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하시는 자를 향한 징계
히 12:1-13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히 12:1-13 / [하나님의 훈련] 이처럼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경기장에 둘러앉아 우리의 경기를 지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가 속도를 늦추거나 뒤로 물러설 수 있겠습니까? 이제는 다리에 달라붙어서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죄를 훌훌 털어 버리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정해 놓으신 이 특별한 경주에 인내를 가지고 달려갑시다. 2)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며 완성자인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십자가의 죽음 뒤에 올 기쁨을 아시고 그 십자가를 수치로 여기지 않고 거기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의 영예로운 자리에 앉아계십니다. 3) 만일 여러분이 지치거나 낙심케 되거든 죄인들의 무서운 만행을 참고 견디신 예수의 일을 생각하십시오. 4) 여러분이 죄나 유혹과 맞서서 싸우고는 있지만 아직 피 흘릴 정도로 심한 싸움을 치른 경험은 없지 않습니까? 5) 하나님께서 마치 자녀들에게 말씀하시듯이 여러분에게 격려의 말씀을 주신 것을 여러분은 벌써 다 잊어버렸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ㄱ) `내 아들아, 주께서 네게 징계를 내리실 때 너는 화를 내어서는 안 된다. 주께서 네 잘못을 책망하실 때 너는 좌절해서는 안 된다. (ㄱ. 70인역 잠3:11-12) 6) 주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것은 너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주께서 너를 채찍으로 때리시는 것은 네가 하나님의 참 자녀이기 때문이다.' 7) 하나님께서 내리는 시련을 참아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로서 당연히 자녀에게 하실 일을 하고 계십니다. 아버지로서 자기 자식을 단련시키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8) 만일 여러분이 잘못을 저질렀다면 자녀가 부모에게 꾸지람을 듣듯 하나님의 질책을 받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도 가족도 될 수 없습니다. 9) 비록 우리를 낳아 준 아버지가 우리를 꾸짖고 야단 치는 일이 있다 해도 우리는 그를 따르고 존경합니다. 그렇다고 하면 참되게 사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는 하나님의 시련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10) 우리를 낳아준 아버지는 우리의 앞날을 위해 그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극히 짧은 기간 동안만 우리를 훈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 그분의 거룩하심을 나누어 주려고 언제나 바르게 견책하시는 것입니다. 11) 무슨 벌이든 벌받을 때는 즐겁기보다는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가서는 그것이 유익한 결과를 낳아 믿음이나 성격이 다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12) 그러므로 여러분은 ㄴ) 느슨해진 주먹을 힘껏 쥐고 떨리는 무릎을 굳게 일으켜 세우십시오. (ㄴ. 70인역 신29:18) 13) 그리고 여러분이 걸어가기에 똑바르고 평평한 길을 열어 나가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을 뒤따라가는 이들이 비록 약하고 절름거리는 사람들일지라도 넘어지거나 부상 당하지 않고 오히려 튼튼하게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구약의 성도들(11장)을 믿음의 본으로 삼아 계속 신앙생활을 하라고 당부합니다. 당부의 핵심은 배교하지 말고, 신앙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자(1-3) 기자는 당시 원형 경기장에서 운동선수가 경주하는 것을 비유로 들어 바람직한 신앙의 태도를 설명합니다. 이 경주의 목표는 믿음을 시작하신 분(믿음의 주)이요, 믿음을 완성하신 분(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이십니다. 성도는 예수를 목표로 하고, 본서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신앙의 덕목인 인내로써(6:12-15; 10:36)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4-9)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이미 환난을 경험했고(10:32), 앞으로도 그들에겐 커다란 환난이 예상됩니다(12:4). 대대적인 핍박 속에서 그들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습니다(2:1; 3:12-14; 4:1; 11, 16; 6:4-6, 11; 10:23, 26, 35-36, 39). 그들은 점점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쪽으로 기우는 중입니다. 배교의 위험 앞에 놓인 그들에게 기자는 잠언 3장 11-12절을 인용하여 환난에 대한 새로운 관점, 곧 핍박과 고난이 지닌 신앙의 의미를 소개합니다. 하나님과 성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환난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징계로서, 징계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징계(훈계) 없이 아들은 제대로 자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이 아닌 자들의 심판은 세상 끝날까지 미루시지만(마 13:30), 아들들은 즉각 심판하십니다(고전 11:32). 징계는 아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아버지의 성품을 드러냅니다. 한 마디로 징계는 유익합니다. 징계받는 시간은 정금을 만드는 시간입니다.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10-13) 징계는 내가 실패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징계는 거룩함으로 가는 길입니다. 징계를 달게 받는 성도는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습니다. 기자는 운동경기의 비유를 계속 사용하여 위축되지 말고 계속 신앙의 경주를 하라고 권하고 ‘고침을 받게 하라’고 합니다(12-13).
적용: 당신은 하나님의 징계를 달게 받고 있습니까? 징계받고 있다면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하십시오.
현대인의 빗나간 심성 중 하나는 조급증입니다. 인생의 참된 가치는 기다림과 땀 흘림에 있습니다. 다음은 최근 미국 침례교 회보에 실린 짧은 글입니다. "한 걸음으로 너무 멀리 가려고 하지 말라. 너는 걸음을 계속해야 한다. 한마디 말로 네가 누구인가를 말하려 하지 말라. 너는 말을 계속해야 한다. 1인치의 성장으로 너무 크려고 하지 말라. 너는 계속 성장을 해야 한다. 하나의 행동으로 모든 것을 이루려고 하지 말라. 너는 계속 행동해야 한다.“
< 설 교 >
믿음의 경주
히브리서 12:1-13
지난 몇 달 동안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배들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아벨부터 시작해서, 에녹, 노아, 아브라함……그리고 지난 시간에,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믿음의 선배들을 살펴보면서, 무엇을 깨달으셨습니까? 아마도 가장 큰 깨달음이라고 하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를 다니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 다는 것을 배우셨을 겁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내일을 바라보며 소망 중에 현재의 고난을 이기며 살아가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이 믿음을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능력으로 나타내게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믿음이 능력으로 나타내게 할 수 있습니까?
첫째로는, 죄를 벗어 버리고, 경주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마라톤 선수들을 보시면요. 복장이 아주 간단합니다. 요즘은 시대가 너무 좋아서, 마라톤 선수의 운동화 한 켤레가 2억이니, 3억이니 합니다. 왜 이렇게 비싸냐면, 신어도 신은 것 같지 않게, 과학적으로, 가볍고, 튼튼하게 만들어서 그렇습니다. 만약에 마라톤 선수가, 옷을 여러 개 껴 입고 나왔다면, 아마 완주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너무 몸이 무겁고 힘들어서요.
마찬가지로 오늘 믿음의 경주를 하는 우리들을 향하여, 성경은, 벗어버리고, 경주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마라톤 선수처럼, 옷을 벗어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죄를 벗어 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바꿔 말하면, 죄를 많이 지고 있으면, 경주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 죄를 벗어 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회개 밖에 없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로지 회개 밖에 없습니다.
오늘도 이 회개에 대해서 집고 넘어가길 원합니다. 회개는요. "하나님 용서해주세요"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돌아 가는 말합니다. 과거에는 사단의 영역에서 살았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는 말합니다. 만약에 도박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도박을 완전히 끊기 전까지는 완전한 회개가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왜 그렇게 사람들이, 죄를 끊겠다고 하면서, 죄로 인해서 자주 넘어집니까? 그 이유는 우리 속에 죄성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회개는, 과거에 지었던 죄들을 미워하고, 수치스럽게 여겨 지게 될 때, 비로소 진정으로 회개한 상태로 보시면 됩니다.
과거에는 술 한 두 잔이 전혀 부끄럽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쳐다 보기도 싫은 거예요. 그럼 그 술에 관한 한 자유한 것입니다. 벗어 버린 거예요. 예전에는 모이기만, 남 험담하고, 욕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그런 모임이 싫은 거예요. 남 험담하고 그러면, 그 자리를 뜨고 싶어져요. 그러면, 그 부분 만큼은, 죄를 벗어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 하나, 죄라고 생각되어 지는 것을 벗어 버리다 보면, 얼마나 영혼이 가볍겠습니까?
오늘 본문 1절 다시 보세요. 어떤 죄를 벗어 버리라고 말씀하십니까?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 믿음의 경주를 하는데, 날 무겁게 만들고, 죄에서 빠져 나오고 싶어도, 또 그 죄에 얽매이고, 도 얽매여서, 결국, 달릴 수 없게 만드는, 죄들을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죄의 중독에서 빠져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믿음의 경주를 하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1896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제 1회 올림픽을 개최하게 되었을 때, 어느 무명의 한 병사의 아름다운 사명감을 기리기 위해서 마라톤이라는 경기 종목이 생겨났습니다. 이 병사는 전쟁터에서 승리의 기쁜 소식을 가지고 뛰었던 것입니다. 이 승리의 기쁜 소식을 왕에게 전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뛰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병사 못지 않은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그 기쁜 소식은, 죽어 마땅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보혈의 피의 공로로, 구원 받았다는 구원의 기쁜 소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주님께 보여 주기 위해서, 달려 가는 것입니다. 열심으로 믿음의 경주를 한 다음, 주님 품에 안겨, 영원토록 살 그날을 소망삼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어떻게 믿음이 능력으로 나타나게 할 수 있냐면, 주님을 바라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절에 "믿음에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삶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십니까? 바라보신다면, 얼마큼 주님을 바라보십니까? 주기철 목사님은, 석양에 붉게 물든 하늘만 바라보아도, 주님 가신 십자가의 길이라고 생각하며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하늘에 구름 한 점만 떠도, 저 구름 사이로 주님이 오실 것 같아, 기다리는 마음으로 주를 바라보았습니다.
미국에 남북 전쟁이 끝난 후, 두 병사가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두 병사는 고향에 돌아 온다는 기쁨에 발걸음을 재촉하며, 고향 언덕을 막 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의 두 눈에 들어온 건, 어렸을 때부터 열심히 다녔던, 언덕 위에 있는 작은 교회였습니다. 한 병사가 다른 병사에게 제안을 합니다. '교회에 잠시 들어가 감사 기도를 드리자' 고 말이죠. 하지만, 다른 병사는, 무슨 교회냐, 술이나 마시러 가자고 말합니다. 세월이 십 수년이 흘러, 술이나 마시러 가자고 한 병사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감옥에서 나누어 주는 신문을 펼쳐 들고, 이 사람은 놀라지 않을 수 가 없었습니다. 그날 그 사람이 신문에서 읽은 기사는, 미국의 22대 대통령 '클리브랜드' 가 당선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 클리브랜드는 십 수년전에 남북 전쟁에 나갔다가, 같이 고향으로 돌아온, 그 친구였습니다.
인생이 무엇을 바라보고 사느냐가 얼마나 중요한 지 모릅니다. 바라보는 대로, 인생이 펼쳐지게 되어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생명을 지켜주신 하나님이 너무 감사해서, 먼저 감사기도라도 드리고 싶어했던, 그 청년은 분명, 전쟁터에서도, 주님을 바라보았을 거예요.
여러분 주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주님을 닮을 수가 없습니다. 2절을 보세요. 예수님을 바라보면, 어떻게 됩니까? 온전케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 볼 때, 온전케 되는 것입니다. 사람 바라보지 마십시요. 사람에게서 무엇을 기대 하겠습니까? 내가 낳은 자식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요.
환경도 바라보지 마십시요. 잠시 잠깐이면, 이슬처럼, 안개처럼, 꿈처럼 사라지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나의 관심을 어디에 두고 사느냐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관심을 주님께 두고 사느냐, 아니면, 세상에 더 관심을 두고 사느냐? 주님을 바라보아야 생명이 있습니다.
1850년 1월 6일, 영국의 콜체스터 시는 심한 눈보라로 도시 전체가 마비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때 한 십대 소년은 그가 늘 다니던 교회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없이 가까이 있는 교회에 들어가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그 교회 담임목사님께서 출타하셨기 때문에 평신도 한 분이 목사님을 대신하여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설교한 성경 본문은 이사야 45장22절의 말씀이었습니다.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이때 이 소년은 여러 달 동안 마음의 곤고함과 죄에 대한 괴로움에 빠져있었습니다. 비록 소년은 3대째 목사 가정에서 자라서 교회와 예수에 대하여 잘 알고는 있었지만 구원의 확신은 가지고 있지 못하였습니다. 그날 설교를 맡은 그 설교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주님을 바라봅시다' 라는 말만, 반복해서 외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때 이 설교자는 한쪽 구석에 앉아있는 새 방문자를 바라 보며 말했습니다. "젊은이, 자네는 아주 피곤해 보이는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그 말을 들은 그 젊은 청년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 보았는데, 그 청년이 바로 후에 회심하여 위대한 설교자가 된 스펄젼 목사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 보기 원합니다. 거기에 우리들의 소망이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세번째로, 어떻게 믿음이 능력으로 나타내게 할 수 있냐면,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며, 하나님께 꾸지람을 받을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5절을 보시면, "징계 받을 때에, 가볍게 넘어가지 말고, 꾸지람을 받을 때 낙심하지 말라'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 하시는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8절을 보세요.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매들 드시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잔소리를 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우리에게서 하나님께서 원치 아니하는 모습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것을 고치시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떠한 일이 생기면,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일하시고 있다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가볍데 넘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냥 운이 나빠서 그래, 그냥 우연히 일어난 거야 하지 마시고, 혹시 이런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내게 무엇을 말씀하기 원하시는지를, 하나님께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히브리 기자는, 이렇게 징계를 받을 때,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쉬운 한국어 성경은, '이성을 잃어 버리지 말라' 라고 번역했습니다. 내게 좋지 않은 일이 닥칠 때, 이성을 잃어 버리지 말고, 정신을 차리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간증하기를, 자기가 거의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을 무척 원망했다는 거예요. 이성을 잃어 버린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접니까? 매일 같이 하나님께 따졌다고 합니다. 왜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이면 접니까? 제가 주일성수를 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십일조를 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뭐 나쁜 짓을 했습니까? 매일 같이 하나님께 따지고 있는데,
하루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길, '나는 사랑하는 독자 아들도 십자가에 내 주었는데, 너는 나를 사랑하냐? 네가 나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그건 내가 준 풍요로움 때문이지, 내가 너에게서 건강을 빼앗았을 때도, 너는 여전히 나를 사랑할 수가 있느냐' 라는 음성을 듣고는 정신을 차렸다고 합니다.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도 이런 사람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하박국 1:13절을 보시면, 하박국이 하나님께 항의 하듯 따집니다. "악인들이 의로운 사람을 죽이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잠잠하십니까?" 다른 말로 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왜 고난을 주십니까?' 하며 따진 것입니다. 오늘 말씀처럼, 이성을 잃어버리고 대들었습니다.
여러분,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오늘 본문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다같이 11-13절을 읽겠습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오늘 징계를 받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하나님께서 주시는 음성입니다. 징계를 받을 당시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잘 통과한 자에게는 평강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내가 알지 못하는 억울한 일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내가 감당하기 힘든, 어려운 일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이 몰라서 침묵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요. 이런 일들 가운데, 더욱 믿음으로 서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사람들은, 억울하다고,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자살하고, 힘들다고, 인생을 포기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더욱 사랑하시기에 이런 이들을 허락하시는 구나, 깨달으시고, 이 징계가 훗날에는 평강과 축복으로 바꾸어지는 역사가 일어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믿음의 경주자로 부르셔서,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경주 할 수 있도록 견고한 믿음을 허락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얘기치 못한 일들을 만날 때도 있고, 남에게 말 못할 일들을 겪을 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며, 이성을 잃어버리는 죄를 범하지 않게 하시고, 낙심하지 말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우리에게 당한 경주를 끝까지 경주하며 승리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경주하기 원합니다.
혹시 우리 삶 가운데, 징계가 온다 하여도, 낙심하지 말고,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을 바라보자
히브리서 12:1-13
달리기는 로마 제국에서 사는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매우 익숙한 운동경기였습니다. 로마는 각 지방마다 경기장을 세워 운동경기를 장려하곤 했는데, 모든 운동경기의 꽃은 마라톤이었습니다. 말로 표현 못할 고통의 순간들을 인내하고 우승한 마라토너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았습니다. 이런 마라토너의 모습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비유하기에 적절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저자들은 종종 그리스도인들을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얻기 위해 달리는 달리기 선수로 묘사하곤 했습니다(고전 9:24-27; 갈 2:2; 빌 2:16; 골 1:29, 2:1; 딤전 6:12; 행 20:24) 우리는 그 중에서 사도 바울이 순교의 시련을 내다보면서 한 유명한 말씀을 기억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고, 내가 달려가야 할 길도 끝냈으며, 믿음도 지켰습니다. 이제 내게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 면류관은 하나님과 함께하며 의롭게 살았다는 표시로 주시는 상입니다. 주님이 바로 정의의 재판관이시기 때문에 마지막 그 날에 주님은 내게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또한 나뿐만 아니라 주님이 다시 오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딤후 4:7-8) 이 얼마나 감동적인 확신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 역시 히브리 성도들의 믿음을 격려하기 위해 그들을 달리기 경주자에 비유합니다. 세상의 경주에서는 기록이 중요하지만, 신앙의 경주에서는 완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이 신앙의 경주를 완주할 수 있도록 격려합니다.
히브리 성도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달리기 경주자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천성을 향해 달려가는 신앙의 경주자들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신앙의 경주를 마쳐야 합니다. 경주의 결승점을 통과하는 순간 우리 모두에게는 영광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가 히브리 성도들에게 주었던 격려의 말씀은 곧 우리들에게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경주를 다 마치고 영광의 면류관을 얻을 수 있을까요?
첫째, 우리의 귀는 응원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1a).
우리의 귀는 어디에 예민할까요? 소음에 예민합니다. 특히 나에 대해서 조롱하거나 비난하는 말에 예민합니다. 히브리 성도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당했습니다(10: 33). 어떤 사람들은 조롱을 받기도 했습니다(11:36). 어제 학생 소감 모임 메시지에서 재원 목자님은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었을 때, 일주일 동안 분노하며 저주하는 말을 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재원 목자가 그런 말을 듣고도 일주일 밖에 분노하지 않았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이런 말을 듣고 평생을 분노하는 사람도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때로는 모든 사람의 칭찬을 받으리라는 기대도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을 하면서 옛날 보다는 좀 더 착하고, 좀 더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부모님부터 못 마땅해 하는 경험을 자주 합니다. 좀 더 착하고, 좀 더 바르게 살겠다는데도 부모님이나 친구들, 친척들로부터 비난의 말을 듣습니다. 사랑과 이해, 신뢰와 격려의 말을 기대했던 그들로부터 예상치 않는 말을 들을 때 그 실망감과 낙심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외로움과 쓸쓸함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영적인 귀를 열면 들려오는 소리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 소리는 바로 히 11장에서 언급했던 수많은 믿음의 증인들이 우리를 응원하는 소리입니다. 그 소리는 이 세상에서 들려오는 모든 불신과 비난, 조롱과 비하의 말들을 능히 덮고 남을 만큼 분명하고 우렁차게 들려오는 응원의 소리입니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불신과 비난, 조롱과 비하의 말들은 대체로 근거가 없는 말들입니다. 재원 목자를 비난했던 말들은 재원 목자의 사정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뒷 담화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증인들의 말은 가장 확실하고 근거가 있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다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달려본 증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우리들의 경주를 즐기러 온 구경꾼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증인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았던 그들의 삶이,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치러야 했던 피와 땀과 눈물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증거하는 증인들입니다. 그들이 지금 우리들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가청범위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의 귀가 들을 수 있는 20Hz에서 2만Hz 사이를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귀는 20세가 넘으면서부터 노화가 시작되어 십대들이 들을 수 있는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다고 합니다. 이런 원리를 이용해서 만든 것이 ‘모스키토 버즈(mosquito buzz)’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음역의 소리를 만드는 기계입니다. 소리가 너무 높아 대부분의 성인들은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10대들은 이 소리를 듣습니다. 10대들이 떼지어 서성거리를 것을 싫어하는 가게 주인들이 이 기계를 구입해서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 기계를 작동시키면 십대들이 짜증나서 가게에 오래 머물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가신 십대들을 힘들이지 않고 쫓아내는 데 제격입니다.
사탄은 우리 신앙인의 경주에 언제나 ‘모스키토 버즈’를 작동시키는 것 같습니다. 우리를 짜증나게 하는 소리, 우리를 화나고 낙심하게 하는 소리, 우리로 하여금 절망하게 하는 소리를 들려주어 우리가 신앙의 경주에서 ‘아웃’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그 때마다 우리 귀의 주파수를 바꾸어야 합니다. ‘모스키토 버즈’를 듣고 짜증만 내고 있을 것이 아니라, 다른 주파수에서 들려오는 믿음의 증인들의 우레와 같은 격려와 응원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신앙의 경주를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우리의 몸은 없애 버리고 벗어 버려야 합니다(1b).
달리기 경주에 참가한 경주자에게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달리기를 시작하기 전에 몸에 있는 모든 것을 벗어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혹 넥타이를 매고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고 달리기를 하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무슨 생각이 들까요? 모피 코트에, 출렁거리는 악세서리를 달고, 하이힐을 신고 출발선에 선 사람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까요? ‘저 사람 미친 거 아냐?’라고 모두들 수근 거릴 것입니다. 달리기에 나선 사람은 달리기에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이 아무리 값지고 비싼 것이라도 벗어 버려야 합니다. 달리는 사람은 자기의 지위나 신분을 나타낼 그 어떤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신앙의 경주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달리기에 나선 사람이 세상 명예나 영광의 모자, 학벌이나 스펙 등의 악세서리, 권력의 외투, 가식의 구두 등을 입고 출발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신앙의 달리기를 방해하는 것들일 뿐입니다. 이런 것들을 벗어 버려야 신앙의 달리기를 열심히 달릴 수 있습니다. 벌거벗은 몸으로,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 아무런 거리낌 없는 단독자로 서야 합니다.
신앙의 경주에서 우리를 무겁게 하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체중’입니다. 경주자가 체중을 줄이지 않고는 완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체중을 줄이지 않고 경주에 참가한 사람은 자기 체중의 무게에 눌려 스스로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신앙의 경주에서도 ‘비만’은 심각한 방해물입니다. 영적 비만은 언제나 심각한 경주의 방해물입니다. 신명기 31장 20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 곧 그들의 조상에게 약속한 땅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들은 배불리 먹고 살이 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다른 신들에게 마음을 돌려 그들을 섬기며 나를 버리고 내 언약을 어길 것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 비만을 경고합니다. 영적 비만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자신의 것으로 남용하는데서 옵니다. 영적 비만은 신앙의 경주를 귀찮게 여기도록 만들어 결국은 이 땅의 것들에만 만족하는 우상숭배에 빠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경주자는 늘 영적 다이어트에 힘써야 합니다. 적정 체중을 유지하고자 자신을 영적으로 단련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기도와 말씀, 교제와 실천으로 날마다 지방을 빼내야 합니다. 신앙의 거품을 제거하고 단단한 근육질로 만들어야 합니다.
신앙의 경주자가 벗어 버려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얽매이기 쉬운 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란 많은 죄들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히 3:13절에서 언급한 ‘우리를 속여 마음을 완고하게 만드는 죄’를 가리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을 때, 그들을 속여 마음을 완고하게 만들었던 그 죄입니다. 이 죄는 히브리 성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얽매이기 쉬운 죄입니다. 특히 약속이 쉽게 성취되지 않거나, 애매하게 고난을 받을 때, 그리고 계획했던 일들이 틀어질 때 우리를 속여,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하게 하고, 하나님께 대해 쓴 뿌리를 품어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드는 그 죄입니다. 이 죄에 얽매이면 신앙의 경주 자체가 힘겨워 집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선진들이 그랬던 것처럼, ‘믿음으로’ 이 죄를 벗어버리라고 권면합니다. 그래야 신앙의 경주를 힘써 달릴 수 있습니다.
셋째, 우리의 눈은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2).
히브리서 기자는 11장에서 수많은 믿음의 증인들을 언급했지만, 믿음의 증인들 중의 증인인 한 분을 들라면 역시 예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그 자신의 온 삶으로 믿음이 무엇인가를 가장 적절하게 보여 주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참아 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었으며, 십자가 위에서 조차도 그 믿음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시작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믿음을 온전히 이루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믿음의 ‘저자’(the author)이시며, ‘완성자’(perfector)이십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출발부터 그 완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완전함에 이르셨습니다. 이제 모든 신앙의 경주자들은 믿음의 증인들 중의 증인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믿음의 시작이며, 또 믿음을 완전하게 하시는 주님만을 바라봅시다.”
그런데 우리의 시선은 자주 쉽게 흩어집니다. 신앙의 길에서 문제가 생기면 우리의 눈은 그 문제에 집중하게 됩니다. 환경이 어려워지면 그곳에서 우리의 눈을 떼기 어렵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조그만 변화에서 내 시선은 흔들립니다. 경주자에게 시선이 흩어진다는 것은 매우 치명적인 일입니다. 그것은 곧 목표의 상실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과 다리는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흩어지면 우리의 경주는 갈팡질팡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주는 매우 지루하고 힘겨운 경주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경주자에게 있어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시키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목표를 분명히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기만 하면 우리의 몸과 다리는 자연스럽게 그곳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눈을 예수님께 고정하기만 하면, 한 번 시작된 우리의 믿음은 반드시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넷째,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3-13). 3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이 그를 미워해서 악한 일을 할 때에도 묵묵히 참으셨습니다. 지칠 때라도 낙심하지 말고 예수님의 본을 따르기 바랍니다.”
달리는 동안 경주자의 마음에는 온갖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마라톤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동감할 것입니다. 달리기를 출발할 때는 그저 신이 납니다. 공기도 상쾌하고 발걸음도 가볍습니다. 엔돌핀이 팍팍 솟아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달리다 보면 숨이 차고, 다리가 아프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생각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왜 이렇게 힘들지. 숨차 죽겠네. 내가 왜 이렇게 힘든 달리기를 한다고 나섰지. 미쳤지 미쳤어. 그만 둘까? 아니야, 사람들이 비웃을 거야. 계속 달릴까? 힘들어 죽겠네. 얼마나 남았지? 완주 할 수는 있을까? 저 사람들은 하나도 힘들어 보이지 않네. 나만 힘든가? 그동안 살 좀 빼고 연습 좀 많이 해 둘걸….” 오만 잡생각이 듭니다. 힘든 생각이 이기면 달리기를 포기하는 것이고, 힘든 생각을 극복하면 완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경주도 비슷합니다. 생각이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신앙의 경주에서 어려움을 당할 때 그러합니다. 히브리 성도들이 지금 그런 상태에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4-11절에서 히브리 성도들이 지금 힘든 신앙의 경주에서 무슨 생각을 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제일 먼저, 그들은 자신들이 받는 고난을 아버지의 훈계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들이 받는 고난이, 자신들의 죄에 대한 벌이라든가, 애매한 고난이라든가, 악한 사람들의 모함이라든가 생각하지 말고, 사랑하는 아버지가 아들을 훈련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훈련을 받으면 ‘아, 나는 사생아가 아니고 하나님의 참 아들, 딸이구나’라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고난을 당할 때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나? 하나님이 나한테 왜 이러시지? 그러면 그렇지 하나님이 나한테 복을 주실 리가 있겠어?….” 이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들을 물리치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훈련을 주시는 구나’라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이 훈련하시는 목적을 생각해야 합니다. 10절을 보면, 이 땅에서의 아버지는 그들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자식을 벌합니다. 즉 육신의 아버지는 때로는 자기 욕심이나 감정에 따라 자식을 벌합니다. 요즘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처럼 자식을 체벌로 죽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거룩하심을 닮게 하기 위해 훈련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훈련은 받을 때는 즐거움이 없고 고통스럽기까지 하지만, 이 훈련을 받은 후에는 ‘의와 평강의 열매’를 얻게 됩니다(11).
그래서 하나님의 훈련은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경주에서 고난을 받을 때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훈련은 좋은 것이여!”
하나님의 훈련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거룩함을 주고,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의 경주에서 피곤하고 지칠 때마다, 다시 일어나 경주를 계속해야 합니다(12).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저는 다리를 고쳐 주셔서 힘차게 신앙의 경주를 하게 하실 것입니다(13).
장거리 달리기에서 마음의 생각은 기권과 완주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신앙의 달리기에서도 마음의 생각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우리가 힘든 생각, 회의적인 생각, 확신 없는 마음으로는 달리기를 계속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이 그를 미워해서 악한 일을 할 때에도 묵묵히 참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본을 따르면 우리도 참을 수 있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죽을 것 같은 시간을 참고 인내하면 한결 숨쉬기가 편해지고, 더 나아가 달리기의 희열을 맛볼 수 있는 때도 옵니다. 힘들기만 하면 누가 달리기를 하겠습니까?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힘들긴 해도 그 후에는 중독될 만큼 희열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달리기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힘들 때마다 예수님을 생각하며 인내하면 하나님께서 또한 좋은 시간도 주실 줄 믿습니다.
이제 설 연휴를 맞아 우리는 가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특히 불신 가정으로 돌아가시는 분들은 오늘 나눈 네 가지를 꼭 기억합시다. 귀를 열어 응원 소리를 들읍시다. 방해 되는 것들을 벗어 버립시다.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합시다. 예수님을 생각하며 참읍시다.
히12장 1~13절
찬송가 342장 ‘너 시험을 당해’ / 작성: 이성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11장 말씀을 통해, 믿음의 선진(先進)들은 어떤 삶을 살았는지 확인했습니다. 믿음으로 산 어떤 이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겨졌으며, 어떤 이는 구원의 방주를 만들어 새 인류의 시작이 되었으며, 어떤 이는 믿음의 조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심한 고문을 받기도 했으며, 조롱과 채찍질 뿐만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고, 돌에 맞고, 톱으로 켜는 것과 칼에 찔려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이 땅에서 고통을 당했으나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더 좋은 것, 즉 영생이 상으로 주어졌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믿음의 선진(先進)들이 살아간 그 모습대로 우리 또한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1절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이러므로'는 구약의 믿음의 선진(先進)들이 이처럼 살았으므로 우리에게 '증인'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이 증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믿음으로 살았던 그 증인들이 구름 같이 둘러싸고 우리들을 지켜본다고 합니다. 마치 올림픽 스타디움 안에서 경주하고 있는 선수들을 관중들이 바라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왜 증인들이 우리들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믿음의 길을 선택하고 걸어갔던 믿음의 선진(先進)들이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 또한 자신들처럼 믿음의 길을 선택하고 걸어가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가 신앙의 여정을 믿음의 경주로 묘사하고 있다는 데 주목해야 합니다. ‘경주’로 번역된 헬라어 ‘아곤’은 ‘싸움’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투쟁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가만히 있어서는 얻을 수 없는 것임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즉 믿음의 길은 ‘싸움’이며 ‘투쟁’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 때만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 무엇과 싸움이며 투쟁이겠습니까?
믿음의 선진(先進)들은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기 위해 싸우고 또 투쟁했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삶으로 믿음의 경주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현재를 살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믿음의 경주를 하라고 촉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경주하는 자들입니다. 그 경주는 영생을 얻기 위한 경주가 아니라 영생을 얻은 자만이 할 수 있는 경주이며, 그 경주는 상을 받기 위한 경주입니다. 고전 9:24-25절입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믿는 자들은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만이 운동장에서 상을 받기 위해 경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의 경주를 통해 나의 믿음이 참된 믿음, 바른 믿음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7:21절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렇다면 믿음의 경주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어떻게 해야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그 방법을 2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우리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한 눈으로는 현실을 직시하고 또 한눈으로는 과거와 미래를 꿰뚤어 보면서 은혜의 사슬에 메여 사는 것입니다. 나의 가족, 가장 작은 이를 사랑하므로 그들 속에 계시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이 인생의 모델입니다.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기쁨, 즉 영원한 생명을 위해 십자가의 고통과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며 산다면, 우리 또한 우리 앞에 있는 기쁨, 즉 영원한 생명을 위해 이 땅에서 당하는 고통과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 징계가 주어진다고 말씀합니다. 5~6절입니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이 말씀 때문에 시험에 드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지금 고난당하고 시련 가운데 있는 분들이 내가 잘못해서 징계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내 가족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내 가족 중 누군가가 사고나 병에 걸려 고통당하고 있거나, 시험을 볼 때마다 불합격 통지를 받거나, 계획하고 실행하는 일들이 안풀려 시련을 겪고 있거나, 억울하게 누명을 써 당하지 않아도 될 어려움을 수개월 동안 당하고 있을 때, 이 모든 고난과 시련이 다 내 잘못 때문에 받는 징계는 아닌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모든 고난과 고통이 다 잘못으로 인한 징계는 아닙니다.
만일 모든 고난과 고통이 잘못으로 인한 징계라면, 의인의 고난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잘못해서 고통을 당하셨습니까? 그 제자들이 징계를 받아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까? 사도바울이 세 차례에 걸친 전도여행 중 당한 고난이 죄로 인한 것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잘못으로 인해 징계를 받든, 의로운 일을 하다가 고난을 당하든 모두 유익하다는 사실입니다.
잘못 때문에 징계를 받았다면, 그 길에 돌이켜 주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돌아서면 됩니다. 마치 탕자가 허랑방탕한 삶을 사는데도 형통했더라면 탕자는 절대로 아버지께 돌아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의로운 일을 하다가 고난을 당했다면, 인내하는 그에게 합당한 상이 기다릴 것이기에 이 또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영육이 건강한 사람은 고난과 시련을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고, 전진을 위한 도약의 발판으로 삼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세상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은 건강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설사 억울한 일을 당하여 고난과 시련을 당할지라도 원망과 불평은 그 문제를 해결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면교사나 진면교사로 삼아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로 삼는다면 어떤 고난과 시련도 자신에게는 유익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잘못으로 인한 징계를 받을지라도 그 징계가 유익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로 첫째, 징계는 자녀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답게 그에 걸맞은 믿음의 경주로 믿음의 선진들이 선택하고 걸어간 그 길을 우리도 따라 가십시다.
기도
사랑의 주님, 믿음의 선진들이 걸어간 그 길을 우리도 걸어갈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한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또 다른 눈으로 세상의 달콤한 유혹에 빠져 곁눈질 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를 되돌아보게 해 주옵소서. 혹시라도 믿음의 경주에서 이탈하여 징계를 받고 있다면 돌이킬 수 있는 결단과 용기를 주시고, 믿음의 경주를 하다가 의로운 고난과 시련에 직면해 있다면 하늘의 상을 바라보며 인내하게 해 주옵소서.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음을 오늘도 기억하며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마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께서 징계를 주신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2. 의로운 일로 인해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3.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과 시련을 반면교사와 진면교사로 삼은 적이 있습니까?
4. 믿음의 경주를 위해, 오늘 나는 어떤 실천을 하고 있습니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히 12:1-13 / 조동호 목사
히브리서 12장 1-5절까지는 그리스도를 모델로 한 경주에 관한 권면의 글입니다.
1절에서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란 11장에서 소개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수동적인 구경꾼으로서가 아니라 능동적인 참여자로서 진리를 고백하고 진리를 확증하고 진리를 위해서 목숨까지 바친 순교자들입니다. 그들은 약속의 실체를 받지 못했지만 삶 속에서 약속의 실체를 기다리며 증언한 자들입니다. 여기서 “약속의 실체를 받지 못했지만”이란 뜻은 믿음의 조상들이 가나안 땅을 약속받았지만, 그곳 가나안 땅은 그림자와 모형일 뿐이고, 장차올 더 좋은 땅, 가나안 땅의 실체인 하늘 가나안 땅, 곧 영원한 나라의 땅을 아직 받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11장의 믿음의 조상들은 우리가 다 그 나라의 땅을 상속받기 위해서 동참할 때까지, 주님의 재림의 날까지. 그 땅을 멀리서 바라보고 기뻐하는 자들입니다.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는 경주에 나가 달리는 자가 경주하는 데 방해가 되는 무거운 짐이나 거추장스런 것들을 말합니다. 고대 헬라인들이 시합 중에 옷을 벗고 벌거벗은 채 경기를 했던 관습에서 나온 말입니다. 믿음의 경주를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거추장스런 죄를 벗어버리자는 것입니다.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는 먼 거리를 달리는 마라토너처럼 인내를 통해서 인내와 함께 낙오하지 말고, 끝까지 완주하자는 것입니다.
2절에서는 또 다시 예수님을 본보기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11장에서는 구름떼같이 수많은 증인들을 내세웠는데, 12장 2-3절에서는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는 성도의 믿음이 예수님을 믿는 데서 시작되고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시키고 지속적으로 그분을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 속에 있는 예수님을 믿는데서 시작되고,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이뿐 아니라, 예수님은 믿음의 사람들의 모범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십자가의 수치와 고난과 죽음을 장차 받아 누리게 될 영광을 위해서 달게 받았던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십자가를 지신 후에 하나님의 우편보좌에 앉는 보상을 받으셨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로마서 8장 17절에서,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다.”고 하셨고, 빌립보서 1장 29절에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요한은 계시록 3장 21절에서,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하지 말아야할 것 가운데 한 가지가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능력이 많으시고, 권세가 많으시며, 흑암을 빛으로, 혼돈을 질서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실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이시니까, 아무런 부족함이나 어려움이나 시련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 물론 지금은 능력의 주요, 심판의 주님이시며, 하나님의 우편보좌의 권세를 가진 분이시지만, 그분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는 우리와 동일한 육체를 가지시고 우리와 동일한 고통들을 경험하셨으며, 사람들로부터 배신당하시고, 배척당하셨으며,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시고 하나님의 우편보좌에 앉게 하신 것은 그분이 아버지 하나님의 소중한 뜻을 받들어 그 과업을 완수하시기 위해서 오랫동안 인내하며 견디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예수님에 비교되는 인물이 제우스의 인간아들 헤라클레스입니다. 헤라클레스가 누구입니까? 그를 힘센 장사쯤으로 아셨다면, 제대로 아신 게 아닙니다. 헤라클레스라는 이름은 ‘알케이데스’가 자신에게 운명으로 부과된 극한의 시련과 역경을 다 이긴 후에 얻게 된 이름입니다.
‘헤라클레스’는 ‘헤라의 영광’이란 뜻입니다. 제우스의 부인 헤라가 운명으로 부여한 모진 고초를 극복한 다음에 얻은 이름, 그 이름이 바로 헤라클레스입니다. 그의 영웅성이 ‘힘’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가 영웅의 반열에 오른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그는 자신에게 부과된 가엾은 운명과의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싸움을 하되,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했고, 옳은 가치와 정의를 위해서 했습니다.
둘째, 그는 지혜의 신 아테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신의 도움 없이 혼자의 힘으로 영웅의 반열에 오른 게 아닙니다.
셋째, 신은 고난을 극복할 방법을 항상 예비했고, 헤라클레스는 그 방법을 찾아 기어이 난관을 극복했습니다. 신은 앞문을 닫으면, 반드시 뒷문을 열어두십니다. 헤라클레스는 그 사실을 믿었습니다. 신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련을 주십니다. 시련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들고, 영웅이 되게 하여 영광을 누리게 합니다.
넷째, 헤라클레스는 최후까지 신 앞에서 겸손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그를 그토록 괴롭혔던 헤라까지도 박수를 보내며, 자신의 딸까지 주어 부인을 삼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헤라의 영광’이란 이름까지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 그를 독일의 시인 쉴러는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용감한 헤라클레스는 끝없이 싸우며 괴로운 가시밭길을 걸었다.... 헤라의 증오는 지상의 모든 고뇌를, 지상의 모든 수고를 그에게 지웠으나, 운명의 생일로부터 저 장렬한 최후의 날까지 그는 이 수고를 훌륭하게 참아내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가장 소중한 믿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신 앞에서 겸손할 줄 아는 인내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성도들을 헤라클레스와 같은 영웅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예수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닥친 어려움들로 인해서 풀이 죽고 연약해져 심신이 괴로울 때, 그때 고난을 참고 이기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낙심하여 지쳐 버리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송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보라’>
히브리서 12장 6-13절까지는 훈련과 인내에 관한 권면의 글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훈련시키듯이, 하나님도 사랑하는 자녀들을 훈련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 훈련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꾸지람을 듣더라도 낙심하지 말며, 그 훈련을 잘 참아 내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훈련하지 않고 방치한다면 그가 어떻게 사랑받는 자녀이겠습니까? 자녀가 마땅히 받아야 할 훈련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생아지, 참 자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훈련시키는 육신의 부모도 공경해야하는데, 하물며 천지대군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며 훈련을 잘 참고이기는 것이 더더욱 당연하지 않겠냐고 말합니다. 더욱이 하나님 아버지의 훈련은 우리를 당신의 거룩함에 참여케 하여 유익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모든 훈련이 다 그렀듯이, 받을 당시에는 괴롭지만, 받고나면 고생한 보람이 있고,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훈련받지 못해 시들부들한 사람처럼, 나른한 손과 힘 빠진 무릎의 사람이 되지 말고, 훈련을 잘 마쳐서 꼿꼿하고 똑바로 걷는 씩씩한 용사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북풍이 바이킹을 만들었다’는 격언이 있듯이, 훈련이 없으면 발전이 없습니다. 바울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시련과 연단을 받도록 허락하시고, 그 과정을 통해서 성장하고 발전하도록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엄격히 말해서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시험과 시련을 주시지 않고, 그들이 당하는 시험과 시련을 허락하실 뿐입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의 시험과 시련이 자기 자신의 문제나 주변 환경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시험과 시련을 막아주시고, 피할 길을 주시지 않고, 허락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표를 정해서 가는 길에 산이 나타나면 산을 넘어야 하고, 강이 나타나면 강을 건너야 합니다. 바다가 나타난다면, 바다도 건너야 합니다. 하늘이 가로막는다면, 하늘이라도 건너야 합니다. 그래야 목표한 지점에 도달할 수가 있습니다. 북풍이 바이킹을 만들었듯이, 산과 강과 바다와 하늘이라는 장애물들은 인간들에게 배도 만들게 하고, 자동차도 만들게 하고, 비행기도 만들게 하였습니다. 시련이 인간에게 기술과학문명을 가져다준 것입니다. 시련이 자주 사람을 유익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이미 알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시련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련과 연단을 받도록 허락하시는 이유가 자녀들인 우리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받고 있는 시련과 연단이 물질에 관한 것이든, 건강에 관한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짧은 시련과 고통을 달게 받고, 영원한 영광을 얻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참고 인내하면 반드시 영광을 얻게 된다고 말합니다.
유명한 목회자들일수록 자주 하나님을 믿으면 시련은 사라지고 축복만 있는 것처럼 설교하는데 사람들은 그런 아편설교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칼 마르크스(1818-1883)가 종교를 억울한 인민의 한숨이요 아편이라고 비판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축복만을 선한 것으로 여기고, 결과만을 가지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공리주의나 실용주의적 설교들은 꿀처럼 달지 모르지만, 사람들을 쉽게 중독에 빠지게 하고, 사람들을 병들게 하기 때문에 아편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설교를 힘들고 지칠 때 한방 맞는 진통제나 피로회복제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서 66권은 고생 후에 오는 더 좋은 복락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래서 신실한 믿음과 인내를 강조합니다. 성서가 물질축복을 마치 최고의 선인 것처럼 꾸미지 않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대부분의 축복은 시련을 이긴 후에 얻게 되는 복락을 말합니다. 고난을 이기고 누리는 축복을 말합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한다(롬 8:17)고 말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들도 고난과 시련을 당하고 있고, 매일의 십자가를 지고 있습니다. 성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절망을 경험합니다. 좌절을 겪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실패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실패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반드시 승리하도록 예정되어졌고, 운명 지어져 있습니다. 성도들의 운명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하는 것입니다(고전 15:57). 하나님께서 그렇게 약속하셨고, 또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승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운명입니다. 그렇게 예정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알고 계시기 때문에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본보기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후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우편보좌에 앉은 사실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승리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분을 신실하게 따르는 신자들도 줄줄이 승리의 열매들이 될 것입니다. 성서는 우리 성도들이 ‘최후의 승자,’ ‘영원한 승자’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월계관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것이 운명입니다.
왜 영적 성장이 둔화되는가?
히브리서 12:1-13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갖가지 크고 작은 죄들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저질렀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에는 가책이 있었지만 어떤 죄를 반복적으로 범하면 별로 가책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생에 마귀가 개입하여 나를 종으로 삼으려는 처음 단계인 점을 알았을 때 비로소 정신이 들어 구원의 필요성을 실감하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 성도는 이제 옛 생활과 다른 새 삶을 영위해야 했는데 그 삶이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구원받기 이전의 체질을 바꾸는 데 적극적이지 못한 채 습관적으로 교회만 다녔기 때문입니다.
그가 영적 침체에 빠진 첫 번째 원인은 매일 먹어야 하는 말씀을 먹지 않았으며, 또 기도로 주님과 교제해야 했는데 그 일을 소홀히 했기에 마귀에게 틈을 주었던 것입니다. 몸에 바이러스가 침투하면 사람이 병을 얻는 것과 같습니다.
영적 침체는 영적 병입니다. 세상 삶이 바쁘다고 해서 영적 의무를 소홀히 하게 되면 그는 곧 실족하고 믿음을 잃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하나님께서 그를 길에다 버리십니다. 성경 말씀을 읽을 때 자기 지성과 믿음으로 읽었던 진리를 붙잡을 수 없으면 그가 쭉정이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귀가 그를 가지고 노는 것입니다. 구원받았는데 마귀의 종이 될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마귀의 소유가 될 수는 없어도 마귀에게 점유당할 수는 있습니다(마 8:16,28,33, 눅 8:35).
영적 침체는 곧 마귀로 하여금 자신 안에 들어와 자신을 소유하라는 준비자세입니다(엡 4:21-27).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옛 사람에게로 회귀하려 하면 성령님을 슬프게 함을 알아야 합니다(엡 4:30).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 순간부터 적(敵)이 달라집니다.
영적 전쟁에서 싸워 승리한 적이 있습니까?
I. 쉽게 에워싸는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 경주를 해야 합니다(1-3절).
그리스도인이 된 후 싸움의 진영이 바뀐 것을 아십니까? 전에는 마귀의 종으로서 마귀의 진영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들을 대항해서 싸웠으나 이제는 마귀의 진영을 향해 싸워야 합니다. 이 싸움은 쉬운 싸움이 아니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견뎌 내며 싸워야 한다고 성경이 권면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이지만, 12장은 성도가 시련을 당했을 때 견뎌야 하는 인내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어떤 형태로든지 마귀와의 전쟁을 경험하여 승리하지 못했다면 그는 믿음의 생활을 잘 못하고 산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교회들이 소위 사역이라 하고 선교라고 행하는 일들을 많이 보았는데 모두가 식상한 일들뿐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란 마냥 마귀를 기쁘게 해주는 일에 불과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전쟁을 망각하고 마귀들이 쳐 놓은 장애물들을 제거하지 않고 슬쩍슬쩍 비켜 가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겁내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현재 성경대로 믿고 실행하지 않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잘 나갔던 두레교회, 온누리교회, 사랑의교회, 지구촌교회는 어찌 되었습니까? 순복음, 신길동, 윤석전 등은 어디에 있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귀의 침입을 받아 현재 그들 안에 마귀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마귀인 줄 알고 대항해 보지만 그 능력이 너무 약합니다. 위기인 줄 알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지만 기도 소리가 너무 미약합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구원받았는지 의심하기도 합니다. 마귀는 그의 기를 꺾어서 그가 구원받지 않았다고 여기게 만듭니다.
이 땅에는 마귀의 공격과 활동에 대하여 제대로 아는 일꾼들이 너무 적습니다. 기독교 서점이나 출판사에서 마귀에 관한 책들을 펴내는 곳은 우리뿐입니다. 전에 몇 권의 책이 출간되기도 했지만 책 내용도 부실하기 짝이 없었고, 개역성경으로 설명했기에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마귀를 대적하라는 요령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마귀의 집단들이 마귀를 드러내려 했기에 거기에는 심지어 마귀가 그 저자를 시켜 오히려 마귀를 겁내지 말라고 써 놓았습니다. 그래서 사람 몸의 면역체계 이상과 마귀의 공격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오랫동안 지속된 우울증, 두려움, 불안감, 무서운 꿈들, 발작증세, 약물중독, 극도의 피로감, 폭발하고 싶은 성격, 성적으로 학대받은 상처로 인한 충격 등은 마귀가 침입할 수 있는 통로가 될지 모르지만 약으로도 어느 정도 치유될 수 있습니다. 정신적 질환이라고 해서 모두 다 마귀가 일으키는 것은 아닙니다. 마귀가 그를 공격해서 점유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마귀는 억압과 굴종을 강요하는 것이 다릅니다. 북한 김 씨 3대는 면역체계 이상이 아니라 마귀가 그들 안에 들어가 점유해 버렸기에 사람을 죽이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깁니다. 보통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겠습니까? 김정일은 어떤 과학자가 실험용 개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더니 사람이 있는데 왜 개를 쓰냐고 했습니다. 일본 731부대 생체실험 중에 1945년 5월 일본 규슈대 의학부에서는 미군 포로 8명을 해부해 장기와 피를 빼내고 바닷물을 혈액 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가를 실험했다고 이번 7월 17일 도노 도시오 씨가 증언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인들은 완전히 마귀에게 관장됐습니다. 제주 4ㆍ3 사건 때 공비에게 살해된 경찰, 공무원, 민간인은 1,756명이나 됩니다. 노통은 빨치산들을 명예회복시켜 줬습니다. 그를 통해 빨치산이었던 자기 장인의 명예도 회복시켰습니다. DJ는 5ㆍ18 때 소위 민주화를 위해 죽었다는 사람들에게 국가의 돈을 퍼줬습니다.
영적 전쟁에서 싸워 승리한 적이 있습니까?
II. 우리가 죄와 맞서서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 대항하진 않았습니다(4,5절).
사도 바울은 자기의 삶 전체를 하나의 경주로 보았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어떤 성도는 경주가 있는 것조차도 모릅니다. 경주자가 지녀야 했던 자세는 모든 무거운 것과 쉽게 에워싸는 죄를 벗어 버리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9에서는 『그러나 부유하게 되고자 하는 자들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빠지리니, 이는 사람들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는 부유하게 되기 위해 소유에 집착하는 것이 헛된 일임을 경고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경주를 가장 많이 방해하는 요인은 죄입니다. 죄는 주자로 하여금 다른 동료들과 보조도 맞추지 못하게 하며 심지어 걸을 수도 없게 만듭니다. 많은 성도들이 여러 가지 비성경적 행보를 하면서도 주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여기는 것은 실로 큰 문제입니다. 성경의 잣대로 그들의 믿음의 행보를 쟀을 때 그것은 육신적이고 죄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간증이 없다는 판정을 받을 뿐입니다. 정상적이고 양심적인 행보는 아주 적습니다. 그런 일들은 성령이 역사하신 것이 아니라 육신을 따라 행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3절에서는 그런 일들을 『모순된 행동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마귀의 굴종으로부터 구해 내시려고, 또 우리를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 주시어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하고 합당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하시려고 얼마나 많은 모순된 행동들을 견뎌 내셨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셋째 하늘의 영화를 버리고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되시려고 처녀에게서 성령으로 태어나셨더니 세상은 별별 의심을 다했고 주님께서는 온갖 박해를 다 받으셨습니다. 이방인 총독은 자기 앞에 주님을 세워 놓고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진리가 무엇이냐?” 따위의 질문만 해댔습니다. 성경을 배워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런 터무니없는 일들이 얼마나 모순된 행동이었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날 빌라도가 주님을 심문한 것같이 보였지만 진짜 심문관은 주님이셨습니다. 그날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빌라도는 한 가지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요 18:33-38). 빌라도는 주님을 어떻게 할 수 있는 위인이 못 되었습니다. 그 일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진행되었습니다. 그 일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누구나 읽으면 알 수 있습니다. 로마카톨릭과 개신 교회들은 아직도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형을 놓고 종교 행위를 하며 부활절과 크리스마스를 지킵니다. 주의 만찬식이라며 누룩 넣은 빵과 발효된 포도주를 먹고 마시며 살이 되고 피가 된다고 떠듭니다.
로마인들이 행한 모든 행위들, 유대인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행한 모든 행위들, 구세주를 몰라보고 뺨을 때리고 수염을 뽑으며 침도 뱉고 조롱하고 십자가에 못박고 해면에 식초와 우슬초를 적셔 마취하려고 했던 그 모든 행위들은 얼마나 엄청난 모순된 행동들이었습니까? 주님께서 그런 행위들을 받으셔야 할 근거가 있었습니까? 도대체 누구를 위하여 주님께서는 그 모순된 행동들을 견디셨단 말입니까!
바로 인류를 죄의 형벌과 지옥의 심판으로부터 구원시키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기록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죽음의 세력을 가진 마귀를 멸망시키시고 죽음을 두려워하므로 평생을 노예로 속박되어 있는 자들을 놓아 주실 일을 하실 분은 주님 한 분뿐이셨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고 교회에 다녀야 성장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불의를 행했던 사람들이 받을 수 있는 유익을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분의 피로 구속받은 성도들이 마귀에게 패배하지 않고 세상으로부터 성별하는 삶을 살게 하시려고 그러한 모순된 행동들을 견디셨던 것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싸워 승리한 적이 있습니까?
III. 주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고 매질하십니다(6-13절).
주님께서 복음을 통해 예수님을 구주로 믿겠노라고 고백하고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을 아들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것은 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인간들끼리 무슨 해골단, 빌더버그, 프리메이슨들이 피로 나눈 결의와 다릅니다. 성경에 없는 일들은 누가 했다 하더라도 모두 마귀적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로부터 구하여 내셔서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셨으니 그 안에서 우리가 그의 보혈을 통하여 구속, 곧 죄들의 용서함을 받았느니라』(골 1:13,14).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주님께서 제시해 놓으신 복음을 통해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겠다고 고백한 사람들의 “고백”에 의하여 완성된 것인데, 인간 편에서 마귀의 꼬드김에 넘어가 마귀의 말을 신뢰하게 되었을 때 그 인간은 마귀의 소유가 될 수는 없어도 마귀에게 조종당하고 쓰임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로 알게 해주신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서의 배반은 살인을 하고, 염산을 뿌리고, 방화를 하고, 차로 들이받고, 같이 죽자고 차를 타고 호수나 바다나 강에 빠지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법을 위반할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징계를 하십니다(히 12:5-13). 이런 징계는 일찍이 이스라엘에게도 적용되었습니다(잠 3:11,12). 그러므로 우리가 깨우쳐야 할 일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겠다고 고백한 사람들은 그 사실을 취소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다만 잘못 판단하여 옛 습관으로 되돌아갔다면 개가 토한 것에 다시 돌아가고 또 돼지가 씻고 나서 그녀의 진창 속에서 뒹구는 것과 같게 됩니다(벧후 2:22). 한 번 구원받은 성도가 구원을 잃어버릴 수는 없어도 마귀의 종 노릇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징계를 무시한다면 주님께서는 그를 사탄에게 넘겨지도록 처리하십니다.
히브리서 12:5,6에는 두 가지 징계와 책망이 제시됩니다. 한 가지는 하나님의 징계를 비웃는 것이고, 또 다른 것은 책망을 듣고서도 세상의 지혜와 방법대로, 즉 자기 방식대로 처리하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책망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낙심이란 고난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셨다고 여기며 절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으로부터 징계를 받는다고 여기면 즉시 무릎을 꿇고 자신이 지은 죄들을 자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죄들을 자백하면 그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일 1:9). 하나님께서 자녀를 징계하시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를 겸손하게 하기 위해서(고후 12:4-8),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을 위로해 주시려고(고후 1:1-4), 위에 있는 것을 사모하라고(골 3:1-3), 하나님의 약속들이 사실임을 확신시켜 주시려고(빌 4:13-19), 하나님의 은혜가 시련 가운데서 충분함을 보여 주시기 위해(고후 12:9) 징계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말씀이 무슨 뜻인지 전혀 모릅니다. 국회의원이나 장관들, 대학 교수들이라고 해도 알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구원받고 나서 옛날의 생활방식과 습관을 그대로 유지하거나 세상 친구들로부터 성별하지 않게 되면 마귀가 침투할 수 있습니다. 특히 초신자들은 사소한 영역에서 분노를 분출하고 원망하고 쓴 뿌리를 제거하지 못합니다. 그런 죄의 습성들이 오래 지속되면 마귀가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대로 믿고 실행하지 못했을 때 옛 습관과 죄들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럴 때 그의 삶은 갈등이 커집니다. 마귀는 그런 성도들에게 접근하여 틈을 노려 들어가 그를 꼬드길 수 있습니다. 세상 교회들이 이런 진리를 알겠습니까? 교회라고만 하면 마귀가 벌벌 떱니까? 교회 간판만 내걸면 피난처가 될 수 있습니까? 죄가 날 유혹할 때에 우리 마음에 단호한 선언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를 씻었고(요일 1:7), 이제 나는 하나님의 소유이고 아들이 되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에게 명령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게 명하노니 나에게서 썩 나가라!” 그때 마귀는 그 사람 안에서 바닥에 구르거나 몸을 비틀거나 괴성을 지르거나 구토하거나 저주하기도 합니다. 단호히 반복해서 명령하고, 주변에 동료들이 있다면 진지하게 기도하십시오. 왜 우리가 주님의 용사가 되어 영적 전쟁을 잘 치러야 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참는자의 복
히브리서 12:1-13
성도의 성공적이고 행복한 삶은 예수님의 삶을 배우며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삶은 한 마디로 십자가의 삶이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참으심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본문에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하신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히 12:2) 예수님의 생애는 인내하는 삶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참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주님은 일생동안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 평생 남의 집에 머물며 사셨습니다. 태어날 때도 남의 집, 마굿간에서 탄생하셨고, 마지막 무덤도 남의 무덤 즉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을 빌려서 사흘 밤을 계셨습니다.
전세방에서 살면서 불평하시는 분이 있으십니까? 예수님을 생각하시고 참으시기 바랍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억울한 소리 듣고, 분해서 가슴치는 자 있습니까?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참으십시오. 좋은 일을 하고 최선을 다 했는데 억울한 누명 쓰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때로는 감옥살이할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의롭게 선하게 사셨는데도 결국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분이 풀리지 않아서 고통 당하는 분이 계십니까?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는 자 때문에 고통 당하십니까? 예수님은 끝까지 원수를 사랑하시면서 참으셨습니다. 제자들의 배신도 참으셨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종교, 가정적으로 답답한 현실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까? 얼마나 답답하면 술을 마시고, 차를 타고 달리면서 울기도 하고, 소리를 질러 대기도 하겠습니까. 심지어 자살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때 사는 길은 예수님을 생각하며 인내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죄인들에게 그토록 심한 일을 당하시고 참으신 그 분을 생각하면 어떠한 환경에도 지치거나, 낙심하거나, 좌절치 않고 인내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인내를 배워 주님처럼 승리하는 복을 받아야 겠습니다. 어떻게 인내할 수 있습니까?
첫째,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을 믿고 참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살리는 말씀이고 인도하는 말씀이며 행복하게 만드는 말씀이며 이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마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전생애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시는 생애였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이 말씀을 알았기에 참으실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생애에서 모든 고난을 참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섭리를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성경에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아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지어다"(시37:7) 우리의 삶에서 불평이나 원망, 불만은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하기 원하는데 그렇게 안되니까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야 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현실의 고난을 참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하므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며 또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더욱 아름다우니라"(벧전 2:19)고 했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로마서 8:28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서 살다 보면 여전히 악과 부조리가 있고 납득할 수 없는 애매한 고난이 우리의 삶에 계속 몰아쳐 옵니다. 여기에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고 믿음이 무너집니다. 의로운 자가 억울하게 고난 당하고 못살며 악한 자가 형통하는 것을 보면 모순을 느끼고 회의에 빠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궁극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불합리한 모든 일들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고 참아야 합니다.
또 기도할 때, 응답을 기다릴 때 믿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때는 즉시 응답하시고, 때로는 천천히 응답하시기도 합니다. 또 때로는 거절하십니다. 거절은 더 좋게 하려는 것이니 응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고 믿음으로 참아야 합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구하면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고 약속 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나왔고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광야에서 다 죽고 여호수아, 갈렙 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만이 광야의 길의 고난을 참아낸 것입니다. 배고파도 참고, 목말라도 참고 앞길이 암담해도 참고 고난이 와도 하나님을 믿고 참았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우리도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견디고 참아야 합니다. 여름 행사로 은혜받았는데 마귀가 그냥 두지 않습니다. 참으며, 기도하며, 믿음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둘째, 주님이 소망으로 참으신 것처럼 소망을 바라고 참아야 합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현실이 암담해도 참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수치와 고난을 참으신 것은 부활의 소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아버지께로 돌아갈 것을 확신했습니다. 성경의 약속은 우리에게 소망이 넘치게 합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4)
그렇습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 참을 수 있으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병원에 환자들이 들어가도 건강을 회복하며 나을 수 있기에 수술대에 누워도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살지 못하고 죽을 것 같으니 불안, 걱정, 슬픔이 있게 마련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고생하며 사는 것이 내일을 복되게 한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무슨 고난도 능히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소망의 믿음 문제입니다. 지금 고난이 있고 슬픔이 있어도 내일 행복한 날을 바라보고 그것이 이루어지리란 믿음이 있으면 참고 극복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약속된 미래, 확실한 소망이 있다면 어떤 고난도 참을 수 있고, 즐거움으로 승화시킬 수 있습니다. 잠시 받는 환난은 미래에 나타날 영광 때문에 오히려 자랑스럽고 지금 당하는 부끄러움이 하나님 앞에서 칭찬으로 바뀔 것을 아는 사람은 모든 시험을 기쁨으로 참고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도 미래를 말씀에서 알고 감사하며 살아야 겠습니다. 우리 삶에 몰아쳐 오는 시험의 물결은 오직 소망으로 참을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한 성도는 믿음을 지키다가 로마의 한 감옥에서 오랫동안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고 최후 순교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네가 끝까지 예수를 믿는다면 오늘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성도는 "나는 죽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안식하고 있을 것입니다. 나로 하여금 하늘의 훈장 받도록 채찍질하고 아프게 해서 하늘의 면류관을 쓰고 순교자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애써 주시는 황제님께 감사 드립니다." 이렇게 인사하고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찬송하며 하늘나라로 갔답니다. 이러한 확실한 소망이 여러분에게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능히 참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수치와 고난을 참으심은 죄인을 사랑하시는 마음때문 입니다. 예수님은 죽으면서도 죄인들의 용서를 빌며 참으셨으며, 참으심으로 온전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부부, 형제, 이웃, 교우간에 오래 참는 것입니다.
클소스톰은 욕을 당하거나 손해를 본 사람이 보복할 힘이 있으면서도 보복하지 않는 것이 '참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참아야 합니다. 참는 자가 상대방의 마음을 차지합니다. 참는 마음은 큰 자의 마음이며, 믿음이고, 승리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온갖 나쁜 말로 자기를 비난하고 무시했던 스탠드 장군에게 끝까지 참았을 뿐 아니라 그를 국방장관에 채용했습니다. 세월이 지나 암살당한 링컨의 시체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세상에서 일찌기 보지 못했던 위대한 통치자가 여기 누워있다"고 했습니다. 사랑으로 참은 링컨의 마음이 교만한 마음을 이긴 것입니다.
카네기는 말하기를 "승부대결에서 승리의 비결은 인내가 제일이다. 조급하면 마음이 흐려지고 화를 내면 일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참고 기다리면 기회가 온다"고 했습니다.
중국의 장공예의 집에는 9대가 한집에서 화목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친구가 화목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광으로 안내했습니다. 항아리 속에는 "忍"으로 쓰여진 종이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가족들이 마음이 상할 때마다 "忍"을 써서 참았다는 것입니다.
어느 집에나 불평과 불안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가 생기면 교회를 찾으시고, 십자가를 바라 보세요. 참으신 주님을 생각하시고 기도하십시오. 그리하면 참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 하고 싶은 일, 말, 행동 다하지 못합니다. 참아야 합니다. 인내는 믿음을 보존하며 화평을 유지하고 사랑을 육성하며 겸손을 가르치는 교사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많이 참는 자가 성숙한 인격자요,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평화의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참는 본을 보여야 합니다.
어느날 공자님에게 장자가 찾아와 질문을 했습니다. "몸을 닦는 비결을 말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공자는 백가지 행동의 근본은 참는 것이 제일이라고 하면서 "왕이 참으면 국가가 해로움이 없는 것이고 참지 않으면 나라 안이 빈 터가 될 것이요 장관이 참으면 다스리는 땅이 커질 것이고 참지 않으면 자기 몸뚱이까지 없어질 것이요, 관리가 참으면 제 지위가 커질 것이고 참지 않으면 죽을 것이요, 형제가 참으면 그 집이 부귀를 누릴 것이고, 부부가 참지 못하면 이혼하고 자식이 외롭게 될 것이요, 친구가 참으면 상대방의 명예를 떨어뜨리지 않으며 참지 목하면 우정이 끊어질 것이요, 자신이 참으면 화가 없고 자신이 참지 못하면 근심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장자가 감탄하여 참능 것은 참으로 어렵고 또 어려운 것이로구나! 사람이 아니면 참지 못할 것이요, 또 참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매사에 참고 나면 모든 일이 잘되고 감사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참지 못해서 싸움이 나고, 갈등이 생기고, 헤어지고, 죽으며, 온갖 삶의 비극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참으심을 본받고, 인생 길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참고 살아야 합니다. 가정, 직장, 교회에서 참아야 합니다. 불신자보다 성도가 더 참아야 합니다. 평신도 보다 집사, 권사, 장로가 더 참아야 합니다. 주님도 십자가에서 곤욕을 참으셨습니다. 지금도 참고 계십니다. 한 생명이라도 더 살리며 심판을 연기하며 참으시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시다. 더 열심히 믿으십시다. 참음으로 성공적인 삶을 사시고 영원한 복을 누리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를 바라보자
히브리서 12:1-13
요절: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2003년 1월 1일을 학생회 동역자님들과 함께 무등산 정상에서 해돋이를 보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우리는 구름사이로 찬란하게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2003년의 희망찬 소망과 비젼을 꿈꾸었습니다. 그런데 벌써 2003년 마지막 주일예배가 되었습니다. 지난 한 해를 돌이켜 볼 때에 국내외적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라크 전쟁이 있었고, 세계 각 곳에서 수많은 테러사건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아까운 생명을 잃었습니다. 엊그제는 이란에서 지진이 일어나서 25000명이 사망하는 큰 사고가 있었습니다. 국내적으로도 대구 지하철 참사로 192명이 목숨을 잃었고, 태풍 매미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았습니다. 정몽헌 현대그룹회장 자살 사건등 생활고를 비관해서 자살한 뉴스가 꼬리를 물었습니다. 계층간, 세대간, 이념간의 갈등으로 말미암아 데모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2002년에는 그래도 월드컵 4강 신화도 창조하고, 참여정부가 탄생하는 등 기대감이 많았는데, 2003년은 대체로 어두웠던 일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저희들이 무거운 기억들을 다 털어 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이를 통해서 새로운 비젼과 새로운 각오로 2004년 새해를 힘있게 출발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먼저 1절을 보겠습니다. 1절을 다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신자들의 삶을 경주, race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자체가 하나의 달리기 경주입니다.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은 우리 신자의 삶을 '순례의 길(pilgrim's progress)'에 비유했는데, 히브리서 저자는 달리기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이 달리기 경주가 너무나 힘들고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특히 대부분의 세상사람들이 우리와는 다른 넓고 편한 코스로 달려가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외로움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힘들어하거나 외로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1절에 보면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어서 우리를 힘써 응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20년동안 방주를 지은 노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출애굽의 영웅 모세, 용감한 믿음의 여인 라합등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저 하늘나라에서 우리를 바라보며 박수를 치며 응원을 하고 있습니다. "현민아! 힘내라" "경일아! 일어나" 마라톤 선수가 힘들고 어렵지만 길가에 늘어선 관중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박수를 쳐 주고 응원을 해 줄 때 힘이 솟구쳐서 계속해서 달려갈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주변에 수많은 믿음의 증인들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에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해 나갈 때에 구체적으로 가져야 할 자세가 어떤 것입니까?
첫째로,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려야만 합니다. 달리기 선수들이 레이스를 하는 것을 보면 최대한으로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서 뛰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봉주 선수가 마라톤을 할 때에 양복을 입고, 코트를 걸치고 뛰는 것 보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무거운 옷을 벗어버리고, 런닝 셔츠와 팬티만을 입고 뜁니다. 신발도 최고로 가벼운, 새털처럼 가벼운 신을 특수 제작해서 신습니다. 황영조선수가 올림픽에서 우승할 때에 소속사인 코오롱에서 최고로 가벼운 신발을 만들기 위해서 연구제작비로 약 1억원을 투자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믿음의 경주를 하고자 할 때에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과거에 모든 슬픈 기억들, 상처와 아픔, 실패한 일들, 인간갈등으로 인해 힘들어 했던 일들. 이런 것들을 다 벗어 던져 버려야만 합니다. 또 우리마음속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세상욕심과 장래에 대한 근심, 걱정들을 과감하게 벗어 던져 버려야만 합니다. 특히 우리의 마음속에 뿌리깊은 죄 문제, 고질적인 죄의 소욕들을 벗어 버려야만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잘 투쟁하다가도 정욕의 올가미에 걸려 넘어져서 며칠씩 헤매고 괴로워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미움과 시기심의 영에 한 번 사로잡히게 되면 얼굴이 시컴해져서 사람들을 피해 다닙니다. 안일의 세력에 져서 며칠씩 방굴러데쉬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학하고 괴로워해야만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죄들을 즉시 회개하고 과거의 수치와 부끄러움들을 과감하게 벗어 버리고 힘차게 일어나서 믿음의 경주를 계속해야만 하겠습니다. 이사야서 43:18,19절에 보면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운데 새 일을 행하시고자 하시는데 과거에 얽매여서 의기소침해 있으면 되겠습니까? 에베소서 4:22절 말씀처럼 우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어야"만 하겠습니다.
또한 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우리는 우리를 얽매이게 하는 죄를 벗어 버리되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워야만 하겠습니다. 죄는 마치 거머리나 찐드기와도 같습니다. 떼어 버리면 언제 와서 또 붙어 있고, 떼어 내면 또 언제와서 내 피를 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생동안 죄와 싸워야만 합니다. 죄와 싸우되 어느 정도까지 싸워야 합니까? 피흘리기까지 싸워야만 합니다. 이를 볼 때에 믿음의 경주는 단지 운동삼아 하는 조깅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믿음의 경주는 눈보라치는 험한 산을 기어서 올라가는 산악경주와도 같습니다. 달려가다가 넘어져서, 다리가 깨질 수도 있습니다. 넘어져서 무릎에서 피가 흐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무릎에 멍이 좀 들었다고 믿음의 경주를 포기하고자 합니다. 양이나 동역자들에게 상처를 좀 받았다고 되돌아가고자 합니다. 조금 희생해놓고는 계산하며 손해의식에 시달립니다. 새벽기도 몇 번 나왔다가 몸살이 나면 금방 몸을 사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의 경주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다같이 4절 말씀을 큰 목소리로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까지는(to the point of shedding your blood) 대항치 아니하고." 저희들이 죄와 싸우되 피흘리까지 싸울 수 있길 기도합니다. 밤새워 투쟁하다가 코피도 좀 흘리고, 피곤해서 계단에서 쓰러지기도 하고, 치열하게 맹렬하게 죄와 싸우고 계속해서 믿음의 경주를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지난 달 모스크바에서 최 죠세핀 선교사님이 오실 때 가져온 한 통의 편지를 받고 느끼는 바가 많았습니다. 모스크바에는 저와 같은 학교, 같은 학번 출신으로서 이름도 저와 똑 같은 김바나바 선교사이라고 있습니다. 이분은 몇 달 전에 Joseph Malygin목자의 결혼문제를 돕다가 너무 많은 마음고생을 해서 그만 혈압이 올라서 쓰러졌습니다. Joseph목자의 결혼사진은 이번 호 UBF news지 맨 뒤에 있습니다. 김바나바 선교사님은 연약한 Joseph목자에게 믿음을 심고 밤새워 이야기를 들어주고 카운슬링하고, 또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서 직장에 출근하고, 퇴근한 후에는 네 자녀를 돌보고. 이렇게 하다가 쓰러져서 한쪽 귀의 청력까지 상실될 지경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몇 주째 사경을 헤매다가 지금은 많이 회복이 되어서 좋아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동역자 루디아 선교사님께서 제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래도 이를 통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어 감사했다는 편지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이 편지를 읽고 많이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선교지에서 양들을 섬기다가 쓰러지기까지 하는데, 내가 너무 본국에서 안일하게, 편하게 목자생활하고 있지 않나 생각하니 심히 부끄러웠습니다. 제가 적당히 목자생활하지 않고 피 흘리기까지, 쓰러지기까지 영적인 투쟁을 감당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지난 월요일 날 동경에 정다니엘 선교사님께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다음주에 일본지부장 수양회가 있는데 와서 "메시지를 새롭게 파는 법"에 대해서 특강을 해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전요한목자님께서도 갔다 오면 좋겠다고 전화를 하셨습니다. 저는 성탄연극을 섬기고 나서 이번 주는 좀 쉴려고 했는데, 무엇보다 자료를 준비하는데 시간이 촉박해서 마음에 갈등이 되었습니다. 다음주에는 우리 신년수양회도 있기 때문에 2박 3일동안 번갯불에 콩구어 먹듯이 다녀와야 했습니다. 미숙사모님도 갑자기 큰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집에 가는 바람에 아이들도 챙겨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주 말씀이 하필 "피 흘리기까지 투쟁하라"는 말씀이어서 연구발표를 준비하기로 결단하였습니다. 연구실에 20권의 관련 책들을 쌓아두고 열심히 타자를 두드렸습니다. 그랬을 때에 몸살이 나고 몸은 좀 피곤했지만 말씀의 세계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선교사님들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게 되어서 감사했습니다. 우리가 이왕 믿음의 경주를 출발한 사람들로서 쉽게 편하게 적당히 놀면서 달리고자 하지 아니하고, 피 흘리기까지 투쟁하며 믿음의 길을 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둘째로, 믿음의 경주를 하고자 할 때에 인내를 배워야만 합니다. 1b절을 보면 "인내로써 우리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라고 하였습니다. 마라톤 경주를 하다보면 꼭 죽을 것 같은 사점(死點)이 있다고 합니다. 선수들에게는 10km지점과 35km지점이 사점이라고 합니다. 이때는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은 극도의 피곤이 몰려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때를 잘 참고 견디게 되면 몸에 적응이 되어서 잘 뛸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이 어렵고 피곤하고 너무 힘들어서 내 인생이 망할 것 같은 두려움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이를 잘 참고 견디게 되면 언젠가는 반드시 역경의 먹구름이 걷히고 햇빛이 내리쬐는 좋은 날이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할 때에 인내를 배워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가복음 21:19절에서 "너희의 인내로써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바울도 디모데후서 4:7,8절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저희들이 좀 힘들어도 인내하며 믿음의 중심을 지키게 되면 장차 의의 면류관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셋째로, 믿음의 경주를 하고자 할 때에 예수님을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다같이 2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하다가 피곤하고 낙심이 될 때에 참고 인내하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인내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참고 견딜 힘이 없습니다. 이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로서 믿음의 알파요, 오메가가 되십니다. 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 특혜를 이용해서 고난을 면제 받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도 고난의 과정, 슬픔과 역경의 과정, 아픔과 수치의 코스를 다 겪으셨습니다. 아니 우리가 겪는 고난과 아픔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견디기 힘든 고난을 다 겪으셨습니다. 피와 땀과 눈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그 힘든 고난과 십자가를 다 참으실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바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영광에 이를 소망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피곤해도 낙심치 않고 참으실 수가 있었습니다. 장차 하늘나라의 영광을 소망하였기 때문에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고, 침을 뱉고, 채찍질하고, 거역하는 자들을 다 참으실 수가 있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 모든 어려움을 거쳐서 마침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고난을 참고 견디고 이겨낸 예수님에게 당신의 보좌 우편이라는 영광스러운 자리를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예수님을 바라보아야만 하겠습니다. 이 예수님을 생각해야만 하겠습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에 예수님을 바라보면 힘이 납니다. 스피릿이 생깁니다. 이 나라를 보면 소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나 자신을 바라 보아도 절망만 되고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면 소망이 보입니다. 희망이 보입니다. "아, 나도 비록 지금 고생하고 수고하지만 장차 주님의 나라에서 영광스러운 상급을 받을 날이 오겠구나!" 그 날을 생각하면 놀라운 힘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이 예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수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믿음의 길을 달려갈 수가 있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3,14)."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자꾸만 한 눈을 팔게 만듭니다. 세상에 화려한 것, 재미있는 것, 인기 있는 것을 바라보라고 부추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다 스치고 지나가는 것들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신 이인 예수님,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참으시고 이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사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예수님께 눈을 고정시키고(fix your eyes on Jesus) 믿음의 길을 가야만 하겠습니다. 우리가 자꾸 한눈 팔면 헷갈리고 흔들리고 헛생각에 시달리고 인간적인 생각 때문에 힘듭니다. 오직 예수님 한 분 만을 바라보고 믿음의 길을 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 하늘의 상급을 얻기 위하여, 믿음의 길을 달려가는 믿음의 경주자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넷째로, 믿음의 경주를 하고자 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훈련을 잘 받아야만 합니다. 다같이 5,6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 보시겠습니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5절과 6절 말씀에는 징계, 꾸지람, 채찍질이라는 단어가 연속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본문에는 '징계'라는 단어가 8번이나 반복해서 나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징계는 영어로 'discipline'으로서 '훈련'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훈련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본성적으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킵니다. 우리가 죄악된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만도 힘들고 고달픈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뒤에서 밀어주시지 않고, 오히려 꾸짖고, 훈련하시고, 채찍질까지 하시는가? 도와주시지는 못할망정 왜 내 인생에 태클을 거시는가? 하나님께 대해서 sorry한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처럼 믿음의 사람들에게 훈련을 주시는 것입니까? 6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생각하시기 때문에 훈련을 하시는 것입니다. 서양속담에도 "달리는 말에 채찍질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잘 할려고 하는 사람일수록 더 자극을 주어서 훈련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석봉과 그의 어머니에 대한 스토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한석봉이가 집을 떠나 멀리 글씨를 배우러 유학을 갔습니다. 어머니는 아들 석봉이의 공부를 위해서 떡을 만들어서 시장에다 내다 팔았습니다. 한석봉은 이런 어머니를 생각하며 열심히 공부하고 글씨를 썼습니다. 그리고 이제 됐다 싶었을 때에 석봉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랜만에 아들의 얼굴을 보게 된 어머니는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러나 그 어머니는 무조건 아들을 얼싸안고 씨암탉을 잡아주지 않았습니다. 저녁에 불을 끄고 깜깜한 방에서 글씨를 써 보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깜깜한 방안에서 떡을 썰었습니다. 잠시후 불을 켜 보았을 때에 어머니의 떡은 불을 켜고 썬 것처럼 똑같이 가지런했건만 석봉이의 글씨는 삐뜰빼뜰 엉망이었습니다. 이때 석봉이의 어머니는 어떻게 말했습니까? "석봉아! 당장 스승에게로 가서 더 글을 배워 오너라! 실력이 향상되기 전까지는 집에 돌아올 생각을 말거라" 이처럼 어머니의 혹독한 훈련과 꾸지람이 있었기 때문에 한석봉이라는 위대한 명필이 탄생되게 되었습니다. 그 어머니가 아들이 미워서 꾸짖고 훈련을 했겠습니까? 아닙니다. 진정으로 아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 아들을 더 위대한 인물로 키우기 위해서 훈련을 한 것입니다.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고, 이쁜 자식 매하나 더 때린다고, 사랑하는 자식일수록 부모는 자식을 더 강하게 훈련하는 법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징계는 다 받는 것이어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잘못 태어난 사생아는 사랑이 가지 않기 때문에 훈련을 시키지 않습니다. 내버려 둡니다. 그러나 정말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자기 자식이라면 때려서라도 큰 인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을 특별히 징계하시고 훈련하셨습니다. '제자'는 영어로 'disciple'이라고 하는데, 이 'disciple'이란 단어는 바로 오늘본문에 나오는 징계 'discipline'에서 왔습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공부해 보면 예수님은 무리들을 훈련시키신 적이 거의 없습니다. 무리들은 그냥 받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틈만 나면 훈련시키셨습니다. 특히 수제자 베드로는 아주 혹독하게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앞으로 장로들에게 넘겨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한 마디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오히려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막8:33)."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단이라고까지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조차도 '사단'이라고 책망하신 적이 없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이라고는 했어도 '사단'이라고는 안 했습니다. 헤롯도 '여우'라고는 했어도 '사단'이라고는 안 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따르고 있는 제자에게, 그것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수제자에게 어떻게 '사단'이라고까지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이것은 베드로가 미워서가 아니라 베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를 수제자로 키우기 위해서, 위대한 사명을 맡기기 위해서, 이처럼 철저하게 훈련하시고, 꾸짖고, 징계하신 것입니다. 이런 훈련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베드로는 후에 사도행전의 역사를 창조한 위대한 복음의 종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해 보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쓰시고자 한 종일수록 훈련하시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25년 동안이나 아들을 주시지 않고 훈련하셨습니다. 나중에는 천신만고 끝에 얻는 그 아들 독자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도 그 곱디 고운 왕자의 손이 곰 발바닥같이 되도록 40년 동안 광야에서 처절하게 훈련시키셨습니다. 다윗을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일찍이 기름부어 왕으로 세워놓고는 수 년동안을 광야의 토굴에서 쫓기는 신세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방 땅에서 미친사람, 거지행세를 하며 망명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훈련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성군 다윗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솔로몬을 생각해 보면 그는 아버지 다윗보다 아마 IQ가 두 배는 높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열왕기상 4장에 보면 솔로몬은 잠언을 삼천을 말하였고, 그 노래가 일천 다섯이요, 모든 식물과 동물을 다 논할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었습니다. 그는 신곡을 1000여곡이나 발표하였습니다. 그는 입만 열었다하면 명언이요, 구구절절이 진리만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뛰어난 그였지만, 그가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말로는 결코 아름답지 못했습니다. 우리 중에 다윗이라는 이름은 사모해서 서로 아들 나면 다윗이라고 지을려고 하지만, 솔로몬이라고 아들 이름을 짓는 사람은 없습니다. 학습지 이름, PC방 이름은 솔로몬을 봤어도 사람이름 중에 솔로몬은 본 적이 없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훈련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당시에는 힘들지만 나중에는 진정으로 좋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훈련을 사모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하나님의 훈련은 분명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119:71절에서도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우리는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성이 죄악되어서 거저 거룩하게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났다고 하지만 아직도 우리의 내면가운데는 많은 죄악된 요소, 인본적인 불순물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런 죄악된 요소, 세속적인 불순물들이 제거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훈련을 받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훈련을 통해서만 우리는 불순물을 걸러내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예할 수가 있습니다. 금덩어리는 결코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뜨거운 용광로에서 재련 과정을 거쳐야만 거친 광석들이 녹아지고 빛나는 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욥도 말했습니다.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그러므로 저희들이 하나님의 훈련을 경히 여기기나, 훈련을 받을 때에 낙심할 것이 아니라, 경외심을 가지고 훈련을 잘 받을 수 있길 기도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입니다. 훈련 받을 때에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훈련받는 것을 보면 고소하고 깨소금 맛이지만 내가 훈련 받을 때는 죽을 맛입니다. 그러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가 맺힌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훈련을 많이 받아서 그 내면이 연단된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런 사람들의 내면은 솜털처럼 부드럽고 온유합니다. 강가에 조약돌처럼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똑같이 고생을 해도 그것을 의미없는 세상풍파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내면에 한과 상처만 남습니다. 그래서 열매는커녕 가시만 가득합니다. 툭 건드리면 쿡 찌릅니다. 가까이 다가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징계를 하나님의 훈련으로 영접하고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내면이 한없이 평화롭습니다. 따뜻합니다. 잔잔한 은혜가 있습니다. 그 인격에서 배어 나오는 어떤 깊은 맛이 있습니다. 그윽한 성령의 향기가 풍겨납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수 십 년의 비바람을 맞으며 모진 풍설을 이겨낸 녹차가 깊은 맛을 내지 않습니까? 우리의 신앙도 힘들고 어려운 하나님의 훈련을 잘 견뎌내야만 마침내 깊은 맛을 내는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로 성장할 수가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좋은 바이올린을 만드는 나무재료는 로키산맥 정상에서 구한다고 합니다. 그곳은 얼마나 춥고 바람이 많이 부는지 나무들이 똑 바로 서 있지 못하고 무릎을 꿇는 자세로 반쯤 누워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처럼 세찬 바람과 추위를 견뎌낸 나무이기 때문에 바이올린을 만들어서 연주를 하게 되면 신비의 소리가 난다고 합니다. 열대지방에서 쉽께 빨리 자란 나무는 도저히 그런 소리를 낼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사람도 많은 연단과 훈련을 받으면 성장한 사람은 말 한마디를 해도 깊이가 있고 철학이 있고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지식적으로 많이 안다고, 책을 많이 읽었다고, 신앙의 깊이가 깊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강의실에서 배울 수 없는 귀한 진리들을 우리는 하나님의 훈련을 통해서 깨닫고 배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하겠습니까? 12, 13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우리 중에 어떤 분은 하나님의 훈련을 받다가 너무나 힘들고 피곤해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다리가 저리고 무릎이 아파 오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1, 2년도 아니고 벌써 몇 년 째냐? 하나님의 훈련이 지겹다, 신물이 난다"고 말하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장차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고, 주님의 거룩하심에 참예 할 소망을 바라보게 될 때에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다시 일어나서 힘차게 뛰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를 바라보자!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저희들이 2004년 새해에는 새 일을 행하실 주님을 바라보고 다시 일어나서 힘있게 믿음의 경주를 계속 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