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승들의 깨달음과 부처님의 정각과의 차이’를 알고 《화엄경》강의를 하라
우리 한국불교-자, 절에 갑니다. 선방이 있는 절을 갑니다.
30명~50명이 큰 선방(禪房) 대중방에서 벽을 보고 앉아서 ‘이 뭣고~, 뭣~고?’ 하지요.
혹은 ‘무자(無字)’화두를 들면서 ‘무(無)~, 무~’하지요.
깨치기 위해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합니다.
깨달으면, 깨치면 이제 자기의 모~든 소원은 다 이루어진다고 생각을 하고
깨치기 위해서 화두를 들어요. 10년, 30년.
지금까지 이 세대에 몇 사람, 서너 사람 정도 인정받은 깨달은 선사(禪師)가 나왔습니다.
자, 그 깨달음의 정도는 어느 정도인가? 그 깨달음이.
그 깨달음에 대해서 지난 시간에 조금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수행승들의 깨달음과 부처님의 정각과의 차이’, 이것을 좀 말씀해 주고 싶습니다. 이거 알아야 됩니다. 이것을 모르고《화엄경》강의를 한다든지《화엄경》을
해석 해설한다든지 하면 큰~업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쯤에서는 부처님의 정각에 대해서 말씀을 드려도 되겠다 싶습니다.
내가 한 10년 법문을 했는데, 이쯤에서는 이 스님의 법문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겠구나 해서 오늘 말씀을 할 테니까 잘 들으십시오.
오늘 처음 오신 분은 이 법문 말씀이 너무나도 깊고 밝기 때문에
잘 이해를 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여기에 와서 법문 듣는 것만으로도 부처님의
그~지혜의 빛으로 업장이 씻겨나가고, 또 되도록 쉽게 쉽게 말씀드릴 테니까 들어 봐주세요.
선방에서 스님이 정진을 하다가 이제 깨달았다 그 말이어요. 깨달았다 그거요.
화두타파 했다 그거야. 이것을 견성(見性)이라고 해. 견성했다 그거야.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견성 경계를 이야기해.
그래서 큰~스님한테 가서 인가를 받는 거예요.
정확히 깨달았다, 바른 깨달음이다고 인가를 받는 거예요.
그러면 인가해준 사람의 법맥(法脈)을 잇습니다.
자, 깨달았다. 뭘?
전번에도 가끔 이야기했지만, 이 우주는 넓고도 넓고도 넓습니다.
이 우주는 무변광대(無邊廣大)합니다.
우리가 사는 땅덩어리와 같은 별들이 항하사(恒河沙) 수 정도 됩니다. 그 보다도 더 돼.
그러니까 이 우주 안에는 별들이 인도 갠지스 강의 그 모래 수보다도 더 많다 그 말이어요.
그 안에는 나름대로의 생명체가 있습니다. 생명체가 있어요. 이 지구에는 사람이 살잖아요. 사람뿐만이 아니라 온갖 동식물이 있잖아요.
이 우주 안에는 지구와 같은 별들이 무~수히 있다 그거예요.
그러니까 이 우주가 그렇게도 넓습니다. 상상할 수 없어요.
지금 21세기의 첨단 천문학적인 이해를 가지고도 이해를 할 수가 없어요.
지금 천문학이 도달한 그 지평선 너머를 몰라요.
200억 광년이나 되는 지평선 저 너머를 모른다고요.
그래서 ‘이 우주가 정말로 광활하구나!’ 하는 것만 알지 온전한 것은 잘 모르고 있다고요.
자, 이 많은 땅덩어리들, 별들. 그 별들의 땅덩어리 그 위에는
많~은 동식물 광물들이 있단 말이어요. 이 모~두를 낸 것이 있어요. 낸 것이 있어.
거기서 나왔다 그거예요. 이것 때문에 나온 거예요. 이것 때문에 생겼어요.
이것을 우주 본체라고 합니다. 이것 때문에 생겼단 말이에요.
태어나서는 어쩌냐? 성주괴공(成住壞空)을 밟아요. 성주괴공을 해요.
사람들은 생로병사(生老病死)를 해요.
우리의 생각은 생주이멸(生住移滅)을 해요.
물질은 성주괴공을 해요. 이것을 반복해요.
그렇게 할 수 있는, 할 수 있도록 하는 그 힘이어요. 본체가 있어요.
이 본체가 없으면 안 되어요.
그 본체(本體)를 본 것을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주 만물을 내고 성주괴공 생로병사를 할 수 있도록 관리하고 유지하고
영원히 반복케 하는 큰~힘, 이것을 우주의 본체라고 해요.
오늘 처음 오신 분들, 이렇게 하면 조금 이해가 가겠습니까?
이것을 보는 것을 견성이라고 해요. 이것을 보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해요. 대단하지요.
그런데 보기는 봤지만, 봤다는 말에 좀 어폐가 있어요. 드러나 버린 거예요.
경계가 뒤집히면서 드러나 버린 거예요. 그럴 때 나(我)는 없어요.
너도 없고 상대도 없고 모~두가 허공같이 텅 비어 있는 거예요. 그것이 드러나요.
그것을 본 거예요. 봤다는 것도 어폐가 있다고 했지요.
나(我)도 없는데 누가 봐요? 그것을, 그 텅~빔을 ‘알아차림’ 그래. 알아차림.
알아차린 거예요. 알아차린 것, 이게 견성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런 견성을 하게 되면 너~무 너무도 편안하고
정말로 법열(法悅)이 솟아 나와요. 이거 묘해요. 그렇게~ 좋은 거예요.
이게 진짜 좋은 거요. 진짜 즐거움이어요.
이 상대세계의 즐거움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 즐거움이요.
그런데 그 즐거움은 상대적인 즐거움하고 질이 달라요.
정~말 좋아요. 이게 견성입니다.
이게 수행승들이 원하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출처:2013년 자재 만현 큰스님 법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