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생활은 낭만이 아니다.
박래여
소설 원고를 쓰다가 멈추고 창밖을 본다. 환한 햇살이다. 숲은 이미 푸름으로 채워졌다. 창문을 열어놓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숲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 나는 곳을 봤다. 고라니가 귀를 쫑긋 세우고 내 쪽을 본다. 나도 가만히 바라본다. 예민한 귀를 가진 짐승이다. 이맘때면 짝을 찾아 우는 고라니 울음을 심심찮게 듣는다. 숲에서 어슬렁거리는 황토색 털을 가진 고라니를 보면 안아주고 싶다. 가끔 나와 눈 맞추기도 하는 녀석인가. 놀라지도 않는다.
농부의 친구가 전원주택 지을 땅을 구한단다. 중고기업체를 운영하는 사람이다. 외국에도 사업체를 내려고 하는 중인데 손자손녀들 생각해서 자연정원을 가진 집을 원한다. 전원주택 붐도 한풀 꺾였다. 농촌에서 나고 자라 도시로 나갔던 사람들 꿈이 시골로 돌아오는 것이라 하던가. 전원주택 붐이 일 때가 있었다. 막상 시골에 살아보니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란다.
우리는 일찌감치 전원생활에 길들어 사는 촌부다. 시골이 익숙한 터전이지만 도시 아파트에 길들어 살던 사람에게 시골 정서는 여러 가지로 불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친구도 고향에 들어와 살다 나갔다. 막상 나이드니 손자손녀들 생각해서 전원 속으로 돌아오고 싶다지만 그 친구의 아내는 반대하는 것 같다. 그 마음도 이해한다. 도시 살다 고향에 돌아왔을 때는 빈손이었던 그들이다.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다.
그 친구는 다시 사업을 일으켜 성공했고 그들이 살던 고향의 땅도 팔아치웠다. 한동안 도시생활에 젖어 살더니 노후가 되자 다시 전원으로 돌아오고 싶은 모양이다. 노인의 길을 걷는 남자와 여자는 생각이 다를 수 있다. 이미 도시의 편리한 생활에 길든 아내에게 전원생활은 꿈이나 낭만이 될 수 없다. 나처럼 자연의 품에 길들어 살지 않으면 힘들지 않을까. 사람마다 좋아하는 것이 다르고 필요로 하는 것도 다르다. 잘 늙어가고 싶으나 잘 늙어가는 방법은 요원한 것이 삶이기도 하다.
내가 조언할 것은 없다. 그들 삶이니까. 그들 부부가 알아서 할 것이다. 오래 전 산기슭 모롱이에 살던 젊은 아낙이 생각난다. 전원생활을 동경한 아주머님이 전원주택과 황토 집을 지어 들어왔었다. 효자 아들은 아주머님만 보낼 수 없어 따라 들어왔었다. 시어머니는 황토 집에서 살고 며느리는 전원주택에서 살았다. 푸름만 봐도 역겹다던 젊은 아낙은 도시가 체질이었나 보다. 결국 며느리는 3년인가 견디다가 이사를 나갔고, 혼자 살아보겠다던 시어머니도 한두 해 뒤에 아들 따라 나갔다.
전원생활은 낭만이 아니다. 텃밭만 가꾼다 해도 일이고, 마당에 잔디를 심어도 잔디 가꾸는 것도 일이다. 꽃을 가꾸는 것도 일이다. 풀과 진드기와 모기와 온갖 곤충에 대해서 무심해야 살기 편한 곳이다. 자연을 자연 밖에서 바라보는 것과 그 속에 들어가 사는 것은 천양지차다. 담금 주나 효소도 오래 숙성해야 제 맛이 나듯이 전원생활도 익숙해져야 편안한 터전이 된다. 시골에 들어와 좌충우돌하다 자신도 모르게 길들어 떠나지 못하면 전원생활을 하게 된다.
필리핀 오지에서 시집온 여자가 있었다. 시골에 살면서 고향을 무척이나 그리워했었다. 그 여자가 몇 년 만에 고향에 갔지만 적응하기 어려워 서둘러 돌아왔단다. 필리핀에 가보면 한국의 편리한 의식주가 생각나고, 한국에 나오면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담긴 고향 필리핀의 의식주가 그리울 수밖에 없다. 한국의 시골은 예전 모습이 아니다. 농촌총각이 외국인 아내를 맞이하려면 최소한 재래식 집을 헐어 현대식으로 고친다. 부엌이 아닌 싱크대가 놓인 주방과 양변기가 놓인 화장실은 필수다.
농부의 친구는 시골에 들어오면 전원생활을 즐겁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경제적으로 풍족하니 생계 걱정할 것 없이 유유자적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사람 그리운 정도 알게 되겠지. 손자손녀도 가끔 들릴 테고. 자연과 더불어 편안하게 늙어갈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현실은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다. 노인이 되면 불편한 곳이 농촌 아닐까. 승용차가 없으면 병원나들이조차 힘에 부친다. 그래도 전원의 삶은 남은 나날을 여유롭게 할 것이다. 눈만 뜨면 자연과 마주할 수 있는 곳이니까.
소설 원고 숙제를 끝냈다. 나는 퇴고하기가 가장 힘들다. 읽을 때마다 고쳐야 할 곳이 나온다. 완벽한 퇴고를 못한다. 이번 소설은 초벌구이를 하고 몇 번의 퇴고를 거쳤지만 완벽하다는 생각을 못하겠다. 소설의 주제반영은 잘 됐는지. 소재를 제대로 소화했는지. 평생을 글을 써도 완벽한 문장을 구사하기 어렵지 않을까. 내가 쓴 글인데도 다시 읽으면 또 어색한 문장이 나오고 틀린 낱말이 나온다. 글을 쓸 때는 퇴고는 필수인데도 내겐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글을 쓸 때는 영감이고, 다듬는 것은 기술이라서 그럴까.
나는 다시 창밖을 본다. 고라니가 숨은 숲은 고요히 가라앉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