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어찌하여 하느님께서는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는가?>
▥ 욥기의 말씀입니다.3,1-3.11-17.20-23
1 욥이 입을 열어 제 생일을 저주하였다. 2 욥이 말하기 시작하였다. 3 “차라리 없어져 버려라, 내가 태어난 날, ‘사내아이를 배었네!’ 하고 말하던 밤! 11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올 때 숨지지 않았던가? 12 어째서 무릎은 나를 받아 냈던가? 젖은 왜 있어서 내가 빨았던가? 13 나 지금 누워 쉬고 있을 터인데. 잠들어 안식을 누리고 있을 터인데. 14 임금들과 나라의 고관들, 폐허를 제집으로 지은 자들과 함께 있을 터인데. 15 또 금을 소유한 제후들, 제집을 은으로 가득 채운 자들과 함께 있을 터인데. 16 파묻힌 유산아처럼, 빛을 보지 못한 아기들처럼 나 지금 있지 않을 터인데. 17 그곳은 악인들이 소란을 멈추는 곳. 힘 다한 이들이 안식을 누리는 곳. 20 어찌하여 그분께서는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고 영혼이 쓰라린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21 그들은 죽음을 기다리건만, 숨겨진 보물보다 더 찾아 헤매건만 오지 않는구나. 22 그들이 무덤을 얻으면 환호하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련만. 23 어찌하여 앞길이 보이지 않는 사내에게 하느님께서 사방을 에워싸 버리시고는 생명을 주시는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복음 루카 9,51-56
51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52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5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54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55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56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1969년 7월 21일, 아폴로 11호에 타고 있던 닐 암스트롱이 처음으로 달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그러면서 달에 관한 구체적인 연구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그전까지는 달은 그저 신비로운 장소일 뿐이었지요. 달에 토끼가 살고 있다는 옥토끼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또 우리나라에서 달이 가장 큰 보름에 맞춰 농경 사회에 의미 있는 행사(정월대보름, 백중, 추석)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달에 직접 갈 수는 없고, 눈에 보이기만 하니 그냥 신비로운 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달 착륙 후 신비로움에서 벗어나 구체적으로 우리 곁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나의 이웃과 함께해야 구체적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혼자만 살면 그만이라면서 함께하는 자리를 피한다면 사람의 기억 속에 구체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나의 마음에 발을 내디딜 수 있도록 자기의 마음을 활짝 열 수 있어야 합니다. 함께해야지만 구체적으로 서로에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신적 존재가 아니기에 절대로 사람들과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던 예수님께서는 심부름꾼을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보내서 숙박을 알아보게 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맞아들이지 않습니다. 사실 그 전에 이미 사마리아 지역에서 환영받아 머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환영하지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유다인들이 과월절을 지내는 곳은 시온산, 즉 예루살렘입니다. 그에 반해 사마리아 사람들은 과월절은 그리짐산에서 지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을 가는 예수님 일행을 환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즉, 전례적인 이유로 거부했던 것이지요.
여기서 제자들의 반응이 재미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말합니다. 상당히 격분해 못 참겠다는 표현입니다. 그만큼 자기 스승께 대한 사마리아 사람들의 홀대를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은 누가 내릴 수 있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원하시지 않으면 어떤 불도 내릴 수 없습니다.
사마리아 사람과 함께하는 마음 자체가 없으니,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폭력적으로 이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든 함께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 누구도 구원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기억하며, 우리 역시 이웃들과 함께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신비의 차원이 아닌, 구체적으로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물 흐르는 대로 휩쓸러 가지 않고 ‘정말 이대로 괜찮을까’ 멈춰 서서 고민하고 사색하는 것. 의구심은 사람을 근본부터 뒤흔드는 에너지가 된다(야마자키 마지).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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