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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미술: '눈'의 예술
앞에서는 낭만주의 미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현대미술이 어떻게 태동되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이 시간은 다음의 그림에서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에두아르 마네, <풀밭위의 점심> 1863]
정장을 차려입은 두 남자와 벌거벗은 한 여인이 앉아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도 다소 외설적인 면이
있습니다. 만약에 이것이 사진이나 동영상이었다면 더욱 그렇게 느껴졌겠죠.
이 그림은 오늘날처럼 매체가 발달하지 않았던 19세기 중반의 사람들에게 상당한 도덕적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그림 속 인물들은 사교계의 유명인사들로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죠.
나체의 여인은 마네가 즐겨 그렸던 모델이었고, 두 신사중 하나는 마네의 동생입니다.
마네가 누드를 그렸기 때문에 도덕적인 비난을 받았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서구 회화사에서 누드화
는 전통적인 쟝르의 하나입니다.
문제는 마네가 님프나 여신을 그린 것이 아니라 실존 인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었죠.
과거 화가들이 그렸던 비너스의 누드는 미의 상징이었지만 실존인물 빅토렌느 머랑을 그린 마네의
이 그림은 도덕적인 비난의 대상이었습니다.
마네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이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장면은 실제 있었던 일을 묘사한 것이 아닙니다. 마네는 이 작품을 통해서 예술가의 자유를 선언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술가는 미적인 효과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다시 그림을 봅시다. 여인의 따뜻한 크림색 피부는 남자들의 차가운 흑회색 코트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마네가 여인을 나체로 그린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회화적 대비 효과를 위해 그는 이런 구상을 한 것이죠. 말하자면, 마네는 회화의 세계에는
일상적 현실 세계와는 다른 법칙이 존재한다고 본 것입니다.
마네에게 있어서 회화는 그 자신의 자율적인 법칙을 가진 고유한 세계가 되고 있는 셈이죠.
그런데 바로 이 점이 세인들의 비난을 불러 일으켰던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 보았듯이 전통적으로 회화는 사람들에게 교훈이나 배울 점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
되어 왔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이 그림른 아무런 배울만한 것이 없는 불경스러운 그림으로 비춰
졌던 것입니다.
이 그림에서 또 눈여겨 볼 점은 묘사된 인물들이 과거의 작품들에서처럼 입체적이지 않다는 사실
입니다.
지난 시간에 보았던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떠올려 봅시다. 고전주의 회화에서는 인물의 실체감을
살리기 위해 명암의 미세한 단계를 아주 꼼꼼하게 처리합니다.
그 덕분에 그림 속의 인물은 마치 대리석 조각같은 느낌을 주죠.
그에 반해 마네의 <풀밭위의 점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훨씬 평면적으로 보입니다. 왜 그런걸까요?
마네는 실제로 집밖으로 나가 야외의 풍경을 관찰할 경우 빛을 받는 부분은 훨씬 더 밝게 보이고
어두운 부분은 더욱 짙게 보인다는 점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전주의 그림에서와 같은 명암의 섬세한 단계는 실제로 관찰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
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카데미에서 배운대로 명암법과 채색법을 구사하는 대신, 자신이 관찰한 바대로 그리
기로 한거죠. 그 결과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의 대비가 강조되었고, 남녀 인물들은 다소 평면적
으로 그려졌습니다.
그림을 봅시다. 여인의 몸과 신사들의 검은 의상은 거의 평평해 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실체감이 없어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야외의 밝은 빛 속에서는 둥근 형체들이 평평하게
보인다는 시각적 현실을 고려해 볼 때, 과거의 어떤 작품보다도 현실감있는 묘사라고 할 수 있습
니다.
마네의 새로운 미술과 그 정신은 인상주의자들에 의해 계승됩니다.
그들은 마네의 뜻을 좇아 화구통을 들고 화실을 박차고 나온 화가들로, 자신의 눈을 통해 직접 본
것이 아니라면 그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중 대표적인 사람이 끌로드 모네입니다. 그는 강의 풍경을 그리기 위해 조그마한 배에다 화실을
차렸습니다. 자연을 묘사한 그림은 그 현장에서 완성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죠.
이러한 모네의 생각은 필연적으로 기법상 새로운 방법을 낳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연에서 실제로
관찰된 현상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화합니다.
예컨대 구름이 해를 가리며 지나가거나 바람이 물 위에 반사된 그림자를 부숴뜨림에 따라 사물의
색채와 형체가 달라 보이게 되지요. 게다가 태양광선의 방향이 하루종일 바뀌기 때문에 언제 그것을
보았는가에 따라 달라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네는 순간적으로 관찰된 대상을 포착하기 위하여
재빨리 붓을 휘둘러 그림을 완성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는 과거의 화가들처럼 꼼꼼하게 마무리할 여유가 없었고, 화면에 거친 붓자국을 남기게 되었습
니다. 그는 세부보다는 전체적인 효과에 주의를 기울였던 것입니다. 그의 그림을 봅시다.
[끌로드 모네, <생 라자르 역> 1877]
당시 사람들 눈에 모네의 그림은 마무리가 덜 된 미완성작, 혹은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그린 그림으로
보였습니다. 이 그림은 마네의 그림보다도 더 평면적이며, 그림속의 사물들은 실체감이 없어 보입
니다. 원근법도, 입체감을 부여하는 전통적인 테크닉은 무시되고 단지 형체를 암시하는 색채만 있을
뿐이죠. 이런 이유로 모네 또한 동시대인들의 조롱과 비난을 면치 못했습니다.
모네는 평생에 걸쳐 수많은 연작을 하였습니다. 예컨대 <짚더미>, <루앙성당>, <수련> 등이 있습
니다. <생 라자르 역>은 그의 첫번째 연작입니다.
이 연작에서 그는 기차역에서 볼 수 있는 증기의 표현에 매혹되어 있었습니다. 기차가 뿜어내는 연무
는 순간적으로 존재하다가 이내 대기중으로 흩어져 버리고 맙니다. 모네는 수많은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장소로서의 역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는 몽실 몽실 피어 오르는 증기사이로 흩어지는 빛의 효과와 그러한 혼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기관차와 객차의 모습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대기중에 순간적으로 존재하는 양상들에 대한 모네의 관심은 그의 후기작들에서도 지속되고 있는바,
그 미묘한 분위기의 묘사, 강렬한 빛과 반사광선의 사실적이고도 시적인 묘사, 그리고 순수한 색채의
하모니 등은 그의 양식적 특성이 되고 있습니다.
[오귀스뜨 르느와르, <물랭 드 라 걀레뜨> 1876]
우리가 잘 아는 르느와르의 대표작입니다. 모네가 주로 풍경을 그렸던 것과는 달리, 르느와르는
인상주의의 원칙을 일상 생활의 장면을 묘사하는 데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흥겨운 야외 무도회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파티의 분위기에 흠뻑 취해 있는 젊은 남녀
들은 모두 즐겁고 명랑해 보입니다.
이러한 축제의 정취를 르느와르는 인상주의 특유의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의 주요 표현 대상은 화려한 의상의 인물들이 아닙니다. 르느와르의 주요 관심사는 인물들
과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을 비추고 있는 햇빛의 효과에 있습니다.
앞쪽에 앉아 있는 여인의 얼굴을 봅시다. 그녀의 눈과 이마는 그늘 속에 있는 반면, 입과 턱 위에는
햇빛이 아롱거리고 있습니다. 화면 중앙에 보이는 두 인물은 그래도 선명하게 그려진 편입니다.
뒤로 갈수록 형체들은 점점 햇빛과 공기 속으로 용해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네가 그랬던 것처럼 르느와르도 대담하고 자유로운 붓놀림으로 대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세부는 대개 생략된 스케치풍의 그림입니다. 그래서 르느와르도 모네가 받았던 것과 같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세세한 것까지 자세히 그렸다면 이와 같은 생동감이 느껴졌을까요?
르느와르는 야외의 무도회에서 관찰되고 느껴질 수 있는 분위기를 이렇게 화사한 화면을 통해 표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는 전통적인 화가들처럼 섬세한 수법을 쓰고 있지는 않지만, 자신의 시각 경험을 생생하게 전달
하기 위해 과거의 어떤 거장 못지 않은 신중한 방법으로 화필을 사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에드가 드가, <압생트> 1876]
또 다른 인상주의자, 에드가 드가(Edgar Degas)의 작품을 봅시다. 드가는 인상주의자들 중에서도
유달리 소묘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화가로, "소묘는 형태가 아니라 형태를 보는 방식이다"라고 말하
기도 했습니다.
드가는 아카데믹한 윤곽선의 개념에 반감을 갖고, 살아있는 형태를 사실적이고도 조화롭게 강조하는
특징적인 스타일을 창안하였습니다.
인상주의자들 중에서도 드가는 이렇듯 시각적 세계를 구성하는 대상들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우리는 드가의 인물 스케치들을 통해 각 대상의 분리와 상호관계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드가는 종종 고전주의적 인상주의자로 불리우는데,
그는 스스로 "현대적 삶을 그리는 고전주의 화가"가 되기를 원했던 화가였습니다.
목욕하는 여인, 빨래하는 여인, 발레하는 무용수들과 같은 현대의 일상적 정경들을 주로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 마네와 기타 인상주의자들과 비슷했지만, 드가는 옥외의 밝은 빛 아래서 그림을
그리는 일은 드물었고, 주로 실내의 정경을 그렸습니다.
<압생트>는 당시 서민들이 즐겨 마시던 독한 술이었습니다. 아직 대낮인 것 같은데도 몽롱한 표정
을 하고 있는 여인의 얼굴이 보이는군요. 옆의 남자는 그녀의 남편처럼 보이는데요, 그는 여인을
외면하는 자세를 하고 있군요. 카페에서 볼 수 있는 일상적인 정경을 우연적인 시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제라 할 수 있는 두 사람을 드가는 오른쪽 상단에 치우치게 위치시켜 중앙집중적 구도를
회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화면의 많은 부분이 빈공간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볼수 있는데요,
이러한 공간은 여인의 공허한(?) 심정을 표상하는 듯 하지 않습니까?
여하튼 드가는 빈 공간을 남겨두고 있는 그림을 여러점 제작했고, 그럼으로써 우연히 지나가면서
바라본 듯 그 장면을 자연스럽게 묘사하였습니다. 드가의 이런 그림들은 우연히 찍은 스냅 사진의
한 장면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그의 그림의 자연스러우면서도 신선한 구도는 당시 발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진술의 영향을 받은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네이후 인상주의자들은 일종의 사실주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내 '눈'으로 실제로 관찰한 것들만 그린다는... 그러다 보니 그들의 그림의 주제는 신화나 역사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의 일상 속에서 접할 수 있는 정경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카메라가 렌즈에 비춰진 이미지를 기록하듯이 자신의 망막에 맺힌 이미지를
기록하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상주의자들이 실제로 그린 것은 사물 그 자체라기보다는 사물을
비추는 빛이었습니다. 빛을 통해 화가의 눈에 들어오는 시각적 인상, 그것이 인상주의자들의 주요
표현 대상이었죠.
인상주의가 과거의 그림과는 달리 화사하고 생동감넘치는 색채의 향연으로 나타나는 데에는 바로
이런 이유가 있었습니다. 자, 그럼 이시간은 여기서 마치고요,
다음에는 인상주의 이후 현대미술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 The pictures above appear in Mark Harden's artchive and Jim's fine art collection.
3. 색채의 마술사들
이번엔 여러분에게 친숙한 반 고호와 고갱의 예술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아마도 반 고호를 모르시는 분은 없을 것 같네요. 그를 비롯해서 고갱, 세잔, 쇠라 같은 화가들을
보통 후기인상주의자라고 부릅니다.
인상주의 이후의 미술이라는 의미죠. 이들은 이후 20세기 미술이 발전하는데 아주 결정적인 영향력
을 행사한 중요한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인상주의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만 거기에 머무
르지 않고 인상주의의 한계를 나름대로 극복하여 새로운 양식을 개척한 사람들입니다.
그럼 우선 반 고호의 작품을 보도록 하죠.
[빈센트 반 고호, <나이트 카페> 1888]
'반고호' 하면 사람들이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이 아마도 강렬한 색채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거친 붓자국이겠죠. 그래서 그의 그림은 차분함, 고요, 평정 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뭔가 강렬한 정서가 느껴지지요. 1853년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반 고호는 그 자신이 매우 감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신앙심이 아주 돈독했고, 한때 전도사로 일하기도 했었습니다. 종교적 열정이 남달랐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목사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그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생활 능력이 없었던 그가 그림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화상이었던 동생 테오가 평생 그의 후견인
역할을 해주었던 덕분이었습니다. 얼마되지 않는 수입을 쪼개어 형에게 생활비를 대주었던 테오가
없었더라면 대화가 반 고호는 존재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반 고호는 테오를 통하여 인상주의자들을 소개받고 인상주의에 심취하게 됩니다.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복잡한 도시 파리를 떠나 남불의 아를르로 떠납니다. 그곳은 그가 평소 동경하던
전원생활과 태양빛으로 흠뻑 젖은 풍경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위의 그림은 반 고호가 아를르에 머물 당시 그린 그림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반고호 특유의 양식
이 보입니다. 아를르의 강렬한 태양 덕분이었는지 이 시기이후 그의 색채는 더욱 강렬해집니다.
카페의 밤풍경을 그린 이 그림을 봅시다. 빨간색 벽과 초록색 천장, 그리고 불타듯 빛나는 노란 전등... 주로 원색을 사용하여 강한 색조 대비를 보여 줍니다.
시계는 열두시를 넘기고 있고 테이블에는 사람들이 몇명 쭈그리고 앉아있군요. 과연 이 카페의 벽은
진짜로 원색의 빨간색이었을까요? 그리고 천정도...?
지금 반 고호는 지극히 주관적으로 색채를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나이트 카페에서 느꼈던 퇴폐적
이고 절망적인 분위기를 개성적인 색채를 통해 표현하고 있는 거지요. 반 고호의 그림을 하나 더
볼까요?
[빈센트 반 고호, <귀가 잘린 자화상>, 1889]
아를르에 머물던 반고호는 일종의 화가들의 공동체를 꿈꾸면서 고갱을 그곳으로 초청했습니다.
당시 고갱은 반 고호처럼 생활비를 대주는 동생도 없었던 차라 몹시 궁색한 생활을 하고 있었죠.
그래서 반 고호의 제안을 응락했고 두 화가는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함께 사는 일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의견의 불일치가 계속되었고, 고갱의
오만한 성격은 반 고호의 예민한 신경을 자극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사소한 충돌 끝에 반 고호는 흥분을 참지 못하고 폭발시키게 됩니다. 광기에 가까운
감정에 사로잡힌 그는 자신의 귀를 잘라 마을의 매춘부에게 보냅니다.
언젠가 농담삼아 그러마고 약속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이후 고갱은 그의 곁을 떠나고,
반 고호는 마을 사람들의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주변의 이상스런 시선에 시달리던 반 고호는
더 이상 견디기 힘들 정도로 쇠약해져서 아를르 근처의 생 레미 정신병원에 수용됩니다.
위의 그림을 보면 귀에 붕대를 두른 반 고호 뒤로 그림이 한장 붙어 있는 것이 보입니다.
일본의 채색 판화입니다. 19세기 말 많은 인상주의자들은 일본의 판화에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일본 판화는 대담한 색채와 평면적인 형태를 그 특징으로 하는데, 몇몇 화가들이 새로운 미술을
개척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반 고호 역시 일본 목판화에 열광했었고, 그의 그림에서 우리는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빈센트 반 고호, <별이 빛나는 밤> 1889]
이 그림은 반 고호가 생 레미 정신병원에서 요양하고 있을 때 그린 것입니다. 그는 주기적인 발작을
일으켰지만, 이 정신병원에서 그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들을 몇 점 남기게 됩니다.
별도, 달도, 그리고 사이프러스 나무도 모두 불타는 것처럼 보입니다.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듯한
대상들은 이 그림을 단순한 풍경화 이상의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이 풍경화는 반 고호의 격정적인 정서를 특유의 색채와 붓질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을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교회가 보입니다.
그림의 상징성을 더욱 강화시켜주고 있죠. 이 신비스러운 풍경은 분명 우리가 실제로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절제할 수 없는 격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반 고호의 눈에는 마을의 밤풍경이
이렇게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누가 불렀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빈센트"라는 노래가 있죠. "starry,
starry night.."하면서 시작되는... 바로 이 그림을 소재로 한 노래입니다.
자, 이제 반 고호의 친구였던 고갱의 작품세계를 살펴봅시다. 반 고호와는 사뭇 다르지만 고갱 역시
아름답고 강렬한 색채의 세계를 우리에게 선사한 화가입니다.
고갱은 파리에서 주식 중개인을 하면서 가족을 부양하던 평범한 가장이었습니다.
그는 그림에 관심이 많아 아마추어화가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1885년 전업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고갱은 처와 자식들을 등진채 브르타뉴라고 하는 시골로 내려 갔습니다. 브르타뉴는 프랑스에서
가장 발전이 늦은 지역으로, 고갱은 원시적인 삶을 동경하여 그곳을 선택했습니다.
[폴 고갱, <설교후의 환영(illusion)> 1888]
이 그림은 고갱이 브르타뉴의 퐁타방 지역에 머물 당시 그린 것입니다. 마을 여인들이 모두 똑같은
옷을 입고 있죠? 이 지방의 민속 의상입니다. 지금 묘사되고 있는 것은 마을 사람들이 설교 시간에
들었던 성서의 내용이 환영으로 나타난 놀라운 기적의 장면입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 야곱이 천사와 씨름을 하는 모습이 오른쪽 상단에 보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현실에서 있었던 일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보고 있는 환영인 셈이죠. 씨름하는 두 사람 앞엔 강이
놓여 있고 강 건너에는 소가 한마리 있습니다.
이것 역시 환영입니다. 고갱은 이 그림에서 현실적 대상과 비현실적 대상을 혼합시키고 있는 것입
니다. 현실에선 볼 수 없는 장면을 묘사하는 것... 우리는 이런 것을 이미 낭만주의에서 봤었습니다.
19세기 말에는 이런 경향이 회화에서 더욱 빈번히 나타나는데 이런 종류의 회화를 우리는 "상징주의"
라고 부릅니다.
다시 그림을 봅시다. 원색에 가까운 빨간색 바탕은 색종이처럼 평평합니다.
여인들의 까만 의상과 흰 모자 역시 마찬가지죠. 상상의 세계를 암시하는 빨간색은 여인들의 의상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색채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은 선명하지 않지만 색면
을 까만 선으로 테두리를 하고 있죠. 덕분에 형태가 더욱 단순화되어 보입니다.
고갱은 신비스러운 종교적 체험을 특유의 화려하고 평평한 색면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인데, 고갱은
스스로 자신의 양식을 "종합주의"라고 부릅니다.
[폴 고갱, <후광이 있는 자화상> 1889]
고갱의 자화상입니다. 반 고호의 자화상과 비교해 보십시오. 두 사람에게서 상당히 다른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매우 겸손하고 지적이며, 한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고자 했던 반 고호와는 달리
고갱은 좀 오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자신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해야 하는 사람이었죠. 그는 리더쉽이 강해 그를 추종
하는 일단의 화가들이 있었습니다. 이 그림에서 고갱은 스스로를 성화시키고 있습니다.
사과와 뱀은 고갱을 최초의 사람 아담처럼 보이게 합니다. 그런가 하면 머리위의 후광은 고갱을
두번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처럼 보이게 하지요. 이 그림 역시 상징성이 농후합니다. 어찌 되었건
고갱은 지금 자신을 성인으로, 말하자면 "종합주의"의 성인으로 나타내고 있는 겁니다.
[폴 고갱, <우리는 당신을 환영합니다, 아베 마리아> 1891]
고갱은 보다 원시적인 세계를 찾아 남태평양의 타이티섬으로 떠납니다.
그곳은 당시 불란서의 식민지였습니다. 타이티에서 그는 원주민 여인을 부인으로 맞아 아이까지
낳습니다. 이 그림은 타이티 원주민들을 모델로 그렸습니다. 그런데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그림은 기독교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빨간 색의 원주민 의상을 하고 있는 여인과 그의 어깨에 올라 앉아 있는 어린 아들의 머리 위를
보십시오. 고갱의 자화상에서 봤던 것과 같은 후광이 있습니다. 그들은 타이티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지금 마리아와 어린 예수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죠. 고갱은 여기서 원시적인 것과 서구
문명을 종합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 그림은 색채가 참 아름답습니다.
전경의 열대 과일의 색상과 후경의 핑크빛 배경의 조화, 마리아의 빨간 의상과 경배하는 여인의 파란
의상의 대조... 고갱의 세련된 색채 감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반 고호가 주로 원색 위주의 강렬한
색채를 사용했었다면 고갱은 중간 톤의 다양한 색상을 사용하여 자신의 풍부한 색채 감각을 마음껏
발휘합니다.
반 고호와 고갱은 서로 개성이 뚜렷이 구별되는 화가들이지만, 색채를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를 표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반 고호는 자신의 내면 세계를, 고갱은 신비스러운 종교 정신을 색채의 다양한 가능성을 통해 표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현대미술에 남긴 공적은 대상을 고유색에서 해방시켜 색채를 자유롭게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주관적 정서나 상상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삼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후대에 "표현주의"라는 양식을 낳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표현주의의 선구자들인 셈
이죠.
* The above pictures were captured from Mark Harden's artchive and Jim's fine art collection.
4. 시각 세계의 질서
우리는 후기인상주의라고 불리는 미술가 중 반 고호와 고갱의 미술세계에 대해 알아 보았습니다.
이번엔 세잔과 쇠라의 작품들을 감상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쇠라의 그림을 보도록 합시다.
점묘화법으로 유명한 화가죠. 그의 그림은 복사본으론 원화의 감동을 제대로 느끼기 어렵습니다.
실제로 그의 그림을 보게 되면 조그마한 색점들의 하모니가 그저 놀랍다고 밖에 느껴지지 않죠.
[죠르쥬 쇠라, <그랑 쟈뜨섬에서 바라본 풍경> 1887]
<그랑 쟈뜨섬의 일요일 오후>의 왼쪽 상단의 장면을 떼어낸 것 같은 풍경입니다.
점묘화법이 좀더 잘 보입니다. 쇠라는 후기인상주의자들 중에서도 인상주의의 기법을 가장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미 보았듯이 인상주의자들은 형체를 꼼꼼히 완성하지 않고 즉흥적인 붓질로 형체를 암시해 주는
것 만으로도 대상을 묘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주로 옥외에서 풍경을 그렸던 인상주의자들은 햇빛에 반사되는 밝은 색채로 캔버스를 메꾸었는데,
서로 다른 색채를 병치시키는 방법으로 대상을 묘사했습니다.
쇠라는 인상주의자들의 즉흥적이고 대담한 붓질을 조그마한 색점으로 대치시키고 있는 셈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쇠라를 "신인상주의"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쇠라의 그림이 인상주의처럼 즉흥적으로 보입니까? 아무도 그렇게 느끼지 않을 겁니다.
색채에 있어서건 구성에 있어서건 쇠라는 그림의 어느 부분도 즉흥적으로 그리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는 <그랑쟈뜨섬의 일요일 오후>라는 대작을 완성하기 위해 60여점의 습작을 했고요,
완성작이 나오기까지 2년이나 걸렸습니다.
쇠라는 꽤 오랜 기간동안 색채 이론을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혼합되지 않은 물감을 작은 점들로
병치하였을 때 가장 정확하고 선명한 색채효과를 얻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연두빛의 잔디를 묘사하기 위해 녹색과 노란색을 섞어서 칠하는 대신 녹색과 노란색을
나란히 점으로 찍는 것이 우리 눈에 보다 선명하게 들어 온다는 거죠.
쇠라는 빛을 받는 부분은 노란색같은 밝은 색을 좀 더 많이 사용하고, 어두운 그림자는 어두운 녹색
이나 진한 주황색 등 어두운 색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그림자라고 해서 어두운 색만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림자에서도 우리는 노란 색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빛을 받는 부분 역시 밝은 색 일변도로 하지 않고 어두운 색을 섞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색채 뿐아니라 그림의 구도와 사물의 형태에 대해서도 쇠라는 아주 고심한 흔적이 보입니다.
<그랑쟈티섬의 일요일 오후>를 다시 봅시다. 인물들은 아주 단순화된 형태로 그려져 있습니다.
여자들은 마치 원통형의 도형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다른 사물들도 할 수 있는한 최대로 단순화
시키고 있는 걸 볼 수 있죠. 전체적인 구성을 봅시다. 쇠라는 인물들의 위치나 서있는 방향 등을
인위적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서있는 방향이 거의 일정한 것이 눈에 띄지요?
그는 가장 이상적인 구도를 만들기 위해 고전주의적 비례체계를 연구했습니다. 예를 들어 황금
분할 같은 것 말입니다. 그리고 그 연구 결과를 이 작품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쇠라는 인상주의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고전주의적으로 보입니다.
체계적인 이론과 규칙에 따르고, 오랜 습작 기간을 거쳐 신중하게 화면을 구성하는 것, 이것이 다름
아닌 고전주의가 아닌가요? 인상주의가 후대 미술가들에게 새로운 미술의 가능성을 열어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시각적 인상의 기록자로 여겼던 그들의 미술은 단지 표면적 효과만
있을 뿐 깊이있는 내용이 없어 보이기도 했죠. 반 고호와 고갱이 상징적인 내용을 화폭에 담으려고
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후기인상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쇠라 역시 인상주의의 한계를 나름대로 극복하려 했던 것입
니다.
이제 세잔으로 넘어갈까요? 세잔은 부유한 아버지 덕분에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 평생 그림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세잔을 아버지가 탐탁하게 여겼던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가 유산을 많이 남기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세잔은 아버지를 두려워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소심하고 예민한 사람이었습
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했구요. 파리에 잠깐 머물면서 동료 화가들을 알게 되지만,
곧 자기 고향인 엑상 프로방스로 돌아와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게 됩니다.
세잔도 쇠라처럼 고전주의적 특징을 보이는 후기인상주의자입니다. 그런데 쇠라가 고전주의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에 보다 철저했던 반면, 세잔은 화가가 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모순된 고민들을 작품
속에서 종합하고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세잔은 자신의 작품이 인상주의처럼 생동감 넘치는 감각을 담아내는 동시에 고전주의처럼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것으로 남길 원했습니다. 다시말해, 그는 생생한 감각과 지속적이고 견고한 본질을
모두 성취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는 어는 한쪽을 얻으면 다른 한쪽은 잃을 수 밖에 없는 모순된
소망이지만, 세잔은 평생의 탐구 작업을 통해 자신의 목적에 꽤 근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잔은 한 점의 그림을 완성하는데 상당히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그래서 세잔의 초상화 모델들은
아주 고역을 치루곤 했지요. 왜냐하면 오랫동안 모델을 서야 했을 뿐만 아니라, 조금이라도 자세가
흐트러지면 세잔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았으니까요.
세잔 역시 움직이는 모델보다는 사과같은 정물을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과일도 시간이 지나면 썩어
버리죠. 그래서 그는 몇번씩 정물을 바꿔 주면서 그림을 완성해야 했습니다.
이 그림을 봅시다. 사과의 색깔이 참 곱지 않습니까? 왼쪽 맨 앞에 있는 사과를 보십시오. 입체감을
표현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별로 없습니다. 좀 평평해 보이죠. 하지만 빨간 색채가 이 사과를 충분히
실체감있어 보이게 하지 않나요? 다른 대상들에서도 비슷한 느낌이 납니다. 좀 더 자세히 그림을
봅시다. 이 그림에선 전통적인 원근법이 완전히 무시되고 있습니다.
각 대상들은 교묘히 조화를 이루고 있지만, 그들 각각은 그 형태가 가장 잘 나타날 수 있는 시점에서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옛날식으로 하나의 시점을 중심으로 모든 사물들을 통일성있게 그린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시점을 동시에 사용하여 한 화면안에 종합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얀 접시 위에 놓인 빵을
봅시다.
맨 위의 빵이 약간 들려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세잔은 빵의 모양을 살려주기 위해 좀 더 위에서
내려다 본 빵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사과바구니도 마찬가지입니다. 바구니가 약간 들려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구니 안에 있는 사과들의 형태가 잘 보이는 시점에서 그린 것이죠.
테이블을 보면 원근법이 얼마나 무시되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테이블 윗 선과 아랫
선을 봅시다. 좌우가 직선으로 닿지 않습니다. 세잔은 이런 방법이 대상의 본질을 잘 살릴 뿐 아니라,
실제 시각 현상 또한 잘 표현한다고 보았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어떤 장면이나 대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기하학적으로 모든 대상을 정리해서 보지 않는다는 거죠. 각 사물들의 특징을 따로 따로 -
하지만 거의 동시에 - 포착하면서 상황을 인지한다는 겁니다.
세잔의 고향 엑 상 프로방스에 있는 생빅토와르 산은 그가 아주 즐겨 그렸던 소재였습니다.
이 그림은 세잔이 말년에 그린 생 빅토와르 산입니다. 그가 죽은 해가 1906년이니까, 그의 최후의
작품 중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전의 작품과 비교할 때, 이 작품에선 대상이 거의 해체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말년의 세잔은 마치 모자이크를 하듯이 작은 색면들을 병치하여 대상을 묘사
합니다.
다시 말해 세잔은 특유의 붓놀림으로 작은 각편같은 색면들을 만들어 내는데, 이 색면들이 대상을
이루는 기본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방법으로 형태의 기하학적 특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잔은 대상의 물질적 실체를 충실히 구현하기 위해선 다음과 같은 두가지 점이 중요하다고 보았습
니다.
첫째는 자연을 면밀히 관찰하는 것이고, 둘째는 대상의 형태적 본성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자연의 관찰을 위해서 그는 생 빅토와르산을 평생동안 수없이 오르내렸습니다. 그의 작품은 그의
눈으로 파악된 진실의 기록입니다. 대상의 형태적 본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는 대상을 "구, 원추,
원통"과 같은 기하학적 도형으로 파악하였습니다. 즉 산은 원추형으로, 나무는 원통형으로, 집은
입방체로 단순화시켜 파악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파악된 대상의 기하학적 특징을 그는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크고 작은 색면들로 표현?g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그려진 세잔의 그림은 특유의 구성적 효과를 성취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이 그림이 무엇을 그렸는지와는 상관없이 색채 구성 그 자체가 매우 조화롭고 아름답습
니다. 이런 효과를 고도로 추구해 나간 것이 소위 "추상 미술"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잔은 추상미술의 선구자격이 되지요.
앞서 말했듯이 세잔은 화가가 할 수 있는 모든 고민을 가지고 씨름했던 사람입니다. 구성과 색채,
이성과 감각, 논리와 정서 등 화가가 가진 딜레마를 세잔처럼 진지하게 문제삼았던 화가도 별로
없을 겁니다. 결과적으로 그가 이룩한 것도 그 누구보다 높이 평가받을 만한 것이고요.
그래서 많은 후대 화가들은 세잔을 존경하고 그의 그림에서 크게 영향받게 됩니다. 그중 대표적인
사람들이 피카소와 마티스죠.
이제 다음시간부터 우리는 본격적으로 20세기의 미술 세계로 들어가게 될 겁니다.
여러분은 곧 마티스와 피카소를 만나시게 됩니다. 기대해 주세요.
* The above pictures were captured from Mark Harden's artchive and Jim's fine art collection.
5. 새로운 원시주의
이제까지 우리는 19세기 낭만주의이후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를 거쳐 현대미술이 어떻게 변모했는
지에 대해 살펴 보았습니다. 19세기 말의 화가들, 즉 마네와 모네, 반 고호, 세잔 등은 20세기의
미술이 전개되는데에 발판을 마련해준 현대미술의 선구자들입니다.
이 시간부터는 본격적으로 20세기의 미술을 감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피카소, 마티스,
칸딘스키, 뒤샹, 달리 등 낯익은 20세기 미술가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시간엔 20세기 초에 있었던 야수파란 그룹과 그 그룹의 리더격이었던 마티스(Matisse)의 미술
세계를 탐험해 보겠습니다. 우선 다음 그림부터 봅시다.
마티스 부인의 초상화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화려하다 못해 현란한 색채가 가장
인상적입니다.
바탕을 보십시오. 빨강, 노랑, 초록, 파랑, 핑크... 적어도 5개 이상의 색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티스 부인의 얼굴에도 온갖 색깔이 다 쓰였군요. 마치 가면을 쓴 것 같은 모습입니다. 마티스는
동료 화가들과 함께 이 그림을 <가을전>이라는 전시회에 출품했습니다. 다른 화가들의 그림도
마티스의 것과 비슷하게 강렬하고 비자연적인 색채가 특징이었죠. 그들의 그림은 당시 사람들이
보기엔 너무나 자유분방하고 거칠어서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 동물을 연상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야수파(Fauvism)"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모리스 드 블라맹크, <서커스> 1906]
야수파의 일원이었던 블라맹크의 작품입니다. 역시 거친 붓놀림과 강렬한 색채가 야수적인 특성을
말해줍니다.
블라맹크는 이런 원시적인 강렬함을 몹시 사랑했던 화가였습니다. 20세기 초 서구의 많은 미술가
들은 미개부족이나 동양의 미술을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원시부족의 가면이나 조각에선
서구 전통 미술에선 볼 수 없었던 직접적이고 강렬한 표현 효과가 있었습니다. 원시 미술의 단순한
선과 강렬한 색채가 주는 직접적인 효과는 당시 화가들에게 새로운 미술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던 것
입니다. 블라맹크는 원시주의를 매우 노골적으로 표방했던 화가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정규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루브르 미술관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는 사실도 그에겐 자랑거리였구요.
대신 그가 자주 드나들었던 곳은 파리의 민속박물관과 인류학 박물관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아프리카 조각상과 같은 원시미술과 접할 수 있었죠.
마티스의 어린 동료였던 드랭이 그린 그림입니다. 마티스와 드랭은 나이차가 꽤 많았지만 한때 공동
작업을 할만큼 가까웠습니다. 드랭의 부모는 그가 화가가 되는 것을 극구 반대했었습니다.
그런데 점잖고 교양많은 마티스의 설득으로 드랭은 화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드랭이 색을 사용하는 방법도 마티스와 비슷합니다. 마티스 부인의 초상화처럼 마티스의 얼굴도
대담한 색채로 채워져 있습니다. 얼굴의 색깔은 어떤 색이어야한다는 고정 관념이 완전히 깨져
있지요.
이러한 색채의 자율성 혹은 회화의 자율성의 선언은 야수파라고 불리우던 화가들 모두의 공통된
특징이었습니다.
마네이후 많은 화가들은 회화의 세계는 일상적 생활 세계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고유한 영역
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주제를 위해 색채와 드로잉을 자유롭게
사용하였습니다. 이러한 미술의 자율성에 대한 생각이 20세기의 미술이 전개되는데 하나의 원동력
으로 작용합니다.
[앙리 마티스, <초록의 선> 1905]
마티스가 <모자를 쓴 여인>을 그리고 나서 불과 몇달 후에 그린 마티스 부인의 초상화입니다.
<모자를 쓴 여인>과 이 그림을 비교해 봅시다. <초록의 선> 역시 강한 보색 대비를 사용하고,
색채의 자율성을 주장하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하지만 <모자를 쓴 여인>이 야수파란 이름에 걸맞게 충동적이고 통제되지 않은 색채와 산만한
구성을 보여준다면, 이 그림은 상당히 잘 정돈된 느낌입니다.
구성이 훨씬 안정감있게 되어있죠. 그런데 이 그림의 구성을 견고하게 해 주고 형태를 명확하게
해 주는 것은 바로 색채입니다. 이 그림에서 마티스는 전통적인 명암법이나 원근법을 전혀 사용
하고 있지 않지만, 그는 색채대비를 통해 훌륭하게 입체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마티스 부인의 얼굴 중앙을 가로지르는 초록색의 선이죠.
이 대담한 선으로 마티스는 코의 입체감을 표현하는 동시에 그림 전체에 균형감을 부여하고 있습
니다.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그림이 초록의 선을 중심으로 두 부분으로 나뉘고 있음을 알수 있죠.
마티스 부인의 얼굴은 초록의 선을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 쪽의 색이 다릅니다. 햇빛을 받는 쪽은
보다 경쾌한 색으로, 반대쪽은 그늘진 색으로 칠해져 있습니다.
이번엔 바탕색을 봅시다. 왼편의 주황색은 대상을 가깝게 느껴지게 하고요, 오른편의 차가운 녹색은
대상을 뒤로 물러나 보이게 하지요. 마티스는 이 그림을 기점으로 야수파의 즉흥성을 탈피하고
견고한 구성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앙리 마티스, <빨강의 조화> 1908-9]
마티스는 이제 더이상 야수파가 아닙니다. 이 그림의 제목이 암시하듯이 그림안의 모든 요소들은 잘
조화되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도 불필요하게 그려진 것이 없이 아름답게 통제된
우아한 양식이 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매우 평면적으로 보입니다. 벽지와 식탁보가 동일한 패턴으로 연결되어서 거의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마치 벽지의 무늬가 식탁보를 타고 내려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번엔 왼편의 창을 봅시다. 창밖으로 나무가 있는 풍경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창밖의
풍경입니까? 혹시 풍경이 그려진 그림 아닐까요? 애매합니다. 하지만 마티스에겐 그것이 무엇
인지가 별로 중요하지 않았을 겁니다. 빨간색에 대응하는 녹색의 풍경이 그곳에 필요했을 뿐이니
까요.
결국 마티스가 이런 그림을 그린 이유는 단지 장식적인 효과를 위한 것입니다. 마티스가 이그림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순수하게 시각적인 세계였던 것입니다.
원래 벽화로 제작된 이 그림들은 상당히 스케일이 큰 작품입니다. 얼핏 보았을 때 이것들은 아주 쉬운 그림처럼 보입니다. 주제도, 기법도 너무 단순해 보이죠.
그런데 이 단순한 그림들이 우리를 춤과 음악이 시작된 그 옛날로 데려가 주는 것 같지 않습니까?
혹은 춤과 음악이라는 본능적이고 순수한 행위를 다시금 일깨워 주는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를 어떤 단일하고 근원적인 경험으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마티스의 <춤>과 <음악>은 원시주의
적입니다.
사실 마티스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수 많은 습작을 했습니다. 그는 선 하나하나에 무척이나 고심했
습니다. 예를 들어 <춤>의 맨 왼쪽에 있는 여인의 몸통을 봅시다. 그는 이 여인의 복부를 그리면서
이 선이 전체 구성에 미칠 효과를 면밀하게 검토했을 겁니다.
활처럼 둥글게 표현된 여인의 몸은 그녀의 신체적 특징을 약화시키고 있기는 하지만, 둥글게 손을
맞잡고 돌아 가는 춤을 표현하는데는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형식적 구성을 염두에
두고 그림을 보게 되면, 왼쪽의 여인의 자세가 비정상적으로 뒤틀려 있는 이유, 오른쪽 하단에 있는
여인들이 상대적으로 작게 표현된 이유 등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마티스는 색채의 효과를 누구
보다도 잘 이용할줄 알았던 화가인 동시에 누구 못지않은 탁월한 구성력을 가진 화가였던 것입니다.
[앙리 마티스, <붉은 방> 1911]
마티스의 화실 풍경이군요. 그런데 온통 빨간색이네요. 마티스의 화실이 진짜로 그랬냐구요?
그럴리 없죠. 앞서 말했듯이 이건 순전히 회화적인 효과를 위한 겁니다. 앞서 본 <빨강의 조화>가
생각납니다. 거기서와 마찬가지로 이 그림에서도 어디까지가 벽인지 바닥인지 얼핏봐서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물론 방의 3차원적 구조와 식탁의 존재를 암시하는 어렴풋한 선이 있어서 방의 구조를 알아보는 것이
어렵진 않죠. 벽에는 온통 마티스의 그림이 있군요. 조각도 더러 보이구요. 마티스는 자신의 그림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인물들을 조각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아래의 조각을 보십시오.
마티스의 화실 오른쪽 구석에 있는 청동 조각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식탁위엔 도자화도 보이네요.
이런 모든 대상들이 마치 하나의 붉은 색 평면 위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티스는 이런 순수한 공간의 유희를 즐기고 있는 겁니다.
[앙리 마티스, <곡선의 여인상> 1909]
이 시간엔 마티스의 초기 미술을 중심으로 야수파 회화를 감상했습니다. 물론 마티스가 내내 야수파
로 활동한 건 아니었습니다. 야수파라는 미술운동은 1900년대 중반에 불과 몇년동안 존재했을 뿐입
니다. 하지만 야수파의 성향이 마티스의 미술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죠.
마티스의 그림에선 화가의 의지에 따라 색채가 자유롭게 표현되고, 형태가 변형됩니다.
이러한 회화적 자율성의 주장은 이후 추상미술에서 보다 극단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