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因緣
<제2편 방황의 땅>
④ 방황의 문-7
새로 지은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집채는 말할 것도 없지만, 정읍댁이 시집올 때에 해온 윤기 나는 장롱과 세 채나 되는 비단이브자리며, 알뜰살뜰한 부엌살림살이에 온갖 세간들을, 있는 그대로 노씨에게 맡기어놓고, 간단한 피난 짐만 챙기어 보에 싸놓았다.
이브자리 한 채와 당장 입을 옷가지를 대충대충 챙기고, 냄비랑 주걱 숟가락 젓가락 같은 가벼운 취사도구를 다른 보에 또 쌌다. 이 속에는 동혁의 것과 동수의 것도 들어있었다. 충청도에 가서 그네들을 만나게 되면, 그네가 쓰던 숟가락과 젓가락을 놔두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한 뒤에는 일본정치 때 사두고 추은 겨울철에만 입던 벨벳과 털옷 한 벌을 따로 작은 봇짐으로 쌌다. 그것은 양쪽 어깨띠까지 매어서 용훈이 걸머지고 가게 따로 꾸리었던 거였다.
이렇게 피난 짐 꾸리기가 마치어지자, 용훈은 슬그머니 집을 나가 금순이와 기옥이를 만났다. 새벽녘에는 이곳을 떠나야하는 아쉬움에서 그는 그 애들을 만나고 싶어지었던 거였다.
금순이도 저희 엄마랑 아빠를 따라서 곧 부산으로 피난을 떠난다고 하였다.
“용훈아! 우린 부산으로 가기로 했대.”
금순이는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더라도, 이렇게 입을 열었다.
“.....”
용훈은 그 애의 말이 어쩐지 스산한 느낌마저 들어서 대꾸하지는 않았으나, 어느새 멀리 떨어지어 있는 듯이 보이는 금순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였다.
“너흰 어데로 가는 거니?”
금순은 용훈이 말이 없자 물었다.
“충청도로 간대.”
용훈은 경산이 입버릇처럼 뇌던 충청도를 내뱉듯이 하였다.
“충청도가 어데야?”
금순은 혼잣말처럼 물었으나, 용훈이도 모르는 곳이었다.
“모르겠어. 그곳엔 우리 일가들이 산댔어.”
용훈은 들은 대로 말하였다.
그렇게 대답한 그는 문득 글썽하여지는 눈으로 금순이와 기옥이를 번갈아 보면서 물었다.
“너희들과 헤어지면 언제 만나니?”
“전쟁만 끝나면 바로 만나지 뭐!”
부산으로 간다는 금순이가 천진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대꾸하는 거였다.
“전쟁이 언제 끝날 줄 알아?”
옆에서 입을 다물고 두 애의 주고받는 이야기만 듣고 있던 기옥이 얼굴에 어두운 빛을 띠면서 심드렁하게 끼어들었다.
“너희와 헤어지면, 언제 만날지 모르겠다.”
용훈은 못내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자고새고 눈만 뜨면 만나서 함께 놀던 아이들이었다. 더욱이 금순이는 지난해 여름 한강에 나아가서 헤엄치고 무자맥질을 치면서 놀 때에, 발가벗은 채로 갑자기 용훈에게 달리어들어 서로 한 덩어리가 된 적이 있었다.
그 뒤로 그 애는 용훈이만 보면 끌어안는 버릇이 있었다.
용훈은 그것을 내색하지 않았으나 헤어지는 마당에는 어린 가슴에도 찌릿한 통증이 일었고 그러한 가슴 한 가운데를 쥐어뜯고 싶기도 하였다.
그는 그 모두가 허상이었다는 상실감에 젖어들었다.
뿐인가, 태어난 이태원의 괴이하던 이방인들의 별난 풍경과, 학동 절뚝발이의 죽음과 금봉네랑, 그리고 세브란스병원의 새하얀 병실에서 팔뚝만한 주사기를 들이대던 어여쁜 여자간호원의 뽀얀 얼굴빛과, 청구동 학교의 드넓은 운동장에서 나비처럼 유희와 율동을 하면서 늘 뒤로 빼려고만 하던 그를 끈질기게도 상냥한 말로 타이르던 여자선생님. 게다가 집터를 닦느라고 비지땀을 흘리면서 곡괭이질에, 삽질에 아버지와 삼촌의 노고하는 모습들.
그 어느 한 가지도 머릿속으로 떠오르지 않는 게 없었던 거였다.
첫댓글 삶 자체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 아닐까 합니다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재회의 기쁨이 꿀맛 같겠지요 ^^*
그래서 會者定離요 去者必反이라지만
이별이란 사실이 항상 가슴을 찢게 합니다.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한데
사람의 마음은 그렇지가 않은 것 같아서 씁쓸하지요.
會者定離 去者必返 을 다시 새겨봅니다
있을 때 잘하라는 노래가 있지만
옆에 있을 때는 그 소중함을 모르기 쉽지요 ^^*
그렇습니다. 회자정리란 만나면 헤어짐을 기약한다는 건데 헤어지면 반드시 돌아온다고 합니다.
흔히 불교에서 말하는 저승에서 다시 만남이기도 하고 사람이 가정이고 직장이고 만났다가 헤어지고 헤어지고 만남이 연속이지요.
그야말로 만남의 순간이 소중한 것인데 그것을 잊을 때가 많지요.
대우님! 깊은 밤에 찾으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