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본 소설에 큰 애착을 갖고 있지 않다. 일본 소설 특유의 하드보일함은 내 생리완 그리 맞지 않는 모양이다.
물론 눈에 띄고 손에 잡힌다면 가리지 않고 읽기는 한다. 그렇게 만난 몇몇 작가는 내 맘을 사로잡기도 했지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엔 살짝 김이 빠진 느낌이다. 닮았지만 한편으론 이해할수 없는 문화와 양식을 가진 다른나라 젊은이들의 글은 약간 모자란 감흥만을 남겼다.
물론 스치듯 단언해버리는 생각이 얼마나 큰 모순을 안고 있는지 나는 안다. 짧은 식견이 낳은 오만방자함이 얼마나 형편없이 날라가던지. 드디어 만난 것이다. 얼토당토 않는 편견을 멋지게 날려버린 타자를!
쉬지도 못하고 단숨에 읽어 내리면서 나는 기분 좋은 흥분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세상엔 이토록 충만한 즐거움으로 가득 찬 책이 얼마든지 널려있구나. 내가 할 일이라곤 그런 책들을 찾아 읽고 읽고 또 읽으며 즐기는 것 뿐이구나. 취향과 딱 맞아떨어지는 책을 찾았을때 느낄 수 있는 교감은 언제나 독자를 고취시킨다. 철저히 주관적인 잣대를 빌어 단연 최고의 목록에 합류하게 된 나쓰메 소세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내가 아는 고양이는 몸을 숙이고 바싹 엎드려 볼때 비로소 본 모습을 보여주는 요물이다. 제가 알아서 살피고 인간에 맞춰 행동을 수정하는 개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동물이다. 독립적이다 못해 지독히 제멋대로 구는 고양이는 자기보다 강함이 분명한 인간에게도 숙이지 않는다. 자기 안위만 중요할 따름이다. 맛난걸 내줄 듯 하면 다가갔다 내키면 아양을 떨고 해꼬지할 듯 싶으면 피할 뿐이다. 절대 고개를 꺽지 않는 이 동물을 이해하기 위해선 내키지 않더라도 이쪽에서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많은 편견을 가졌으면서도 많은 예술가의 혼을 사로잡은 동물이기도 하다.
나쓰메 소세키는 참 괜찮은 작가였으리라. 천재가 되어보지 못해 알수는 없으나 세간에 보여지는 천재들의 행태를 보고있노라면 그 속이 범인과는 다른 모양이다. 뭐가 그리 들끓는지 생각도 못한 기기묘묘한 것들을 샘처럼, 화산처럼 뿜어내곤 한다. 나쓰메 소세키는 그와 같은 천재 작가는 아니였을테다.
천재였다면 내면을 매운 무엇들로 벅차 주변을 둘러볼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내가 읽은 소세키는 천재와는 거리가 먼, 주변을 둘러 싼 사람들의 행태와 그 안의 본질적인 것까지 고스란히 읽고자 하는 관찰자에 불과하다. 물론 영민한 관찰력 역시 타고 나야 하는 재능이겠지만 그것은 고통과 함께 발전시켜야 하는 씨앗에 불과하다. 소세키는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재능을 각고의 노력으로 발전시킨 범재다.
손에 잡치지 않는 세계에 고립된 천재보다 우리네들 틈에서 자괴감에 몸부림치며 무언가를 토하는 범인들은 때로 천재보다 더 큰 깨달음을 안겨준다. 나에게 소세키가 그러했다.
고양이든 사람이든, 관찰을 하고자 한다면 먼저 대상에 맞춰 몸을 숙여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안 사람이였다. 그렇게 탄생한 주인공 (이름조차 없는)고양이는 사람들이 흔히 스쳐 지나 미처 알지 못하는 고양이 그 자체의 고양이였고. 고양이의 관찰대상이 된 선생은 아이러니하게도 나쓰메 소세키 자체의 소세키였다.
그와 함께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사람 세상에 흔히 볼 수 있는, 사람 자체의 사람들인 것이다.
좀 더 본질을 들여자보자면 고양이가 서생이요 서생이 소세키니, 소세키는 자신의 허영심을 그대로 들어낸 인물, 게으르고 영특하지도 못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인으로 보이고 싶은 헛된 마음에 몰라도 일단 고개부터 끄덕이고 보는 어리석은 자신의 모습을 우스갯감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그 우스꽝스러운 서생을 포함한 어리석은 인간 자체를 관조하고 있는 고양이 역시 소세키이다. 소세키는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타인처럼 관망하며 글로 써내렸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에서 오는 번뇌가 인생을 갉아먹기라도 한 걸까. 책의 앞머리에 실린 작가 소세키에 대한 자료는 그가 그리 행복치 못한 삶을 살았다고 알려준다.
그러나 그가 어떤 삶을 살았던지 간에 그의 작품은 남았다. 그 작품은 나는 고취시켰다.
나름 두껍두껍한 책은 별다른 고저 없이 간단한 에피소드들만 나열되어 있다. 구샤미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인생의 대부분을 초등학교 선생으로 허비한 우유부단 고집쟁이 서생은 앞으로도 그리 특별한 계획이 없는 모양이다. 매일 탁자 앞에 앉아 펼쳐 놓은 책 위에 침을 흘리며 낮잠을 자고, 부인을 닥달하며, 과자를 먹고, 간혹 찾아오는 손님들 앞에서 지식인인양 알아도 아는체, 몰라도 아는체, 하며 살아갈 요량이다.
그를 찾아오는 손님 가운데 가장 빈번한 자가 미학자 메이테이인데 꽤나 매력적인 인물이다.
짐짓 세상사를 초월한 것마냥 재미를 위한 허풍이며, 거짓말로 사람들을 골리길 좋아하고 늘 유쾌하게 부족함 없이 살아가는 메이테이는 어찌보면 다른 인물들과 다른 듯 보이나 그 역시 모순을 바로잡을 용기 없이 적당히 타협하는 나약한 인간이다. 그래도 그런 메이테이의 기지 덕분에 자꾸 웃게 되니 재밌는 인물임엔 확실하다.
이름난 사업가의 영양과 스캔들에 휘말리는 젊은 간게쓰군을 보자. 대학을 다니며 논문을 준비하고 나름 깨어있는 지식인으로 보이나 그가 연구하는 주제라는 것이 목을 메어 자살하는 역학이라거나 개구리 눈알의 전동작용에 대한 자외 광선의 영향따위라니,
연구랍시고 유리알만 진지하게 갈아대는 양은 웃지 않을래야 않을수가 없다.
간게쓰군과의 스캔들의 주인공인 가네다양은 갈대처럼 청혼자들을 비웃으며 하녀의 가짓것마저 탐내는 여자지만, 그의 어머니 하나코가 거대한 코를 앞세워 남편의 권세를 자랑하고 다니는 꼴을 보면
그 엄마 아래 어찌 반듯한 딸로 자랄 수 있겠느냐,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하나코는 간게쓰군이 박사라도 되면 졸부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여 가문의 지성을 세우겠다는 요량인데..
그걸 보고 있는 고양이의 한마디 한마디가 어찌나 경쾌한지.
구샤미 선생을 위시로 한 지식인들은 진흙탕을 뒹굴며 재물을 탐하는 사업가들을 욕하고 사업가 간게쓰를 위시로 한때 구샤미의 제자였으나 사업에 뛰어든 미즈시마들은 급변하는 세상에 등 돌린채 독야청청 달관한 척하는 지식인들을 비웃는다.
그러면서도 서로를 닮고 싶어하니 모순이랄밖에.
소설의 배경이 일본이든, 막 개화가 시작된 백년전이든 중요할게 뭐란 말인가. 소세키가 보고 쓴 책 속의 세상은 지금 내가 처한 이곳과 하나 다를게 없었다.
그네들의 행태가 우스워 깔깔대다가도 뜨끔한 것이다.
[뜨끔]
백년이라는 간극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조지 오웰과 더불어 나쓰메 소세키는 풍자소설이란 것이 얼마나 씁쓸한 웃음인지 뼈아프게 깨닳게 한다. 웃으며 즐겁게 볼 수 있는 책이지만, 노트에 옮겨적고 싶은 번득이는 구절로 가득 찬 책이지만,
읽고 나서 남는건 쓸쓸함 뿐이다.
그래도 인간이기에 인간을 향해 따뜻한 시선을 보낼 수 밖에 없는 소세키의 모순이 슬프다. 작가 소세키가 고뇌속에서 몸부림쳐 토해낸 부조리의 진상이니 쓸쓸함이 당연하다.
그렇게 실컷 웃고 많이 생각케한 책이였다. 인간적인, 그래서 더 어려운 고민을 싸안은 일본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노력을 인정하고 존경하지 않을 수 없게 한 책이기도 했다.
/
책의 서두, 실린 글에 나온 것처럼 처음엔 가로안의 한문들과 역주, 낮선 문체가 거슬리기도 한다. 하지만 소세키의 성찰로 부터 우러나는 명문과 경쾌하게 이어지는(어쩌면 음율을 타는듯도 한) 글 본연의 어감을 살리기 위해 옛스러운 구어체를 사용했다는 설명에 아! 아! 정말이지 잘못했으면 느끼지 못했겠구나 가슴을 쓸어내렸다.
더불어, 어째서 나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일본작가들에게서 느끼지 못한 일체감을 소세키에게서 찾았는지
아직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미 죽어 썩어버렸을 사람인데 말이다.. |
첫댓글 우매한 인간을 바라보는 고양이의 눈빛이 냉소적으로 느껴집니다. 우와~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이번주 안에 꼭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ㄳ해요.
도서관에 갔더니 관외대출이라... 그래서 나쓰메 소세키의 마지막 장편 소설이자 자전적 소설인 '한눈팔기'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우선은 정말 극적인 내용이 없어서 지루할 수 있습니다만, 나쓰메 소세키는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가 궁금한 분들이라면 읽어봐도 괜찮을 듯합니다. '여자라서 바보가 아니라 바보라서 바보라고 하는 거야'라며 생활인인 아내를 무시하는 공허한 지식인 겐조의 독선적인 모습을 자신의 모습에 기대어 잘 그렸더군요. 어린 시절,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게 하고 자신을 전유물인 듯 여기며 오냐오냐 하던 양부모로 인해 삐뚫어져버린 성격,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을 어려운 이론을 통해 어렵게 설명하며
세상을 무시하지만 막상 현실은 궁핍하여 외려 무시당하는 겐조. 어린 시절 도장 찍었던 계약서로 인해 자신에게 끝까지 찾아와 돈을 요구하는 양부모의 모습까지. 참으로 답답한 느낌으로 일관하는 책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지리하게 읽는 와중에도 그 답답함을 묘하게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거든요. 책의 마지막 장면은 싸하게 재미있습니다. 목돈을 고리로 빌려 양부모에게 전달했기에 그렇게라도 깨끗히 끝나서 다행이라고 하는 아내에게 '끝난 건 거죽뿐이라구. 그러니까 당신을 형식만 아는 여자라고 하는 거야.'라며 힐난하니, 아내는 다시 묻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정말 끝나는 거예요?'라고.
이에 겐조는 '이 세상에 끝나는 것이란 하나도 없어. 일단 한번 일어난 건 언제까지나 계속되지. 그저 이렇게 저렇게 모양이 변하니까 우리가 모르는 것뿐이라구.'라며 유명하다는 문구를 날립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말없이 아이를 끌어안으며 하는 아내의 말, '아이고, 우리 아기 착하기도 하지. 아버님 말씀은 도통 무슨 말씀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네' ^^;; 나쓰메 소세키는 자신이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소통하지 못하고 자신의 세계에 빠져있다는 것을 알았던 모양입니다. 채만식의 '치숙'을 생각나게 하지만 겐조에게는 연민이 더 느껴지네요. 제목을 왜 한눈팔기로 정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원래 '道草'의 의미대로
목적지에 가는 도중이라거나 도중에서 지정거리다 등으로 지었으면 좋았을텐데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유학을 마치고 일본에 와서 가장 궁핍하고 힘들었던 시기, '한눈팔기'에 나온 시기 즈음에 썼다고 하는데 이제 제대로 시동 걸었으니 '고양이~'를 읽어봐야겠습니다. 그 고양이가 관찰한 것도 겐조요, 그 고양이 자체도 겐조였겠군요. 맞으려나... 읽어보겠습니다.
소스케의 다른 작품은 [도련님] 밖에 읽지 않았습니다. 좋은 책이였으나 고양이에서처럼의 강한 느낌은 오지 않더군요. 한 작가의 작품이래도 여러가지 느낌을 품을수 있는가 봅니다. 하지만 그 저변에 깔린 바탕은 똑 같겠죠.
지금 고양이 반 이상 읽었습니다. 정말 좋네요. 그간 책을 많이 읽진 않았습니다만, 진짜 백 년 전 작품이라는 게 미끼지 않을 만큼 제가 지금까지 읽은 소설책 중에서 가장 맘에 듭니다. 아하~ 이런 책을 추천받다니 정말 기쁩니다. 만화적 상상력으로 정말 가볍게 웃기는 듯하나, 냉소적인 웃음을 곱씹어 철학적 가치를 생각하게 되는... 정말 제가 좋아하는 스탈입니다. 쥐 한 마리도 제대로 잡지 못하면서 인간을 만든 신까지 조롱하는 어이없는 고양이 모습이 나옹이보다 더 미워할 수 없게 하고, 구샤미, 간께스, 메이테이의 우스게소리는 소파에 앉아서 같이 듣고 있는 듯합니다. 친구들에게 추천할 책이 있다는 게 신나네용~
ㅋㅋ 정말로 웃기는 고양입니다. 사실 저는 썰을 풀어내는 메이테이의 모습이 나올 때가 정말 좋습니다. 뭐가 진짜고 뭐가 가짜인지 모를 백과사전과 같은 메이테이의 구라담... 정말 깊고 화려하네요. 일본 문학을 처음 접했는데 괴리감이 많이 사라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