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ving Block
박미산
빛 한 줌 허락되지 않은
당신이라는 틈새
발버둥 칠수록 뒤엉킨 다음 문장은 흙으로 덮였다
당신이라는 벽에 부딪혀 구부정해진 뿌리지만
언제든 침울한 어깨를 안을 수 있던 가지
꼿꼿한 물방울에게 달려갈 수 있던 줄기를 가졌었다
어둠의 시간이 순간 나에게 왔다
사지를 늘어뜨리고 기어다닐 수밖에 없는,
나에겐 뿌리도 없어
숨 쉴 틈을 열어줘
연둣빛 잎새를 물어 날랐던 집으로 가고 싶어
발자국에 무수히 짓밟혀도 한 번 더 피어나고 싶어
꽝꽝 언 땅일지라도 걸음걸음
발끝에서 보랏빛 꽃을 피워보고 싶어
제철도 아닌데 잡풀 속에서
결코 피워내지 못할 네 음절의 노래를
지금도 간절하게 부르고 있다
집에 가자
집에 가자
박 병장의 퀴논
문드러진 망고처럼 끈적이는 퀴논의 오후
습한 공기 속 끝없이 이어지는 시장통 미로
맹호조차 뜯어 먹지 못했던 시장 끄트머리에서
망고를 파는 늙은 여인
그녀와 숨 막히게 엉켰던 밀림의 기억
어둠 속에서 썩어가는 망고처럼 불쑥 떠오르는 그녀의 웃음
늙은 여인의 손에 들린 검게 물든 망고
역사는 짓무른 망고처럼 냄새를 풍기고
먼지 쌓인 좌판 위
기록되지 않은 시간 속에서
뭉개지는 인천과 퀴논의 추억
죽음의 여왕 케레스처럼 부서진 마을 앞에서
그녀는 괜찮다고, 이제 곧 끝날 거라고
다이너마이트처럼 환하게 웃고 서 있었지
그녀 뒤로 쏟아지던 포탄의 파편들
터져버린 망고처럼 붉게 물들었던 퀴논의 밤
핏물 든 심장을 움켜쥐고
우리는 서로를 놓아야 했지
늙고 상한 망고를 바라보는 그녀
썩은 망고처럼 형체조차 남지 않은 사랑의 기록
그녀의 침묵 속에서 돋아나는 검은 글자들
그 어디에도 없는
찢겨진 고해
껍질만 남은 이야기
한 권의 썩어가는 앨범
집으로 가는 길
작년 3월 그가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빛 한 줌 허락되지 않은 당신이라는 틈새에서
그는 하나의 단어인 ‘집’만을 끊임없이 되풀이했다.
그는 그 짧은 문장을 언어 이전의 울음처럼, 기억의 밑바닥에서 더듬으며 반복했다.
때로는 움직이지 못하는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싸안고 기도하듯 중얼거리기도 했다.
언어를 잃은 존재가 언어로 돌아가려는 몸부림은 번번이 문장이 되지 못해
흙 속으로 묻혀버리고 어둠의 시간이 그의 삶을 덮었다.
사지가 짓눌린 채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시간 속에서
그는 자신에게 뿌리가 없음을, 숨 쉴 틈조차 허락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에게 ‘집’은 단순한 거처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본향本鄕이었다.
움직이지 않는 사지, 굳어버린 혀끝에서도 그는 여전히 집으로 가고자 했다.
돌 아래 갇힌 씨앗이 어둠 속에서도 피어오르듯,
인간 또한 절망 속에서 생의 방향을 찾는 법을 안다.
그 길은 재활의 길이자 영혼이 몸을 다시 세우는 길이었다.
시는 그 길과 닮아 있다.
언어를 잃은 자가 언어로 돌아가려 애쓰듯 시인은 침묵 속에서 단어를 더듬는다.
돌로 꽉 막힌 문장 아래에서 한 줄기 의미의 뿌리가 자라나기를 기다린다.
그 과정은 병과 싸우는 몸의 고통과도 같다.
절망 속에서도 “한 번 더 피어나고 싶다”는 생의 본능은 시인의 시작이자 회복의 첫 발이다.
시인은 무수히 짓밟힌 자리에서도 다시 쓴다.
집으로 가려는 그의 간절함과 잊힌 문장을 되살리려는 시의 열망은 같은 뿌리에서 솟아난다.
병을 이기는 일도, 시를 쓰는 일도 결국은 자신이라는 집으로 돌아가는 순례다.
살아 있음의 의미를 되묻고 짓눌린 몸과 언어를 조금씩 일으켜 세우는 그 길의 끝에서 그도 나도 보도블록 아래에서 보랏빛 꽃을 피우기를,
그리고 그 꽃이 다시 언어가 되기를 간절히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