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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사람들
히 11:32-40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33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히 11:32-40 / 이제 얼마나 더 말해야하겠습니까?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그 밖에 다른 예언자들의 신앙에 대해서 다 이야기하자면 아무리 해도 시간이 모자랄 것입니다. 33) 이 사람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이웃 나라들을 정복하였으며 자기 백성들을 정의로 다스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받았습니다. 또한 사자굴에 던져졌으나 해를 받지 않았고 34) 맹렬히 타는 불구덩이에 던져졌으나 조금도 상처를 입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죽음의 칼날을 피해서 위험을 면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병들고 연약하였으나 믿음으로 다시 건강하게 되었고, 또 어떤 사람은 전쟁터에서 믿음으로 큰 힘을 얻어 적군을 전부 격퇴시키고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습니다. 35) 그리고 어떤 여자들은 믿음이 있었으므로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장차 더 나은 생명의 부활을 얻으려고 감옥에서 풀려나는 대신 매맞고 사형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유의 몸이 되기보다는 죽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36) 어떤 사람들은 조소당하고 매맞고, 다른 사람들은 쇠사슬에 묶여 감옥에 갇혔습니다. 37-38) 어떤 사람들은 돌에 맞아 죽고, 어떤 사람은 톱에 두 동강으로 잘려 죽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믿음을 버리고 풀려나기 보다는 칼에 맞아 죽는 편을 택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양이나 염소의 가죽으로 변장을 하고 광야와 산을 방황하였고 동굴이나 토굴에서 숨어 살며 굶주림과 병과 학대에 시달려야 하였습니다. 39) 이 사람들은 끝까지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약속하신 것을 전부 다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40)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보다 더 좋은 것을 준비해 두신 것을 그들에게도 주시려고 기다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공통점은 고난을 받았으나 마지막에는 승리를 한 것입니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32-34) 본문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 사사 시대와 왕정초기의 사람들입니다. 믿음으로 기드온은 미디안에게(삿 7:22), 바락은 가나안인에게(삿 4:15), 삼손은 블레셋에게(삿 16:30), 입다는 압몬에게(삿 11:33) 승리하였습니다. 믿음으로 다윗을 비롯하여 왕들과 선지자들은 의를 행하기도 하였습니다(대상 18:14; 대하 9:8). 믿음으로 사자들의 입을 막은 다니엘(단 6:22)과 ‘불의 세력’을 물리친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있습니다(단 3:19-28). 믿음으로 ‘칼날을 피한’ 다윗(삼상 18:11), 엘리야(왕상 19:1-14), 엘리사(왕하 6:31-33)는 하나님을 자신의 방패로 삼았습니다(시 18:2). 그리고 믿음으로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된 사람’ 히스기야(왕하 20장; 사 38장), 믿음으로 잃어버린 은혜를 회복한 삼손(삿 16:28-31)이 있습니다. 이어서 믿음으로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친’ 여호수아와 사사들 그리고 다윗 등 모두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환난 중에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35-40) 믿음으로 죽음을 극복한 여자들이 있습니다. 엘리야를 통해 아들을 살린 사브랏 과부(왕상 17:22), 엘리사를 통해 아들을 살린 수넴 여인(왕하 4:35)과 예수로 인하여 독자를 살린 나인 성 과부와 나사로의 동생들인 마리아와 마르다(눅 7:15; 요 11:44)입니다. 그리고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희롱과 채찍질, 결박과 옥에 갇히는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고(렘 37장-38장) 돌로 치는 것과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습니다(왕하 1:8; 대하 24:21; 렘 26:23). 이처럼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께 목적을 두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십자가도 기꺼이 지겠다는 참된 용기와 확신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믿음으로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더 좋은 것을 받도록 예비하신 것이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때론 아직 성취되지 않은 율법의 옛 언약의 약속들이 있지만(13, 39) 복음의 새 언약으로 더 좋은 것을 예비하신 하나님의 구원은 영원한 나라에서 구원받은 백성으로 성취될 것입니다.
적용: 믿음은 눈물의 기도와 환난의 바람을 통해 성장하는 나무입니다. 당신의 믿음의 나무는 어떻게 성장하고 있습니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을 인정하는 것은 과학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자의 믿음은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그 분의 말씀과 약속을 신뢰합니다. 주님의 칭찬을 받는 큰 믿음은 겸손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겸손은 단순히 자신을 낮추는게 아니라 예수를 높이는 것입니다. 불가능이 없으신 예수, 약속을 취소하지 않으시는 예수는 징계하시고 연단하셔서 깨끗한 그릇으로 성장케 하십니다.
< 설 교 >
히브리서 11:32-40
찬송가 545장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 김광욱 목사
히브리서 11장은 소위 ‘믿음장’이라고 불립니다. 크게 다섯 단락으로 나누면, 첫째는 믿음의 정의에 대한 서론이 있고, 둘째부터 다섯째까지는 믿음이란 무엇인지를 ‘믿음의 선진들’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시대를 구분하였습니다. 둘째는 아브라함 이전 시대 믿음의 선진들, 셋째는 족장 시대의 믿음의 선진들, 넷째는 모세부터 가나안 입성까지의 믿음의 선진들, 다섯째는 사사시대 이후 믿음의 선진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지막 부분입니다.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는 앞에서 아담의 아들 아벨부터 가나안 입성 때의 라합까지 믿음의 선진들이 보여준 믿음의 내용만으로 충분하기에, 더 이상의 믿음의 선진들의 소개는 불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본문에서는 이전 방식대로 한 사람씩 이름을 언급하며 믿음의 내용을 소개하지 않고 간략하게 그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는 사사시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사사시대 이후의 왕정 시대의 대표적인 믿음의 선진입니다. 다음은 사무엘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본 구절에서 6명의 사람을 언급하면서 사무엘을 다윗 다음으로 언급한 것이 주목할만한 점입니다. 사무엘은 사사시대에 태어나 왕정시대까지 살면서 하나님께서 사울과 다윗을 왕으로 세울 때 기름을 부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자신의 아들 둘을 사사로 삼았지만(삼상8:1), 사람들은 사무엘을 마지막 사사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사사 직무 이외에 엘리 제사장을 이어 제사장 직무를 수행했으며, 선지자로서도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사무엘을 다윗 앞에 언급하지 않고 왕정 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들 중 제일 앞에 기록한 것입니다. 사사시대와 왕정시대의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면 할 말이 너무 많기에 시간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음 구절부터 간략히 이들의 믿음의 행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33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선진들의 행동의 특징은 ‘믿음으로’ 행함입니다. 사사들과 다윗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겼습니다. 칼이나 창이나 군인을 의지하기보다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의를 행함 역시 믿음 없이 행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불의를 행하지 않고 의의 행동을 합니다. 여기서 ‘믿음으로 약속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특별한 약속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받았다’는 것은 ‘믿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전혀 현실과 거리가 멀어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약속을 믿음으로, 미래에 믿음의 실상을 보았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자들의 입을 막았던 사람으로는 삼손과 다니엘이 떠오릅니다. 다윗도 사자를 물리쳤습니다(삼상17:36-37).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믿음으로 불의 세력을 멸한 사람은 다니엘의 세 친구가 생각납니다. 맹렬한 풀무불에 들어가고서도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칼날을 피한 사람은, 다윗이 사울 왕의 칼을 피한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고, 엘리야 선지자가 아합의 칼날을 피한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고, 엘리사 선지자가 아람 왕의 칼날을 피한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연약한 가운데 강하게 된 사람은, 머리카락이 깎이고 눈이 뽑힌 삼손이 다시 힘을 내어 블레셋 사람들의 신전 기둥을 넘어뜨렸던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고, 히스기야가 죽음을 앞에 두고 벽을 향해 간절히 기도한 후 생명이 15년 연장된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친 사람들은 다윗과 앞에 언급된 사사시대 사람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인 여자들은 엘리야 선지자 시대의 사렙다 과부와 엘리사 선지자 시대의 수넴 여인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두 여인은, 자신의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을 보았습니다.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한 사람들은, 히브리서의 1차 수신자들이 잘 알고 있었던 성경 외에 인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마카비 4서’에 두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는 90세 되는 제사장 엘르아살이 부정한 음식인 돼지고기 먹기를 거부했다가 극형에 처했던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7명의 순교입니다. 7명의 순교자들은 우리나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가면 볼 수 있는 고문 형틀처럼 일반인들이 상상조차 하기 힘든 고문 형틀로 순교했다고 합니다.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다는 말은 속전을 내면 죽임을 면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 문자적 의미는 ‘몸값의 지불로 자유를 얻는다’입니다. 오늘날 보석금 제도가 있는 나라에서도 사형수가 돈을 주고 사형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돈으로 사형을 면할 수 있다면 어느 사형수가 그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겠습니까? 믿음의 선진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구덩이에 갇히기도 하고, 나무 고랑으로 목이 결박되기도 했습니다(렘20:2).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돌에 맞아 죽은 사람은 분열 왕국시대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톱으로 죽임을 당한 사람은 이사야 선지자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죽음은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탈무드와 ‘이사야의 순교’라는 문헌과 초대 교부들의 전승에 의하자면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 왕이 보는 앞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톱에 의해 몸이 두 동강이 났다고 합니다. 기록에 의하자면 “큰 소리로 울부짖거나 울지 않았으며, 그의 몸이 두 조각으로 잘릴 때까지 그의 입술이 성령으로 말하였다”라고 합니다.
칼에 죽은 사람들은 사울 왕 시대에 죽임을 당한 제사장들 그리고 남 유다 왕국 말기에 예언자 우리야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렘26:23).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던 사람들은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당시 양과 염소 가죽옷은 직물로 제조된 옷에 비해 초라한 옷입니다. 오늘날처럼 잘 재단한 가죽옷과는 거리가 멉니다. 직물이 귀했던 고대에 산이나 들에서 유리할 때 입던 옷이 양과 염소 가죽옷입니다. 더운 날씨에도 이런 가죽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은 궁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원시 시대의 사람을 떠 오르게 합니다. 세례자 요한도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를 먹었던 것은 광야 생활을 하면서 궁핍한 생활을 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는 세상은 그들이 살기에는 적당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본향은 세상이 아니라 하늘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여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불편한 잠자리일 뿐이고, 본향인 천국에 가면 편안한 침대가 있음을 알았던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지금 세상의 불편함에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본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은 단지 야영 생활지입니다.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들은’ 4절에서 38절까지 언급된 믿음의 선진들을 가리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증거 자료를 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믿음의 선진들이 믿음으로 행한 모든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증인이 되어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무엇을 행하더라도 그것이 눈에 보이는 증거로 남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우리의 행함을 보고 계시기에 마치 CCTV 녹화영상물이 법정에 증거 자료로 채택되듯이 하나님께서 친히 증인이 되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증인이 되어주신다면 더 이상 무슨 증거 자료가 필요하겠습니까? 다음으로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는 것은 ‘약속의 성취를 받지 못하였다’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언급된 믿음의 선진들은 구약의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존재했던 사람들로서 주님을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들은 생전에 메시아가 오신다는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근거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선진들보다 신약 시대 성도들이 누리는 영적 특권이 더 큼을 부각시켜 주고 있습니다.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는 것은 구약 성도들에 비해 신약의 성도들에게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는 뜻입니다. ‘더 좋은 것’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이를 누리지 못했으며, 다만 믿음으로 바라보았을 뿐입니다.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구약의 성도들이 예수님 안에 있는 신약의 성도들과 함께 온전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즉 구약의 성도들은 그들 스스로 온전하게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의 믿음 역시 오직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속죄의 피를 흘리심으로 온전하게 된 것입니다. 미래의 사건이 과거의 상태를 온전하게 하였다는 말이 불합리하게 들리겠지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비로운 역사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보다 늦게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셨지만, 예수님께서 속죄의 피를 흘리심으로 시공을 초월하여 과거에 존재했던 믿음의 선진들의 믿음을 온전하게 해 주셨습니다. ‘구약을 구원의 은혜의 기초’라고 말하고 신약은 ‘구원의 완성’이라고 말합니다. 구약의 성도와 신약의 성도는 상호 관련성이 있습니다. 예수님 속죄의 피로 구약의 성도와 신약의 성도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구약의 성도들 역시 예수님 속죄의 피로 인해 구원에 참예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놀랍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이 세상의 사람들, 그리고 미래에 존재할 세상의 사람들에게 성취될 수 있도록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이 구원에 참예하게 된 것을 생각하며, 신약 시대의 성도인 우리는 자신을 죽이는 자원 제물이 되어 흑암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명의 빛으로 인도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입과 몸으로 드리는 자원 제물이 되어야 이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기도와 찬양으로 감사하며, 교회 안팎의 자원봉사를 통해 사람을 살리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십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믿음으로 행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구약 시대 믿음의 선진들이 믿음으로 바랄 수 없는 상황에서 바라고 약속의 성취를 기다렸음이 귀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 믿음보다 신약 시대 성도들에게 더 좋은 것,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예비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속죄의 피를 흘리심으로 시공을 초월하여 구약의 성도들의 믿음을 온전하게 해 주신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를 기억하며, 오늘날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견고하게 하는 통로가 되길 원합니다. 이를 위하여 믿음으로 저희의 입과 몸을 하나님께 자원제물로 드리는 삶을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믿음으로 의를 행한 일이 있다면 무엇인지 회고해 봅시다.
2. 믿음으로 약속을 받은 적이 있다면(성경을 묵상하다가 받은 말씀) 무엇이며, 그 약속의 실상을 보았습니까? 아니면 그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3. 삼손이나 히스기야 정도는 아니더라도 믿음으로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된 적이 있습니까?
4. 한여름에 입을 옷이 없어 계절에 맞지 않는 두꺼운 옷을 입을 정도로 형편이 좋지 않다면 믿음의 선진들 중의 누구를 깊이 생각하면 좋겠습니까?
5.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던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믿음의 용사들
히 11:32-40 / 주병열 목사
예수를 알고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그분은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거듭남이라고도 합니다.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피가 바뀌고, DNA가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옛날 그대로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아게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그렇게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의 발자취를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그들은 모두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마지막으로서 믿음으로 산 사람들의 삶을 총정리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특별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위대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본문은 기라성 같은 믿음의 거인들을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동일한 영적 승리를 얻고 누리도록 도전하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1.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을 이깁니다(32-35상)
믿음의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위대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역시 보통 사람들과 같이 인간적 약점들을 많이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본문에 이름만 나열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그리고 사무엘입니다. 여기에 나온 사람들과 또 앞서 언급했던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까지도 모두 그런 치명적인 허물과 약점들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했습니다(33-34절).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아왔던 사람들이 어느 날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면서 그들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과 함께 부족하지만, 어설프지만, 한 걸음씩 나아갑니다. 그 결과는 언제나 위대했고, 놀라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제자들을 다락방에 모아놓고 말씀하셨습니다. 유언과 같은 말씀을 하셨는데, 그 마지막 말씀이 요한복음 16장 33절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리고 요한일서 5장 4절에서 사도 요한은 이 말씀을 받아서 다시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릇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본문에 나오는 인물 중에 기드온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 왕이 있기 전의 시대 사람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웃 민족들에 의해 자주 침략을 당하곤 했었습니다. 이 때도 이스라엘은 미디안이라는 이웃 민족에 의해 7년째 압제를 받고 있었습니다. 농사를 지어서 추수를 하면 곧바로 쳐들어와서 다 빼앗아가곤 했습니다.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겠습니까? 그는 아주 쪼그라든 마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현실에 적응하여 살기조차 힘든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기드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삿6:12). 뜬금없는 소리를 들은 기드온은 아마도 화가 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그 말씀을 듣자 이렇게 대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과 함께 계신다면 어찌하여 이 민족이 이런 참혹한 일을 당해야 합니까?’ 라고 말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했습니다.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삿6:14)
기드온의 인생은 여기서부터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어설펐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섬기는 우상을 한 밤 중에 부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들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양털로 하나님의 응답을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계속해서 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결국 300명의 정예 군사를 이끌고 나가 미디안이라는 감당하기 어려운 적군들과 싸워 이겼습니다.
이런 믿음으로 산 사람들은 모두 주님의 위대한 역사에 참여했습니다. 어떤 이는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는 권력자의 칼날을 피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는 연약한 중에 강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담대해졌습니다. 용기를 얻었습니다. 겁 많고 소심한 기드온이 불과 3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미디안의 군사와 싸워 이긴 것입니다.
아주 평범하고 어떤 면에서는 흠이 많은 인간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런 놀라운 역사를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도 이런 믿음의길을 걷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도 동일하게 부르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담대하게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갖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을 갖지 못하면 우리는 사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는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살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살게 되면 우리는 더 아상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없고, 또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역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사람들이 걸어가고 체험했던 그 놀라운 은혜의 길을 걷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2. 믿음은 고난을 이기게 합니다 (35하-40)
여기서 하나 질문이 있습니다. 그러면 믿음은 항상 좋은 결과가 나타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항상 좋은 결과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본문 35절 하반절 이하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저희는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것은 정복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승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당신의 자녀들이 고난을 당할 때 침묵하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 고난과 핍박을 묵묵히 감당했습니다. 그들은 그 고난을 피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고난을 기꺼이 감당하려고 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승리만이 아니라, 고난도 주시는 것입니까? 여기서 두 가지 점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병원균이 몸에 없는 사람이 아니라 몸 속에 있는 병원균을 이기는 사람입니다. 우리 안에는 끊임없이 우리를 공격하는 병균, 암세포들이 있습니다. 우리 몸 속에 있는 백혈구가 그런 나쁜 세포들과 계속해서 싸워 이기기 때문에 우리는 건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균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균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동일한 원리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악한 세력, 어려운 도전, 위기와 고난 속에서 이를 극복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이렇게 세워가십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에게는 이 땅에서 승리를 맛보게도 하시지만,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땅에서 고난과 아픔을 겪게도 하십니다.
그들 중에는 이 땅에 사는 동안 끝까지 고난 중에 살다가 죽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숙제입니다. 과연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천국에 가면 결국 다 동일하게, 아니 어쩌면 더 큰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 약속의 말씀에 위로를 받고 나아갑니다. 본문 35절에서도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합니다. 맞습니다. 그들은 천국에서 누릴 더 큰 영광을 보고 갔습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더 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렇게 고난을 당하는 이들은 그 고난 중에 아픔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그 안에서 놀라운 주님의 은혜를 맛보았습니다. 성경에서 고난 당한 사람들을 잘 보십시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보십시오. 그들은 느부갓네살 왕의 금신상 앞에 절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풀무불 속에 들어갔습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사형 방법이었습니다. 완전히 흔적도 없이 태우고 녹여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아들,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 풀무불 속을 걸어다녔습니다. 그들은 결박되지도 않았고, 불에 상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니엘을 보십시오. 사자굴 속에 들어갔습니다. 사자굴은 무시무시한 공포와 죽음이 기다리는 곳입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한 군데도 상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월요일에 Mr. Bailey께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금요일에 장례를 지냈습니다. 그 전 주 목요일 병원에 그를 심방갔습니다. 젊으셨을 때 믿던 믿음 생활을 지속하지 못하시던 분이셨는데, 병상에서 다시 예수를 믿기 시작하셨습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한 후, 두 가지 질문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는 것을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신 것을 믿습니까?’ 이 두 가지 질문을 할 때마다 그는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분의 표정이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밝은 미소로 바라보는 그분을 볼 수 있었습니다. 도대체 죽음을 앞둔 그 병상에서 그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있기에 그 고통 중에 저렇게 밝은 미소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 병상에서 그는 우리가 모르는 그 무엇인가를 보고 있었고, 느끼고 있었고, 만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이루시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의 삶이 세상적으로 화려하든 아니면 초라하든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영광은 동일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분의 미소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표적입니다. 진정한 승리는 고난도 이기는 것입니다. 고난을 이기지 못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겪는 고난을 사실 그 안에 은혜와 평강, 보호하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승리하는 사람과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삶이 질적으로 동일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고난을 당하는 사람과 예수를 믿고 영광을 누리는 사람이 우리의 눈에는 너무도 다르게 보이지만, 사실은 그것은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당하는 사람에게도 큰 위로와 기쁨, 능력과 승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어떤 모습으로 인도를 받든지 그것에 너무 연연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주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너무 약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고난에도 몸을 사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맛볼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 맛을 경험할 기회가 없습니다.
풀무불 속에 들어가서도 주님을 손을 붙잡고 결박되지 않고, 상한데도 없이 주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깊은 고난 가운데 빠진다고 느낄 때 우리는 두려움에 빠지곤 합니다. 하지만 그럴 때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 안에 평안이 있음을 보십시오. 막상 우리가 고난 가운데 던져지면 고통과 어려움이 있을 것 같지만, 그 안에는 주님의 지키심과 함께 하시는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승리하는 믿음
히 11:32~40
너무 많아서
그동안 <믿음의 전당>이라는 제목으로 히브리서 11장을 열다섯 차례에 걸쳐 설교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뭐 그리 많이 했냐며 놀라지만 사실 열다섯 번으로 어떻게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을 다 살펴볼 수 있겠습니까? 열다섯 번이 아니라 백 오십 번을 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본문 32절에서는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 열다섯 번에 걸쳐 살펴본 인물들 외에도 또 어떤 믿음의 사람들이 있는가? 기드온과 바락, 삼손, 입다 같은 사사들도 있고, 다윗 같은 임금도 있고, 사무엘과 선지자들도 있는데 이들 모두에 대해 말하려면 시간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구약에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기에 미처 그들을 다 다룰 수 없다는 것이지요. 신약에 보면 이와 비슷한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 한 번 요한복음 21:25을 찾아볼까요?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다 기록한 후에 맨 끝에 이 구절을 쓰고 있습니다. 이 말은 자기가 기록한 요한복음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하신 일을 기록했지만 다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을 낱낱이 다 기록한다면 그 책 분량이 이 세상을 꽉 채우고도 모자랄 것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이 남기신 말씀과 행동이 너무 많아 도저히 다 기록할 수 없었다는 고충을 털어놓은 것이지요.
이런 말씀들을 보니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해마다 연말이 되면 각 방송국마다 무슨 '연예대상' '연기대상'이라는 이름으로 상을 참 많이도 줍니다. 상 받은 사람들이 앞에 나와서 수상소감을 할 때 주로 이런 식이지요. "오늘 제가 있기까지 도와주신 누구누구에게 감사합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부모님이나 배우자에게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한 때는 미스 코리아 대회를 하면서 진선미에 뽑힌 아가씨들이 무슨 미용실 원장님에게 감사한다는 말을 하곤 했지요. 그런데 문제는 나를 지금까지 도와준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간은 정해져 있고 그 짧은 시간에 그 모든 사람의 이름을 다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생각해보세요. 남들 이름은 다 나왔는데 자기 이름만 쏙 빠지면 그 분들이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그렇다고 그 짧은 시간에 그 분들 이름을 다 부를 수도 없고요. 실제로 영화상의 꽃이라고 하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답니다. 수상소감을 하는 사람마다 하도 소감이 길어서 시상식 시간이 점점 늘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수상소감을 45초 이내로 제한하고 시간이 지나면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울리면서 마이크가 스르르 아래로 내려가도록 한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고마운 사람, 기억해야 할 사람은 너무 많은데 주어진 시간은 짧기 때문입니다. 저도 한 번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만약 제가 저 자리에 서서 소감을 말한다면 나는 과연 어떤 사람들의 이름을 부를 것인가? 고마운 사람, 기억나는 사람이 너무 많지만 그 이름을 다 부를 수 없기에 그 중에 정말 빠져서는 안 될 몇 사람만 뽑아서 수상소감을 해야 한다면 과연 누구의 이름을 부를 것인가? 걱정 마세요. 아무리 많아도 저희 교회 성도들과 장로님들 이름은 제가 꼭 부를 것입니다.
자,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32절 말씀이 나온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한 번 32절을 볼까요?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여기서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라는 말은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당시에는 말을 하다가 시간이 부족할 때, 즉 수상소감 같은 것을 할 때 이 말을 썼습니다. 즉 "나의 오늘이 있기까지 도와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낳아주신 부모님께도 감사드리고, 감독님께도 감사하고..." 하다가 45초가 지나면 이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즉 이하 생략이라는 뜻입니다. 글을 쓰다가도 지면이 부족하면 이 말을 썼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지면 관계 상 생략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지면 관계 상 또 시간관계 상 도저히 구약에 나오는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다 언급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그리고는 다 생략하고 딱 여섯 명만 더 언급한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짧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믿음이 부족하거나 모자라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들도 앞서 열다섯 주 동안 언급한 믿음의 사람들과 견주어 결코 그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또 이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전당>에 그 이름이 안 나오고 이하 생략에 들어갔다고 해서 그들의 믿음이 다 적은 것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너무 많아서, 도저히 다 기록할 수 없어서 생략한 것뿐입니다. 그러기에 비록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전당>에 그 이름이 안 나왔다 하더라도 여기 이름이 나온 사람들과 견주어 결코 부족함이 없는 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저는 거기에 우리의 이름도 들어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한참 무더웠던 지난 7월 8일 저는 이 <믿음의 전당> 시리즈 첫 설교를 하면서 이런 말로 설교를 마무리했습니다. 제가 설교원고를 그대로 읽어보지요.
그런데 오늘 말씀을 맺으면서 한 가지 생각해 볼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믿음의 전당>이 마감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믿음의 전당>은 히브리서 11장에 나온 사람들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오늘도 계속되고 있으며 주님 오시기 전까지는 계속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여기 이름이 오를 사람들이 뽑힌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모세는..." 하는 명단 뒤에 "믿음으로 아무개는..." 하고 누군가의 이름이 계속 더해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이러한 놀라운 믿음의 사람들뿐 아니라 오늘 우리들도 이 믿음의 사람들 못지않게, 아니 그들보다 더 귀한 이름으로 <믿음의 전당>에 오르고 더 크고 귀한 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참 중요한 말 아닙니까? 제가 설교해 놓고도 참 멋있는 말 같습니다. 여러분도 이 말씀을 기억하고 꼭 그대로 되기를 바랍니다. 꼭 저와 여러분의 이름이 아직 마감되지 않은 이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전당>에 꼭 올라가기 바랍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11장을 열다섯 차례나 설교한 이유입니다.
믿음의 사람들
자, 그러면 이제 33절부터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의 믿음의 모습을 간단하게 살펴볼까요? 여러분은 이제부터 조금 정신이 없으실 것입니다. 워낙 짧은 몇 절 안에 구약에 나오는 그 수많은 사람들의 믿음을 집약적으로 다 요약하다보니 이렇게 된 것입니다. 조금 빠른 속도로 말씀을 풀어봅니다.
제일 먼저 33절에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누구 얘기일까요? 분명치는 않지만 아마 앞서 나온 여섯 명 가운데 사사들과 다윗 왕의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비록 이 명단에는 생략되었지만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는 가나안으로 들어가 정복전쟁을 시작합니다. 이 때 시작된 이스라엘 민족의 정복사업은 열두 명의 사사들을 거쳐(비록 오늘 본문에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네 명만 대표로 나오고 있지만 말입니다) 다윗 임금과 그 아들 솔로몬 임금 때에 이르러 최고 절정에 달하여 그 영토가 엄청나게 커집니다. 즉 이들의 믿음은 다른 이방민족과 싸워 이기는 승리의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의를 행하기도 하며" 이것은 앞서 언급한 사사와 왕들이 하나님의 공의에 의지해 의롭고 바른 통치를 했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은 "약속을 받기도 하며"입니다. 사사와 임금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의지할 때 하나님이 이 나라를 지켜주시리라는 약속을 받아 그대로 나라를 다스렸다는 뜻입니다. 즉 사사나 임금 같은 통치자들이 누구를 의지했느냐는 말입니다. 통치자들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지해서 나라를 다스릴 때 나라는 평안하고 부강했지만 반대로 자신의 힘만 의지하거나 다른 강대국을 의지하거나 우상을 의지할 때 나라는 큰 위기에 빠지거나 심지어 망해버리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 바로 구약의 역사서라고 부르는 여호수아 - 사사기 - 사무엘상하 - 열왕기상하 - 역대기상하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이 짧은 33절 한 절에서, 즉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라는 짧은 구절을 통해 여호수아서부터 역대기에 이르기까지, 나아가 예언서에 이르기까지 모든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구약의 많은 책들은 한 마디로 이런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임금이나 통치자가 믿음으로 나라를 다스리면, 즉 하나님만 의지하면 그 나라가 살고 부강해 질 것이지만, 반대로 하나님 외에 그 어떤 다른 것을 의지하면(자신이나 군사력이나 강대국이나 우상이나) 반드시 망한다."는 것입니다. 왜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느냐 함께하지 않으시냐의 차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우리나라는 이제 12월이면 이 나라를 4년 동안 다스릴 대통령을 뽑습니다. 중요한 것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처럼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인을 뽑을 때도, 또 교회를 이끌어갈 담임목사나 지도자를 뽑을 때도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지도자가 누구를 의지하느냐, 무엇을 의지하는 사람이냐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우리 자신이 사업을 할 때나 가정을 이끌어 갈 때나 무엇을 할 때든지 항상 누구를 무엇을 의지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 하나만은 분명합니다. 믿음이 있어서 하나님을 의지하면 승리합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는 누구 이야기가 나옵니까?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이건 쉽지요? 바로 사자 굴에 들어갔어도 털끝 하나 상하지 않은 다니엘 이야기입니다. 다니엘을 시기한 바사의 관리들이 다니엘을 모함합니다. 누구든지 왕 이외에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기도하면 사자 굴에 넣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굴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여호와 하나님만 유일한 신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타협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랬더니 다니엘을 사자 굴에 집어던졌는데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습니다. 왜냐? 하나님이 사자들의 입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그 다음 34절에 나오는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는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그들 또한 다니엘처럼 느브갓네살 왕이 세운 금신상 앞에 절하지 않다가 맹렬히 타는 풀무 불에 던져졌지만 털끝 하나 불에 타지 않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의 믿음은 모두 타협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사자 굴에 들어가도, 풀무 불에 던져져도, 그 어떤 환란과 핍박을 받아도 하나님이 반드시 눈동자 같이 지키셔서 보호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믿음대로 하나님은 이들을 보호하시고 결국 승리하게 하십니다. 믿음이 이긴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구약의 선지자들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의 왕비 이세벨이 죽이려고 쫓았고(왕상 19:2) 엘리사는 여호람 왕이 죽이려고 쫓았고(왕하 6:31) 예레미야는 여호야김 왕을 피해 숨었습니다(렘 36:19, 26). 모두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다가 미움을 받아 그리 된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임금을 피해 달아납니다(삼상 18:11). 그런데 이렇게 한 나라의 절대권력자인 임금이 죽이겠다고 쫓아왔어도 그들의 목숨을 빼앗지 못합니다. 오히려 나중에는 쫓아오던 왕들이 비참한 죽음을 당합니다. 왜냐? 하나님이 보호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했더니 그들을 미워해서 죽이려는 사람들이 나타났으나 하나님은 그들의 방패요 피난처가 되셔서 끝까지 지켜주시고 나중에는 원수들이 오히려 망하게 하십니다. 승리의 신앙입니다.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성경에서 연약한 가운데 강하게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드온은 므낫세 지파 중에서도 가장 보잘것없는 가문 출신인데 겨우 300명의 군사들만 거느리고 이스라엘을 구원합니다. 삼손은 머리카락이 잘려 힘을 잃고 눈까지 뽑혔다가도 민족을 구했고 에스더는 연약한 여자였지만 멸망 직전에 있는 유대인들을 구원합니다.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이것은 앞서 설명한 대로 여호수아나 사사들, 다윗 임금 같은 사람들이 이방민족을 믿음으로 물리친 사건을 뜻합니다.
35절에는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라는 말이 나옵니다. 구약에 이런 사건이 어디 나옵니까? 사르밧 과부와 수넴 여인은 죽었던 아들을 믿음으로 살립니다. 신약에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가 믿음으로 오라비 나사로를 살립니다. 이 사건들은 우리가 믿음을 가질 때 죽은 자도 살릴 수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우리의 믿음은 죽음의 권세까지도 이기는 승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계속해서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말씀하는데 앞서 여인들이 믿음으로 죽은 자식이나 오라비를 다시 살렸습니다만 이 부활도 좋지만 많은 사람들이 육신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보다 "더 좋은" 부활, 즉 영원히 사는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핍박과 환란을 당해도 굴하지 않고 기꺼이 순교의 길로 간 사람들은 이 "더 나은 부활" 즉 영원한 생명을 믿었기에 구차하게 목숨을 구하기 위해 배교하지 않고 순교의 길로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36절, 37절, 38절에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란과 학대를 받았으니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라는 말이 나오는데 교회사에 보면 실제로 수많은 성도들이 신앙 때문에 이런 핍박과 환란을 당했습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느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처럼 조롱과 채찍질 당하고, 꽁꽁 묶여 감옥에 갇혔을 뿐 아니라 심지어 스데반 집사가 순교당한 것처럼 돌로 맞아 죽고,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 선지자가 톱으로 몸이 잘려 순교 당했다고 하는데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순교당하고, 칼에 맞아죽고, 양과 염소의 가죽으로 만든 누추한 옷을 입고 집도 없이 방황하며,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박해를 피해 광야와 산과 토굴에 숨어 비참하게 살기도 했습니다. 정말 엄청난 핍박과 고난입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이 정도 괴로우면 배교합니다. 자기 신념도 버립니다.
그런데 38절 첫 부분 괄호 안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이 말은 "그들에게 세상이 가치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만약 세상이 더 가치가 있다면 어떻게든 세상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쳤겠지만 이들은 세상보다 더 가치 있는 천국과 영생을 믿었기에 기꺼이 박해 받고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말 그대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이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세상에 죽음을 겁내지 않는 사람만큼 무서운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맞아죽고 얼어 죽고 굶어죽어도 절대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칼에 맞아죽고 맹수에게 물어 뜯겨 죽으러 원형경기장에 들어가면서도 찬송 부르는 그들을 누가 말립니까? 누가 이길 수 있겠습니까? 정말 무서운 믿음입니다. 어떤 믿음인가요? 바로 승리의 믿음입니다. 지금 내가 비록 이렇게 고난당하고 죽임 당해도 반드시 하나님이 내게 승리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대가
39절과 40절은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다"는 말이 이상합니다. 분명 33절에는 이들이 약속을 받았다고 했는데 말입니다. 뒤에서 말한 약속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약속의 성취입니다. 즉 이들은 모두 구약시대 사람들이기 때문에 '구약'(舊約)이라는 말 그대로 옛 약속, 즉 율법이나 하나님의 계시를 통한 약속은 받았지만 '신약'(新約) 즉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한 새 약속은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서도 그토록 귀한 믿음으로 핍박과 죽음까지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오늘날 신약시대에 살며 예수님을 알고 믿고 구원 받은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겠느냐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믿음의 모습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설교하면서 제일 많이 나온 낱말이 무엇인지 찾으면 답을 알 수 있습니다. 뭐지요? '승리'입니다. 지금까지 소개한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모두가 "승리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믿음으로 다른 나라들을 이기고, 핍박을 이기고, 죽음을 이기고, 또한 비록 지금은 핍박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더라도 나중에는 반드시 승리했습니다. 이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도 "승리하는 믿음"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 믿음은 분명히 힘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핍박이나 환란도, 어떤 원수의 방해도, 심지어 죽음까지도 다 이겨낼 수 있는 힘입니다. 이 힘은 누가 주느냐?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힘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반드시 이깁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승리합니다. 지금은 비록 약한 것처럼 보이고 지는 것처럼 보여도 마지막에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여러분도 바로 이 믿음을 가지셔서 최후 승리를 얻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믿음으로
히브리서 11:32-40
2001년을 시작하는가 싶더니 벌써 3월이 되었습니다. 인터넷상에 올라 있는 많은 글들이나 라디오의 음악 프로그램들에서는 봄에 대한 이야기들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봄이라는 것을 느낄 정도는 되지 않지만 어김없이 봄이 오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계절이 바뀌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3월이 되니까 봄이 오는 것입니까? 아니면 봄이 오니까 3월이 되었습니까? 어느 것입니까? 사실 자연의 변화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달력과 상관없이 오고 있습니다. 그 자연의 변화에 대한 여러 가지 상황을 따져서 만든 것이 달력입니다. 음력은 자연의 변화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윤달을 집어넣어서 양력과 보조를 맞추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달력이란 자연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달력에서 3월이 되었기 때문에 봄이 와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자연의 변화에 따라 우리의 삶이 바뀔 뿐입니다. 3월이 되었기 때문에 봄이라고 생각하고 봄에 맞는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4계절이라고 하는 주기에 맞추어서 자연의 변화를 쉽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달력이 우리에게 필요할 뿐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날짜, 즉 시간이라는 것에 매여 사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 ‘시간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삶의 모양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하여 만들어놓은 달력이나 시간 안에서 동일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없다, 혹은 시간이 모자란다는 것은 일에 매여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어떤 일을 시간 안에 해결하려고 하는 것 때문입니다. 시간에 쫓겨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인간은 누구나 다 시간 안에 갇혀버린 결과가 된 것입니다. 시간을 초월하여 시간이나 날짜와 상관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매여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이런 모습이 보입니다. 달력, 즉 시간이나 날짜가 우리의 삶을 겨울이나 혹은 봄에 맞는 삶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변화가 우리의 삶의 모양을 바꾸어 놓습니다. 마찬가지로 종교나 문화가 우리를 생명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를 생명으로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우리를 생명으로 바꾸어 놓는 주체는 따로 존재합니다. 믿음이란 내 쪽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주어질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하고, 성경 읽으며, 전도하며 예배하는 종교 생활이나 문화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다고 착각하고 있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본문 32절에 보면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히브리서 기록자는 지금 역사적인 인물들을 다 열거하고자 함도 아니고 또한 역사적인 순서대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이 본문을 가지고 역사적인 순서를 이야기하고 정리하고자 한다는 것은 본문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다만 히브리서 기록자는 이러한 기록을 통해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라고 한 것처럼 더 이상 상세한 설명이 불필요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본질적으로 드러내고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이미 충분하게 증거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고 약속의 땅에서 여리고 성을 빼앗는 사건에서 라합이 멸망 받지 않고 구원을 받는 것까지 진술함으로 히브리서 기록자는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기록을 마무리짓습니다. 지금까지의 11장에 대한 기록은 믿음의 사람에 대한 위대함을 증거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들의 고난에 대해서 알려주려고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믿음이 무엇이며, 또한 믿음에 의한 삶의 모습들을 설명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온전한 믿음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언급된 바락은 드보라의 소환을 받아 이스라엘의 군대를 이끌고 가나안 사람 시스라 및 그의 병거들과 싸워 그들을 대파한 사사였습니다. 이러한 전투의 승리가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 가운데 전해지고 있습니다(삿 5장). 바락이 행한 전투의 본질적인 의미를 드보라가 한 말 속에 이렇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붙이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의 앞서 행하지 아니하시느냐”(삿 4:14).
기드온은 선발된 사람 300명을 이끌고 미디안의 대군을 무찌르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입다의 지휘 아래 이스라엘은 아모리 족속의 군대와 암몬 족속의 군대를 무찔렀습니다. 또한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과 맞서 싸운 사사였습니다. 사사 시대의 모든 전사들이 거둔 승리는 하나님은 다수를 통해서든 소수를 통해서든 하나님 자신의 뜻대로 구원을 이루어 내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사무엘과 다윗의 행적에 대해서는 많은 지면이 할애 되어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록자는 앞에서 언급한 구약의 많은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믿음의 모습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하고 설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들이 당했던 상황과 그들이 믿음으로 살았던 다양한 삶들을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33절 이하는 그러한 묘사들입니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에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였다는 것은 사사들과 다윗, 그리고 무서운 적국들에 대항해서 승리를 거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의를 행하기도 하였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공의로 다스렸다는 뜻입니다.
사무엘에 대한 기록에서 그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거하라 내가 뉘 소를 취하였느냐 뉘 나귀를 취하였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뉘 손에서 취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그들이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속이지 아니하였고 압제하지 아니하였고 뉘 손에서 아무것도 취한 것이 없나이다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 손에서 아무것도 찾아낸 것이 없음을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거하시며 그 기름 부음을 받은 자도 오늘날 증거하느니라 그들이 가로되 그가 증거하시나이다”(삼상 12:3-5).
다윗은 왕으로서 “모든 백성에게 공과 의를 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삼하 8:15, 대상 18:14). 스바 여왕이 솔로몬에게 한 말도 동일한 취지에서 한 말이었습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당신을 기뻐하사 이스라엘 위에 올리셨고 여호와께서 영영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므로 당신을 세워 왕을 삼아 공과 의를 행하게 하셨도다 하고”(왕상 10:9). 이 모든 것들은 다윗의 자손이 영원히 통치할 메시야 왕국은 영원한 평강과 공평과 정의가 현저한 특징을 이룰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사 9:7 참고).
그들은 약속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이 자기 시대의 실현을 보지 못한 메시야적 약속들과 그리고 실제로 그 성취를 체험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기타 다수의 약속들에 해당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호수아 21:43 이하를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인정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열조에게 맹세하사 주마하신 온 땅을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다 주셨으므로 그들이 그것을 얻어 거기 거하였으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사방에 안식을 주셨으되 그 열조에게 맹세하신 대로 하셨으므로 그 모든 대적이 그들을 당한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대적을 그들의 손에 붙이셨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일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수 21:43-45).
다윗도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한 성취로 감사를 드렸습니다(대상 16:15이하, 시 105:8이하 등). 기드온이 적은 무리를 이끌고 미디안 군대와 싸운 것도 승리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신실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미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온전히 성취되는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실행되는 것을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자기 약속을 신실하게 이행하신다는 사실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였습니다. 사자 굴에 들어갔던 다니엘은 다리오 왕에게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단 6:22). 다니엘이 사자의 입을 막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자의 입을 막으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통해 하나님 자신의 약속을 어떻게 이루시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생명을 주신다는 약속을 그런 식으로 계시하신 것입니다.
34절에서는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였다는 것은 다니엘의 동료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당한 극한 고난과 거기서부터 구원을 얻은 것에 대한 기록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단 3:17). 이 또한 사자의 입을 막고 구원하신 것과 동일한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구약의 인물들은 칼날을 피하기도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다윗과 엘리야, 엘리사 등을 연상시켜 줍니다. 다윗은 사울왕의 질투심과 살해 기도를 피해 도망다니던 시기에 여러 차례나 이를 경험하였습니다. 엘리야도 격분한 이세벨을 피해 도망치면서 이를 경험하였으며 엘리사 역시 아람 왕이 그를 죽이기 위해 무장 병력을 보냈을 때 이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자신의 연약성을 자각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이 믿음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삼손이 다곤 신전을 무너뜨린 사건이나(삿 16:23)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사건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바울 사도가 이와 동일한 진리를 선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환난이라는 연약한 상태에서 구해 달라고 간구하였으나 주님은 이를 거절하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결국 바울 사도는 인간의 연약성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낼 수 있는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서 이렇게 선언하였습니다.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9-10).
또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스라엘로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과정에서 일어난 수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을 결코 이스라엘의 능력이나 힘으로 설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을 물리치게 된 것을 전쟁에 용사되시는 하나님에 의해 승리하게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전쟁을 여호와의 전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전쟁이었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기록자는 계속하여 35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히브리서 11:19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하여 말씀하면서 이렇게 설명했었습니다.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믿음이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그것을 본문에서 ‘여자들이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았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여자가 죽은 자를 산 채로 되돌려 받는 경우를 두 번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를 통해 사렙다 과부의 아들이 소생한 예가 그 하나이고(왕상 17:17 이하), 엘리사의 유사한 행위를 통해 수넴 여인의 아들이 소생한 사건이 또 하나있습니다(왕하 4:8 이하).
신약 성경에서는 나인성 과부가 죽은 아들을 산 자로 되돌려 받았으며(눅 7:11 이하),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빠 나사로를(요 11:1 이하), 욥바의 과부들은 친구 도르가를 이런 식으로 되돌려 받았던 것입니다(행 9:36 이하). 그렇다고 해서 다시 살려줌을 받는 이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으로 또는 믿음의 한 현상만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부활한 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가 죽음에서 다시 살려줌을 입는 은혜를 받았다면 또 어떤 이는 더 좋은 부활, 즉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하늘나라에서의 생명 그 자체를 소중하게 여기고 세상에서는 죽는 것으로 믿음을 드러내고 표현한 자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다시 살림을 받는 것은 언젠가 다시 죽는 것에 불과한 삶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에 어느 것이 좋으냐 라고 하는 구분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다시 살려주시는 것을 통해 영원한 죽음이란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의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주셨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시 사는 소생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서의 생명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계시하시기 위한 도구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셔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이 땅에서 얼마나 살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드러난 믿음이란 하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즉 믿음이란 하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주어진 자들에게서는 사나 죽으나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인줄로 여기고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는 삶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여기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하였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0-24).
그러므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날마다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점에서 ‘믿음으로’라는 말은 무슨 도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무엇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나의 꿈을 이루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이라는 말을 하면 신뢰한다는 말부터 떠올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을 통해 나의 비전을 이루고 야망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은 믿음이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나 자신의 무엇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믿음이 우리에게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옛 사람은 죽고 새로운 자로 다시 살게 된 것이 믿음 안에서의 삶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로마서 1:17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늘에서 주어진 믿음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가지는 목표는 오직 믿음입니다. 목표가 믿음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우리의 목표요 삶의 전부라는 말입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이 땅에서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은 오직 예수님을 좇아 살게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다양한 믿음의 삶이란 오직 약속을 바라보며 약속에 이끌림을 받아 살았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끌림을 받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까?(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
히브리서 11:32-40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들의 목록을 여러 사람 나열하고 있습니다. 사실 지면상 그 많은 믿음의 선배들을 다 일일이 나열하는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32절에 저자가 말합니다.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히브리서 저자가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다 기록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믿음의 사람들이 보여준 삶을 두 가지 범주로 구분 했습니다. 첫번째 범주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 사람들입니다. 두번째 범주는 믿음 때문에 고난과 핍박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각 범주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 사람들 입니다. 33-34절 말씀에는 이 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이기었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33절을 봅시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이것은 모세와 여호수아처럼 다른 나라와 싸워 이긴 역사적 사건을 의미합니다. 또한 33절을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사건이 하나 등장합니다.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히브리서 기자가 누구를 염두해 두고 있는 것일까요? 다니엘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려다가 모함에 빠져 사자굴에 들어가게 된 다니엘,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자들의 입을 막으셨습니다. 이어서 34절을 보면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쉽게 다시 해석하면 “불 가운데서 구원을 받았고”가 됩니다. 불 가운데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 누가 있을까요? 다니엘의 세 친구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입니다. 34절을 보면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라는 말도 있습니다. 기드온처럼 연약했으나 강하게 쓰인 자, 히스기야처럼 병들어 죽게되었으나 나음을 입은 자도 여기 포함이 됩니다. 또한 34절에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라는 표현은 여호수아나 사사들 그리고 다윗처럼 적국의 군대와 권세들을 물리친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이긴 사람들의 명단이 존재하는가 하면 반대로 믿음 때문에 세상에서 고난과 핍박을 당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 대한 이야기가 35-3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35절을 봅시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엘리야 시대 때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이 살아났습니다. 엘리사 때에는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이 살아났습니다. 이처럼 이들은 죽은 자를 부활로 다시 받았습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사실은 어떤 이들은 더 나은 모습으로 부활 할 것을 생각하면서 고문을 당해도 풀려나는 것을 거절하기도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조롱을 당하고 채찍과 매를 맏고 쇠사슬에 손과 발이 묶인 채로 옥에 갇혔습니다. 그 중 어떤 이들은 돌에 맞아 죽었고, 몸이 반으로 잘리기도 하였으며, 칼에 찔려 죽기도 하였습니다. 37절에 ‘양과 염소 가죽을 입었다”는 것은 늑대나 육식동물들이 이 가죽을 쓴 사람을 잡아먹게 하기 위해서 일부로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힌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들은 믿음 때문에 가난과 고난과 학대를 견뎌야 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믿음으로 세상에서 고난과 핍박을 당한 순례자들을 가리켜서 38절에 말하기를 “이런 사람은 세상에 감당치 못하도다.”라고 했습니다. 본래 이 말은 “이런 사람들에게 세상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은 어떠한 부귀영화에도 마음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또한 이들은 믿음으로 인해 핍박과 환난이 와도 마음을 바꾸거나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38절 말씀을 보면 이 믿음의 사람들은 광야와 산중과 암혈은 동굴입니다. 토굴은 땅굴입니다. 이런 곳들을 찾아다니며 지냈습니다. 우리는 믿음대로 살면 경제적으로 잘 살고 복받는다는 이상한 공식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사실 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전승에 따르면 선지자 예레미야는 돌에 맞아 죽었고, 이사야는 톱질 당해 죽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이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었는 이유는 하나님꼐서 주신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39절을 한 번 봅시다. “(39)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39절을 잘 못 읽으면 마치 이들 모두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받지 못했다는 이상한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성취될 영원한 나라에 대한 약속입니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약속의 성취는 보지 못했으나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뤄질 것을 믿고 살았습니다.
어제 새벽에 우리가 살펴본 모세도 애굽의 모든 보화에 관심 갖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한 모든 능욕을 더 값지게 여겼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믿음의 사람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가치를 두지 아니하고 살아갔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주저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다 끊어내고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 가치를 두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들을 믿음으로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담대한 믿음의 길
히브리서 11:32-40 / 이강웅 목사(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
서론: 우리 기독교 신앙을 소위 이적과 기적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선 성경을 살펴보면 기적과 이적의 기사가 참 많이 등장합니다. 우선 구약을 살펴보면 홍해가 갈라진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린다, 반석에서 생수가 터져 나온다, 이런 기적이 계속하여 등장합니다. 신약에서도 예수께서 각종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오병이어의 역사가 일어나며, 풍랑을 잔잔케 하시고, 물위를 걷습니다. 그리고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납니다. 이렇게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시고, 또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적과 기적이 많이 등장하지만 그것만이 기독교 신앙의 전부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적과 이적만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유일한 통치 방식이 아닙니다.
안이숙 사모가 쓴 책 <죽으면 죽으리라>에서 아주 인상적인 대목이 나옵니다.
일본제국이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던 평양에서 독립운동의 뿌리를 뽑기 위해서 가장 먼저 기독교 조직을 와해시키기로 작정합니다. 많은 교회 목사들과 지도자들을 검거하여 유치장에 가두고 무섭게 고문을 자행했습니다. 열렬히 믿던 신도들은 박해를 피해서 이리저리 흩어져 숨었습니다. 그런데 일본 경찰은 무슨 계획인지 알 수 없으나 구속했던 목사들과 지도자들을 일시적으로 풀어 줍니다. 숨어 있던 신도들이 풀려난 분들을 찾아가 위로하며 옥중 고난을 듣습니다. 안이숙 씨도 깊은 밤에 고문을 아주 심하게 당했다는 이유택 목사님댁을 찾아갔습니다. 깊은 밤중에 모여든 신도들도 신앙을 위해서 구속될 각오를 했던 사람들이라 이목사님에게 여러 가지 고문 당하던 일과 감옥생활에 대해 질문을 했습니다. 얼굴이 창백한 이유택 목사님은 어찌나 지독한 고문을 당했던지 풀려나온 것 자체를 별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여러 가지 질문 중에서 모든 신자들이 가장 듣고자 하는 질문이 드디어 나왔습니다. “심한 고문을 당할 때 하나님의 이적이 나타나던가요?” 모두 긴장과 고요 속에서 숨을 죽이며 답변을 기다립니다.
이유택목사님은 이 질문에 대해서 한참을 머리 숙여 깊이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낙심마십시오. 아무런 이적도 내게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믿기를 내가 그 무서운 고문을 당할 때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해 주셔서 큰 권능을 나타내어 고문을 아프지 않게 이겨내도록 해주실 줄로 믿었으나 그런 것이 아니드만요. 얼마나 아프고 견디기 어려웠던지 죽지 않는 것이 오히려 저주스러웠어요. 나는 ‘오! 주여 속히 내 영혼을 거두어 올려주시어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하고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것이 얼마나 겁이 나는지 알 수 없었어요. 참으로 힘들었어요.”
이 말을 듣자 안이숙씨는 마치 보자기로 확 씌우는 것처럼 눈 앞에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낙심하여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듣고 본 바를 전하자 어머니는 참으로 의외라는 표정으로 단정히 앉아서 안이숙씨를 타이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것은 사람의 모든 경험을 하신 후에야 사람을 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지. 사람으로 십자가를 지셨으니 그 얼마나 아프셨고 어려웠을까. 우리도 부활하기 전에는 신이 될 수 없으니 사람으로서의 고난은 그대로 다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픈 것을 견디는 것이 희생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비록 신학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기독교 신앙을 아주 정확히 이해하고 계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적과 기적을 통해서 역사하시기도 하지만 자연계의 질서와 법칙에 따라서 이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우리의 이성과 감정, 그리고 의지를 사용하여 살아가는 일상생활 또한 신앙의 영역에 속합니다. 자연계 법칙과 질서, 그리고 우리 인간의 인격적인 활동은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또 다른 중요한 통치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 꼭 이적과 기적이 일어나야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이고, 기도의 응답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비록 기적적인 현상을 체험하거나 목격하지 않아도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은혜를 깨달으며 감사하며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여도 거쳐가야 할 것을 다 거쳐가야 하는 때가 있다는 사실을. 기적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기도응답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런데 기적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은혜의 울타리를 벗어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 영역 안에 있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바로 이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우리 안에서 여전히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신앙의 영웅들이 등장하지만 그들 모두가 기적적인 하나님의 개입과 간섭으로 크게 승리하거나 구출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박해와 시련을 겪으면서 끝까지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기적적인 구출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전진하고 사명을 마쳤습니다.
신년을 시작하면서 현재 여러분의 어려움이 무엇입니까? 앞으로 어떤 장애물이 기다릴 것 같습니까? 어떤 열악한 조건입니까? 우리 믿음의 선진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결코 장미꽃이 뿌려진 길을 갔던 것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어쩌면 우리 보다 훨씬 더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련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환경과 조건 가운데서도 패배주의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도전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믿음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결국 모든 문제를 극복하고 승리한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운명론이나 숙명론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매우 진취적이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도전적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인내합니다. 시련을 적극적으로 감내합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에서 이런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들의 담대한 믿음이 이들을 통해서 어떤 삶을 살게 하였는지를 배우기를 원합니다.
1. 믿음은 문제를 극복하는 승리의 삶을 살게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신앙의 용사들에게도 우리처럼 어려운 난관이 가로막고 있었고, 뛰어넘기 어려운 장애물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무력감과 좌절감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패배주의와 비관주의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있는 장애들, 문제들, 도전들을 다 극복하고 승리했습니다. (히 11:33-35절 상)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기도 하며”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는 이방 왕에게 압제를 당하던 이스라엘을 구했습니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투였지만 믿음으로 싸워 이겼습니다. 다윗은 거인 골리앗을 믿음으로 때려 눕혔습니다. 이길 수 없는 전투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의를 행하기도 하며” 엘리야는 악한 유대 왕 아합 앞에 나아가 우상숭배의 죄를 책망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생명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의를 행했던 것은 하나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받기도 하며” 여호수아는 “네가 밟는 모든 땅을 너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 말씀을 믿음으로 그 약속대로 가나안 땅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죄목으로 모함에 빠져 사자의 굴에 던지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천사가 사자들의 입을 막았습니다. 다니엘 6:23 “왕이 심히 기뻐서 명하여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즉 그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 하나님을 의뢰함이었더라” “하나님을 의뢰함이었더라” 믿음이 그를 살렸다는 것입니다.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불 속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금산상 앞에 절하지 않으면 불구덩이 속에 집어던지겠다는 느브갓네살 왕의 위협 앞에서 그들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다니엘 3:17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이 믿음의 고백이 불의 세력을 꺾은 것입니다.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다윗은 사울왕의 칼날을 피해 목숨을 보존했습니다. 때로는 다윗이 숨어 있는 그 굴속에 사울왕도 쉬러 들어올 정도로 위태위태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생명이 보존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방패요, 나의 피난처”라고 고백한 그의 믿음 때문입니다.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 되어 이방인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이들은 모두 하나님을 의뢰하고 전장에 나아가 승리했습니다. 믿음 때문입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다시 살려 냈습니다.
모두 믿음이 가져온 승리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런 수많은 증거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히 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들의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은 세상 도처에서 기적을 행하게 하시며 승리를 거두게 하십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태어날 때부터 특출한 존재여서 승리하는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특이한 재능이나 은사를 가지고 출생한 것 아닙니다. 그들 또한 우리처럼 아주 평범하게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우리처럼 평범하게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미디안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한 기드온이 처음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을 때의 모습은 용사가 아니라 미디안의 군대를 피하여 포도주 틀 속에 숨어들어가 몰래 밀을 타작하던 겁쟁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드온을 ‘큰 용사여’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연약하고 소심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큰 용사가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법칙입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핍박할 때 나귀 턱뼈로 3,000명을 때려누인 삼손은 지극히 평범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습니다. 입다라는 사사는 어머니가 기생이자 첩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복형제들에 의해서 아버지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다윗은 또 어떻습니까? 이새의 말째로 태어나 가족으로부터 푸대접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사울왕을 이어 왕위에 오를 인물을 살피러 이새의 집에 왔을 때 그는 들판에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왕이 될 인물로 생각조차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들의 출신배경을 살펴보면 정말 보잘 것 없는 가운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악한 조건들을 다 뛰어넘어서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위대한 삶을 살았던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었다고 말씀합니다. 그 믿음은 담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출처: https://koinedata.tistory.com/1026 [코이네자료실:티스토리]
세상이 감당 못할 신앙
히브리서 11:32-40
성도들의 삶은 믿음과 별개의 차원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참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그의 의식, 생각, 그리고 삶의 모든 방면에서의 모습이 믿음의 양상을 나타내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는 참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바른 믿음의 역사가 무엇인지를 잘 드러내줍니다. 비록 이 땅이 죄로 인하여 추악한 타락의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믿는 성도들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져 하나님 나라는 완성을 향하여 진행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도도하게 흘러가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 속에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믿음의 열전을 예로 들면서 이 역사는 바로 영혼의 구원을 향한 역사이며 하나님의 통치의 현장임을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저자는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세상이 인간 시조의 범죄로 인하여 파괴된 세상을 회복하시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 가운데 그 속에 불림받아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공경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던 신실한 성도들의 믿음을 강조하며 재창조로 하나님나라가 완성될 때 까지 같은 믿음, 즉 구원받을 믿음을 가질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1. 참 믿음의 풍부한 증거들
* 히 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저자는 창조 이후 타락된 세상 가운데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믿음으로 신실하게 살아갔던 이들, 아벨부터 시작하여 아브라함을 거쳐 라합에 이르기까지 선민과 이방인을 막론하고 구원에 이른 이들의 신실한 개인적인 믿음의 예를 마감하고, 이제 더 이상 예로 들기 보다는 이제까지의 내용을 정리하고 결론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참 믿음에 관한 설명을 마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 32절의 말씀은 앞서 언급한 이들의 위대한 믿음과 못지않은 위대한 믿음의 소유자들로 이들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려면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고 하면서 앞서 예로 든 성도들로도 부족한가? 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이는 말씀드린대로, 이 서신의 수신자들이 구약에서 보여주고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이들임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는 증거입니다. 저자는 더 이상이 예를 들지 않아도 그들이 잘 알고 있는 기드온을 비롯한 사사들과 다윗 왕과 사무엘을 비롯한 선지자들 모두의 역사적 기록들은 구원을 얻는 참된 믿음의 소유자들임이 분명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히브리인 기독교인들에게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는 참 믿음의 소유자들이 성경에는 무수하게 기록이 되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주며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들은 그들이 나타낸 그 믿음의 위대성을 기념하기 위하여 쓴 말씀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그 믿음의 영웅들이 어떻게 그러한 놀라운 믿음의 업적들을 남기어 하나님의 구원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그러한 삶의 모습들의 원동력은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우리를 격려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는 우리들 이들 가운데 개입하시어 그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셔서 그들을 격려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도록 섭리하신 그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합니다.
2. 영혼 구원을 위한 믿음의 양상들(樣相, faces)
저자가 32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인물들은 매우 신중하게 선별된 성도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앞에서 언급한 아벨로부터 라합에 이르기까지의 인물들도 선택된 인물이라고 하겠습니다만, 이들이야 말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목록이라고 하겠습니다.
저자는 기드온, 바락, 산손, 입다 그리고 다윗과 사무엘 그리고 선지자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나열된 인물들이 단순하게 시간적 혹은 역사적인 흐름에 따라 선택된 것이 아님에
주목하게 됩니다. 또한 구약에서 보듯이 이들 개개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놀라운 믿음의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음도 주목됩니다. 그러면 무엇을 위하여 이들의 이름들이 열거되고 있는 것일까요?
1)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신뢰하라
저자의 관점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창조부터 구약의 마지막 까지 포괄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관점에서 형성되었으며 나아가 완성될 지를 보여주며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참된 믿음은 어떤 맥락에서 이루어져 가는 지를 보여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믿음을 칭찬하고 기리고자 하기 보다는 그 믿음의 성격과 그로 인하여 겪게 되는 이 세상 가운데서 나타난 다양한 양상들을 예로 들면서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며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을 지속적으로 가질 것을 촉구합니다.
* 히 1:1-2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2) 두 부류의 믿음의 양상들
우리는 영혼의 구원을 위한 믿음의 양상들을 어떤 부류로 나누어지는 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두 가지로 대별됩니다. 첫째의 모습은 적극적이며 공격적인 믿음이 모습입니다. 둘째의 모습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믿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참된 믿음이 완전히 상반된 양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개인적인 성격적인 면도 있겠지만, 그러나 성도가 처하였던 상황과 당시에 발생하게 된, 즉 개인이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삶의 격렬한 소용돌이 가운데서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자기에게 주어진 시대를 살아갔던 성도의 삶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러한 삶의 현장을 과연 어떤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지를 저자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a. 적극적인 믿음
* 히 11:33-34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이 구절은 믿음으로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삶을 치열하게 살았던 시대를 보여줍니다.
(1) 나라를 정복한 이들: 여호수아와 사사 시대로부터 사울, 다윗 그리고 솔로몬에 이르는 시대에 활동했던 인물들을 연상시킵니다.
(2) 정의를 실천한 이들: 왕들의 통치가 공의롭게 이루어진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권한 가운데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권력을 대행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시편 저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 시 97:1-2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찌어다. 구름과 흑암이 그에게 둘렸고 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로다
(3) 약속을 받은 이들: 아브라함을 비롯한 모든 구약의 믿음의 조상들이 오랫동안 추구하였던 바, 하나님의 언약을 그들의 인생 가운데서 실제로 받았던 것을 의미합니다(예, 이삭을 받은 아브라함).
* 히 6:15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이미 살펴본 대로 이들은 얼마든지 자신이 살았던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살고 있던 지역에서 얼마든지 재산을 축적하며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권력과 힘과 영향력을 행사하며 당당하게 살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들 모두는 사실 장차 하나님께서 완성하신 그 나라 즉 구속의 실체를 확신하였고, 그 나라를 소망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 히 11:13-16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 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4) 불의 세력을 물리친 이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들 수 있겠습니다. 이들은 다니엘과 함께 포로 가운데서 어렵게 누리게 된 지위와 특혜를 포기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일념으로 우상 숭배를 거부하였던 위대한 인물들입니다. 실제로 그 거부행위로 7배나 더 뜨겁게 달구어진 풀무불 가운데 들어갔으나 살아난 위대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 단 3:16-18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 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5) 칼날의 위협을 피한 이들: 아합의 왕후 이사벨과 같은 정치 권력의 위협을 피한 엘리야, 엘리사, 예레미야 선지자와 같은 성도들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모두는 하나님만을 온전히 신뢰한 믿음으로 사악한 종교집단과 그리고 정치 세력과 싸워 승리한 위대한 신앙인들입니다.
b. 소극적인 믿음
* 히 11:35-38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우리는 이 구절에서 단지 믿음 때문에 고난의 시대에 시련을 당하고, 자식을 잃은 후 죽은 자식을 이적 가운데 얻기도 하며, 온갖 고난의 삶을 살았던 성도의 모습을 봅니다. 이들은 불신과 배교 그리고 타락된 종교, 사회 문화적 시대에 오직 하나님 여호와만 신뢰하고 바라보며 살았던 신실한 성도들이 사회와 동족 그리고 대적들로부터 당하였던 수난의 역사를 생각하게 됩니다.
(1) 죽은 자의 부활을 경험한 이들: 엘리야 선지자 시대의 사렙다 과부(왕상 17장), 엘리사 선지자 시대의 수넴성 여인(왕하 4:17)의 경우를 생각하게 됩니다.
(2)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한 순교자적 삶을 산 인물들:
유대 역사에 있어서 얼마나 이들이 이 같은 신앙의 절개를 지켰는지 모릅니다. 구약 시대가 마감되고 신약 시대로 넘어 오면서 400년의 중간기 시대가 있는 데 이 시대에 로마의 학정에 반대하여 유대인들이 벌린 독립전쟁을 얼마나 치열하였지 모릅니다. 외경, 마카비서와 유다 역사가 잘 나타내 보여줍니다.
(3)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돌에 맞고 또한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은 인물들: 예레미야 선지자와 같은 이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4) 톱으로 켜임을 당한 경우: 이사야 선지자 선지자가 그러한 고문을 당하여 순교하였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참고, 외경 이사야의 승천).
(5) 칼에 죽는 것을 당하는 경우: 엘리야를 비롯한 많은 선지자들이 당하였던 고문과 살해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에 우리야라는 선지자는 여호야김 왕에게 칼로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렘 26:23).
(6)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며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며 외롭게 신앙생활을 한 성도들의 경우: 지금도 땅굴 속에서 살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유적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들 모두는 경건한 성도들로서 세상 가운데서 온갖 멸시와 천대와 환란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믿음으로 살았던 자들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들을 가리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 성도들이라고 Title을 달아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신앙을 어떠한지요? 세상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하고 강력하며 확실합니까?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세상이 인정하는 신앙입니까? 아니면, 무시해도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 모잘 것 없는 신앙의 모습입니까?
생전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격려하시고 계십니다.
*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다음의 말씀을 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무엇이 두려워 믿음 생활을 대충하십니까? 창조주시오, 구원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구원의 역사 속에 부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주시어 아들까지 주심을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아들의 이름으로 이 죄악된 세상을 믿음으로 싸워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하였습니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의 인생의 의미와 사명을 알게 하시어 한 평생 의미 있는 인생의 길 즉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향하여 진력하며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 얼마나 축복된 인생입니까? 어떻게 이 귀한 인생을 살아가시겠습니까? 단순히 잘 먹고 세상에서 모자람이 없이 덩덩거리며 살기 위한다면 굳이 예수를 잘 믿으려고 애쓸 필요가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히브리서 저자의 강력한 이 믿음의 증거와 논리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3. 완성될 구속 역사를 향한 참 믿음
* 히 11:39-40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 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미 살펴 본대로, 이 구절은 우리로 하여금 놀라운 영적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믿음의 증거를 받고 확신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의 삶의 현장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약속을 받았으나 성취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믿음으로 그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며 소망 가운데 살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40절의 말씀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미 지난 2월 24일 주일에 전한 말씀에서 구약의 성도들과 우리는 한 믿음 한 백성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이는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Backbone과 같은 핵심적인 구원의 진리라 믿습니다.
그때 저는 다음과 같은 논리로 이 진리를 설명 드렸습니다.
“ 여기서 중요한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즉 구약의 성도들을 우리와 비교해 볼 때, 이들과 우리가 다른 점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시대가 다르다는 것뿐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들은 예수님 오시기 전(모세의 영향권 하에 있던)의 사람들이고 우리는 예수님 오신 후(예수께서 완성하신 구원의 시대)의 사람들이라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이 두 그룹은 같은 약속, 같은 믿음, 같은 고백을 하며 살아갑니다. 단지 구약 성도들은 그 약속을 받았지만, 성취를 얻지 못한 삶을 살았고 우리는 그 약속을 받아 확실한 가운데 같은 믿음으로 그 완성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차이뿐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성도들의 믿음의 경주 역시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이 완성되어야만 이루어 질 수 있는 같은 믿음의 경주입니다.“
39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구원의 구조를 다시금 설명합니다.
“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히브리서의 특징인 "비교방식“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구약의 성도들에게 제공하였던 구원의 방식과 신약의 성도들이 얻게 된 구원의 방식을 비교해 볼 때 신약 성도들에게 제시된 구원방식이 ”더 나은“ more advance된 방식임을 알게 합니다.
이 비교 방식은 단절된 관계가 아니라, 연결된 관계입니다. 즉 구약 성도들이 가졌던 믿음은 우리와 다른 차원의 믿음이 아니라, 같은 믿음 방식으로 상호 교통이 가능한 한 통속의 믿음입니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version이 다를 뿐, 같이 통용할 수 있는 향상된 program과 같이 같은, 한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구약 성도의 믿음은 성취 받지 못한 약속받은 그림자적인 믿음이라면, 우리의 믿음은 성취된 약속을 받은 성취적 믿음입니다. 이 두 믿음은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들에게 하신 그 언약이 최종 적으로 완성되기까지 함께 경주해야 하는 같은 하나님 나라의 한 백성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할 같은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놀랍게 밝힌 기독교 구원의 진리는 개인적이 아니고 공동체적임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 고전 15:24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이는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적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온 백성이 함께(altogether, Whole) 전부(entire) 완성되는 나라임을 가르쳐 줍니다. 이 믿음은 국가 간, 민족 간, 계층 간, 그 어떤 차별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차별이 없으며, 시대적 차이 또한 없습니다. 그릐고 귀천의 차이가 없으며, 남녀의 차이가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는 모두가 하나입니다(One in Christ Jesus)! 이것이 참 믿음입니다.
결 론
여러분과 저는 이 귀한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을 우리가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 것입니까? 시류 따라, 내 마음에 당기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입니까? 아니면 어떠한 상황과 시대 속에서도 확실한 믿음으로 할 것입니까? 말씀에 대한 깊은 사모하심과 헌신으로 스스로 이 말씀을 확인하시며 온전한 믿음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으로 진리와 공의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실천하는 신실한 믿음의 영웅들이 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