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던가.. 엄만 이런말을 하신적이 있다.
사랑은 할 수 있을때 즐겨라.
하지만 난 충분히 그렇게 하고 있지 못하다.
왜냐하면 엄마는 지금도 사랑을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엄마를 바라보고 자란 나로서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만 사랑을 즐기지만, 엄마때문에 아빠가 아파하는 모습을
늘상 뒤에서 지켜봐왔기 때문일까...
엄마와 아빠가 이혼하지 10년째이다. 그리고 오늘은 그런 두분이
결혼하지 20주년 되는 날이다.
"아빤... 엄마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매년 결혼기념일을 혼자 챙기는거야?"
아빤 그저 아무대답없이 웃고만 계신다.
항상 아빤 엄마에 대해 말하면 다 웃어 넘기신다..
답답해 죽겠어. 처음 엄마가 이혼하자고 했을 때도 그랬다.
언제나처럼 아빠가 해주신 간식을 먹고 있는데 엄마는 마치
잠깐 슈퍼 갔다온다는 말처럼 이혼하자는 말을 했다.
아무렇지 않게. 당연한 듯이 말이다.
그날 이후 엄만 정말 보이지 않았다. 엄마를 볼 수 있는 날은 바로 오늘.
이상한건 엄마 역시 매년 결혼기념일은 빼놓지 않고 챙긴다는 것이다.
이런 날. 언제부턴가 난 집에 있기 싫어서 1년에 한번 얼굴을 비추는 엄마 얼굴을
보지도 않은채 집을 나서곤 한다. 아빤 아침부터 뭐가 그리 신났는지,
콧노래를 부르며 와인에 먹을 치즈케익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다.
"나 나갔다 올게. 엄마 가면 문자해"
"여울아. 엄마 얼굴 한번 보고 나가. 안본지 5년도 넘었잖아."
"일년에 겨우 하루 얼굴 보려고 엄마가 있는 줄 알아?!
난 엄마 아직도 이해 못해. 아빠처럼 착하지 않아서 그런가봐."
난 어김없이 찾아오는 연중행사를 무시한채 집을 나선다.
내가 과연 엄마를 이해하는 날이 올까.. ?
"너 또 철호 만나러 가냐?"
멀리서 들려오는 아빠 목소리에 대답도 않고 귀에 이어폰을 꼽았다.
집을 나서면 쭉 이어져 있는 골목길과 골목길 끝에 작은 유치원 ,
그리고 사거리를 지나면 언제나 그자리에 있는 버스정류장이 있다.
세월이 지나면 이런 작은 것들도 변하겠지.. ?
<난~ 찌루찌루의 파랑새를 알아요>♬
몇년전부터 바뀌지 않는 나의 벨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댔다.
분명 철호일 것이다. 이런 이상한 연중행사를 기억해주는 건 철호 뿐이다.
철호는 초등학교부터 지금까지 우정을 지켜온 유일한 친구이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땐 친구 엄마들이 날 싫어했었다. 엄마가 바람난 년이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철호만은 달랐었다. 철호 어멈님도 날 가여워 하셨었다.
그 후로 난 누군가를 쉽게 믿지 못했다. 다들 날 똑같은 시선으로 쳐다보는 것 같고,
괜한 피해의식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내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난 만족한다. 그게 한명일지라도.
"왜."
[벌써 집을 나오셨더구만.]
"아빠가 전화했냐."
[그래. 근데 어쩌냐. 오늘은 이 오빠가 시간이 안되는데~]
"오빠 좋아하네. 언젠 일부러 시간 냈냐? 됐어. 신경안써줘도 되. 중도갈꺼야"
[그 낡아빠진 책들 속에서 하루종일 계시려고?]
"비꼬지마. 배신자야."
[쳇. 알겠다. 시간되면 중도갈게.]
"오지마..."
툭.
*(중도: 학교 중앙도서관을 줄여서 중도라고들 한다.)
그래도.. 이날 만큼은 언제나 함께 해줬으면서..
얼마전에 이 녀석 옆에 또 다른 여자친구가 생겼다.
잘생긴편은 아니지만 키도 크고 유머감각도 있고 매너도 있는 터라 여자가 끊이질 않는다.
오늘은 .. 중도 가기 싫다.. 이녀석 온다고 하면 오는 녀석이지만
오면 오늘 하루종일 그녀와 어떤일이 있었고 이러쿵 저러쿵 온통
그여자 얘기만 할텐데... 오늘만큼은 그런 얘길 들어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여울아. 삼천동에 괜찮은 헌책방있던데.. 가볼래?
여기 주소랑 전화번호. 너가 좋아할만한 책이 많은 것 같던데..생각있음 가봐.
며칠전 동기중 한명이 건내중 종이 한장. 대충 대답해버리고 다이어리에 아무렇게나
끼워 넣어두었던 종이. 좀 구겨졌지만.. 글씨를 못알아 볼 정돈 아니니까..
그리고 .. 전화번호? 전화 해볼까... ?
일단 삼천동으로 향하기로 한 나는 중도로 향하던 발길을 돌렸다.
평소에 혼자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편이지만, 초행길을 혼자가는건 처음이다.
누구나 인정하는 길치인터라.. 이런 위험한 모험은 하지 않는 편인데.. ...
결국 1시간을 헤맨후에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두근 두근.
괜스레 심장이 뛰기 시작한 건.. ...
[여보세요?]
두근 두근.. 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