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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성지 홈페이지에서
◎ 간략설명 : 수많은 천주교인을 국사범으로 처형한 해미 진영
◎ 지번주소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179
◎ 도로주소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남문2로 143
◎ 연락처 : 전화번호 (041)688-3183 팩스번호 (041)688-9039
◎ 홈페이지 : http://www.haemi.or.kr
◎ 관련기관 : 해미 성지
◎ 관련주소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성지1로 13
◎ 문화정보 : 사적 제116호
◎ 미사시간 : 주일 : 11:00 미사 일정은 해미 순교성지 것입니다.
평일 : 월 11:00 (화-토) 11:00
◎ 찾아가는 길 :
[승용차] * 서울 출발
- 강남권 : 양재 IC→과천 의왕간 고속화 도로→일산 외곽순환도로
→서서울 IC→서해안 고속도로→해미 IC→해미→해미읍성
- 강북권 : 서울 외곽순환도로→서서울 IC→서해안 고속도로
→해미 IC→해미→해미읍성
- 강서권 : 서부간선도로→안산→발안 IC→서해안 고속도로
→해미 IC→해미→해미읍성
* 인천 출발 : 서해안 고속도로→해미 IC→해미→해미읍성
* 대전 출발 : - 공주→유구→예산→덕산→해미→해미읍성
- 유성→공주→청양→홍성→해미→해미읍성
- 유성(대전 당진간 고속도로 이용)→당진
→서해안 고속도로→해미→해미읍성
* 천안 출발 : - 아산→삽교천→당진→운산→한우개량사업소
→해미→해미읍성
- 예산 →덕산→해미→해미읍성
* 부산, 대구 출발(경부고속도로 이용) : 대전→유성→공주
→유구→예산→덕산→해미→해미읍성
* 광주 출발 : 전주→군산→서해안 고속도로→해미 IC→해미
→해미읍성
[대중교통] 서울 남부 터미널에서 서산행(10분 간격, 1시간 40분 소요)을 타거나 대전 동부 터미널에서 서산행(20분 간격, 2시간 30분 소요)을 탑니다. 서산 공용버스 터미널에서 해미행 시내/시외버스를 이용(10-15분 간격 운행, 15-20분 소요)하여 해미읍성에서 하차합니다.
속칭 ‘해뫼’라 일컬어지는 해미 고을은 역사적으로 조선 초기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처소를 둔 곳으로서 조선 중기에는 현으로 축소 개편된 진영에 1400-15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무관 영장이 현감을 겸하여 지역을 통치를 하던 곳이다. 내포 일원의 해안 국토 수비를 명목으로 현감겸영장(縣監兼營將)은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다 할 국토 수비의 전공을 기록한 바 없는 해미 진영은 1790년대부터 1880년대에 이르는 100여 년간,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대량 처형한 오명만을 남기고 있다. 이 기간 동안 한국 천주교회사에 있어서 대박해의 때로 기록된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조정이 천주교 탄압을 공식화 할 때 외에도 해미 진영은 지속적으로 내포 지방의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여 죽였다. 병인 대박해 때만 해도 조정에 보고된 해미 진영의 천주교 신자 처결의 숫자가 1천여 명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그 이전 80여 년 간에 걸친 해미 진영의 지속적인 천주교 신자 처결의 숫자는 수천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지속적인 박해 동안 해미 진영(지금의 해미 읍성, 사적 제116호)에 있던 두 채의 큰 옥사에는 한티고개를 넘어 내포 지방에 끌려온 천주학 죄인들이 항상 가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도 바로 이곳에서 옥사하였다). 또한 옥사 앞에는 당시 순교자들의 손발을 묶고 나뭇가지에 철사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하던 일명 호야나무(회화나무, 충청남도 기념물 제172호)가 철사줄이 박혀있던 흔적을 희미하게 간직한 채 지금도 우뚝 서 있다. 그래서 1950년대에 해미 공소 신자들이 식량을 절약하여 옥사터 주변 땅 1,800여 평을 확보하여 공소 강당을 세웠는데, 1982년 정부가 문화재 관리 정책이란 명목으로 공소 강당을 철거하고 그 터를 일부 보상, 일부 징발한 후 순교 기념비만 새로 세워주었다. 그 후 오늘날까지 옥사터에 대한 교회 자체적인 성역화 사업은 허용되지 않고 있다.
이렇게 내포 지방에서 끌려와 옥사에 갇혀 있던 그 많은 순교 선열들을 군졸들은 매일같이 해미 진영의 서문 밖으로 끌어내어 교수, 참수,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 등으로 처형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더욱 잔인한 방법이 고안되기도 했다. 즉 돌다리 위에서 죄수의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메어치는 자리개질이 고안되어 죽이기도 하였고, 여러 명을 눕혀 놓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하였는데, 혹시라도 꿈틀거리는 몸뚱이가 있으면 횃불로 눈알을 지져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하여 해미 진영의 서문 밖은 항상 천주학 죄인들의 시체로 산을 이루고 그 피로 내를 이루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지금은 해미 진영의 서문 밖 바로 앞에 있는 70여 평의 좁은 순교지에 자리개질에 이용되던 돌다리가 보존되어 있는데, 1956년에 서산 성당으로 이전 · 보존되다가 1986년 9월에 원위치를 찾아 복원되었다가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 개설로 인해 2009년 1월 8일 해미 생매장 순교성지 내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현재 서문 밖 순교지에 있는 자리개 돌다리는 모조품이다.
그리고 1866년 병인년부터 1868년 무진년에 이르는 대박해 때에는, 많은 수의 죄수들을 한꺼번에 죽이면서 시체 처리의 간편함을 위하여 생매장형이 시행되었다. 해미 진영의 서녘 들판으로 십 수 명씩 데리고 나가서 아무 데나 파기 좋은 곳을 찾아 큰 구덩이를 만든 후, 한 마디 명령으로 산 사람들을 밀어 넣고 흙과 자갈을 덮어 묻어버렸다.
또한 생매장형이 시행되면서 여름철 죄인의 수효가 적을 경우에는 사령들이 번거로움을 덜기 위한 방법으로 개울 한가운데에 있던 둠벙에 죄인들을 꽁꽁 묶어 물속에 빠뜨려 죽이는 수장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해미 지역의 외인들은 천주학 죄수들을 빠뜨려 죽인 둠벙이라 하여 ‘죄인 둠벙’으로 부르기도 했으나 현재는 이름조차도 변해 ‘진둠벙’이라 불리고 있다.
교회가 이곳을 순교지로 인식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농부의 연장 끝에 걸려들어 버려지던 뼈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 때 캐어내던 뼈들은 수직으로 서 있는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 바로 그것은 죽은 몸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을 묻었다는 증거이다. 1935년 서산 본당 범 베드로 신부의 지도 하에 해미 진영 서녘의 생매장 순교 벌판에 대한 발굴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때 발굴한 순교자들의 유해와 유품 성물들은 그해 4월 2일 30리 밖 상홍리 공소 뒷산 백씨 문중 묘역에 임시 안장되었다가 1995년 9월 20일 원래 순교 터로 이장되었다. 이때 순교자들의 유해 일부는 별도로 보존 처리하여 모셨다가 현재는 해미순교성지 기념관 내의 유해참배실에 보존하고 있다. 그리고 무명 생매장 순교자들의 묘역 뒤에는 16m 높이의 철근 콘크리트 조형물인 해미 순교탑이 세워졌다.
그런데 이렇게 수천 명으로 추정되는 순교자들 중 70여 명만이 불확실한 이름과 출신지를 기록으로 남기고 있을 뿐, 그 밖의 모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무명 순교자들이다. 모두가 무명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순교자들 중 홍주(홍성)와 공주 등 상급 고을로 이송된 순교자들은 이송 사실과 이름이 기록으로 남겨진 것으로 보아 그 이송된 순교자들은 해미 진영장의 독자적 처결에 있어서 사후에 문책거리가 됨직한 신분의 사람들이었으며, 해미 진영은 처형 후 문책의 배후 세력을 갖지 못한 서민층 신자들만을 심리나 기록 절차 없이 마구잡이로 죽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해미 성지는 1985년 4월에 해미 본당이 설립된 후 해미 순교선열현양회를 발족하였고, 순교성지 확보운동을 전국 신자들에게 홍보하여 꾸준히 모금한 결과 1998년 말에 생매장 순교터 부지 약 7천 여평을 확보하였고, 이어서 1999년 5월부터 3천 명의 회원들로부터 성전 건립 기금을 모아 2000년 8월 기공식을 갖고 2003년 6월 17일 무명 순교자 기념 성당을 건립하여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셔놓고 있다. 이렇게 조성된 생매장 순교지 일대는 “예수 마리아!” 기도 소리를 “여수머리”로 알아듣던 곳이 이제는 주민들의 입으로 “여숫골”이라는 이름의 땅이 되어 오늘의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2014년 8월 17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 참가를 위해 해미 성지를 방문하여 아시아 주교들과의 만남을 갖고 해미읍성에서 폐막미사를 집전하였다. [출처 : 해미성지 홈페이지,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4년 8월 20일)]
감옥터와 호야나무 높이 5미터, 길이 1.800미터의 석성으로 옹벽을 두른 해미 진영 안에는 동헌 동남쪽 1.800평 대지 위에 내옥, 외옥으로 구분되던 감옥이 있었다. 이조 시대의 감옥은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울 안에 있었다. 바닥에 멍석을 깔아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말할 수 없이 더워 한여름 매 맞은 상처는 곪기 일쑤였다. 고문과 굶주림, 갈증과 질병으로 순교자들의 몸이 스러져 갔던 감옥은 발굴 작업 및 남아 있는 기록을 토대로 복원 재현되었다.
그 감옥터 옆에 있는 호야나무는 신자들을 묶어 매달고 몽둥이로 치면서 고문하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즉 오늘도 이 호야나무의 묵은 가지는 녹슨 철사줄에 움푹 패이도록 옛님들의 아픔을 살갗에 두르고 있다.
관아터와 장터길 진영장이 호령하던 옛 동헌 또한 헐려 없어졌다가 복원되었다. 그 옆에 아문과 호서좌영의 옛 모습 또한 복원되어 있고, 그 주위로 노송 여러 그루가 당시 호령 소리, 곤장치는 소리, 비명 소리를 이파리마다 묻혀 놓은 듯 그 자리에 서 있다. 관아터로부터 남서쪽으로 헐려진 옛 집터 사이사이에 질퍼덕한 길이 있었다. 옛 저자길로 옛님들이 저주의 욕설을 온몸에 묻혀가며 형장으로 호송되던 길이었다.
서문 밖 순교지 저자길을 따라 서쪽 하수로에 다다르면, ‘재앙을 떨쳐내는 문’이 비껴 있다. 재앙의 씨알머리를 서쪽에 내어 버리듯이, 사학 무리를 이 문 밖으로 끌어내어 쳐 죽었다. 잡아들일 때 빼앗았던 십자가의 묵주 등을 이 문의 난간에 넣어놓고, 지나가며 밞게 하여 천주학을 버리고 목숨을 살려보라 하였다. 그러나 그 님들은 성물에 머리 숙여 절을 하고, 문턱을 넘어 가서 목숨을 기꺼이 내놓았다. 이 문의 누각에는 지성루라 쓰여 있는데, 본래 탱자나무로 둘러쳐진 해미 진영이었기 때문이지만 이 서문이란 그 님들이 가시밭 이 세상을 떠나가던 마지막 문이었다. 이 문을 나가면 그 님들을 밀어 넣고 돌로 찧던 하수구가 입을 벌리고 있다. 하수구를 가로 질러 놓여 있던 돌다리는 그야말로 사람 도마였고, 여기저기 시체가 쌓여 썩고 피가 땅에 젖어 남아 흐르는 곳이 서문 밖이었으니 여기서 죽은 목숨이 몇 천이나 되었는지 헤아릴 수 없어 그저 “시산혈하를 이루던 곳이었다”라는 말만 남아 있다.
피의 제사장 자리개돌 서문 밖 순교지에서 순교자들의 목숨을 빼앗는 방법은 가지가지였다. 돌로 쳐 죽이기도 하고, 돌구멍에 줄을 꿰어 목에 옭아 지렛대로 조여 죽이기도 하고, 묶어서 눕혀 놓은 여러 명을 돌기둥으로 내리 눌러 죽이기로 하였으며, 얼굴에 백지를 덮고 물을 뿌려 질식시켜 죽이기도 하고, 나무에 매어 달고 몽둥이로 죽이기도 하였다.
특히 잔인하게는 돌다리 위에 연약한 순교자를 서너 명의 군졸들이 들어올려 자리개질(태질)하여 머리와 가슴을 으스러지게 하기도 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시 양촌 사람 방영창 안토니오 등 수많은 분들이 순교하였다. 꿈틀거리는 몸뚱이가 있으면 횃볼로 지져 숨을 끊어 버렸다. 이 자리개돌은 서문 밖 순교 성지 일부를 확보하여 보존하다가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 개설로 인해 2009년 1월 8일 해미 생매장 순교성지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서문 밖에는 현재 모조품을 준비해 두었다. [출처 : 오영환, 한국의 성지 - http://www.paxkorea.kr, 2005, 내용 일부 수정(최종수정 2011년 12월 2일)]
▶모바일용 요약 설명◀ 해미 고을은 조선 중기 내포 일원의 해안 수비를 위한 진영이 있던 곳으로 진영장이 현감을 겸해 지역을 통치하며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1790년에서 1890년에 이르는 100여 년 동안 해미 진영은 수많은 천주교인을 국사범으로 처형했는데, 공식적인 박해 외에도 끊임없이 내포 지방의 교우들을 잡아들여 죽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해미 진영의 옥사에는 늘 잡혀 온 교우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매일 서문 밖으로 끌려나가 교수형, 참수,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 자리개질 등으로 죽어갔습니다. 특히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시체 처리를 간편하게 하기 위해 생매장이나 수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순교한 이들의 정확한 신원과 행적조차 알려지지 않았고, 단지 수천으로 추정되는 순교자들 중 70여 명만의 이름과 출신지가 남아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생매장과 수장으로 숨져 간 진둠벙 주변에는 십자가의 길 14처와 노천 성당이 조성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을 고문하고 처형했던 해미 읍성에는 동헌과 교우들을 가두었던 옥사가 복원되었고, 그 앞에는 고문대로 쓰던 호야나무가 남아 있습니다. 서문 밖 순교지에는 1956년 서산 성당으로 이전하여 보존하던 자리개 돌다리가 1986년 원위치를 찾아 복원되었다가 2009년 1월 다시 성지 내로 옮겨 보존하고 있고, 1989년에 건립한 순교현양비가 있습니다. 그리고 1935년 서산 본당 범 베드로 신부에 의해 순교자들의 유해와 유품들이 발굴되어 30리 밖 상홍리 공소 뒷산에 임시 안장되었다가 1995년 원래의 순교 터인 해미 순교탑 앞으로 이장되었습니다.
해미 성지는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숭고한 희생과 신심을 기리기 위해 2003년 6월 무명 순교자 기념성당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가졌고, 성당 뒤에는 묘지 형태의 유해참배실을 건립했습니다. 유해참배실은 2009년 ‘해미순교성지 기념관’으로 새롭게 단장했습니다. 2008년 충청남도 문화재로 지정 고시된 해미 성지는 2015년까지 지자체와 함께 역사를 간직한 순례지로 개발할 예정입니다. 2014년 8월 17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 참가를 위해 해미 성지를 방문하여 아시아 주교들과의 만남을 갖고 해미읍성에서 폐막미사를 집전했습니다.
한국의 성지 홈페이지에서 :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처형한 해미 진영
■ 순례지 정보
◎ 소재지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 연락처 : 해미 성지 관리소 사무실
(041) 688-3188, 688-4886 FAX (041) 688-9039
◎ 홈페이지 : 해미 성지 http://www.haemi.or.kr
◎ 미사시간 : [해미 성지] 평일 및 주일 : 오전 11:00
(단 월요일 미사 없음)
◎ 교통편 : [승용차] 서해안 고속도로 해미IC에서 내려서면 곧 해미 읍성에 이른다.
해미는 일찍이 천주교가 전파된 내포 지방의 여러 고을 가운데서 유일하게 진영이 있던 군사 요충지였다. 1418년에 병영(兵營)이 설치되었고. 1491년에 석성이 완공된 해미 진영은 1790년대로부터 100년 동안 천주교 신자들을 무려 3천 명이나 국사범으로 처결한 곳이다.
내포 일원의 해안 수비를 명목으로 진영장은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원래 조선왕조의 군사적 요충지 진영(鎭營)에는 중앙에서 3품의 진영장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해미의 영장은 조선 중기 이후, 3품 벼슬의 무관(영장)이 별도로 파견되어 담당한 것이 아니라, 종6품의 해미 현감이 겸임을 한 것으로, 해미 진영은 홍주 진관(洪州鎭管)에 속하며 홍주 영장(종3품)의 지휘를 받아, 서해안 일대의 고을에서 잡힌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신자들 중의 지체가 높은 사대부 출신들은 모두 상급 기관인 홍주 영장 및 충청 감사가 있는 공주로 이송하고, 신분이 낮은 서민들만 자의적으로 대량 처단한 것 같다.
해미 읍내에는 순교 기념지가 여러 곳이 있다. 그러나 공식 형장은 서문 밖이었던 것 같다. 다음은 성내에 있던 옥터인데 여기에서 많은 교우들이 옥사 또는 교수형을 당하였다. 해미의 첫 순교자는 1797년의 정사박해로 체포되어 1800년에 순교한 인언민(印彦敏, 1737~1800, 마르티노)과 이보현(李步玄, 1773~1800, 프란치스코)이다.
이어 1814년에는 김진후(金震厚, 1739~1814, 비오)가 해미에서 옥사로 순교했으며, 그 외에도 1811년∼1839년의 중기 박해 기간 동안 민 베드로 첨지( ?~1839) 등 9명이 해미에서 신앙을 굳게 증거한 뒤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1866년 이후로 진행된 병인박해 때에는 모두 122명에 이르는 순교자가 해미에서 탄생하였다. 이는 순교록에 나오는 57명, 관변 기록인 《공충도사학죄인성책》에 나오는 70명 중에서 중복된 것으로 추정되는 순교자 5명을 제외한 숫자이다.
이처럼 모든 기록을 통해 성명이나 세례명 중 적어도 하나를 확인할 수 있는 해미의 순교자는 132명에 이르고 있다. 여기에 무명 순교자 47명 이상의 수를 더하면, 기록으로 확인되는 박해기의 해미 순교자 총수는 179명 이상이 된다. 교회의 순교자 증언록만을 통해 볼 때, 박해기의 해미 순교자 67명 중에는 교수형으로 순교한 33명의 경우가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참수와 옥사가 각각 5명, 병사가 4명, 생매장이 3명, 그리고 장사가 3명, 미상이 14명으로 나타난다.
■ 해미 읍성의 신앙 증거 터와 순교 터
◆ 감옥 터와 호야나무
높이 5m 길이 1,800m의 석성으로 옹벽을 두른 해미 진영 안에는 동헌 동남쪽 1,800평 대지 위에 내옥, 외옥으로 구분되던 감옥이 있었다. 조선 시대의 감옥은 높은 담으로 둘러쌓은 울안에 있었다. 바닥에 멍석을 깔아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말할 수 없이 더워 한여름 매 맞은 상처는 곪기 일쑤였다. 고문과 굶주림과 갈증과 질병으로 순교자들의 몸이 스러져 가던 감옥은 헐려 없어졌으나 최근 다시 복원하였다. 그 감옥 터 옆에 있는 호야나무는 지금도 묶어 매달고 몽둥이로 치면서 고문하던 흔적으로 오늘도 이 나무의 묵은 가지는 녹슨 철사 줄에 움푹 패이도록 옛님들의 아픔을 살갗에 두르고 있다.
병인박해 때 이 감옥 사정을 목격한 이주필(李周弼)씨는 이렇게 증언했다고 한다. "성 중앙에 담을 길반이나 넘도록 쌓아올린 3간 와가가 있으니 그것이 옥이다. 그 속에 30-40명 가량이 갇혀 있었다. 그 담 밖에 큰 고목이 하나 서 있었는데 그 나무에 교우들의 목을 옭아매여 죽였다.
그 옆에 또 바깥옥이 있는데 역시 3간 와가이다. 그 안에는 십자패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는데 문을 열어 놓아도 도망치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이 천주학 하는 사람들이었다. 거기서 북쪽 산 밑에 10여간 되는 와가가 관아이고 여기서 영장이 정사를 다스렸고, 그 우편 아래로 또 큰 와가가 있었는데 그것이 객사였다.
특히 당시 토포병방(討捕兵房)이던 박영완이란 자는 살기가 등등하여 무죄한 사람을 많이 죽였다. 박영완은 심지에 불을 붙여갖고 죽은 사람마다 눈에다 대어보고 아직 덜 죽은 사람을 발견하면 막 때려 죽여 버렸다. 박영완은 얼마 후에 홍주로 잡혀가서 맞아죽고 자손없이 절손으로 끝을 맺었다. 외교인들까지 모두 천벌이라고 말했다."
◆ 관아 터와 장터 길
진영장이 호령하던 옛 동헌과 그 옆자리에 아문과 호서좌영의 옛 모습이 복원되어 있고 뜨락에 있었을 법한 노송 여섯 그루가 당시 호령소리, 곤장 치는 소리, 비명 소리를 이파리마다 묻혀 놓은 듯 그 터에 서 있다. 관아 터로 부터 남서쪽으로 헐려진 옛 집터 사이사이에 질퍼덕한 길이 있다. 옛 저자길이다. 옛 님들이 저주의 욕설을 온몸에 묻혀가며 형장으로 호송되던 길이다.
■ 해미 성지 조성 과정
해미 순교자들에 대한 조사는 1935년 당시 서산(현 서산 동문동) 본당의 주임 신부였던 바로(P. Barraux, 范)신부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 그는 해미의 이주필(李周弼)과 이병준(李秉俊), 도장리의 박승익(朴承益), 조산리의 임인필(任仁弼) 등의 증언에 따라 해미면 조산리 일대를 발굴하여 순교자들의 유해와 묵주, 십자가 등을 수습하고 서산군 음양면 상홍리 공소(현 서산 동문동 본당 뒷산)에 안장하였다.
♠조산리 유해 발굴
그리고 이를 기념하여 국판 40면의 소책자인 《해미순교자약사(海美殉敎者略史)》를 간행하였다. 그 후 1955년 4월에 서산 본당의 신자들이 순교 기념비를 세웠으며, 1956년 3월에는 오기선(吳基先, 요셉) 신부와 서산 본당의 신균식(申均植, 도미니코) 신부가 옛 해미 감옥터와 형구로 사용되었던 돌다리를 찾았다. 돌다리는 6월에 서산 본당으로 옮겨 보관되었다.
♠읍성 내 공소 신축과 순교 기념탑 제막식
이어 1957년에는 해미읍성 안에 공소 건물을 마련하였고, 1962년에는 해미읍성 안 옛 감옥이었던 호야나무 옆의 순교 성지를 매입한 뒤 1966년에 공소 강당을 신축하였다. 그런 가운데 1975년 10월 대전교구에서는 ‘순교복자 79위 시복 50주년’을 기념하여 해미면 조산리에 순교 기념탑을 세우고 대전교구장 황민성(黃旼性, 베드로) 주교의 집전으로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이 기념탑 앞에 세운 화강석 제대는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의 부친인 남연군(南延君) 묘의 상석(床石)을 기증받아 다듬어 만든 것이다.
♠상홍리 유해를 해미로 이장
한편 정부에서는 사적지 보존을 위해 1973년 해미읍성을 사적 116호로 지정하고 읍성 일대의 복원 작업을 추진하여, 1981년 해미 공소 강당이 철거되었다. 교회측에서도 읍성 안팎의 순교 성지를 보존하기 위해 1982년 읍성 내 감옥터에 순교 기념비를 세웠고, 1984년에는 순교자들의 생매장터를 매입하였으며 1985년 4월에는 성지 관리를 위해 해미 본당을 설립하였다.
본당에서는 6월부터 ‘해미 순교 선열 현양 협의회’를 설치하고 성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1986년 9월에는 서산 본당에 보관 중이던 돌다리를 원 위치인 해미 진영 서문 밖으로 옮기고 1989년에는 돌다리 옆에 순교 현양비를 건립하였으며, 1995년 9월에는 옛 상홍리 공소에 안장되었던 순교자들의 유해를 해미 성지로 이장하였다.
♠현양 협의회의 성역화 사업
이와 함께 해미 순교 선열 현양 협의회에서는 순교 성지 매입을 위한 전국적인 모금 운동을 전개하여 1998년에는 해미읍성 주위의 부지 약 7천 평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미 본당은 성지에서 떨어져 있어 순례객들의 미사 봉헌과 성지 관리가 어려웠기에, 해미 본당의 안상길(安相吉, 사도 요한) 신부는 성지 안에 성당을 짓기로 결정하고 2000년 8월에 기공식을 거행하였으며 이듬해 1월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하였다.
2003년 6월에 완공된 무명 순교자 기념 성당은 200평 규모의 대성당과 50평 규모의 소성당을 갖추고 있으며, 성당 뒤쪽에 지름 15m의 대형 묘지 모양의 유해 참배실을 마련하여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장하였다.
▒ 여전히 식지 않고 (해미에서) <김영수> ▒
내포벌의 하늘이 / 끝없이 쪽빛으로 빛나는 것은
땅에다 뿌린 피들 있었음이요 / 내 아직도 꿈을 놓지 않았음입니다
결코 늙지 않는 햇살 속에서 / 약속 푸르게 익어 있는 노래 들으며
땅과 하늘 사이에서 / 슬픔으로 설렐 수 있는 것은
가슴 속에는 기도 품은 죄 있음입니다 / 내 속을 돌고 있는 밤의 안개는
자리를 조금씩 옮길 때마다 / 한 줌씩의 새벽을 남기면서
가장 깊은 슬픔의 샘에 닿아 / 얼굴 씻은 물소리 하나 되기를 바랍니다
눈물 어린 기도 하나 되기를 바랍니다 / 해미를 흐르는 바람은
여전히 식지 않고 있습니다
■ 순교자
◆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1737∼1800년)
1737년 충청도 덕산 주래(현 충남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인언민 마르티노는 온순하면서도 꿋꿋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또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상당한 학식도 쌓게 되었다. 황사영을 만나면서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교리를 배운 뒤 한양으로 올라가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장남 요셉을 신부 곁에 남겨두었으며,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집과 재산을 버리고 공주로 이주하였다.
1797년에 시작된 정사박해 때 공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옥으로 끌려갔다. 청주로 이송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고 다시 그의 고향을 관할하던 해미 관장 앞으로 이송되었다. 해미 옥에서 그는 젊은 이보현(프란치스코)을 동료로 만나 언제나 서로를 권면하였다. 그러자 관장은 ‘인언민도 이보현과 같이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를 옥에서 끌어내 매질을 가하기 시작다가 그중의 하나가 엄청나게 큰 돌을 들어 그의 가슴을 여러 번 내리쳤다. 이내 그의 턱이 떨어져 나가고 가슴뼈는 부서지고 말았다. 이러한 형벌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니, 그때가 1800년 1월 9일(음력 1799년 12월 15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 복자 이보현 프란치스코(1773∼1800년)
이보현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덕산 황무실(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호음리)의 부유한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부친을 여의었다. 그는 난폭하였으나 고향 인근에 살던 황심(토마스)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황심은 훗날 북경을 왕래한 교회의 밀사로 활약하였으며, 그의 아내는 바로 이보현의 누이였다.
1797년의 정사박해로 연산에서 체포되어 그곳 관아로 압송되어 해미 관장에게 이송되었다. 다음날 아침, 프란치스코는 장터로 끌려나가 혹독하게 매를 맞았으나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망나니들은 그를 넘어뜨린 후 몽둥이로 불두덩을 짓찧어 끝장을 냈다. 그때가 1800년 1월 9(음력 1799년 12월 15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 복자 김진후 비오 (1739∼1814년)
충청도 면천의 솔뫼에서 태어난 김진후 비오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증조부요 1816년에 순교한 김종한 안드레아의 부친이다. 족보에는 그의 이름이 ‘운조’(運祚)로 기록되어 있다. 그가 천주교 신앙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맏아들이 이존창으로 부터 교리를 전해 듣고는 이를 형제들에게 전하면서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 가량 되었었다. 그러나 그는 처음에는 천주교 교리에 무관심했으나 자식들의 노력으로 열심한 신앙생활이 시작되었다.
1791년과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배교를 뜻하는 말을 하고는 유배형을 받았지만, 1805년에 다시 체포되어 해미로 압송되었다. 그가 천주교 신자답게 행동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10년간 모범적인 인내심으로 옥중 생활의 고통을 참아냈으나, 결국 1814년 12월 1일(음력 10월 20일) 옥중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76세였다.
■ 찾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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