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컨트리 음악 싱어송라이터이며 영화배우로도 유명한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이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대변인은 지난 28일(현지시간) 마우이에 있는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미국 잡지 피플에 전한 성명을 통해 전했다. "여러분이 무지개를 본다면 그가 우리 모두에게 미소 짓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고인은 1936년 6월 22일 텍사스주 브라운스빌에서 메리 앤(니 애쉬브룩)과 라스 헨리 크리스토퍼슨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모 스웨덴 이민자들이었다. 2013년 공영라디오 NPR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어릴 적부터 컨트리 음악을 좋아했다고 털어놓았다. 열한 살 때 첫 노래 'I Hate Your Ugly Face'를 작곡했다. 부친이 군인이라 자주 이사를 다녔고 10대 때 캘리포니아주 산마테오에 정착했다.
그의 홈페이지에 따르면 크리스토퍼슨은 열여덟 살 때 두 편의 단편 'Gone Are the Days'와 'The Rock'을 월간 애들랜틱 먼슬리에 발표할 정도로 문학에 재능이 있었다. 1954년 캘리포니아 포모나 대학에 입학해 풋볼을 해 골든 글로브 상을 받고 학교 신문의 스포츠 에디터 역할을 할 정도로 다재다능했다. 4학년 때인 1958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드의 표지에 실릴 정도로 학업과 스포츠 모두 빼어났다. 같은 대학원 문예창작 석사 학위를 딴 뒤 저유명한 로즈 장학금 학생으로 뽑혀 1960년 옥스퍼드대학 머튼 칼리지 영문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공부했다.
미국 재향군인회 보고에 따르면 부모는 학업을 마친 뒤 군에 입대하라고 강권해 그는 미 육군에 입대했다. 5년 안에 헬리콥터 조종사가 돼 대위로 진급했다. 1960년대 초 서독에서 복무하면서도 작곡을 계속했고 병사들과 밴드를 결성했다.
독일 복무를 마친 뒤 크리스토퍼슨은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쳐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는 얼마 안 있어 테네시주 내슈빌로 휴가를 갔다가 음악에 대한 열정이 다시 불사올라 1965년 군 예편을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2010년 클래시란 잡지 인터뷰를 통해 "그곳의 음악 공동체와 곧바로 사랑에 빠졌다. 영혼이 충일한 일어었다. 난 지금 이렇게까지 발전할 줄 몰랐다. 하지만 분명히 내가 이뤘던 가장 좋았던 움직임이었다"고 말했다.
내슈빌에서 그는 컬럼비아 스튜디오에서 야간 청소부로 일하며 '포 더 굿 타임스'와 '선데이 모닝 커밍 다운' 등을 썼다. 1968년 빌 내시가 불러 처음 '포 더 굿 타임스'를 녹음했는데 주류 평단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 1970년 4월 크리스토퍼슨의 데뷔 앨범에 다시 실리고 레이 프라이스가 두 달 뒤 다시 불러 발매했다. 프라이스의 트랙은 1972년 그래미상 최우수 컨트리 송 추천을 받았는데 솔 뮤직 아이콘 알 그린이 다시 부른 것이 정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크리스토퍼슨이 작곡했다는 사실과 함께 그의 첫 앨범 '선데이 모닝 커밍 다운'이 내슈빌의 실력자 레이 스티븐스와 컨트리 음악 레전드 자니 캐시가 주목했다. 캐시가 자니 캐시 쇼 라이브 앨범에 수록해 CMA상 올해의 컨트리 음악 송을 수상했고 빌보드의 컨트리 음악차트 넘버 1에 이르렀다.
이 밖에도 재니스 조플린의 1971년 사후 앨범 '펄'에 실렸다. 크리스토퍼슨과 조플린의 최고 히트곡 중 하나였다. 팝 차트의 넘버 1은 물론 1972년 두 차례 그래미상 후보로 지명됐다. 같은 해 크리스토퍼슨은 새미 스미스이 부른 '헬프 미 메이크 잇 드루 더 나이트'로 최우스 컨트리 송으로 처음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1970년대에도 'Loving Her Was Easier(Than Anything I’ll Ever Do Again'와 두 차례 그래미상 지명된 'Why Me Lord' 등을 만들어 녹음했고 컨트리 가수이며 두 번째 아내 리타 쿨리지와 협업해 여러 장의 앨범을 냈다. 부부는 1973년 'From the Bottle to the Bottom'로 그래미 2개 부문 수상했고 1975년 클라이드 맥패터의 1962년 히트 송 '러버 플리즈'를 재취입했다.
일간 뉴욕 타임즈는 1970년 프로필 기사를 통해 "그는 음악인이라기 보다 시인이다. 목소리의 질로가 아니라 설명에 더욱 많은 관심을 쏟았다"면서 "그는 무뚝뚝하고 신비롭기도 하지만 사소한 편견따위는 초월하며 캠퍼와 지적 집단 모두에게 강하게 어필한다. 그는 컨트리와 팝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라고 적었다.
그의 재능은 음악과 작곡을 넘어서도 발휘됐다. 그는 많은 영화들, 'Cisco Pike'(1972), 'Pat Garrett & Billy The Kid'(1973), '앨리스는 여기에 더 이상 살지 않는다'(1974)에 얼굴을 내밀었다. 1974년 그는 잡지 롤링 스톤에 정식 훈련을 받지 않았지만 그는 할리우드에 금세 스며들 수 있다고 확신했다고 털어놓았다. "내겐 연기란 그저 캐릭터를 이해하면 그만인 것이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에 솔직해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고인을 스타로 거듭나게 한 작품은 역시 뭐니뭐니 해도 '스타 탄생'(1976)으로 스스로 파멸하는 존 노먼 하워드 역할이었다. 알려지지 않은 가수 겸 존의 짝사랑 상대인 에스터 호프만 역을 연기한 바브라 스트라이잰드와 공연했는데 골든 글로브 남우주연상을 안겼다. 그는 또 웨슬리 스나입스 주연 '블레이드' 3부작에 스납이스의 상대 휘슬러 역할로도 많이 알려졌다.
은막에 등장하면서도 캐시, 웨일론 제닝스, 윌리 넬슨과 함께 컨트리 슈퍼그룹 '하이웨이 맨'을 결성해 동명 타이틀의 첫 앨범으로 1985년 컨트리 싱글 차트 1위를 기록했다. 두 장의 앨범 '하이웨이 맨 2'(1990)과 'The Road Goes On Forever'(1995)을 더 발매했다.
상복도 많았다. 그래미상 세 차례와 레코딩 아카데미 평생공로상을 2014년 수상했다.넬슨과 공연한 영화 '송라이터'로 1985년 오스카 최우수 오리지널 송 후보로 지명됐다. 2004년 컨트리 음악 명예의전당에 입회했다.
2013년 그는 기억력 상실을 경험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고백했다. 의료진이 처음에는 알츠하이머로 잘못 진단했는데 실제로는 라임 증후군으로 진단됐다고 CBS 뉴스는 전했다. 하지만 현재 아내 리사 크리스토퍼슨(니 메이어스)에 따르면 그는 치료를 받아 몇 주 안에 많이 나아졌다고 했다. 너무 많은 약을 먹어 부작용이 걱정된다고 리사는 2016년 롤링 스톤에 털어놓은 뒤 "갑자기 제정신이 돌아왔다. 나쁜 날들도 있지만, 며칠 동안 그는 완벽히 정상이었다. 그는 심지어 무언가와 싸웠다는 것조차 쉽게 잊어버린다"고 덧붙였다.
2016년에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 'The Cedar Creek Sessions'을 발표했고 2021년 은퇴 선언을 하면서 모리스 히그럼 매니지먼트(MHM) 유산 관리를 한다고 덧붙였다. 이 회사의 회장이며 파트너 클린트 히그럼은 성명을 통해 "고인은 모든 아티스트들이 따르고 싶어하는 아티스트다. 그는 아티스트 중의 아티스트다. 만약 러시모어 산에 송라이터 자리가 만들어진다면 크리스가 거기 들어가야 한다"고 애도했다.
2017년 멘스 저널이 인생의 비밀을 믿느냐고 묻자 그는 "한때 규칙 목록 같은 것을 만들었는데 '진실을 말하고, 열정적으로 노래하며, 웃으며 일하라, 그리고 가슴으로 사랑하라' 이다. 어쨌든 이런 것들로 시작하면 좋다"고 답했다.
고인은 프랜시스 비어와 처음 결혼한 뒤 1962년 큰딸 트레이시를 낳았고, 1968년 큰아들 크리스를 봤다. 쿨리지와는 1974년 딸 캐시를 낳았다. 그리고 세 번째 부인 리사와 다섯 자녀, 제시(1983), 조디(1985), 존(1988), 켈리 매리(1990), 블레이크(1994) 등 모두 여덟 자녀와 일곱 손주를 유족으로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