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 거부하고 법무부 사표... 나는 반국가세력인가 [특별기고] / 12/20(금) / 한겨레 신문
◇ 류혁 전 법무부 감찰관
불법 계엄 선포에 따른 속칭 윤석열 내란사건이 발생한 지 꽤 됐지만 아직도 그날의 놀라움으로 가슴이 답답하다. 계엄선포가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충격적이었던 탓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저렇게 시대착오적이고 반헌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위험인물들이 아직도 우리 사회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데서 오는 걱정과 불안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지난 3일은 내게 평범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평온한 날이었다. 아내가 친구들과 지방으로 여행을 떠났기 때문에 일찍 퇴근했고, 오랜만에 큰아이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맛있게 저녁식사를 하고, 미룰 수 없는 집안일을 몇 가지 끝내고는 다음날 아침 일찍 운동하러 나갈 생각으로 밤 10시쯤 잠자리에 들었다.
막 잠이 든 나를 깨운 아이의 말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황당한 내용이었다. 요즘 세상에 비상계엄이라니. 놀라서 TV와 인터넷 뉴스를 보니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바로 법무부 실장과 국장의 단톡방을 확인해보니 계엄 선포에 따라 법무부 실장과 국장을 비롯한 직원들에게 비상소집이 걸려 있었다.
과천 법무부 청사에 도착해 장관회의실에서 장관에게 이게 계엄에 관한 회의냐고 물었다. 박성제 장관이 "그렇다"고 하자 미리 마음먹었던 대로 "계엄선포에 따를 수 없다"는 뜻을 밝히며 사직하겠다고 했다. 장관 부속실에 비치된 법무부 용지로 사표를 작성해 4일 0시 9분 비서관에게 전달하고 부속실 직원들과 차례로 작별 인사를 했는데도 깊은 분노와 함께 슬픔이 밀려왔다.
어떻게든 운전해 자택에 돌아와, SNS에 사직한 것을 투고했다. 곧바로 한 기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왜 그만뒀나. 혹시 계엄에 반대해서?" 라고 물었다. 평소 공감할 수 있는 많은 기사를 쓰던 기자였기에 나는 내 생각을 망설임 없이 말했다. 닥칠 어려움에 대한 걱정보다는 시대착오적이고 위헌적이며 불법적인 계엄, 개인적인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이기적인 계엄에 대한 분노가 훨씬 컸기 때문인지 평소와 달리 상당히 흥분된 어조로 말한 것 같기도 하다.
이제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가 가결되고 수사기관들도 앞다퉈 형사책임을 묻는 절차를 밟고 있어 분노의 감정은 조금씩 사그라질 법도 하지만 사태 이후에도 반성의 빛은 전혀 보이지 않는 그의 언행을 접할 때마다 마음속 깊이 뭉친 부정적 감정이 크고 무거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또 이런 터무니없는 궤변을 앞으로도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과 형사재판 과정에서 자주 접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한숨이 나온다.
윤석열 대통령은 "계엄은 고도의 통치행위로 사법심사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이 변명은 확립된 최신 헌법판례에 무지함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나치의 반인륜적 전쟁범죄를 옹호한 일부 법실증주의자들과 같은 생각을 가진 시대착오적 인간임을 공표하는 것과 같다. 심지어 자신이 법 위에 군림하는 폭군과 같은 특별한 존재로 착각하고 있음을 자인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대통령은 "국회에 경고만 하려 해도 2시간 만에 끝날 만한 내란이 어디 있느냐" 는 엉뚱한 변명을 늘어놓기도 했다. 자칫하면 엄청난 유혈사태와 헌정중단을 초래할 수도 있었던 이번 내란이 다행히 단시간에 종료된 것은 대통령의 주장처럼 이번 사태가 단순한 경고를 목적으로 하는 계엄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동원된 계엄군의 준비부족, 미숙함, 지시내용에 의문을 품은 일부 병사들의 임무수행 거부, 국회의 발빠른 계엄해제 결의, 시시각각 상황을 전하며 계엄군에 맞선 시민과 국회 보좌진들의 용기있는 대응 등이 종합된 결과였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아울러 한국 형법이 규정하고 있는 "국헌 문란을 목적으로 하는 내란"은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해 국가의 헌법질서를 위태롭게 하면 곧바로 완성되는 범죄다. 국가원수뿐 아니라 누구에 의해서도 저질러질 수 있고, 헌법질서를 위협하는 상황이 2시간이 아니라 단 1분이라도 발생하면 곧바로 완성되기 때문에 이런 변명은 있을 수 없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밖에도 대통령은 여러 가지 주장을 늘어놓았지만 궤변과 거짓말이 뒤섞인 허위주장이어서 반박할 가치조차 없고, 스스로의 책임을 조금이라도 회피하기 위한 비겁하고 부질없는 변명에 불과하다.
이번 사건으로 사표를 제출하면서 계엄 선포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했으니 나 자신도 윤석열 대통령이 말하는 속칭 반국가세력의 일원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저런 궁리 끝에 이런 생각에 이르러 어이가 없어 그만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지만, 그러면서 걱정, 한탄, 분노가 뒤섞인 안타까운 감정도 북받쳐 오른다.
얼마 전 나를 걱정해 전화를 걸어온 중독치료 전문 정신과 의사인 오랜 친구에게 "요즘은 평소와 달리 잠을 깊이 못 자고, 천천히 달려도 평소보다 심박수가 높아 걱정이다. 술이나 한잔하고 억지로라도 잠을 자야 한다" 고 푸념하고 말았다. 그 말을 듣고 친구는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부정적인 감정을 피하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것은 진짜 해결책이 아니다. 술을 많이 마시면 알코올 분해 과정에서 나오는 독소에 의해 전두엽이 손상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화를 잘 내게 되고, 자신의 행동의 부정적인 결과를 과소평가해 남의 눈에는 터무니없이 비치는 잘못을 서슴없이 저지르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사람이 느끼는 괴로움에 무감각해져 자신에 대한 공격에 대해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마침내는 그 때문에 가족이나 동료 등 주위 사람들이 모두 떨어져 나가게 된다. 그래서 모든 건전한 관계가 상실되고 주변에는 아양을 떨면서까지 뭔가 이득을 보려는 인간만 남게 되니까 더욱 자기중심적인 인간이 되어간다. 그런데 결국은 그런 사람들조차 다 떨어져 나가게 되는 거야. 그리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은 겉보기와는 달리 자기긍정감이 낮은 경우가 많고, 그것 때문에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인간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마지막에는 자신만이 남겨지게 되는 거야. 술은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
친구의 고마운 조언을 받아들여 운동화 끈을 다시 묶고 오래전부터 해오던 아침 조깅을 재개하기로 했다. 3일 비상계엄 선포로 시작된 내란사태가 완전히 끝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나는 마음을 추스르고 평소의 내 모습으로 돌아가 소소한 일상 속에서 행복을 느끼며 45년간 쌓아온 민주주의 전통이 회복되는 과정을 차분하고 굳은 결의로 지켜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