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계 산소에 갔다 와서 향로봉에 갔다.
향로봉은 내 사춘기의 슬프고도 엉망이었던 곳이다.
지금 쓰고 있는 소설 속의 주 무대가 되는 곳이다.
사진 속의 문 하나가 찍혀있는데, 그곳에서 나는 지금 쓰고 있는 소설의 그녀에게서 순결을 잃었다.
지금도 그녀가 했던 말을 잊을 수 없다.
“동생 대학 보내기 위해.....”
그러면서 말을 흐리고 뒤돌아 누웠던 그녀였다.
묵호조선경비대 자리의 소나무는 아름드리 몸채를 가지고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그 자리의 맨발 공원을 나는 매일 걷고 있다.
묵호 중학교 앞에 살던 ‘노가리’ 친구 집은 지금도 남아있었다.
울릉도 출신 부모님이 운영하던 익경이 친구 중국집 자리도 지금도 버티고 있었다.
기봉이 친구 형은 배타다가 술 너무 마셔 죽었다고 했다.
향로봉 골목길에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여자들이 있었다.
아직도 그 흔적이 ‘춘향이’ ‘명월이’ 간판으로 술을 팔고 있었다.
향로봉 마을은 울릉도로 가는 여객선과 해양경찰 경비정과 묵호항 역의 석탄을 실은 기차가 모여 있는 곳이다.
지금도 향로봉 마을과 묵호항 부두 마을을 이어주는 내 키 높이 정도의 굴이 있고, 조명에는 거미줄이 처져있었다.
향로봉 마을은 산업항 어항 여객항 군항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과거 밀수로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그곳으로 평창 동계 올림픽 당시 현송월이 예술단을 끌고 만경봉호로 입항을 했고, 나는 그 광경을 내가 살던 등대 아파트에서 막걸리를 마시면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향로봉 마을 길은 해파랑길이 조성되어 있다.
중간의 해리수퍼는 해파랑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유명하다. 지금도 수퍼 할머니는 2000원에 라면을 끓여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