람들도 감사하게 생각하였고 숯이 도착할 시간이면 '양식에 보태라.'며 쌀을 대문밖에 내어놓기까지 하였다.
그들 형제들은 먹을 만큼 이상의 양식은 절대로 가져가지 않았다.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어느 날 외삼촌댁에 들은 그들이 집에 이르자
때마침 일행선사도 오셨는데
배도를 보더니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얘야 너 정승이 되겠구나."
"스님, 언제는 저희 형제더러 빌어먹겠다고 하시더니
오늘은 어찌 정승이 되겠다고 하십니까?
거짓말 마십시오."
"전날에는 너의 얼굴에 거지 팔자가 가득 붙었더니
오늘은 정승의 심상(心相)이 보이는구나.
그동안 무슨 일을 하였느냐?"
배도와 배탁이 그동안의 일을 자세히 말씀드리자
일행선사는 무릎을 치면서 기뻐하셨다.
"그러면 그렇지!
너희들의 마음가짐이
거지 팔자를 정승 팔자로 바꾸어 놓았구나."
그 뒤 참으로 배도는 정승이 되었고
동생 배탁은 대장군의 벼슬을 마다하고 황하강의 뱃사공이 되어
오가는 사람을 건네주며 고매하게 살았다고 한다.
심상(心相)이 바뀌면 만상(萬相)이 바뀝니다!
관상(觀相) 사주(四柱) 성명(姓名) 골상(骨相) 풍수(風水) 등등
온갖 것이 심상(心相)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물처럼 유연하고 겸손하게 살아라.
부처님께서 도를 깨닫고 나서 깜짝 놀라셨어요. 그리고 크게 감동하셨지요.
도를 깨닫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했는데 알고 보니 일체중생이 한 명도 빠짐없이 본래 부처였다 이거에요.
그런데 왜 중생의 탈을 쓰고 있을까.
그 탈을 벗게 하려고 부처님께서 45년간 불철주야(不撤晝夜)로 법을 설하셨습니다.
법화경에서는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까닭으로,
일체중생으로하여금 부처님의 법을, 깨달음을 얻게 하고자 오셨다 했습니다.
일체중생에게 부처님의 깨달음을 보이시고자 이 세상에 오셨다,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깨달음을 깨닫게 하고자 이 세상에 오셨다,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깨달음에 들게 하고자 오셨다는 겁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고, 지혜의 종교입니다.
불교를 오래 믿으면 중생 스스로가 지혜로워져서 부처님과 같아집니다.
지혜로워진다는 것은 판단이 명석해지는 겁니다.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 나가는 명석함을 갖기 위해서,
판단력을 갖추기 위해서 우리 중생들은 부처님을 따라 배우고자 정진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따르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진실로 믿어야 하고,
그 가르침을 행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부처님 말씀이 담긴 경전을 열심히 공부하고 마음을 닦는데 방일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불성적(佛性的)인 자기를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걸 확실히 믿어야 자기의 삶 하루하루가 소중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중생심(衆生心)에 매몰되어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에 늘 자기 탐구에 힘써야 하지요.
남의 일에 관심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할 때가 아닙니다.
자기를 바라보고 자신의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해 보세요.
부처님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가장 평범한, 보통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우리 중생들은 보통 사람에 미치지 못하거나 보통을 지나친 사람들이에요.
가장 평범하고 보통 사람인 부처님의 성품을 닮기 위해 우리는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처님 앞에서 무엇을 빌고 있습니까? 부처님을 닮겠다는 건가요?
아파트에 당첨되기를, 남편의 승진을,
또는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붙기를 더 바라고 있지 않나요? 왜 절에 다닙니까?
우리의 정신세계를 정상화하기 위해서 오는 것이다. 라고 나는 말합니다.
법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하는 것이 법입니다.
불교에서 중도를 말하지요. 가운데 중(中), 길 도(道)를 쓰는데 이 중(中) 자가 맞을 중 자입니다.
이치에 턱 들어맞는다. 라는 뜻이지요. 화살을 쏘아 과녁에 맞으면 적중했다 하잖아요. 들어맞았다는 것이지요.
불교는 비판주의적 종교라 할 수 있습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는 없을 무(無)가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없다는 소리가 아니지요. 아니라는 소리도 있다는 겁니다.
반야심경의 무(無)는 전부가 비판입니다. 우리가 절을 하더라도 비판 정신이 없으면 절하는 의미가 없습니다.
한번 절을 함으로써 아직은 멀었다 그 뜻입니다.
또 한 번 절하고 그것도 아니다, 한 번 더 절하고 그것도 아니다. 3천 배를 했어요.
그러나 과연 그 가운데 진실한 절이 3번이나 있을까 말까. 하다는 얘기예요.
금을 캐러 금광에 들어간 사람이 삽질하고는 홱 집어 던집니다. 왜 집어 던집니까? 이것은 아니다. 라는 뜻이지요.
뭐가 아니냐. 금이 아니다 이거지요. 또 한 번 삽질하고는 홱 집어던지면, 그것도 아니라는 뜻이지요.
이것도 아니요, 저것도 아니요, 그것도 아니다. 뭐가 아니냐.
열반에 이르기까지 계속 비판 정신을 가지고 탐구하라는 뜻입니다.
유마경(維摩經)에 곧은 마음을 쓰는 일이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의 성불(成佛)-시에 왜곡된 말을 하지 않는 중생은 내세에 극락을 간다고 했습니다.
또 깊고 깊은 마음속에 부처와 보살이 있다고 했고 보리심을 내면 극락에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곧은 마음과 깊은 마음, 보리심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공덕을 구족 하고 진실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생을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바둑 하는 사람이 한 돌, 한 돌 정성을 다해 신중하게 놓아가듯,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의 길인가 생각하며 하나하나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서양의 과학자가 이런 말을 했어요.
오늘날 세계는 크게 세 가지 점에서 대량 살상이 자행될 우려가 있다고 했습니다.
전쟁으로 핵무기가 터져 대량으로 죽거나, 공해에 의한 완만한 인류의 대량 살상이 올 수 있다 했습니다.
가치관 혼란에서 오는 정신적인 대량 살상도 이야기했어요.
외부적인 환경의 오염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오염되고 있는 것을 경계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어떤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가요. 정신적으로 황폐한 시대, 암담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정신적인 오염이 심각합니다. 시민정신은 갈수록 악화일로에 놓여있어요.
인성이 대단히 잔인해지고 있어요. 천박해져 갑니다.
시민의식은 너도 살고 나도 살자는 공생 의식인데,
천민 의식은 세상 사람 다 죽어도 나만 살고 싶다는 것이에요.
이 병폐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이 자기를 바로 볼 줄 아는 지혜를 기르는 일입니다.
남이 아니라 자기 인생을 볼 줄 알아야 다른 것도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자기의 조국을 보고, 그리고 국제사회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흔히 세계인, 세계인 하는데 세계인이라고 말로는 쉽지만, 진실한 세계인이 되기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현대사회는 탐(貪) 진(眞) 치(痴)가 더욱더 극성을 부리기에 종교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불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가 오늘의 혼탁한 사회를 정화해 나가야 할 막중한 책무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사고(思考)가 편파적이고 격합니다. 자기만 최고로 알고 양보하거나 남을 살피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와글와글 끓는 뜨거운 가마솥 같아요. 우리는 21세기를 살고 있습니다.
지난 20세기에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어느 분야나 물질 위주로 생각해 왔습니다.
탐욕스럽게 살아왔습니다. 그런 관념이 21세기까지 이어져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시대를 해결하기 위해 서양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해 왔을까요.
그들은 존재론, 구조주의와 같은 사상들이 오늘의 시대를 대처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존주의입니다.
그러한 존재론을 가지고 현대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중국 사람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도(道)에 근거했어요. 도가 오늘의 시대를 해결해 줄 것이다.
그러면 불교사상은 어떠한가요. 법(法), 즉 다르마에 의해서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란 말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입니다.
색(色)이란 것은 현상적 세계를 말하고, 공(空)이라 정신세계를 뜻합니다.
이 현상적 세계와 이상적 세계를 합친 것이 인간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행위가 어떠해야 할까요?
현상적이라는 말은 1차원의 세계입니다, 권세, 재물, 현상적인 이익 등 거기에 매몰되면 현실주의자입니다.
정신적인 것은 2차원의 세계입니다. 고귀한 정신주의적인 태도지요, 그런데 극단적인 이상주의적 태도도 있어요.
이러한 사람들은 현실 세계와 대화가 없어요.
자기만이 정당하고 자기만의 만족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가련하게 보고, 망상, 환상주의에 빠지기가 쉬워요.
그렇다면 21세기 사회는 어때해야 하느냐? 이 양자를 바라볼 수 있는 반야의 지혜가 나와야 합니다.
반야의 지혜가 21세기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 원리가 돼야 합니다.
이 3차원의 반야사상에 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조사록(祖師錄)에서 말하기를,
이 세상 사람들이 하루 종일 반야를 외워도 자성 반야를 모르면, 밥을 말하고 있되 배고픈 것과 같다고 했어요.
입으로만 말하는 밥은 배부를 수가 없지요.
입으로만 진리를 말하면 만겁의 세월이 흘러도 견성(見性)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반야의 지혜를 체득할 수 있도록 우리 불자들로부터 열심히 수행 정진해야 합니다.
마음이 어리석은즉 사바세계요, 마음을 깨달은즉 이상세계다.
마음이 삿된즉 사바세계요, 마음을 바로 하니 이상세계다.
열반경(涅槃經)에 나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는 누구나 평등하게 태어나는 것이지만,
스스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심성이 천박해질 수도 있고 고귀해질 수도 있습니다.
지혜롭게도 되고 마냥 어리석을 수도 있습니다. 생명의 원천은 우리의 심성에서 나옵니다.
천당 지옥이 우리들의 심성(心性) 가운데 있어요.
극락이니 천당이니 지옥이니 하는 것이 이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안다면 늘 행복하고 안락할 수 있습니다.
성인들은 세상을 살아 나가는데 가장 으뜸가는 태도는 물처럼 사는 거라고 말합니다.
물이라는 것은 대단히 유연합니다. 내가 서 있는 발바닥 밑 지하를 흐르고 있지만 그 물은 만물을 길러냅니다.
모든 생명은 물이 없으면 살 수가 없어요.
가장 낮은 곳을 흐르지만, 만물을 길러내는 물처럼 유연하면서 또 겸손하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물은 생명을 길러내지만 내가 기른다. 공을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나는 불자 여러분들이 물처럼 겸손하며 포용력 있게,
그리고 고요를 즐기는 사람으로, 마음을 잘 쓰면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현대인들은 고요한 시간을 갖기 어려워요. 고요를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은 불법도 알기 어렵습니다.
물이 고요할 때는 하늘의 달그림자가 선명히 나타나지만, 물이 흔들리면 달그림자는 일그러져 보입니다.
마찬가지예요. 마음이 흔들리면 객관적인 것을 판단하는 지혜가 나올 수 없습니다.
마음이 고요할 때만 판단이 바로 선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 무진장 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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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치바보라도 누구나 한번쯤은 신통한 경험을 한다.
자신만의 순간적인 경험을 진실로 믿으면 안 됩니다.
자신의 부족한 인지능력과 부족한 안목으로 경험한 것을
모든 사람의 인생인양 산다면 결국에는 수렁에 빠질 것입니다.
동쪽으로 갈 길을 서쪽으로 서쪽으로 갈 길을 동쪽으로
무한정 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박학절문(博學切問)! 널리 배우고 간절히 물어라.
일반적 상식과 이치에 맞나?
일반적 상식과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면
아무리 하늘을 나는 재주라도 결국은 나락에 떨어져
고통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과거를 회상한다고 돌아오지 않고
오지 않은 미래를 너무 꿈꾸지 말며
현재도 바로 지나가기 때문에
금강경에
과거심불가득 (過去心不可得)
과거의 마음은 얻을 수 없고
미래심불가득 (未來心不可得)
미래의 마음은 오지 않았으니 얻을 수 없고.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
현재는 찰나에 지나가니 얻을 수 없다.
찰나생(刹那生)찰나에 일어나고.
찰나멸(刹那滅)찰나에 사라진다.
순간(瞬間)이나 찰나(刹那)는 엄청나게 짧은 시간입니다.
1찰나는 75분의 1초(약 0.013초)에 해당하는
극히 짧은 시간이라고 하니 엄청 짧은 시간이죠.
바로 지금 여기서 별안간 생기고 사라지는 우주
이것이 엄청난 무상(無常)입니다.
이 세상 끝은 어디인가
저 세상 끝은 어디인가
이 세상 끝은 이 자리요
저 세상 끝도 이 자리니
천당 극락은 어디인가
천당 극락도 이 자리요
아귀 지옥은 어디인가
아귀 지옥도 이 자리니
이 자리는 어디인가.
일으키는 생각이 이 자리니
일으키는 생각을 들여 보며
지금.여기서.바로.행복한 마음으로 건강하시길!
마하반야바라밀
광년(光年)이란
빛이 1년간 가는 거리
빛의 속도는 1초에 약 30만Km
지구 둘레가 약 4만Km이니 빛은 1초에
지구둘레를 7바퀴 반을 돈다는 이야기입니다.
태양빛이 지구에 도달하는데 8분 걸린다고 하니
우리가 눈으로 보는 태양은
8분전의 태양을 보는 것
1억 광년 거리의 별을 보는 것은
1억 년 전의 별을 보는 것
이미 없어진 별을 있다고 착각하여 보고
새로 생긴 별은 1억년 후에 보게 되니
이미 생긴 것을 못보고 없다고 하는 것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
과거의 마음을 지나갔으니 얻을 수 없고
미래심불가득(未來心不可得)
미래의 마음은 오지 않았으니 얻을 수 없고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
현재의 마음도 찰나에 지나가니 얻을 수 없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일체의 만들어진 법은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꿈과 같고 환영(幻影)과 같고 물거품과 같은 것
금강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거품이 일어났다 꺼졌다 반복하는 것이
우주의 생멸과 같은 것입니다.
천당 지옥도 꿈과 같고 그림자와 같이
영원한 행복이나 고통은 없는 것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면 천당이요.
지금 이 순간이 괴로우면 지옥입니다.
摩訶大法王(마하대법왕)
부처님은
無短亦無長(무단역무장)
짧지도 길지도 않으시며
本來非皂白(본래비조백)
본래 희거나 검지도 않으며
隨處現靑黃(수지현청황)
모든 곳에 인연 따라 나타나시네.
건강하고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부처님이 제타숲의 정사에 계실 때였다.
비구들이여!
오늘은 연기라는 것과 연생(緣生)에 대해서 말하리라.
우선 연기란 무엇인가?
예를 들자면 생이 있으므로 노사(老死)가 있다.
이는 내가 있건 없건 정해진 것이다.
존재의 법칙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 내용은 상의성(相依性)이다.
그것을 나는 깨달았다.
깨달았기 때문에 그대들에게 가르치고 설명하여
그대들에게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부처의 정각의 내용을 한마디로 말하면
상의성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다음에 연생이란 어떤 것인가
예를들면 노사(苦)는 연생이다.
조건이 있어서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조건을 없앰으로서 노사도 없앨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출가의 과제는 노사 혹은 고(苦)였다.
인간의 유한성에 짓눌리는 인간존재를 구제할 길은 없는가
그 길을 부처는 연기의 법을 깨달음으로써 찾아 낸 것이다.
바라나시(波羅捺)의 미가다야에서 첫 설법을 한 다음
부처님은 아직 그 곳에 머물고 있었다.
그 동안 그의 설법을 듣고 그의 제자가 된 사람이
60명이나 되었다.
어느 날 부처는 혼자 숲 속에서 쉬고 있었다.
젊은이들이 숲 속에서 우왕좌왕 하며 무엇인가 찾고 있더니
부처가 거기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여기 여자가 한 사람 도망쳐 오지 않았읍니까"하고 물었다.
그들은 그 근처 양가의 자제였는데
약 30명이 각자 아내를 데리고 이 숲 속에 놀러 왔었다.
그러나 그 중 한 사람만이 총각이어서 아내 대신
유곽여자를 데리고 왔다.
그런데 그들이 정신없이 놀고 있는 사이 그 유곽의 여자가
그들의 돈을 홈쳐 달아나 버렸기 때문에
그 여자를 찾고 있는 것이었다.
이 사정을 들은 부처는 그들에게
"젊은이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달아 난 여자를 찾아 헤매는 것과
자기 자신을 찾아내는 것과 어느 쪽이 중요할까"하고 물었다.
이 질문은 그들의 의표를 찔렀다.
정신없이 놀다가 또 정신없이 여자를 찾던 그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물론 나 자신을 찾아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젊은이들 중 한 사람이 그렇게 대답했을 때
부처님은 그들에게 말했다.
"그럼 모두 거기에 앉아 보게
내가 이제 자기 자신을 찾아내는 법을 가르쳐 주겠네"
젊은이들이 모두 거기에 앉게 하고 부처님은
정연하게 인생을 바로 보는 법!
올바르게 사는 방법! 등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의 마음은 아직 인생의 때가 묻지 않았었기 때문에
곧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부처님을 따라 출가하여
그의 제자가 되었다 한다.
이것은 부처의 내관 즉 자기탐구의 가르침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얘기다.
어느 날 아침 부처님의 젊은 제자 앗사지가
라자그하 거리에서 탁발하고 있었다.
그 태도가 매우 훌륭했기 때문에 어느 수행자가
매우 감탄을 했다.
"만일 이 세상에 참된 성자가 있다면
이 사람은 그 사람의 제자일 것이다
도대체 스승이 누군가 물어 보리라"
탁발에는 법이 있어서 탁발 도중에는
얘기 해서는 안되게 되어 있다.
그래서 그 수행자는 그의 탁발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이윽고 그의 탁발이 끝나자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매우 행동거지가 훌륭하고 얼굴빛도 빛나고 있읍니다
당신의 스승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그는 부처님의 제자며
그의 가르침을 받드는 자라고 답을 했다.
"그러면 당신의 스승은 어떤 것을 가르치시는지요?
그것을 들려주실 수 없읍니까?"
그러나 앗사지는 아직 부처님의 제자가 된 지 얼마 안되므로
그 가르침을 요령있게 말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러나 그 수도사는 그 편린이라도 다소나마
가르쳐 달라고 재차 물었기 때문에
앗사지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원인이 있어 생긴다
부처님은 그 원인을 설법하신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멸하는 것에 대해서도
또 그와 같이 설법하신다"
그 설명만으로 그 수행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즉시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후에 부처님의 수제자가 된 사리불(舍利佛)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마하반야바라밀 🙏
생각해보면 기초가 없었어.
젊을 땐 한심하게 살아도 그 젊음이 영원할거라 생각했지.
부모님의 잔소리도 주변사람들의 조언들도...
모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일뿐인데 왜 저렇게 참견을 할까?
한 귀로 듣고 흘릴뿐이었지.
그러다보니 그 나이에 해야했던 기초공사가 부실해졌지.
토대가 부실하고 흔들리니 건물 하나하나를 올릴때마다
남들보다 몇배는 힘들었고 편법을 사용해야 겨우 가능한
경우가 태반이었어.
결국은 높이 올리지도 못하고 남들보다 낮은 곳에서 멈춰야했지.
시간이 흘러 나이는 먹어가고 그나마 올린 낮은 건물조차도...
부실한 기초공사로 인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도...
무너지는 나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더라.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
그리고 무너진 건물들과 황폐화 된 주변을 돌아봤을 땐...
힘내라며 격려해주던 사람들도, 항상 내 편이었던 부모님도...
모두 내 곁을 떠난 상태였지.
기생수 제도는 다시 출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제도가 아니야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
아무런 희망도 없이 길거리로 내몰면 사고치고 범죄저지르고
난리나는 게 오히려 국가로 볼 땐 더 자원의 낭비니까...
최소한의 돈으로 딱 먹고만 살 수 있게끔.
사고 안치고 살 수만 있게끔.
그렇게 유지시켜주는 생명유지장치 같은 제도지.
이젠 다시 건물을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 기억조차 나질않아.
후회한다. 제 나이에 당연히 해야했던 것들을 거부했던
지난 날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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