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상처를 치유(治癒)하려면
어느 누구나 험난한 인생길을 살아가다보면 예외 없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입게 마련이다. 아무리 선하고 정의로운 일을 도모하는 경우에도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은 더 나을 것이 없으니, 인간은 누구나 원죄(原罪)로 인하여 그 마음에 타고난 죄성(罪性)을 품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治癒)하고 극복하여 오히려 이 상처를 새로운 발전의 동력이 되게 하여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계기로 삼느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인류역사가 말해주듯이 인간의 능력으로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으며 오로지 영원불멸의 진리이신 하나님께 의뢰(依賴)하는 길 밖에는 달리 방도(方道)가 없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이는 이사야 43장 18-20절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의뢰하는 신자(信者)들을 향해 말씀하신 메시지이다. 이 말씀을 들은 한 시편의 기자(記者)는 시편 10편 14절에서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孤兒)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라고 확신에 찬 고백을 하였다.
우리는 이 시편 10편의 기자와 같은 마음을 지닐 수 있도록 평소에 진리를 찾아서 배우고 익힘으로 그 말씀 안으로 온전하게 들어가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되면 우리는 주변의 뭇사람들의 허튼 소리나 비방(誹謗)이나 중상모략(中傷謀略)에 전혀 마음이 상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 말들을 새로운 발전의 동력으로 삼을 수가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남들의 하는 말들을 진리이신 하나님의 관점과 시각에서 모두 여과(濾過)하여 들을 줄을 알아야한다는 것으로 평소에 그런 능력을 키워나가야 하는 것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장 32절).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진리에 찾아서 알고 몸에 익힐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에 우리가 주목할 말은 “누구도 진리를 그대의 머릿속에 집어 넣어주지 않는다. 진리는 다만 그대 스스로가 그대의 힘으로 찾아 내야하는 것이다”라는 노암 촘스키(Noam Chomsky)의 말이다. 성경에서 누차 주의하라고 경고한 바대로 세상에는 사이비 선지자와 이단아(異端兒)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인류역사상 유일하게 스스로 진리라고 말씀하고 그 생명력을 잃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중심에 놓고 바라보되, 그 말씀들의 해석에 있어서는 반드시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양심과 동서고금의 불멸의 경전과 고전들을 두루 알아 이에 비추어 여과해서 해석해야만 한다. 특히 지금까지의 서양문화 일변도의 해석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특히 우리는 우리 조상인 율곡 이이 선생이 “뜻을 세우는 것과 밝게 아는 것과 독실하게 행하는 것 모두가 나 자신에게 달려있다[지지립 지지명 행지독 개재아이(志之立 知之明 行之篤 皆在我耳)]<격몽요결(擊蒙要訣)>”라고 한 말씀과, 백강 이경여 선생이 “학문은 견문을 넓히고 의아(疑訝)한 것을 알려는 것이니, 배움이 높아지려면 목표와 결의가 있어야한다. 학문하는 길은 만 가지가 있으나 궁극은 하나이니, 반드시 인심을 옳게 파악해서 위험한 길에 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學貴多聞 且闕疑 升高致遠 有前期(학귀다문 차궐의 승고치원 유전기) 千塗萬轍 同歸一 要把人心 戒入危(천도만철 동귀일 요파인심 계입위)]”라고 한 말씀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2023.12.18. 素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