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전선로 못 늘리면 4년뒤 정전사태 우려
원전 3기 규모 전력 부족 전망
송전선로가 확충되지 않고 현 수준을 이어가면 당장 4년 뒤에 전력 부족에 따른 ‘블랙아웃(대정전)’이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력망 확충 사업이 계속 삐걱대면서 블랙아웃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우려는 더욱 커지고 있다. 인공지능(AI) 산업의 빠른 발전으로 반도체, 바이오 등 첨단 산업단지의 전력 수요가 급증하는 만큼 국가 차원의 전력망 확충 지원 방안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4일 동아일보가 제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 전망한 기준 수요 변화와 현재 전력망에 따른 전력 공급 능력을 분석한 결과 현재 3만5596C-km(서킷킬로미터·선로 길이×회선 수)인 한국의 송전선로 규모가 그대로 유지될 경우 2028년이면 전력이 부족해진다.
2028년 최대 전력 수요는 107GW(기가와트)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전력 공급 능력은 104.3GW이기 때문에 전력망이 확충되지 않는다면 약 2.7GW의 전력이 모자라는 것이다. 통상 발전용량이 1GW인 원전 1기는 33만3000가구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다. 2028년부터 약 90만 가구가 사용할 수 있는 전력이 부족해질 수도 있는 셈이다.
정부가 올 5월 공개한 ‘제11차 전기본 실무안’에 따르면 2038년 국내 최대 전력 수요는 129.3GW로 예상된다. 지난해보다 38%나 급증한 수치다. 전력망 확충이 없다면 2038년 부족한 전력량은 25GW에 달하게 되는 것이다.
송전선로 5배 더 빨리 늘려야 하는데, 실제론 4년 이상 지연
[비상 걸린 전력 인프라] 〈상〉 속도 안 붙는 전력망 확충
전력망 규모, 발전 용량 못따라잡아… ‘과거 10년’ 속도로 10년간 늘리면
2038년 예비율 4%대… 전력 태부족
지자체-주민들 “송전망 건설 반대”… 전문가 “범정부 컨트롤타워 시급”
때아닌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2011년 9월 예상치 못한 ‘블랙아웃(대정전)’이 한국을 덮쳤다. 전력 사용량을 감당하지 못한 전력 당국은 지역별로 돌아가면서 전력 공급을 중단했고 전국 곳곳의 혼란이 극대화됐다. 신호등이 꺼진 도로가 마비됐고 엘리베이터에 갇혔다는 시민들의 신고도 빗발쳤다. 산업 단지의 가동이 멈추고 병원에선 수술이 중단됐다.
이미 13년 전에 한 번 겪었던 악몽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까지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전력망 확충이 이뤄져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송전망 건설은 지자체 및 주민 반대 등으로 목표 대비 수년간 지연되고 있다.
● 전력망 이전보다 5배 빨리 늘려야
한국전력에 따르면 한국의 전력망 규모는 지난해 3만5596C-km(서킷킬로미터·선로 길이×회선 수)로 2013년(3만2249C-km)보다 10.4% 증가했다. 같은 기간 66% 늘어난 발전설비 용량을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이 같은 추세는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인공지능(AI) 등 첨단 산업의 발전으로 증가하는 전력 수요에 맞춰 발전 설비 용량도 빠르게 늘고 있는데 전력망 확충 속도는 붙고 있지 않은 탓이다. 지난 10년 동안의 속도로 전력망을 계속 확충한다고 해도 조만간 심각한 전력 부족 현상을 빚게 된다.
앞으로 10년간 전력망을 과거 10년과 같은 속도로 늘린다면 전력 예비율(전력 공급 능력 대비 예비 전력)은 2028년 7%, 2038년 4%대로 떨어진다. 전력 당국은 전력 예비율이 10%를 넘겨야 안정적인 상태로 판단한다. 10% 밑으로 내려가면 경계 상태, 5%를 밑돌면 비상 대응에 나선다.
한전은 지난해 6월 발표한 ‘10차 장기송변전설비계획’에서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한 전력망 확충 목표를 공개했다. 설비계획에 따르면 전력 수급을 위해 2036년까지 필요한 송전선로는 5만7681C-km로 추산된다. 매년 확충해야 하는 전력망만 약 1700C-km로 지난 10년의 5배 규모다.
김동철 한전 사장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국가 첨단 산업을 위한 전력망이 제때 건설되지 않으면 (동해안과 서해안의 원전이나 재생에너지 등에서 생산한) 전력을 수도권으로 공급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라고 했다.
● 수년째 지연되는 송전선로 공사
한국전력이 2026년까지 외부 전력 설비를 옥내화하고 초고압직류(HVDC) 관련 시설을 증설할 계획인 경기 하남시 동서울 변전소 전경. 최근 경기 하남시가 인허가를 불허하면서 이미 주민 반대로 66개월 미뤄진 사업은 추가 지연이 불가피해졌다. 하남=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문제는 주민 반대로 전력망 확충이 계속 지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송전선로 건설은 표준 공기(9년) 대비 평균 4년 이상이 더 걸린다. ‘동해안∼수도권 초고압직류(HVDC) 송전선로’ 건설 계획은 주민 반대 등으로 준공이 66개월 미뤄졌다. 최근에는 경기 하남시가 ‘동서울 변전소’ 옥내화 및 증설사업 인허가를 불허하면서 추가 지연이 불가피해졌다. ‘북당진∼신탕정’(150개월), ‘당진TP∼신송산’(90개월) 송전선로 공사도 지자체의 비협조와 주민 반대 등으로 수년째 지연되는 모습이다.
주민들은 ‘전자파 피해’를 앞세우며 반대하고 있지만 한전은 전자파 안전성은 과학계에서 검증이 끝난 문제라고 반박하고 있다. 한전 관계자는 “동서울 변전소의 경우 주민 거주 시설과 300m 떨어져 있다”며 “변전소에서 100m 떨어진 곳의 전자파는 가정 내 냉장고에서 나오는 전자파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도 민생 공통 공약 추진 협의기구를 통해 ‘국가 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 통과를 우선 과제로 다루기로 했다. 21대 국회에서부터 논의된 특별법은 총리실 산하에 전력망 확충을 위한 범부처 차원의 기구를 설치하고 주민 보상과 지자체 협의를 주도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통상 6, 7년이 걸리던 전력망 건설 인허가 과정을 단축할 수 있다.
박종배 건국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전력망 확충은 우리 경제의 미래와 운명이 걸린 문제라고 봐도 무방하다”며 “전자파 안전성 등 지역 주민의 우려를 해소하고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범부처 차원의 컨트롤타워와 국회 차원의 지원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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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정순구 기자 soon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