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신해혁명(辛亥革命)[1911-1915년]으로 인하여 기원전 221년에 550여 년 동안 분열과 혼란이 이어진 시기를 끝내고 중원을 통일한 진나라의 시황제 이래 2천년 이상 중화제국을 다스린 황제의 전제군주제가 종말을 고하고 중국사 최초의 근대적 공화국이 세워졌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반복되던 북방 이민족의 중원 지배도 완전히 종말을 고하게 되어 한족이 만주 지역을 그대로 차지하게 됨은 물론 중국 대륙 전체를 탈환하게 되어 중화민국이 성립된다.
국공내전 이후에도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이 점유한 중원을 한족의 중화인민공화국이 그대로 점령하여 현재에 이르게 된다.
송애령, 송경령, 송미령 등 송 씨 세 자매를 배출한 쑹자수(송가수) 가문은 중국 근대사에서 최고의 명문가로 꼽힌다.
한 사람은 돈을, 한 사람은 인민을, 한 사람은 권력을 사랑했다.
각자의 길을 떠난 송애령, 송경령, 송미령 세 자매는 1949년 중국 대륙이 공산화된 후 세기의 이산가족이 되어 죽을 때까지 서로 만나지 못했다
세 여자는 20세기 초 중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들과 결혼하는 엄청난 혼맥으로 중국의 현대사를 뒤흔들며 자신의 능력과 의지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송씨 세 자매의 생애는 파란만장한 인간 드라마일 뿐만 아니라 드라마틱한 20세기 중국 역사의 變谷을 대변하고 있다.
청나라가 멸망하고 일본의 침략과 뒤이은 내전으로 얼룩진 1900년대 초부터 1950년대까지의 중국 역사는 격동 그 자체였다.
격동의 역사 한가운데로 온몸을 던져 뜨겁게 살았던 세 자매의 갈등과 굴곡으로 얼룩진 삶의 여정은 근대 중국의 역사를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돈을 사랑한 여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큰 언니 송애령은 산서성 최대 금융 재벌 집안의 쿵샹시(공상희)와 결혼하였다.
'중국을 사랑한 여인' 또는 '인민을 사랑한 여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둘째 송경령은 신해혁명의 주역으로 중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쑨원(손문)과 결혼하였다.
'권력을 사랑한 여인'으로 불리는 송미령은 형부인 쑨원이 세상을 뜬 후 국민당의 당수가 된 장제스(장개석)과 결혼하였다.
중화민국(타이완)의 총통 장제스, 중국의 국부 쑨원 그리고 공자의 후손인 금융 재벌 쿵샹시 세 사람의 이름만 보아도 20세기 초의 중국 역사를 한눈에 보인다.
송 자매와 그들의 남편의 역사가 곧 20세기 초 격변기 중국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 유학파로 뛰어난 능력과 야망을 지녔던 세 자매는 중국을 움직이는 남자들과 스스로 결혼함으로써 혁명과 전쟁의 시대에 뛰어들었고 격랑의 역사를 온몸으로 부딪히며 다정했던 세 자매의 삶도 뒤틀린 역사가 되어갔다.
백만장자가 된 세 여자의 아버지 송가수는 혁명당의 요직을 맡아 손문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송 씨 세 자매에의 운명도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세 여자의 아버지 송가수는 애령, 경령, 자문, 미령, 자량, 자안 등 3남 3녀의 6남매를 두었다.
아무리 바빠도 밥상머리 자식 교육을 빼놓지 않았다.
세상을 알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딸들도 모두 미국 유학을 보내 큰딸 송애령은 미국 유학을 한 최초의 중국 여성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큰딸 송애령은 16살이던 1904년 미국의 명문 사립여대인 웨슬리언대로 유학하여 1910년 졸업하여 중국으로 돌아온다.
아버지를 도와 손문의 영문 비서로 활동하던 중 신해혁명 제2혁명에 실패한 손문과 아버지가 일본으로 망명할 때 따라가 쒼원의 비서로 활동했다.
쒼원은 부인과 이혼하고 송애령과 결혼하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
송애령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집안에 들어앉아 직간접적으로 국가 대사에 이런저런 영향을 미쳤다.
언니처럼 웨슬리안 대학을 졸업한 송경령은 일본에 망명 중이던 아버지와 언니를 만났고 쒼원에게 혁명활동을 돕고 싶다는 의사를 표하였고 송애령이 결혼을 하게 되자 대신 비서직을 맡게 되었다.
늘 영웅으로 존경했던 쑨원 곁에서 일하면서 송경령은 쑨원의 강인한 의지와 혁명 원칙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27살이나 연상이던 쑨원과 일본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쑨원의 나이 49세에 송경령의 나이 겨우 22세였다.
"그때의 감정은 연애라기보다는 구국 운동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었으며 쑨원만이 그것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라고 송경령이 훗날 고백하였다.
송경령과 쑨원의 결혼은 혁명 사업과 이상의 결합이었다.
쑨원과 송경령은 혁명투쟁 속에서 서로를 평가하고 재발견하였다.
송경령은 쑨원 만년의 시기에 정치적 사고와 행동에 모든 것을 쑨원과 함께 하였고 쑨원의 정책이나 주의에 적지 않은 영향도 주었다.
"저도 중국산이에요. 당신은 중국산에 자신 없어요?"
중국에서 처음 생산한 비행기의 성능과 안정성을 보여주기 위해 직접 시승하려는 송경령을 위험하다고 말리는 쑨원에게 날린 송경령의 명언이다.
그러나 10년간의 결혼 생활은 잠시였다.
1925년 쑨원은 간암으로 사망했고 남편이자 지도자이며 동지를 잃고 홀로된 송경령은 나이 32세였다.
송경령은 주저앉지 않았다.
송경령은 장개석의 4.12 반공 쿠데타 이후 무한정부의 붕괴로 이어진 반혁명적 사태에 직면하여 손문과 장개석 사이의 이념적 단절을 통감하게 되었고 장개석과 대립하며 중국 공산당 및 소련과의 연합을 추진하는 등 국민당 좌파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중국 대륙이 공산화된 이후 다른 송 씨 가문들은 대륙을 떠났지만 송경령은 그대로 남아 국가 부주석을 역임하며 여성과 아동 문제와 외국과의 친선에 힘썼다.
어린 나이 10살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송미령이 1917년 중국으로 귀국했을 때 송미령은 오만하고 독선적이었지만 미모와 교양에 외교력까지 두루 갖춘 서구형 여성으로 변해 있었다.
미인이고 세련되고 교양과 언변까지 갖춘 송미령은 상해 사교계의 샛별로 등장했다.
송미령이 아동노동위원으로 병원의 실태와 입원 중인 아동노동자들을 살피고 있을 때 매독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을 찾은 장제스와 처음 만났다.
송미령은 장제스의 끈질긴 구애와 퍼스트레이디가 되고 싶은 자신의 야망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결혼을 강행하였다.
그 후, 대만으로 망명한 장제스 총통의 부인으로 평생 살아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