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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선비족의 정체를 밝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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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鮮卑족은 우리와 한 핏줄이다.
우리는 선비, 또는 선비족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동양사나 한국 고대사를 보면 우리의 주변민족 또는 북방의 한 오랑캐 족속으로 선비라는 민족이 존재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선비족에 대하여 중화사관에서는 소위 ‘춘추전국(단군조선이 약화됨에 따라 단군조선의 연방소국들이 독립하고자 반란을 일으켜 들고 일어난 혼란한 시기)’시대에 등장하여 남만주와 몽골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서기 후 이른바 5호16국시대를 거치면서 사라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선비족은 고대 동아시아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수(隋, 영어:Sui Dynasty, 581년 ~ 619년)나라 나, 북위 정권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는 학설이 강력히 제기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선비鮮卑라는 말에서 卑를 보면 ‘저속하다, 낮다, 천박하다’ 라는 뜻이 있다. 이것은 차이나족속이 자기중심의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역사를 서술하면서 주변 한민족을 비하하여 부르며 붙인 이름이라는 것은 참역사학계에서는 다 아는 일반상식이다. 자기네를 중심으로 두고 주변의 네 방향에 자리 잡고 있는 던 4 이(四夷)한겨레, 즉 큰 활을 쏘는 네 부류의 한겨레를 이만융적(夷蠻戎狄)이라고 표현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중화사대주의자들이 득세한 이씨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는 선비족은 우리와는 상관없는 북방의 이민족으로 배워왔다. 백제와 고구려의 도성에 침범한 소정방과 설인귀의 당나라군대가 아주 작정하고 착수한 제일의 만행은 당시까지 존재하던 단군조선의 사서 등 고사서를 모두 불태우거나 약탈한 것이다. 그리고 차이나족의 거수국, 이씨정권은 차이나중심의 사서만 남은 상태에서 이것을 베껴다가 우리역사의 기틀을 잡는다. 이것이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강고해졌고, 정치적 광복이후에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 그래서 선비족은 우리와 남남이 되었다. 그러나, 단군세기 등 참역사 사료를 보면 선비족이 우리와 남남이 결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15세단군 대음(후흘달)재위51년 기미40년(서기전1622년)단제의 동생 대심을 봉하사 남선비의 대인으로 삼다. 둘째, 32세단군 추밀 재위30년 갑인3년(서기전847년)선비산의 추장문고가 공물을 바쳤다. 셋째,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오는데, 보면 고구려시대까지만 해도 선비족은 고구려연방의 한 연방자치국으로 존재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즉 당연히 선비족의 역사는 우리의 역사라는 것이다. 유리명왕 11년(서기전 9) 여름 4월에 왕은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선비(鮮卑)는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우리와 화친하지 않으면서, 이로우면 나와서 노략질하고 불리하면 들어가 지키니 나라의 근심거리가 된다. 만약 이들을 굴복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장차 그에게 후한 상을 줄 것이다.” 부분노(扶芬奴)가 나와서 아뢰었다. “선비는 [지세가] 험하고 굳은 나라이고 사람들이 용감하나 어리석으므로, 힘으로 싸우기는 어렵고 꾀로 굴복시키기는 쉽습니다.” 왕은 “그러면 어찌하면 좋은가?”고 물었다. [부분노가] 대답하였다. “사람을 시켜 배반한 것처럼 해서 저들에게 들어가 거짓으로 ‘우리나라는 작고 군대가 약하고 겁이 많아서 움직이기 어렵다.’고 말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선비는 필시 우리를 업신여기고 대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그 틈이 생기는 것을 기다렸다가 정예 군사를 이끌고 사잇길로 가서 수풀에서 그 성을 엿보겠습니다. 왕께서 약한 군사를 시켜 그 성 남쪽으로 나가게 하면 그들이 반드시 성을 비우고 멀리 쫓아올 것입니다. [그때] 신이 정예 군사로 그 성으로 달려 들어가고 왕께서 친히 용맹스런 기병을 거느리고 협공을 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왕은 그 말에 따랐다. 선비(鮮卑)가 과연 문을 열고 군대를 내어 뒤쫓았다. 부분노는 군사를 거느리고 그 성으로 들어가니 선비가 그것을 보고 크게 놀라 되돌아 달려왔다. 부분노는 관문을 지키며 막아 싸워 매우 많은 [적을] 목베어 죽였다. 왕은 깃발을 세우고 북을 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선비가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되자 계책이 다하고 힘이 꺾였으므로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왕은 부분노의 공을 생각하여 식읍(食邑)을 상으로 주었으나, [부분노는]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왕의 덕입니다. 신에게 무슨 공이 있습니까?”라고 하고는 결국 받지 않았다. 그래서 왕은 황금 30근과 좋은 말 10필을 내려주었다. (우리역사의비밀 네티즌 게시판의 신완순님 게시물에서 발췌) 넷째, 신라의 법흥왕은 선비족의 모용씨의 후예였다고 하는 주장도 나타나고 있는데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위 그림은 경북 경주의 천마총에서 발견된 천마도이다. 그런데 아래 선비족의 유물에서도 같은 천마도가 발견된다. 이것이 우연의 일치인가, 분명히 한반도 경주에 나라를 건설한 세력과 선비족은 같은 핏줄을 갖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섯째, 선비족의 활동지역에서 출토되는 유물을 보면 이들의 뿌리문화 역시 한반도 한겨레의 무당문화였음을 알 수 있다. 유물을 보면 천손신화를 나타내는 황금으로 된 새모양이 나타나고 신목(神木)의 나무가지가 뻗어있는 것도 나타난다. 여기서 신목은 무당문화의 결정체, 강원도 강릉단오제에서 반드시 등장하는 신목-당목-서낭당의 나무와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선비족에게도 아직 확인은 안되고 있지만 분명히 독자적인 이름을 갖고 있는 제천행사도 있었다는 것도 충분히 짐작이 간다.
위 유물은 전형적인 북방한겨레의 하늘자손사상을 담고 있는 봉황=새를 나타내고 있다. 새는 북방한겨레의 무당문화에서 하늘과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체역할을 하는 상징물로 등장한다. 이러한 천손문화는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지역에서도 발견된다.
신목의 나무가지를 형상화 한 것으로 보인다. 신목은 우리나라의 서낭당의 나무와 같다. 여기에는 현세의 복락을 기원하면서 오색의 천 조각을 매달아 놓기도 한다. 현재북방시베리아 소수 한겨레는 자작나무에 복락을 비는 천조각을 달아 놓고 있는데 러시아인들이나 관광방문객들도 덩달아 따라하고 있는것이 발견된다. 역시 무당문화의 한 줄기다.
선비족을 무지막지한 미개인 내지 야만인으로 학습받아온 세대는 위와같은 고급문화를 상상하기 힘들것이다. 자세히 보면 바둑을 두고 있는 그림으로 추정된다. 바둑의 원조는 한겨레라는 것은 이미 증명하였다(백제방의 공지-금동대향로편 참조)
여섯째, 선비족의 언어는 오환족과 함께 고대 몽골어(퉁구스어)와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몽골어와 우리 한국어는 본 바탕이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동호족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우리 한겨레임이 이미 증명되었는데, 이미 연구된 바로는 선비는 동호족의 후예라는 학설이 유력하다. 선비족의 영웅은 서기2세기 중엽의 단석괴(檀石槐)가 있는데 단석괴의 檀을 보면 단군의 단과 같다. 이 점을 보아도 선비족은 우리와 무관하지 않은 같은 핏줄임을 알 수 있다.(임승국의 한단고기-단군세기편 참조) 결론적으로 선비족의 역사는 우리 한겨레의 역사이다. 또한 선비족은 우리와 다른 이민족 오랑캐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한겨레다. 마치 우리와 다르게 배우게 된 것은 한국내 중화사대주의 새끼중국인들이 한국 제도권 사학계를 틀어쥐고 현재의 국사책을 썼고 이것을 참역사인 양 국가가 강제로 가르쳐 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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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 출처: http://blog.naver.com/cjswodlrlcjf?Redirect=Log&logNo=60044731035 ( 이 블록은 위 그림을 차이나측 누리집에서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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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족의 영토는 내내 현 만주일대였기에...고구려가 있을 땅은 만주에 없었습니다.
선비는...고구려에 병합되기 전의 북부여를 의미하는 듯 하고... 고구려와 끝까지 싸운 선비들이...현 몽골과 만주일대의 연연족(燕)들일까 합니다. 고구려와 위나라(후대 오이구르)도... 이 연연족(후대 연나라)의 통치를 받았던 나라들입니다.
예맥각궁이..이 선비족들의 고유 특허격의 무기라니... 조선군들의 주요병기가 예맥각궁인 점을 봐도...조선(朝鮮)은...선비족들을 이름한 국명인듯 합니다. 중조(명,차이나)의 주 무기는...임란까지도"장창"이였습니다.
열도(일본)왜들과 동남아 왜국들은...양이들에게 받은 조총...과 검... 얘들은 각궁이 없었던 걸로 봐선...한반도인들의 속국였을 뿐...동족이라 보기는 좀 그런 애들입니다.
차이나의 차오(朝)자가...중원 서쪽의 "朝+나라"란 국명의 대륙조선(중조+이씨조선)이고... 그 고유영역이 원 발상지인 동쪽으로만 한정된 중세 선비(鮮卑)의 선(鮮)은...중원 동쪽 황해 연안과 현만주... 한반도와 몽골의 고유명칭이 아니였을까 합니다.
중원의 남쪽은 조국(朝國)=차오나라=차이나... 중원의 북쪽은...선비의 선(鮮)...
우리가 청나라(청구)라 부르던 동쪽 타탈리아 자체가...조선식 한자표기론...선(鮮)이 아니였을까 합니다. 만주와 한반도...중국 황해연안도 마찬가지고여...
재미있는 건... 선비족들도...여진&말갈과 마찬가지로...황제를 대인(大人)이라 칭했다네여... 바이킹족들의 "딘"신이며...몽고 퉁구스들의 하늘님 "탱(그리)"...한민족의 시조 단군의 "檀"...모두 일맥상통합니다.
유라시아 북부 전체가 고대엔 이 선비족들의 영역였었고... 그게 고조선의 후기 족속들이며...연연과 중원 연나라의 선조들이며...현 만주의 선양,집안, 천안(북경)을 성지로 하던... 동이 배달 구려족들이자...동부여족들일까 합니다.
서쪽(고죽국)출신의 고구려에게 병합당한 동예가...예맥각궁을 쓰던 선비족들로 보이고여...
중원은...선비족을 동호(東胡)의 일파라 했습니다. 그럼, 서호(西胡)는...고구려가 됩니다...고구려도 "호"라고 자주 불렀으니여...
고려의 고(高)자는...코라즘의 코"자와 같고... 그 코라즘을..호라즘이라 하니...동호는...동 고구려란 말도 됩니다.
여진의 진"도...중세식 조선한글 발음으론 "딘"이 될수 있으니... 여진의 진"은...딘"신을 믿는 바이킹족이란 말이자...단군(탱그리)를 섬기던 선비족이란 얘기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고구려의 주 종족이던 선비족의 직계 후손은...금나라와 후금(타탈리아)가 되는 것이고... 그 동쪽 성지(소도)에 살던 자치국 청국은...한반도 원주인들과 가장 가까운 혈통이라 예상해 봅니다.
대륙조선(중조=차이나)가 양이들에 서역을 다 빼앗끼고...남녘도 왜놈들에게 다 빼앗끼고... 시베리아와 카자흐스탄...몽골까지 러시아에 빼앗낀 청조와 연합해 위기를 모면해 보려던 것이 북경과 청도(산동반도)...상해와 남경...그리고 한반도로 이어지던...고대로부터의 동이 구려족 지역을 근간으로 하는 구한말의 대 양이 전쟁과..대 일본 전쟁엿을까 합니다.
그 연합체의 명칭이...조선(朝鮮)일까 예상하고...
이미 이 때는... 차이나(중조=이조)의 황제는 명목상의 명예직이 되고...청구(청국)황실이 실질적인 황제의 위치였을 거라 예상합니다.
밑의 기본 검색만으로 봐도
현 만주와 중원 북부는 선비족 후손 황조들 대대로의 영지였는데... 왜 우리 한반도인들은...자신들의 원주 조상들을 오랑케로 알고 있었을까요...?
일본이 역사왜곡 해서...?...일부... 인정합니다만...
한반도엔 그 연고권이 약했던 중조(차이나)출신 대한제국 이주민들의 기득권유지를 위해... 즉,상당수의 중원 이주족 출신인... 현 한반도인들의 바람에 의해
정작, 이 땅의 원 조상들을 오랑케로 몰았던 것일 수도 있으니...
구한말의 기인...강증산 도인이... 개벽의 시기에 처벌받을 최고의 죄목으로 칭했던 "환부역조(換父易祖)"의 중죄를... 우리 남조선인들이 저지르고 있는 것일지 모른단 걱정이 밀려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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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족 (민족) [鮮卑族, Hsianpei tzu]
출처: 브리태니커
전문용어사전
(병)Xianbei zu (웨)Hsianpei tzu.
중국의 고대민족.
선비족의 선조는 은대(殷代) 동호족(東胡族)의 한 갈래였다. 진·한 시대에 다싱안링 산맥[大興安嶺山脈] 일대에서 남쪽의 시라무룬 강[西剌木倫河] 유역으로 옮겨왔다. 일찍이 후한(後漢 : 25~220) 때 중국에 복속되었다. 흉노족이 서쪽으로 옮겨간 후 그 지역을 모두 차지했고, 고비 사막 북쪽(외몽골 지역)에 남아 있던 흉노족 10만여 호(戶)가 선비족 지배하로 편입되면서 세력이 점차 강성해졌다. 2세기 중엽 선비족의 우두머리 단석괴(檀石槐)가 선비족 각 부락에 의해 '대인'(大人)으로 추대되어, 우문(宇文)·모용(慕容)·탁발(拓跋)·단(段)·걸복(乞伏) 등의 부락군사연맹을 세웠다. 그리고 부락을 동(東)·중(中)·서(西)의 3부로 나누고 각 부마다 대인통령(大人統領)을 두었다. 후한은 사신을 보내 단석괴에게 인수(印綏 : 황제가 신하에게 내리는 신표용 도장과 그 끈)를 주고 왕으로 봉했다. 선비족은 유목을 생업으로 삼으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다. 선비족이 만든 '각단궁'(角端弓)은 고대에 유명한 무기였다. 단석괴가 죽은 후 선비족의 부락연맹이 해체되었다. 16국 시대에 선비족의 모용·걸복·우문·탁발 등의 부락이 모두 나라를 세운 적이 있었다. 특히 탁발부는 5세기에 북위(北魏) 왕조를 세워 중국 북부를 140여 년 동안이나 통치했고 또한 선비족의 한족화(漢族化)를 열심히 추진했다. 중국 내륙으로 옮겨온 선비족은 점차 농업을 생업으로 삼고 한족과 융합되었다.
마지막 한마디...
선비란 용어는...조선의 에리트층 전용 명칭이자...조선 통치 실세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는 계급의 전용어입니다.
비록 대륙조선의 전신인 티무르제국(호라즘,트란속사니아)이 한자를 잘 몰랐을 지라도 중원 고려를 정복하고선...모든 정식 기록에 한자를 사용했던 건 기정사실일진데...
정작, 그 사서를 쓰던 본인들인 선비들이...자신들의 호칭도 한자로 못 붙였단게 말이 될까요...? 일개 양이들과 미개족들의 고유명칭도 그때 그때 바로 지정을 해 줬으면서여...?
그냥 사(士)자로 썼다면... 왜 한반도의 우리는...사님~..이러질 않고...선비님~이란 용어는 왜 자꾸 썼던 걸까요...?
鮮卑(몽골발음 "쎈비")가... 조선 선비님들의 원래 한자표기이고 이걸 인정하다간 만주와 한반도가...원래 선비국이 였음이...
이 선비(鮮)와 중조(朝) 의 합성어가 조선(朝鮮=차오나라=차이나+센삐)였음이 들통날게 걱정되는 차이나(중조=대륙조선) 이주민들의 눈가림이라
강력히 의심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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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 참 좋습니다 백프로 이의 없습니다 인용해 온 글 도 아주 훌륭 합니다
격려 감사합니다...최선생님...ㅡ. .ㅡ
홍진영 선생님의 이번 글은 저의 소망을 반영하신 것이고, 애를 쓰신 모습이 역력합니다. (결론의 근거가 되는) 인용 부분의 출처를 밝히시는 것이 아무리 귀찮으시더라도 앞으로도 그렇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덧글에 시달리시고는, 출처를 밝히기 위해 애쓰시게 되셨나 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이런데 신경쓰다가 진영님 특유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에 기반한 이론전개방식에 해가 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조금 되기도 합니다. 진영님 글을 좋아하는 팬으로서 말씀 드리는데, 하여튼 글은 꾸준히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서정호 선생님...제가 홍진영 선생님을 괴롭혔나요? '이론' 전개를 자유분방한 상상력에 의존하여야 한다면, 그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여기서 '이론'은 무엇인가요? '역사학'에서 말하는 그 이론인가요? 그렇다면 근거나 출처를 반드시 밝혀야 합니다. 근거가 이 세상 어디에도 없고 오직 '자기 자신'이라고 한다면 누가 믿어 줍니까? 단순히 팬이라고해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말은 역사의 '진실'을 찾고자 하는 데 있어서는 문제가 있습니다. 재미나 흥미로만 역사를 연구하는 게 아닙니다. 저도 홍진영 선생님의 팬입니다.
예를 들면, 동일한 근거를 기초로 하여 연구를 해도 학자마다 그 결과나 결론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근거나 출처를 밝혀주면, 그 주장하는 결론의 타당성을 독자가 제3자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검토할 수 있습니다. 근거나 출처의 표시 없이 자기 주장만 하면 이게 곤란해집니다. "글을 쓰는 것은 내 마음이고 내 자유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왜? 여기 게시판에 글을 올리나요? 개인 소유의 노트에 기록하면 될 것을... 결국, 독자를 의식하고 글을 올리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지적을 하는 것입니다.
홍진영 선생님...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한테 시달리셨나요? 출처나 근거를 밝힌다고해서 자유분방한 상상이 방해된다면 역사를 논할 수 없습니다. 역사소설 작가라면 모를까요...근거를 전혀 찾을 수 없거나 희박한 경우에는 '가설'을 세워서 '검증' 절차를 거쳐야 객관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가설' 단계에서는 당연히 자유로운 상상이 필요합니다. 근거 없는 '가설'만 주장한다면 역사소설입니다. 재미있는 소설 한 편 읽으면 기분은 좋아집니다. 주관성을 낮추고 객관성을 높이는 첫 번째 작업이 바로 근거나 출처를 밝히는 것입니다. 제 의견에 동의하시는 분이 전혀 안계시나요?
네.많이 시달립니다...ㅡ. .ㅡ...물론,더 정확한 근거를 제시해서...더욱 설득력있는 말그대로 학설을 만들라시는 채칙질이신 건 잘 압니다.
그저 가볍게 일반인의 입장에서 제 가설을 한 번 내 놓는 수준으로 만족하려 하는데...자꾸 더 전문가를 만드시려는 좋으신 의도 땜에...가뜩이나 제 먹고사니즘도 못 해결하는 화상이...시간과 정력을 더 빼앗낄까 두렵기도 하고여...그러함에도 김선생님의 지도를 그대로 따라서... 여전히 학술적인 형식 차원에선 유치한 수준이겠지만...최대한 노력해서 글을 써 볼랍니다.
그러더래도 두려운 건...자꾸 마약같이 빠져 든다는 겁니다...하나의 가설을 내 놓으면...10개의 또다른 정황들이 등꼴을 때리는...마치 신들린 무당님들의 고통이랄까나...ㅡ. .ㅡ...꿈속에 언월도를 드신 선조님들이 나타나셔서 계시를 주는게 아닌...순전이 제 머릿속 망상 속에서 새로운 소설이 탄생하고...그 틀대로 정황들을 찾으면...기가 멕히게도 그 정황들이 일반적인 검색만으로도 나오니...관심 않 둘 수도 없고...스스로 피곤해 집답니다.
그래서 오늘도 마치,지 방구에 지가 놀라 흥분하듯...역사 학자님들이 귓구녕들이 멕혀 하품들을 하실 학문적으론 근거도 별로 없는 마구잡이 가설도 안 되는 수준의 글질을 하고 있답니다...경제적, 시간적인 여유가 되면...역사학과에 입문해 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요즘 대학들이 핵교 댕길 때 내신점수 꼬라비인 중늙은이도 받아 주실지는 의문이지만여...
네, 고맙습니다. 저도 직장에서 경험한 것입니다만...글쓰기와 말하기(업계에서는 프리젠테이션 등)가 서툴러서 손해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금도 별반 차이는 없습니다만, 평소에 저도 노력을 많이 합니다. 듣는이, 보는이의 입장을 고려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홍진영 선생님의 글들이 가볍게 지나가는 잡담이나 잡설이라고 생각하시지 마시고, 좀 더 객관성을 확보하고, 더 많은 독자에게 접근하는 형식을 바라는 것입니다. 학술적인 내용이 아니더라도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거창한 학설을 만들어보시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본 카페는 '학습처'이자 '연구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 선비란 단어가 한자가 없을까 황당했었는데 물어봐도 아무도 관심도 없고 심지어는 그게 왜 이상한건지 모르더군요. 이제야 '공식적인'글을 보니 속이 시원합니다. 그리고.. 홍선생님이 워낙에 이것저것 씨를 많이 뿌려놔서 요즘 여러 사이트에서 공명하는 글들을 종종 볼수 있습니다. 난봉꾼 아비한테 자식들 다 거둬 공부시키고 키워라 하면 도망갈테니까 살살 합시다. 버스처럼 많은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수단도 있고 오토바이처럼 냅다 먼저 갔다 왔다 하는 수단도 있는거 아닐까요?
김홍필님, 제 표현이 도발적이었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출처도 불분명하고 희박한 근거에 의지한 가설일뿐인 진영님의 글이라 하더라도 이 게시판에 올리고 여럿이 함께 고민할만한 가치는 충분하다고 봅니다. 일정한 틀을 갖추지 않았더라도 진영님의 통찰력은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도 남는 바가 있으며, 다들 그 폭넓고도 예리한 면에 반응을 하여 읽고 토론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사실, 진영님의 게시물들 중에서 일부는 덧글 하나 안달릴 정도로 괄시(?) 받은 것도 있구요. 아름답게 번뜩이는 바람에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글도 있죠. 틀을 갖추지 않았더라도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 글이라면 일단 여기에 올려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누가(이성계같은 역사적 인물이..) 이런 말을 했다더라.."하며 듣도보도 못했던 주장을 하면서 출처를 안밝히면 당연히 문제가 되겠지만, 진영님은 세계 각국의 역사와 현재의 상황 등을 통합하여 탐정이 추리하듯이 추적해 올라가는 방식이니까 사뭇 다르게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서정호 선생님, 의견 고맙습니다. 제가 오해하였나 봅니다. 제 의견에 공감하시거나 동의하시는 분이 전혀 안계시므로, 제가 틀렸다고 인정하겠습니다. 홍진영 선생님!!! 지금까지 괴롭혀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홍진영 선생님의 날카로운 '통찰력'을 무시하고 방해하였던 제가 부끄럽습니다. 앞으로도 세계 각국의 역사와 현재의 상황 등을 '통합'하여 역사의 '진실'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형식에 구애받지마시고 마음껏 자유분방하게 써 주십시요. 역사 추리소설이라도 좋습니다. 이제부터는 홍진영 선생님의 글에 그 어떠한 댓글도 쓰지 않겠습니다. 지금까지 무례하게 지적하고 말씀드린 점... 깊이 깊이 머리 숙여 사과드립니다.
김홍필님, 혹시 마음 상하시어 여기에 발길을 끊거나 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사려 깊은 타입이 아니다 보니, 본의 아니게 송곳부터 들이민 형국이 되었습니다. 저의 부주의한 말에 너무 마음 쓰지 마시고, 이전처럼 왕성한 활동으로 이곳의 활성화에 힘이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통계를 잘 못 내셨습니다...김선생님...김선생님 제안에 꼭 그럴 필요는 없다시는 회원님들 몇몇분 빼곤...아무 말씀들이 없으셨습니다...왜냐면...제가 김선생님의 제안을 받아 들이겠다고 한 말들 때문입니다...제가 받아들이겠다는데...굳이 김선생님 제안에 동조하실 이유들이 없으셨던 겁니다...그러니 통계상으론 1000여분 정도가 김선생님께 동의하신 겁니다.
저를 안탑깝게 봐 주시는 분들께선...지발 맞춤법은 고사하고..철자나 제대로 쓰라고들 안타까운 맘이 가뜩 단기신 쪽지들도 자주 주곤 하십니다...ㅡ. .ㅡ...제겐 너무도 과분한 주문이시지만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