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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종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최규진
효도합시다(창9:20-27)-2017.5.7. 어버이주일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평생을 두고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효도요, 해도 해도 다함이 없는 것이 부모공경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유교가 효의 종교라고 생각하지만 기독교의 효보다 깊지 아니하며 넓지도 아니합니다. 기독교는 효의 종교입니다. 성경은 수없이 많은 곳에서 효를 강조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효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사회가 핵가족화 되면서 효가 약화되고 삶의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려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효는 가장 사람다운 인륜이요, 천륜입니다.
인간은 마땅히 부모님께 효도해야 합니다(엡6:1, 골3:20). 영적인 효도를 잘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육신의 부모님께 효도를 잘해 천대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잠23:24-25). 그러기 위해서 우리 자녀들에게 성경적인 효를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저주받지 아니하고(신27:16), 장수의 복을 받기 원하시면 효도를 가르치고 행하도록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부모 된 자가 먼저 효를 실천해야 합니다. 효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은 부모들의 효를 그대로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1) 효의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세상에서 최고의 효를 실천하신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효는 부족함이 없는 효요, 완전한 효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행하셨던 효를 우리가 먼저 배우고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빌2:6-8). 죽는 것도 효도였습니다. 아버지가 죽이시매 거절하지 아니하시고 죽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한번도 자기 의지대로 행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철저하게 성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한번도 자기 뜻대로 판단하거나 결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결정권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긴 것입니다. 물론 주님께는 모든 권세와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사소한 일에서부터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하는 운명적인 결정까지도 아버지의 뜻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에 아버지의 뜻을 구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셨습니다. 한번도 아버지의 뜻을 무시하거나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짜 순종이요, 공경이며 효도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아버지가 예수님의 머리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머리로 하여 머리가 주는 생각과 마음으로 사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셨고, 예수님 안에 아버지께서 계셨습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은 하나이셨습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은 한 몸이셨습니다. 때문에 진정한 효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우리 육신의 부모님께 효도해야 합니다. 육신의 부모님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하나님의 대리권자이십니다. 그래서 세익스피어는 ‘부모님의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이다’라고까지 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도 우리 주님께서 행하셨던 효도를 우리 육신의 부모님께 실천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머리로 하여 철저하게 순종하며 사셨던 것처럼 우리 육신의 부모님의 육신의 피로 하나된 우리도 육신의 부모님께 효도함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즉,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공경해야 함이요, 육신적으로는 육신의 부모님께 효도해야 합니다. 육신의 부모님께 효도함이 영의 아버지께 효도함이요, 육신의 부모님께 불효함은 영의 아버지께 불효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효도는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이 효도라는 말입니다.
효도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래서 효도는 하나님의 약속 있는 첫 계명(엡6:2)이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이 세상에 아버지라는 호칭은 두 가지 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육신의 아버지께만 붙이는 고유한 이름입니다. 그래서 부모 공경과 하나님 공경이라는 공경은 ‘카베드’라는 단어로 같습니다(엡6:1, 잠3:9). 때문에 하나님 공경을 잘하는 사람은 부모 공경을 잘 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께 순종을 잘하는 사람은 당연히 부모님께 순종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믿음이 좋은 사람은 효도를 잘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 자녀가 효도하는 자녀가 되기 원하시면 부모 된 우리가 먼저 효도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효도를 실천하시며 사셨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효도를 육신의 부모님께 행하여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이 행하셨던 효를 실천하며 사는 방법은 율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이른바 효도를 배우고 가르침을 받아서 실천하기는 어렵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효가 없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인 효도는 우리 주님께만 있습니다. 그분은 주변의 어떤 것과 비교할 필요도 없었고, 눈치 볼 것도 없었으며, 다른 이해 가치를 따질 필요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효도는 절대적인 효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효를 실천하려면 우리 안에 예수님이 나의 주, 나의 왕, 나의 머리로 계셔야 합니다. 한마디로 내가 예수님의 성전이 되어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내안에 계시는 절대적인 효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로 하여금 효도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효도하려면 정말 힘이 듭니다. 때로는 섭섭하고 낙심되며 포기하고 싶은 충동도 일어납니다. 그러나 내안에 계시는 주님께서 내 마음을 만지시고 나로 하여금 부모님을 사랑하고 공경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면 비록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효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죄송하지만 부모 된 자가 먼저 효도하지 않으면 자녀들로부터 효도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것은 영의 아버지 하나님께 효도하는 것이나 육신의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 다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우리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 영적인 효도나 육신의 효도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모시고 살지 않으면 절대 자녀들에게서 성경적인 효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물론 육신의 효도는 할 수 있을지라도 말입니다. 진정한 효도는 하나님의 가르치심대로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효도는 기준도 없고 만족도 없으며 가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르치신 효도만 진짜 효도입니다.
아무리 우리 주변에 효도를 잘하는 자식이 있을지라도 우리의 모델이 될 수 없습니다. 미안하지만 인간들의 효는 절대적인 개념보다는 상대적인 개념이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효는 절대적인 효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효를 본받아야 합니다. 그분이 행하셨던 효를 배우고 그분이 행하셨던 효를 실천해야 합니다. 자녀들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듯이 육신의 부모님께 순종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육신의 부모님도 공경해야 합니다.
고사 성어에 반포지효라는 말이 있습니다. 알다시피 까마귀 새끼가 자라서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날라다 봉양한다는 말입니다. 명나라 말기 박물학자 이시진이라는 사람의 ‘본초강목’이라는 책에 보면 까마귀의 습성이 나옵니다. 까마귀는 부화한지 60일 동안은 어미가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지만, 이후에는 새끼가 자라서 먹이 사냥에 힘이 부친 어미를 먹여 살린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 까마귀를 자오(인자한 까마귀), 또는 반포조라고 합니다. 곧 까마귀가 어미를 되먹이는 습성을 반포라고 합니다. 이처럼 말 못하는 까마귀도 효를 실천하는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효를 안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혐오하는 쥐도 늙으면 털이 빠지고 밤눈이 어두워지고 동작이 느려서 고양이나 사람에게 잡힐까 두려워 먹이사냥을 힘들어 한답니다. 그러면 새끼 쥐가 어미 쥐에게 먹을 것을 물어다가 봉양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솔개라는 새는 새끼들이 둥지 안에서 어미 새가 물어다가 주는 먹이를 먹고 자라다가 덩치가 커지면 둥지가 좁아질 때 어미 새를 둥지 밖으로 몰아내어 버린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효도하지 않는 자식은 까마귀보다 못하고 쥐새끼보다 못한 자식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효도하지 않는 자식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말씀하십니다(잠30:17).
(2) 노아 가정의 효도 이야기
우리가 부모님께 효도할 이유는 부모님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축복과 저주의 대리권자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효도하는 자식과 불효하는 자식의 결과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노아는 아담의 8대손입니다. 노아는 아들이 셋입니다. 셈과 함과 야벳입니다. 그들이 모두 결혼해서 며느리를 얻었습니다. 노아의 가족은 여덟 식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노아는 120년 동안 하나님의 홍수명령을 받고 방주를 지어서 자기 가족 8식구를 구원해내고 95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야기는 홍수가 끝난 후의 이야기입니다. 홍수 후의 세상은 온통 노아의 세상이었습니다. 본문 19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노아의 이 세 아들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 홍수심판이 끝나고 세상이 새 판짜기에 들어간 것입니다. 노아는 포도농사를 지었습니다. 포도는 무성했고 포도주를 만들어 마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아는 포도주를 취하도록 마셨습니다. 아무리 의로운 노아지만 술에 취하여 실수를 하고 맙니다.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상태로 잠을 잔 것입니다. 전 세계인이 보는 앞에서 말입니다.
벌거벗은 채로 잠이 든 노아의 모습을 가장 먼저 둘째 아들 함이 발견했습니다. 함은 아버지의 벌거벗은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자기 두 형제들에게 고하였습니다(22절). 내용상으로 볼 때 동네방네 사람들이 듣도록 고함을 쳤던 것입니다. 물론 전 세계인들 앞에서 말입니다. 결국 술이 깨고 난 노아로부터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한다는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준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게 됩니다.
부모는 하나님으로부터 자기 자식의 축복과 저주권을 위임받은 대리권자입니다. 노아도 세 아들의 부모로서 하나님이 위임하신 축복과 저주권을 가진 자였습니다. 얼마든지 자식들을 축복하고 저주할 수 있는 권세를 위탁받은 것입니다. 그만큼 부모의 자리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부모는 자기 자식들이 복을 받기 원하지만 다 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축복과 저주의 최종 결정권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부모의 축복권과 저주권을 충분히 존중하십니다. 모든 복은 하나님의 소유지만 자식을 향한 축복권은 부모에게 위임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녀를 축복함에 있어 세상 어떤 사람보다 부모의 영향력이 가장 크고 효력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저주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문에 자식에게 악담이나 험담은 금해야 합니다. 부모의 말에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저주권을 발동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나 부모에게 이런 권세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때문에 부모에게 위임하신 하나님의 축복권과 저주권을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경홀히 여기거나, 만홀히 여기지도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소홀히 여기는 것과 경홀히 여기고 만홀히 여기는 것은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소홀히 여기는 것은 잊어버리는 것이요, 경홀히 여기는 것은 가벼이 여김이요, 만홀히 여기는 것은 완전히 무시하는 것입니다. 사실 효도는 큰 것이 아닙니다. 할 수 없는 일이 아닙니다. 효도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물질은 없을지라도 마음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권세는 없을지라도 마음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효도는 모든 자식들이 누구나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효도는 부모님의 권위를 인정해주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부모님의 감정을 자극하여 인격을 상하게 하는 말이나 행동을 결코 해서는 안됩니다.
미안하지만 부모와 자식의 세대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최소한 몇 십 년의 세월은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물론 시간적인 차이나 시대적인 차이만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같이 속도감이 빠른 세대 속에서는 그 차이가 실로 엄청날 것입니다. 한마디로 양자의 갭을 조정하기가 힘들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상당수의 자식들이 부모세대를 향하여 아무 것도 모른다고 은근히 핀잔을 주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불효의 샘플입니다. 우리는 오뉴월 하루 볕이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최소 30년 전후의 부모와 자식의 시대적인 갭을 무엇으로 수평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편합니다. 자식이 부모를 이해하는 것이 쉽다는 말입니다. 절대 말이나 생각으로 부모를 무시하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고기 한 근 대접해 드리지 않아도 부모님의 권위를 무너뜨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용돈 한 푼 드리지 않아도 부모님의 권위는 절대 건드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즘 들어 부모님의 자존심을 은근히 짓밟고 무시하는 자식들이 늘어나는 것은 현대판 불효의 전형적인 추세입니다. 효도는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입니다. 효도하는 자식은 하나님이 반드시 책임져 주십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사랑과 효도의 관계입니다. 모든 부모는 가르치지 않아도 자식을 사랑할 줄 압니다. 그러나 자식은 부모공경의 효도를 가르쳐도 못합니다. 그러기에 효도는 가르쳐야 합니다. 효를 모르면서 부모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속임수요, 위선입니다. 그런 사랑은 얼마든지 변질될 위험이 있고 악용될 소지가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말에 “아버지가 누더기 걸치고 있으면 자식은 모른 척 하지만, 아버지가 돈주머니 차고 계시면 자식은 효자가 된다”는 말도 있습니다.
(3) 작은 효도 큰 축복, 작은 불효 큰 저주
그러므로 부모님을 향한 효심이나 효행이 결국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속에 나오는 노아의 세 아들들의 운명을 보십시오. 한번의 효와 불효로 말미암아 이들의 운명이 어떻게 바뀌었는지요? 야속하다고 말할는지 모르지만 노아의 가정에 있었던 한 사건이 이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분수령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들의 작은 효심 하나가 큰 축복이 되었고, 이들의 가벼운 행동 하나가 큰 저주가 되었습니다. 노아의 세 아들들의 운명은 완전히 바뀌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말입니다.
술에서 깨어난 노아가 함을 저주합니다(25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함의 저주라기보다는 함의 아들 가나안(함의 4째 아들, 창10:6)에 대한 저주였습니다. 이유를 추측해 보건데 노아와 세 아들들은 이미 하나님의 축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노와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9:1). 중요한 것은 불효자 함의 후예들이 저주를 피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인류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이들은 지금도 그 저주의 효력아래 살아가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흑인들은 함의 후예들입니다. 구스(에디오피아), 미스라임(이집트북부), 붓(리비아)등을 위시하여 오늘날 주로 흑인들의 거주지를 지칭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함의 아들들이 눈이 붉은 것은 노아의 술 취한 붉은 몸을 보았기 때문이요, 그들의 입술이 두툼하고 흉하게 보이는 것은 입술로 못된 말을 함이며, 벌거벗고 사는 이유는 벌거벗은 아비의 몸을 보았기 때문이요, 또한 곱슬곱슬한 머리를 가진 것은 술 취한 아비의 몸을 보고서 머리를 갸우뚱거렸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너무 지나친 언어적 유희지만 한번쯤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않고 옷을 취하여 뒷걸음쳐 들어가서 허물을 덮어준 셈과 야벳의 효심은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셈과 야벳의 축복을 보십시오. 26-27절입니다. 야벳은 주로 유럽의 조상들로서 백인종을 이루게 됩니다. 주로 영국이나 독일, 덴마크, 스페인 미국인들이라고 볼 수 있지요. 사실 이들이 세계사의 주역 같은 역할을 담당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당시 칼빈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셈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지금까지는 이루어지지 아니하셨다. 장차 앞으로 일일지는 모르지만”. 누구도 그들이 세계사의 흐름에 선두주자 역할을 해온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앞으로 어떤 지각변동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유효합니다. 셈족을 통해서 하나님이 세계사의 영적질서를 세워 가시는 것입니다. 셈족은 주로 황색계통을 이루는 바 모든 영적인 주도권을 사실상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 역시 셈의 계보이며, 셈의 계보는 구원의 계보입니다. 그래서 26절에 보면,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노아의 가정에서 일어난 아주 사소하게만 보였던 한 사건으로 인하여 거대한 축복과 저주의 물줄기가 나누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효와 불효로 인하여 인류 역사의 흐름이 바뀌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비록 사소하게만 보였던 노아 가정의 한 단회적인 사건으로 말미암아 어떤 자식은 엄청난 축복의 조상이 되고, 어떤 자식은 저주의 조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부모를 공경하여 복을 받는 주인공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식은 부모를 공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우리는 효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다만 진정한 효도는 주님 안에서만 가능함을 잊지 마십시다.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효도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 안에서 육신의 부모님께 효도함을 잊지 마십시다. 주님의 성전 된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부모님을 공경하고 순종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효도는 반드시 주님 안에서 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하라는 것은 주님의 성전 된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다 같이 에베소서6장1-3절의 말씀을 찾아 읽어보며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