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가 재란 누나의 얼굴이 유리창에 너무 가까이 닿아 일그러졌다.
코와 입술이 찌그러들었다. 우스웠다. 내가 막 소리를 내어 웃었다.
이번에는 내가 얼굴을 유리창에 갖다대었다.
재란 누나가 창밖에서 찌그러진 내 얼굴을 보고 낄낄거렸다.
그런데 그때 참으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재란 누나가 갑자기 유리창에 입술을 갖다대었다.
이번에는 장난기가 있는, 일부러 흉하게 일그러뜨린 입술이 아니었다.
살짝 눈을 감고 뭔가 내 입술을 기다리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런 누나를 한참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누나의 입술 위에 내 입술을 포개었다.
재란 누나는 창밖에 있었고, 나는 창 안에 있었다.
재란 누나와 내 입술 사이에는 유리창이 가로놓여 있엇다.
그러나 그런 사실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한참 동안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키스를 했다.
정말 영화에서 본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키스를 하는 것 같았다.
가슴은 한없이 쿵쾅대었다. 비록 유리창을 사이에 둔 키스였지만
재란 누나의 부드러운 입술 감각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재란누나의 얼굴이 감홍시처럼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나도 얼굴이 저녁놀처럼 벌겋게 달아 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뿐이었다. 그것이 내가 여자하고 해본 첫 키스였다.
정호승- 나의 첫키스 (부분)
가을비가 촉촉히 내리고 있습니다. 산도 젖고 강도 젖고 풀잎들도 젖고 마음도 젖습니다.
가을비 내리면 추워지고 봄비 내리면 따뜻해진다는 데,
이 비 그치면 들판의 곡식들은 더욱 더 깊이 고개 숙이며 익어가고,
강가에 풀잎들은 노랗게 말라가리, 아, 가을의 강가에 가 보았는지.
해맑은 햇살 속에 마른 풀잎들이 사각이는 겨울 강가에 서서 저무는 물을 보았는지.
외로움처럼 키 큰 포풀러 마른 잎이 다지고 마른 풀섶에 샛노란 산국이 지고,
단풍 지면 산산이 빈산이 되어 저 강에는 겨울이 오고
저 강물로 하얀 눈송이들도 겁도없이 하얗게 내리리라.
그러면 나는 강가에 서서 강물로 사라지는 눈송이 들을 보리,
내게 사랑은 늘 그렇게 왔다네.
계절처럼! 소리없이 왔다가 소리 없이 사라지면서 잎 피고 바람 불고 눈내리고 비가 왔다네.
그 여자네 집은 우리 동네 윗동네에 있습니다
그 여자네 집 가는 길엔 벼가 익고 개구리가 울고 감나무가 있고
보리가 겨울 달빛 속에 자랐습니다.
그 여자네 집 가는 길에 하얀 감자꽃이 피고 들국화가 피고
구절초가 피고 산 벚꽃이 피고 강가에는, 강가에는 검은 바위들이 달밤에 번쩍거렸습니다.
풀벌레 울고 밤 산에서 소쩍새 울고 부엉새가 부엉부엉 울었습니다.
어두운 밤에도 굽이굽이 하얗게 살아나던 길, 달이 뜨면 뽀?게 떠 보이는,
적막하고 다정한 길이 늘 펼쳐졌답니다.
해 저물고 바람 불면 바람 따라 길 따라 하얗게 춤을 추던 개망초꽃,
그리고 해맑은 풀잎들. 그 길은 슬프고 외롭고 쓸쓸하고 그리고 정다운 길입니다.
아버지들이 하얀 달빛을 받으며 나락을 져 나르던 길이며,
어머니들이 애기 업고 머리에 곡식을 져 나르던 길입니다.
내 누이들이 돈 벌러 가던 길이며, 동무들이 밤도망!을 치던 길입니다.
어머니들이 울면서 자식들을 떠나보내고 눈물로 자식들을 기다리던 길입니다.
꽃길입니다. 서러운 눈물 뿌리던 길입니다.
기쁨의 길입니다. 그 여자를 만나러 가는 내 사랑의 길이기도 합니다.
그 여자는 꽃같이 고운 열아홉이었습니다.
그 여자네 집을 가는 길엔 한 그루의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습니다.
그 느티나무 앞에는 작은 들판이 펼쳐져 있고 그 들 끝에는 언제나 강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들 끝에 그 여자네 무 밭이 있습니다. 그 무 밭에는 늘 곡식들이 다 떠난 들판에
파란무들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이따금 그 무 밭에서 무나 배추를 뽑아 머리에 이고 가기도 했습니다.
그 느티나무 부근에는 또 그 여자네 밭이 있고 그 밭에는 그 여자네 어머니가
늘 하얀 수건을 쓰고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밭가에는 토란잎이 넙적하게 자라기도 하고,
가지가 열리기도 하고, 오이가 열리기도 하고,
그 여자가 그 여자 어머니와 함께 통밭을 매기도 했습니다.
가을이 되면 감이 붉게 익고 그 여자가 감 망으로 감을 따가가
내가 지나가도 못 본 척하기도 했습니다.
그 여자 꽃같이 고운 열아홉 그 여자는 어머니랑 같이 그 나무 아래를 지나며
나를 못 본 척 눈을 내리깔고 그냥 지나갑니다.
그러나 어디만큼 가서는 얼른 뒤를 돌아다봅니다.
뒤태가 이뻤던 그 여자는 그때 꽃같이 고운 열아홉이었습니다.
그 여자가 나를 힐끗 뒤돌아본 날 밤이면 그 여자는 그 느티나무에서 나를 기다렸습니다.
나느 달빛을 받으며 그 길을 걸어 그 여자를 만나러 갔습니다.
먼 산에서 우는 소쩍새 소리를 들으며, 물소리를 차며 그 여자를 만나러 갔습니다.
검정 우산같이 달 그늘을 거느린 그 느티나무를 보면 나는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 여자는 커다란 느티나무에 등을 대고 기대어 서서 달을 보며 나를 기다렸습니다.
스웨터를 여미며 나를 보고 웃는 그 여자는 달빛 아래 하얗게 핀 박꽃이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들은 밤이면 그 느티나무 등 뒤에서 만났습니다.
어쩌다가 밤 늦게 사람이 지나가면 우리둘이는
그 나무 등에 딱 붙어서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 우리들은 너무 가슴이 뛰고 그리고 너무 좋았습니다.
어찌나 가슴이 쿵쿵 뛰는지 느티나무가 다 흔들리는지 느티나무가 다 흔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 여자의 숨소리, 따뜻해져오는 몸, 그리고 어색하게 더듬어 찾던 손과 마주치던 눈길들.
길 가던 사람이 지나가도 우린 한참을 그렇게 오래 느티나무 등 뒤에 서 있었답니다.
어떤 날 밤은 그 여자가 우리 집으로 오기도 했습니다.
동무들과 같이 와서 내 방문에 밤톨만 한 돌멩이를 던졌습니다.
뒷문으로 얼른 들어온 그 여자는, 동무들과 같이 있으면 늘 내게 무심한 듯했습니다.
멀리멀리 돌아서야 내게 닿는 애매한 말을 했지만 나는 그 말이 내게 한 말임을 잘 알았습니다.
어쩔 대는 평소 우리 둘의 뜻과는 너무 엉뚱한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방은 따뜻했고 우리들은 이불 속에다 두 다리를 뻗고 앉아 놀았습니다.
나는 그 여자의 발을 찾다가 다른 여자의 발을 잘못 건드리기도 했지만
우리 둘의 발이 닿으면 우리만 아는 웃음을 웃으며 좋아했습니다.
우리들은 늘 만나 놀았습니다. 이웃마을에 사는 총각들과 처녀들이 만나 놀 때도 있었고
삼사동네 젊은 청춘들이 만나 밤을 새워 강가에서 놀았습니다.
달 뜬 밤 우리들의 젊음을 견디지 못해 우리들은 우리들의 장소에서 만나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며 놀았습니다. 강가에서 만나 밤이슬이 내릴 때까지 놀았습니다.
그렇게 사람들 속에 섞여 있어도 우리 둘은 어떻게든 또 따로 만났습니다.
넓은 바위 위에서 나는 눕고 그 여자는 내 곁에 앉아 달을 보며 우리들은 행복했습니다.
먼 데서 사람들의 웃는 소리 떠드는 소리가 까마득하게 들려왔습니다.
그럴 때 일수록 우린 우리 둘이라는게 그렇게 실감나고 호젓하고 좋았습니다.
그 여자, 생각하면 숨소리가 들릴 것 같은 그 여자네 집은 우리 동네 윗동네에 있습니다.
김용택 - 그 여자 (부분)
대웅전 정 처마 귀퉁이를 받치고 있는 나신상 때문이었습니다.
부끄럽게도 아니 몰상식하게도 엄숙한 대웅전 처마 네 귀퉁이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 나신상이라니.... 누가 이 절을 지었을까? 궁금했습니다.
그러다가 이 대웅전을 지은 도편수의 사연을 듣게 되었습니다.
당대의 명공이었던 도편수는 전등사 대웅전 건립을 책임지고 공사에 들어가던 중
우연히 마을의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됐답니다. 깊은 사랑에 빠진 이 도편수는 공사가 끝나면
그 여인과 살림을 차릴 생각으로 대웅전 공사 노임 모두를 그녀에게 맡겼습니다.
그러나 공사가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마음이 변해 도편수의 돈을 모두 갖고
다른 남자와 도망을 쳤습니다.
그것을 안 도편수는 실의에 빠져 더 이상 공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미움과 증오가 솟구쳤을까요.
식음을 전폐하고 배회하던 도편수는 어느 날 다시 연장을 잡고
끝내는 대웅보전의 네 귀퉁이에 그 여인의 나체상을 조각해 넣어
평생 무거운 지붕을 더받치게 했답니다.
뭇사람들에게 알몸을 드러내는 수치심을 겪도록 하면서 말입니다.
그 여인이 얼마나 미웠으면 벌거벗긴 채 무거운 지붕을 받치고 있어야 하는
억겁의 고통을 주었을까요. 전등사를 나오면서 그 도편수의 마음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에 대한 증오의 마음도 일종의 사랑을 향한 또다른 그리움이라는 것입니다.
전등사를 나오는 길에 추적추적 비가 내렸습니다.
나는 아주 못되게도 내 마음의 사랑을 그 나신상에 올려놓았습니다.
이 땅에 모든 미운 사랑은 그녀만이 지고 있도록 말입니다.
왠지 마음이 후련해지면서도 슬퍼집니다. 그녀를 사랑했나 봅니다.
전등사에 가면 내 오래전 잃어버린 그립도록 미운 사랑이 있습니다.
권대웅 - 오래전 잃어버린 그립도록 미운 사랑 (부분)
나타샤, 노란 은행잎이 마치 눈처럼 내리는 늦가을 입니다.
은행잎들이 사라질 때쯤이면 그 자리에 또 눈이 내려 쌓이는 겨울이 오겠지요.
나는 나타샤, 라는 말을 들으면 당신의 이름 뒤쪽으로 왠지 눈이 내리고 있을 것 같고,
눈부신 허벅지의 자작나무숲이 펼쳐져 있을 것 같고.
당신이 홀연 나타날 것만 같아서 숨이 막힌답니다.
백석의 시에서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습니다.
나는 백석이라는 사내가 무척 부러웠습니다.
나도 백석처럼 가난했으나 내게는 아름다운 나타샤도 흰 당나귀도 없었으니까요.
그래도 백석이 되어보려고 혼자 쓸쓸히 앉아 눈 내리는 북방을 생각하며
밤새워 소주를 퍼마시기도 했지요.
그렇게 몇 날 며칠 술을 마셔대도 나타샤 당신은 오지 않더군요.
당신에 대해 내가 아는 건 당신이 아름답다는 것과
내가 사랑하는 한 시인이 당신을 사랑했다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마음으로 그려볼 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아마 당신은 흰 눈을 닮았을 것 같습니다.
손으로 만지거나 가까이 가슴에 품으면 금세 녹아 없어지는,
눈물이 되어 녹아버리는 당신은 혹 그런 사람이 아닌가요?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 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데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과 짧고도 뜨거운 연애를 했던 자야 여사는 누런 미농지 봉투 속에 든 이시를 직접 받았다 했고, 1938년 당시 <삼천리> 잡지 기자엿던 소설가 최정희 선생은 백석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자
이 시를 보내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통영 처녀 박경련과의 러브스토리도 공개된 적이 있지요.
과연 이 중에서 나타샤가 누구 일까 하고 세간에는 말이 많았지요.
나타샤 하지만 당신이 누구인지 내게는 그게 그리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은 여인들에게 이시를 건네주며
사랑의 무기로 활용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나는 이 시에서
"가난한 내가 /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오늘 밤 푹푹 눈이 나린다?"는 구절을 좋아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눈이 내린다는 겁니다! 눈이 내리는 날 만나자 어쩌고저쩌고 하는
유행가풍의 사랑법을 일거에 격파하는 솜씨가 멋지지 않습니까?
게다가 연인에게 산골로 가서 살자고하면서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데 지는 것이 아니다 /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라고
당당하게 말할 줄 아는 사내는 백석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을 겁니다.
누군들 이런 목소리에 빨려들지 않겠는지요. 나타샤 내말을 서운하게 듣지 마십시요.
어저면 백석에게는 나타샤가 아예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가해 봤습니다.
물론 많은 여자가 그의 주변에 있었만 그 어떤 남자에게도 나타샤는 없는 게 아닐까요?
없기 때문에 또 모든 남자들은 나탸샤를 그리워하는게 아닐까요?
안도현 - 그리운 나타샤에게 (부분)
구욱구욱 물수리는 강가 숲 속에서 우는데.
대장부의 좋은 베필, 아리따운 고운 아가씨는 어디 있는고,
올망졸망 마름풀을 이리저리 헤치며 뜯노라니
아리따운 아가씨, 자나 깨나 그립네.
올망졸망 마름풀을 이리저리 헤치며 뜯노라니
아리따운 고운 아가씨와 금슬 좋게 벗하고 싶네
<시경>의 <물수리>는 두고두고 읽어도 좋은, 최고의 시 입니다.
옛날 옛적 2500년도 더 된 옛날 평범한 한 남자의 사랑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의 마음에도 다가와 감동을 주는 게 신기합니다.
좋은 시는 이렇듯 영원한 생명을 지닌 시일 것입니다.
이 시를 읽노라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한 남자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 남자 속에 또 보이지않는 한 아가씨가 서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시집일 <시경>의 첫 시가 이렇게
부부의 인연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주 의미있어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물수리>는 '모든 시의 어머니'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구욱구욱, 그 모든 사연을 알고 있는 듯한 물수리의 울음소리가 오래도록 귓가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고형렬 - 지금 막 사랑에 눈뜬 소년을 위하여 (부분)
"그래 맞아. 사랑은 햇살이 비추기 전 끼어 있던 구름 같은 거란다.
너도 알겠지만, 우리는 구름을 만질 수는 없단다.
그러나 비를 만질 수는 있지. 한낮의 무더위에 시달려 목마른 대지와 꽃들이
이 단비를 받아 마시고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도 잘 알잖니?
사랑도 꼭 그렇단다. 손에 잡히지 않지만 모든 것 위에 부어지는 그 달콤함만은 느낄 수 있지.
사랑이 없다면 행복하지도 뭘 하고 싶지도 않을 거야."
그녀는 이 아름다운 진리가 자신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고 한다.
사람과 사람의 영혼을 연결하는 보이지 않은 끈을 본 것이다.
이 후의 삶은 이러한 보이지 않는 끈을 보고서 우리에게 그것을 연결시켜주는 삶이었다.
보지 못하는 이가 본 것을 볼 수 있는 우리는 보지 못했다.
단 몇 초의 미래도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래서인지 그녀가 선택한 아름다운 삶은 우리에게 수없이 많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녀에게 죽음은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마지막 메세지로만 기억된다.
몸은 죽어도 영혼은 살아 있다는 말이있다.
그녀의 영혼이 그러하다.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이미 세상에서 제일 밝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영혼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랑의 의미를 안다는 것, 당신과 내가 연결되어 있고,
그 사이를 어떠한 장애도 가로막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헬렌켈러의 삶을 통하여 절실히 느끼고야 만다.
지금 당장, 오늘 하루가 마지막인 것처럼,
가까이 혹은 멀리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리라.
생의 마침표는 사랑으로 찍어야 하리라.
원재훈 - 생의 마침표는 사랑으로 찍자 (부분)
한때 당신은 내 생명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한데 당신에게 나는 어떤 존재 였을까요?
생의 굽이굽이에서 예기치 않게 당신을 만난듯
우리가 또 어떻게 어떤 자리에서 어떤 모습으로 마주칠지 모르겠습니다.
원고지를 꺼내 놓고, 이번 원고 청탁을 끝까지 거절하지 못한 것을 여러 차례 후회했습니다.
공개된 지면에 쓰는 '연애편지'라니요.
말도 되지 않는 시도라는 걸 왜 처음엔 깊이 깨닫지 못했는지.
발등을 찍고 싶은 심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연애는 격렬하면서도 눈물겨운 비의로서 객관화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공개하는 건 더욱 더 그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이야 어떻든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해왔고, 당신도 내 생각에 기꺼이 동의하리라 믿습니다.
'미안 합니다.'
스탕달은 말했습니다.
"살았다. 썼다. 사랑했다."
나 또한 그렇습니다.
나는 살았고, 오로지 썼고, 언제나 사랑의 열망이라는 뜨겁고 고통스럽고 황홀한 감옥 속에 갇혀
있었으며, 지금도 그렇습니다. 후회는 없습니다. 후회보다. 돌아보면
나는 축복의 시간 속을 매순간 가파르게 관통해 왔습니다.
이 촘촘한 그물망 속에서,
정글의 야만적 법칙에 따른 치열한 경쟁심을 앞세워야 살아 남을 수 있는 세상에서,
오로지 쓰고 사랑하며 살 수 있다는 건 그야말로 은혜가 아닐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시간이라 할 수는 없겠으나 많은 시간이 생생했고,
모든 공간이라 할 수는 없겠으나 많은 공간이 고정돼 있지 않았습니다.
당신과 함께했던 순간은 더욱 그랬지요.
당신과 만날 때마다 나는 언제나 감을 수 있을 때까지
감아 놓은 가파른 현과 같았습니다.
당신이 손끝만 내밀어도,
아니 당신이 눈빛만 보내도 내 온몸이 떨면서 음악 소리를 냈습니다.
나의 현들은 자주 비병을 질렀고 자주 불협화음을 냈고
또 자주 황홀한 고통으로 찢어졌습니다.
나는 과연 당신을 사랑한 것일까요, 아니면 나를 더 사랑했던 것일까요.
우리는 흘러갑니다.
흐르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사랑으로 인해 불변의 금강석처럼 남아 있는 것은 사실 거의 없습니다.
그래도 시시각각 내 안에서 무엇인가 타고 있는 걸 봅니다. 허수아비 같은,
실재하지 않는 헛것들이 아직도 불타는 걸 지켜보고 견뎌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누구는 그것을 그리움이라고 하고, 또 누구는 그것을 열망이라고 부릅니다.
그때 그 순간이 과연 무엇의 시작이었는지 모호한 것처럼,
지금 이 순간이 무엇의 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건 바라지 않겠습니다.
늘 환하게 사십시오.
봄꽃은 소월의 시에서처럼 '저만치'에서 황홀하게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 '봄꽃'과 우두커니 그것을 바라보고 서 있는 '나' 사이의 거리 따위는 그만 잊겠습니다.
지금 떠오르는 모습이 수십 년 전의 당신인 것 같고,
엊그제 꿈속에서 만난 당신인 것도 같고,
또는 전생의 당신인 것도 같습니다.
부드러운 안개가 흘러가지만 '천 년 전부터'거기 있었던 벚꽃 환한 그늘에
은신한 당신이 비로소 따뜻하고 넉넉하게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을 보니, 이 봄날이 참 환합니다.
박범신 - 이 봄날이 참 환합니다 (부분)
님! 그대 가시는 그 길에
내 자신은 낙엽이 되게 노력합니다.
님! 그대 있는 그곳에
내 자신은 천막이 되게 노력합니다.
님! 그대 아무리 빈 잔이라도
내 자신은 그 잔을 가득 채우도록 노력합니다.
사랑은 모든 이를 시인으로 만든다더니 재이는 그 다음날 정말 시인이 되어 나타났다.
태어나서 처음 썼다는 시를 의기양양하게 두 편이나 내 앞에 내밀었다.
재이의 글에는 사랑에 빠진 스무살 남자의 진심어린 흥분과 열기가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나를 생각하느라 늦은 밤까지 잠들지 못하고 수많은 파지를 내던지며
몇번이나 고쳐 썼을 재이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전혀 문학적이지 않은 표현이었지만
나를 향한 천진하고 순수한 마음은 나를 감동시키고 말았다.
뾰요한 당신의 눈빛은
한 폭의 그림인 것 같습니다.
낙엽 위 그대의 눈길은
한 권의 시집인 것 같습니다.
우리!
이 자리에 있는 영혼들
하얗고 눈부시게 빛나는 것 같습니다.
두번째 시는 훨씬 더 들떠 있었다. 그런데 그 뾰요한 눈이란 게 대체 어떤 눈일까
너무 궁금해졌다. 처음 보는 낱말이었다.
한폭의 그림과 한 권의 시집에 비유한 걸 보면 나쁜 뜻은 아닌 것 같았다.
혹시라도 마음 다칠까봐 무슨 뜻이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의 예쁜 눈을 묘사한 거야. 느낌이 팍 오지 않아?"
나를 위해 시를 쓴 재이, 그만큼 나를 좋아하는 마음이 소중했다.
나는 꾀 오랫동안 재이의 시를 수첩에 넣고 다녔다.
"네 심장만 뛰면 언제까지나 네 옆에 있을 수 있어"라고 내게 속삭이던 재이의 마음은
그 순간 진실했고 나는 진심으로 재이의 사랑을 믿었다.
세상엔 재이와 나의 사랑 이외에 가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세상의 중심은 재이와 나 , 우리 사랑이었다.
스무 살의 사랑은 멈출 줄 몰랐고 순화될 줄 몰랐으며 감춰지지 않았다.
재이는 편지로 내게 청혼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나중에 비록 혼자 남겨진다 해도 당신에 대한 감정은 변치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당신에게 내 모든 것을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까닭입니다.
당신을 가슴에 눈물이 고일 만큼 사랑합니다. 당신은 내 자신의 분신입니다.'
결과적으로 나를 적응시키진 못했지만 재이가 늘 주장하던
사랑의 슬로건은 '열심히 사랑하자. 죽도록 사랑하자. 행복하게 사랑하자."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의 사랑이 영원할 수 없었던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재이의 사랑에 행복하면서도 차츰 숨이 찼다.
재이는 사랑의 행군을 하고 있었다.
나는 따라가다 지쳤고 재이는 자신의 행보를 따라주는 못하는 내게 절망했다.
사랑은 아름답지만 연애는 유치하다.
연애는 다른 사람눈에 한없이 어리고 미숙하게 보인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이들에게 미완이 주는 사랑의 설렘은
연애를 단순한 유치에서 끝내지 않고 찬란하게 만든다.
연애의 빛이 사라지고 나면 다시 건조한 흑백의 세상이 실체를 드러내겠지만
연애의 절정은 그래서 더욱 눈이 부시다.
김규나 - 뾰요한 눈빛, 뾰요한 사랑 (부분)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사랑은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의 이름이라고,
그 갯벌은 가르쳐 주었다.
내 영세한 사랑에도 풍경이 있다면,
아마도 이 빈곤한 물가의 저녁 썰물일 것이었다.
사랑은 물가에 주저앉은 속수무책이었다.
그 여름에 당신의 소매 없는 블라우스 아래도 당신의 흰 팔이 드러났고
푸른 정맥 한 줄기가 살갗 위를 흐르고 있엇다.
당신의 정맥에서는 새벽안개의 냄새가 날 듯했고 당신 몸속의 먼곳을 향했고
그 정맥의 저쪽은 깊어서 보이지 않았다.
내가 당신과 마주 앉아 당신의 이름을 부를 때 당신이 숙였던 고개를 들어서 나를 바라보았고,
당신의 시선이 내 얼굴에 닿았다.
당신의 시선은 내 얼굴을 뚫고 들어와 내 몸속으로 스미는 듯 했고,
나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나의 목소리에 이끌려,
건너와서 내게 닿는 당신의 시선에 경악했다.
내가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부름으로 당신에게 건너가고
그 부름에 응답하는 당신의 시선이 내게 와 닿았을 때,
나는 바다와 내륙 하천 사이의 거리와,
시간과 공간이 일시에 소멸하는 환각을 느꼈다.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김 훈 - 바다의 기별 곡릉천에서 (부분)
사랑을 믿습니까? 영원한 사랑을 믿습니까?
나는 믿습니다. 시간 속에 영원한 사랑에 대해서라면 잘 모르겠지만,
기억 속에 처음 그때와 다름없이 빛나는 사랑이라면, 나는 감히 믿습니다.
기억들. 10대의 마지막과 20대의 처음을 나누어 가졌던,
이제 와 다시 그럴 수 있을까. 싶은 연애의 시간들,
핸드폰도 삐삐도 인터넷도 신용카드도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우리는 겁도 없이 설치고 다녔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무엇보다, 이것이 실제 상황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지긋지긋한 짝사랑과는 뭐가 달라도 많이 다른, 진짜 사랑 말입니다.
살아 있는 사랑, 만질 수 잇는 사랑, 반응하는 사랑, 냄새 맡을 수 잇는 사랑. 전화 통화할 수 있는 사랑. 먹고 마시고 웃고 화내는 사랑. 뽀뽀할 수 있는 사랑. 그리고 안 좋은 점이라면,
이걸 안 좋은 점이라고 할 수 있을찌 송구스럽지만 하고 싶다는 그것이었습니다.
진짜 사랑이니 진짜 하고 싶다는 것
그래서 몹시 괴롭다는 것.
아아, 도대체가 삶이란.
처음엔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누가 내 속을 들여다볼까 걱정스러웠습니다.
열아홉 살. 그간 밥 먹고 물 마신 횟수보다 많았던건 섹스에 대한 공상이었지만
구체적으로 누구와 하고 싶다는 느낌은 처음이었습니다.
헷갈렸습니다. 나는 사랑하는가? 과연 그녀를 사랑하는가? 하고 싶어서 사랑하는가?
백해무익, 답이 없는 혼란이었습니다. 세상의 진짜 사랑이란 이렇던가. 이런 고충이 있었던가.
함께 있다보면 자꾸 이상한 곳(?)에 눈이 갔습니다.
자꾸 만지고 싶었습니다. 자꾸 뽀뽀하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도 모르게 손이 가고 입이 가고 몸이 갔습니다.
특히 둘만의 술집에서 그러했는데, 과하게 뽀뽀하고 허리를 안고 때로
티셔츠 속에 손을 넣었다가 뺨을 맞기 일쑤였습니다.
괴로웠습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괴로웠습니다. 정신뿐 아니었습니다.
육체도 괴로웠습니다. 아팠습니다 엄살떠는 거 아닙니다.
온종일 바지 안이 거북하게 팽창해 있다보면,
그걸 엉거주춤 감추고 온종일 영화를 보고 서점에 가고 공원을 걷고 하는 것도 사뭇 불편한 데다
남들이 알아볼까 고역이지만, 내내 그 상태로 저녁나절이 되면, 배가 아팠습니다.
장염 걸린 것처럼 불알을 잘못 걷어 차인 것처럼 정말로 아랫배가 살살 땅기고 아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 괴로우니
둘 다 집어치우라고 설파한 이 누굽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아랫배 아파지는 고통을, 그 양반도 꿰뚫어 알고 있었을 겁니다.
종일 흐리고 눈 비오던 어느 겨울날, 마침내 나는 고백했습니다 솔직히 털어놓았습니다.
밤하늘에 달이 하필 한 개밖에 없는 것처럼 이제는 일상이 되고 만 내 간절함을.
"그랬어?"
그녀는, 약간의 머뭇거림 끝에 대꾸했습니다.
"그런 거 같더라."
" ...저어 , 너는?"
"나? 나는 별로."
"어, 그래?"
" 응. 나는 싫어."
단호했습니다. '응' 좋아 . 나도 기다렸어." 그런 반응을 기대했던 것 까지는 아니지만,
참으로 실망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낙답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졸라댔습니다. 그리고는 거절당했습니다.
다시 애걸복걸했습니다. 역시 냉랭하게 거절당했습니다.
처음엔 다소곳이 거절하던 그녀가, 결국엔 한심하다는 듯 짜증을 부렸습니다.
처음에는 수줍게 칭얼거리던 내가, 받을 돈 못받은 주인집 여편네처럼 성화를 부렸습니다.
그래요. 그녀는 내 첫사랑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랑. 반응하는 사랑. 만질 수 있는 사랑.
냄새맡을 수 있는 사랑. 진짜 사랑. 하지만 그녀가 왜 갑자기 대천을 생각했던 것인지.
끝내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고작 스무 살이었고, 하지만 5개월 전보다는 그만큼 어른이 되어 있었습니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 다 괜찮아. 세월은 가고 사람도 가고. 하지만 사랑은 남는 것.
흘러간 시간 속에 생생히 남아 숨 쉬는 것. 하여,
내 젊은 기억 속에 아직도 함께 하고 있는 그녀. 뭐하고 있을까요?
여자 나이 마흔 살. 지금 누구와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그때의 나를 혹시 기억하고 있을까요?
몸속 깊이 숨어 있던 종양의 기운을 문득 느끼듯.
나는 새삼스레 깨달았습니다. 대천의 가을밤이 그 시절 그녀와의 마지막이었음을.
사랑을, 영원한 사랑을 믿습니까?
한차현 - 내게도 그런...(부분)
당신을ㅡ 보았습니다.
세상에, 내가 안으로 내뱉은 첫마디였습니다.
그 순간 무서웠습니다. 맹목적으로 당신에게 쏠리는 감정이 무서웠고,
내가 상처받을까봐 두려웠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그 철없던 감정과는 또 다른 파문이었고 몸살이었지요.
전 그 감정으로부터 도망쳐서는 꽁꽁 숨고 싶었습니다.
왠지 내가 크게 아플 것 같아, 내가 바보가 될까봐 나는 나를 숨기고,
내 마음을 숨기고, 그리고 도망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예의 그 미소 띤 얼굴로 다가와 내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은미희 - 당신은 바람 (부분)
그래서.. 그리하여 결국 나는 쓰고야 말았다. 내가 가지 않았던 그 길들에 대해서...
시인은 말했다. 가지 않은 길은 아름답다고, 언젠가를 위해 그 길을 남겨두었노라고,
내가 가지 않았던 그 길들은 아름다웠을까?
그 길을 갔다면 나는 지금가 달라?을까?
알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그 길들을 아쉬워하지 않는다.
나라는 사람 본래 후회는 안하는 편이라서...
일어나지 않는 일도 일어난 일에 못지않은 의미가 있다는 주의이므로...
노랫말처럼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은 사람이라서...
서하진 - 그대의 흰손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