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항률화백이 그려준 소녀상 스님께서 봉순이라 지음
우리가 살 만한 곳은 어디인가
법정스님
한곳에서 12년을 살다 보니 무료해지려고 했다.
내 인생의 60대를 이 오두막에서 보낸 셈이다.
처음 이 곳에 들어올 때는 사람 없는 곳에서
한두 철 지내려던 것이
어느새 훌쩍 열두해가 지났다.
돌아보면, 한 생에도
이렇듯 꿈결처럼
시냇물 처럼 덧없이 흘러가리라.
지난 한 해 동안은
내 마음이 떠서 한곳에 정착하지 못했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새로 삶을 시도했다.
그러다가 올봄에 생각을 돌이켜
다시 이 오두막에 마음을 붙이기로 했다.
그대로 주저앉을 수가 없어
내 성미대로 봄내 집 일을 했다.
삭아서 주저앉은 마루를 갈고
비가 새는 지붕 천장을 덧댔다.
온갖 파충류들의 은신처인
바깥마루를 뜯어내고 거기 구들을 놓았다.
바깥마루 천장에는
'93년 입하절에 보수하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내가 이곳에 들어온 그 이듬해다.
주방도 너무 낡아 죄다 뜯어내고 새로 갈았다.
집 안으로 물이 들어오도록
개울물을 이용해 수도를 놓았다.
불을 지필 때마다 틈새로 연기가 새던
낡은 무쇠난로를 들어내고 새것으로 들여 놓았다.
창 바르고 도배할 일이 남았지만
지쳐서 일단 쉬기로 했다.
누가 보면 쳔년만년 살 것처럼
저러나 싶겠지만
일단 내가 몸담아 사는 주거공간은
내 삶의터전이므로 내 식대로 고쳐야 한다.
오늘 살 다가 내일 떠나는 일이 있더라도
오늘 내 마음이내켜서 하는 일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내 가풍이기도 하다.
그리고 수행자가 살다가 간 빈
자리를 누가 와서 살더라도
덜 불편하도록 하는 것이
또한 내 도리이고 지론이다.
지난해 봄 고랭지의 선연한 빛갈에 매혹되어
작약을 1백 그루나 화원에서 사다가 뜰가에 심었는데,
집을 비운 사이 한 포기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캐 간 도둑이 있었다.
언젠가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폭설로 길이 막히기 전에 미리 올려다 놓은
취사용 가스를 모조리 못쓰게 만든 그런 손도 있었다.
이런 일을 격을 때마다
같은 사람의 처지에서
인간의 소행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영조 때 실학자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라는 책이 있는데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
지형, 풍토풍속, 교통, 각 지방의 고사,
인물에 이르기 까지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그는 사람이 살 만한 조건으로
네 가지를 꼽고 있는데,
자연과 인문사회적인 조건과 함께
그 고장의 인심을 들고 있다.
그의 말을 들어 보자.
"사람이 살 만한 터를 잡는 데는
첫째, 땅과 산과 강 등 지리가 좋아야 하고,
둘째는 땅에서 생산되는 것이 좋아야 하며,
셋째는 인심이 좋아야 하고,
넷째는 아름다운 산과 물이 있어야 한다.
이 네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모자라면
살기 좋은 곳이 아니다."
꿈같은 이야기다.
21세기.
바야흐로 정보화의 물결이
남치고 있는 이 땅에서는
어느 고장을 가릴 것 없이
황량하고 흉포해진
인심의 평준화를 이루고 있다.
사바세계의 인간 말종의 실상을
그대로 연출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세상은
우리가 의지해 살아가야 할 곳이다.
못된 인심보다는
그래도 착한 인심이 훨씬 많다.
우리 둘레에는 예나 다름없이
철 따라 꽃이 피고,
새들이 찾아오고,
마른 나뭇가지에서 새잎이 피어나고 있다.
그리고 내 오두막에서도
여전히 물이 흐르고 꽃이 피고,
우리 봉순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註 ,봉순이 : 박항률 화백이 법정스님에게 그려 준 단정한 얼굴에 단발머리, 노란색 웃옷에 보랏빛
스카프를 두른 소녀상. 봉순이란 이름은 법정 스님이 붙여 준 그림 속 소녀의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