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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세계를 지배하는 크리스트교
□ 로마 카톨릭 교회의 발전
1)교황 : 로마 교회의 주교(베드로의 후계자)- 서로마지역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
2)교황 그레고리 1세 : 6세게 말, 게르만족 전도사업 전개 - 개종시킴.
3)동·서 교회의 분열 계기 : 프랑크 왕국과 제휴한 로마 교회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 레오 3세의 성상 숭배 금지령 거부(게르만에 대한 포교상 성상 필요)
4)동·서 교회의 완전 분리 :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카톨릭 교회로 완전 분리됨(1054)
□ 중세의 크리스트교 세계
1)로마 카톨릭 신봉 지역의 확대 : 9세기,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의 개종 10세기, 폴란드·보헤미아의 카톨릭 전도
2)성직자 : 귀족과 함께 지배층 형성, 정신적 지배 뿐 아니라 세속적 지배(봉건 영주)
3)영향 : 생활과 의식 지배 → 경제 활동, 사회 신분 유지
◑ 사교 중심지
교회·성채·방앗간·선술집 서양 중세의 회합 장소 중 으뜸가는 것은 성직자들이 활동하는 교회였다. 중세의 교회는 공통적인 정신 생활의 중심지이자 회합의 장소이기도 했다. 여기서 회의가 열리고, 위험시에, 특히 화재 발생시에 종을 울려 사람들이 모이도록 알려주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담소를 하고 놀이를 하고 시장을 보았다. 성직자들과 종교 회의가 교회의 역할을 신의 집으로서의 본래적 역할로 환원시키려고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오랫동안 이슬람 교 사원과 비교될 수 있는 여러 기능을 가진 사회적 중심지였다.
교구 생활이 교회가 조직한 소우주였듯이, 성채 생활은 영주들이 성채에서 형성한 사회적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봉신의 젊은 아들들이 모여들어 영주에게 봉사하고 군사 훈련을 받았다(때로는 인질 역할도 했다). 영주의 가족과 하인들도 이곳에서 생활을 했다. 이들과 더불어 여흥꾼들의 무리들은 영주의 기분 전환과 위신을 위해 필요한 것을 충족시켜 주었다. 이곳에서 음유 시인들의 지위는 애매했다. 이들은 고용주들의 덕과 공적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고, 주인들이 주는 봉급과 총애에 절대적으로 의존해 있었다. 그들은 때로는 자신들도 영주가 되는 욕망을 갖고 있었고 또 가끔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기사가 되어 문장을 받은 음유 시인들의 경우가 그랬다.
성채에서 생산된 문학과 예술 작품들은 종종 봉건 사 회에 대한 적대감을 다소 포장된 형태로 증언한다. 민중 사회는 이와는 다른 회합 장소를 가지고 있었다. 시골에서의 만남의 장소는 농민들이 곡식을 가지고 와 줄을 서서 방아 찧을 순서를 기다리던 방앗간이었다. 우리는 농촌 개혁이 때로는 그곳에서 논의되고 전파되었으며, 농민 봉기의 음모가 거기서 꾸며졌다고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농민 회합의 장소로서의 방앗간의 중요성을 입증해주는 두가지 사실이 있다. 12세기 종교 교단의 규약들은 수도사들이 그곳으로 시주를 받으러 갈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창녀들이 방앗간 근처를 자주 드나들었다. 그래서 경제적 이익보다도 도덕을 항시 앞세웠던 성 베르나르는 수도사들에게 이 악의 소굴을 파괴하라고 권하였다. 도시에서 부르주아들은 그들의 시장과 회의실을 갖고 있었다. 한 예로 파리의 거상들이 모였던 수로 상인 조합 회의실이 있었다. 이 곳은 '부르주아의 응접실'이라는 적절한 별명을 갖고 있었다. 농촌에서는 물론 도시에서도 가장 큰 사교의 중심지는 선술집이었다. 선술집에는 마을 주민들과 도시의 구역 주민들이 모여들었다.
선술집 주인은 대부업자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그곳은 여관을 겸하기도 했기 때문에 이방인들을 숙박시키기도 했다. 이를 통해 선술집은 사회적 교류망의 중요한 매듭이었다. 먼 곳에서 일어난 사건들이며 전설들이며 신화들을 담은 소식들이 그곳에서 전파되었다. 그곳에서의 대화가 중세인들의 망탈리테(심성, 집단 무의식)를 형성했다. 그곳에서의 술 한잔이 흥을 돋구었듯이, 선술집은 내부의 격정을 발효시켜 폭발시킨 취기와 정렬적인 색조를 중세 사회에 부여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 삼위 일체(Trinity)
크리스트 교에 있어서 아버지인 신과 아들인 예수 크리스트와 사람의 심중에 내재하는 신으로서의 성령은 세 개의 페르소나(Persona; 신격 개성)로서 일체의 것이라는 정통 카톨릭 신학의 근본적 교의. 이에 대해서는 오랫동안의 논쟁이 있었다. 아타나시우스 파는 크리스트란 신을 동일시하여 삼위 일체설을 주장하였고 아리우스 파는 크리스트란 신과 인간과의 중간적 존재라 하여 삼위 일체설을 부정하였으나, 결국 325년의 니케아 종교 회의에서 아타나시우스 파가 정통으로 인정되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종교 회의에서 삼위 일체의 교의가 확립되었다. 이후 정통 카톨릭 신학의 근본적 교의가 되었다.
◑ 로마 교회
로마는 고대 로마 제국의 수도이고, 그 교회가 크리스트의 수제자 베드로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제정 기에 많은 순교자를 낸 도시로서, 크리스트교 세계에서 우위와 권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로마 이외에 콘 스탄티노플·안티오키아·예루살렘·알렉산드리아의 5대 본산이 있었으나, 마지막 3도시는 7세기 이슬람의 침입으로 멸망하고,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이 대립하였다.
◑ 수도원 운동
불안과 폭력이 지배하던 중세 초 4세기 무렵, 일부 성직자들에 의해 세속을 떠나 한적한 곳에 수도원을 세우고 엄격한 계율 밑에 공동 생활을 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세상의 부귀 영화나 안락한 생활 대신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스스로 괴롭고 고통스러운 삶을 선택하고 청빈, 복종, 순결의 계율과 "너희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나를 따르라"는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아무런 장식도 없는 감옥같은 방에서 기도와 명상으로 생활했다. 서유럽 수도원의 기초를 확립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베네딕트이었는데, 그는 592년 로마 남쪽 몬테 카시노(Monte Cassino)에 수도원을 세워, 73장으로 된 베네딕트 계율을 세워 수도원 생활을 조직하였으므로, 이에 최초의 진정한 수도원이 탄생하게 되었다.
◑ 교황과 황제
중세 세계는 교권의 정점인 교황과 속권의 정점인 황제라는 두 권위를 양 촛점으로 하는 '타원형의 세계'. 그러나 이 두개의 권위는 평화적으로 공존한 것이 아니라, 특히 성직자 서임권 문제를 둘러싸고 격렬하게 권력싸움을 전개하였다. 이미 그러한 싸움은 오토 대제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신성 로마 제 국의 황제가 된 후, 교황을 폐위하고, 교회의 성직자를 국왕의 관료로 만들었으며, 교회령과 수도원령을 왕령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한편 교황은 프랑크 왕국의 피핀이 바친 교황령을 경제적 기초로 하고, 서유 럽 전체 땅의 거의 4분의 1을 지배하는 고위 성직자 제후들을 배경으로 강력한 세력을 지니고, 정신 세 계의 지배권 뿐만 아니라 세속적 지배권을 공공연히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성직자 서임권 문제를 둘러 싼 교황과 황제와의 싸움은 교황 그레고리 7세의 교황권 지상의 선언으로 더욱 격렬해졌으며, 십자군 운동을 전후하여 교황권이 점차로 우세해져서 인노켄티우스 3세 때 절정에 이르렀으나 십자군 운동이 실패로 끝나면서 교황권은 쇠퇴하였다.
◑ 카노사의 굴욕(1077)
1077년 교황에 즉위한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성직자의 결혼, 성직 매매를 일절 금지하고, 그때까지 국왕 및 제후가 갖고 있던 성직 임명권을 교황이 갖겠다고 공포했다. 성직자를 세속의 왕이나 제후들이 임명하기 때문에 교회가 타락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독일 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하인리히 4세는 이에 격렬히 반발했다. 성직 임명권을 넘겨준다는 것은 카톨릭 사회에 대한 지배권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1076년 1월 하인리히 4세는 보름스에서 제국 국회를 소집,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위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자 이번엔 분노한 교황이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였는데 파문이란 카톨릭 세계로부터의 완전 추방을 뜻하는 것으로 매우 치명적인 조치였다. 카톨릭 교도는 더 이상 황제 를 만나선 안되었으며,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는 제후 역시 황제와 똑같이 불경한 자로 간주되었다. 사태 가 이렇게 되자, 하인리히 4세를 지지하던 독일의 제후와 성직자들은 황제에게서 등을 돌렸다. 하인리히 4세는 당황했다. 더이상 교황에 맞서 싸울 지지 기반을 잃은 그는 무조건 복종을 맹세했다.
교황은 이때 카노사 성에서 휴양중이었다. 고생 끝에 간신히 도착한 하인리히 4세였지만 교황은 만나주질 않았다. 하 는 수 없이 황제는 그 추운 겨울날 얇은 옷에 맨발로 눈 속에 서서 꼬박 3일 밤낮을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었다. 그제서야 교황은 접견을 허락하고 교회에 복종할 것을 서약 받은 다음 파문을 취소해 주 었다. 이렇게 해서 성직 임명권을 둘러싼 교황과 황제의 싸움은 일단 교황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돌아온 하인리히 4세는 왕권을 재건하는 데 힘을 기울이면서 기회를 엿보았다.
1082년 하인리히 4세는 대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쳐들어가 로마를 점령하고 클레멘스 3세의 교황 취임을 교황청에 승인시켰다. 살레르노 지방으로 피신한 그레고리우스 7세는 1085년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한 까닭으로 유배신세를 면치 못하고 죽는다- 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우스 7세의 싸움은 하인리히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러나 교황과 황제의 치 열한 대립이 일단락된 것은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우스 7세가 모두 죽고 난 다음이었다. 성직 임명은 교황의 권리로 하되 성직자에게 내리는 토지는 국왕의 권한하에 둔다는 타협안이 보름스 화의에서 통과 된 것이다.
◑ 교회권과 세속권의 대립
{하인리히 4세에 대한 파문 선고} 사도들의 수좌인 성 베드로여! 우리들의 말을 들으소서.---- 나는 당신의 은총에 의해서----전능하 신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의 힘을 빌어, 또한 당신의 권능에 의해서 당신의 교회에 대해서 그지 없 이 교만하게 거역한 하인리히에게 독일 및 이탈리아 왕국의 모든 권리를 부인 하노라. 여기에 나는 모 든 크리스트 교도들이 여지껏 그에게 해온, 혹은 하고자 하는, 신종(臣從)의 서약의 속박에서 해방하는 바이며, 또한 그 누구도 그에게 황제로서 신종하지 않을 것을 명하는 바이다. 당신의 교회의 명예를 무시하려는 자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그가 지녀야 할 명예를 마땅히 그의 몸에서 박탈해야 한다.
◑ 파문(Excommunicatio)
카톨릭 교회에서 신도를 교회와의 신앙상 접촉으로부터 배제함을 말한다. 프로테스탄트에서는 원칙적으로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카논 법에 의하면 파문당한 자는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는 비탄니라고 하여, 교황청에서 그 사람을 지명하여 공개적으로 파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톨레라티라 하여 아직 지명 공개를 받지 않은 것이다. 일단 파문된 자는 성사를 받을 수 없으며, 교회 묘지에 매장될 수도 없으며, 사면도 받을 수 없으며, 다른 신도와의 접촉도 일체 금지된다.
또한 파문은 개인만이 아니라 도시나 국가 등의 단체에도 가해지는 수가 있다. 이것을 인테르딕티오라고 한다. 예를 들어,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영국 왕 존에게 내린 파문 등이다. 파문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은 정교 투쟁의 시대이다. 이 때의 교황은 독일 황제를 누차 파문하였는데, 파문당한 황제는 그 신하가 봉건적 복종의 의무에서 해제되므로 황제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그러나 파문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폐단도 수반되었다.
◑ 보름스 협약(Wormser Konkordat ;1122)
신성 로마 황제인 하인리히 5세와 교황 칼리스투스 2세간에 맺어진 협정. 이로써 1076년 이래의 성직 서임권 투쟁은 일단 타결되었다. 그 내용은,
1)성직자는 교회법은 규정에 따라서 선거되며, 황제는 지환 (指環)과 장(杖:영적 권력의 상징)에 의한 서임권을 포기하고 홀(笏:세속적 권력의 상징)에 의한 교회령 및 이에 부수되는 정치적 권리의 수여만을 행사한다. 단 선거에는 황제 내지는 그 대리인이 입회한다. 단 선거에는 황제 내지는 그 대리인이 입회한다.
2)독일 국내에서는 황제의 홀(笏)에 의한 수봉(授封)은, 성직자 서임때 행해지는 성별(聖別)이 의식에 선행되며, 부르군드와 이탈리아에서는 성별이 선행되어야 할 것. 3)교회 국가에서는 이러한 협정은 적용되지 않음 따위이다. 이러한 일들은 그레고리우스 7세의 이상과는 아주 먼 것이어서, 황제는 독일 국내에서는 아직도 성직자의 임명을 좌우할 수 있었으나 독일 이외에서는 서임권은 교황의 수중에 들어갔으니, 황제권은 약체화를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이 내 용은 교황과 황제가 다같이 만족을 느낄 수 없는 타협적인 것이어서, 서임권 투쟁은 시타우퍼 왕조를 통하여 내내 계속되었다.
◑ 교황권의 전성
우주의 창조주는 천체에 위대한 두 빛을 설치하였으니, 강한 빛은 낮을 지배하고 약한 빛은 밤을 지배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보편적 교회의 영역에도 창조주는 위대한 두 권위를 임명하였으니, 더 위대한 것이 영혼을 지배하고 약한 것이 육체를 지배한다. 이 두 권위란 교황권과 왕권이다.
그리고 달은 태양으로부터 그 빛을 얻으며, 그 효과, 크기, 질과 지위에 있어서 태양만 못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왕권은 그 위엄을 교황권으로부터 얻는다. 그러므로 왕권이 교황권을 침범하면 왕권의 빛이 약해질 것이며, 왕권이 교황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 빛은 커질것이다. -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편지(1198년)
◑ 아비뇽 유수(1309∼1377)
중세 말에 교황이 남프랑스의 아비뇽에 거주한 것을 말한다. B.C. 6세기에 바빌론의 포로가 된 유대인의 고난에 비겨서 이렇게 부른다. 교황의 절대권을 주장하는 보니파키우스 8세는 프랑스 왕 필리프 4 세와 성직자에 대한 과세 문제로 서로 대립하다가 분사하였다. 이후 교황청은 프랑스 왕의 지배하에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교황권의 쇠퇴를 상징한다.
보르도의 대주교로 교황에 선출된 클레멘스 5세(1305∼1314)는 프랑스 인으로, 프랑스 국왕에 대하여 보니파키우스 8세가 취한 비난을 모두 취소하고 1309년 남프랑스의 론강 좌안에 있는 아비뇽으로 교황의 거처를 옮겼다. 그 이후 7명의 교황이 아비뇽에 체제하여 프랑스 왕의 허수아비 노릇을 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레고리우스 11세는 1377년에 아비뇽을 떠나 로마에 돌아갔지만 그 다음 해에 사망하고 이로써 로마와 아비뇽에 사실상 2명의 교황이 등장하게 되어 시스마(교회의 대분열:1378-1417)가 일어났다.
◑ 시스마 ( Schisma,교회 분열:1378∼1417)
중세에 카톨릭 교회 사이의 통일이 무너지고, 교회의 대립이 생긴 것을 말한다. 이단이 교의에 관한 문제임에 대하여, 시스마는 권위에 관한 문제이다. 교회 대분열 시대는 1378∼1417년에 걸쳐 로마와 남프랑스의 아비뇽에 교황이 양립했던 상태를 가리킨다. 이전에 아비뇽에 유폐됐던 교황청은 1377년 그레고리우스 11세의 로마 복귀와 함께 폐지됐다. 그런데 이듬해 그레고리우스 11세가 죽고 이탈리아인 우르바누스 6세가 교황에 선출됐지만 추기경단은 우르바누스 6세의 선출을 무효라고 선언하고 새로 클레멘스 7세를 교황으로 선출했다.
우르바누스 6세가 냉혹하고 사려가 깊지 못하며 인격적으로도 열등하다는 것이 거부의 이유였다. 그러나 우르바누스 6세가 완고하게 로마를 떠나지 않자 클레멘스 7세는 아비뇽에 머물렀다. 이후 전 유럽의 교회도 양파로 갈라지게 되자 애가 탄 성직자들은 주교로 구성된 공의회가 교황의 권위보다 우월하다는 결의를 했다. 이 동안 양측의 교황청은 재정이 궁핍하여 관직 매매 등이 성행, 중세기말 로마 교회의 쇠미함을 여실히 말해 주고 있으며, 이윽고 밀어닥치는 종교 개혁에 의한 크리스트 교계의 분열의 전조를 나타냈다.
이에 대하여 독일·영국 등은 로마측의 교황을, 프랑스 를 중심으로 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포르투칼 등은 아비뇽의 교황을 지지했다. 로마와 아비뇽으로 분열했던 양 교회를 통합하려는 계획은 주교회의 중개로 여러 번 시도됐지만 쉽게 실현되지는 않았다. 1409년 피사 공의회는 두 교황을 폐위하고, 새로운 교황을 선임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결과는 3명의 교황이 서로 대립해 혼란이 더욱 가중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1414∼17년에 걸쳐 열린 콘스탄츠 공의회에서는 위클리프와 후스 같은 성서주의자를 이단으로 규탄했다.
동시에 교회의 분열을 해결하는 데도 주력해 3년만에 세 교황을 겨우 퇴위시키고, 선거로 추기경 오도네 콜론나를 마르티누스 5세라는 통일 교회의 교황으로 선출했다. 다행히도 교회의 대분열은 종말을 고했다. 그러나 이듬해에는 후스의 처형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정략에 의한 비극으로 판단한 체코 국민이 전쟁을 일으켜, 교회의 고민은 조금도 감소되지 않았다. 동시에 교회의 내부에서 하급 성직자의 발언권이 더욱 강해지면서 로마 교황청은 차츰 동요하게 됐다.
◑ 크리스트교와 중세 유럽
크리스트교가 유럽의 종교로서 확립된 것은 중세의 전성기인 12∼13세기 무렵이었다. 중세 카톨릭 교회는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중세 유럽사회의 유일한 통일적 계층 기구가 되었으며 따라서 중세 유럽은 하나의 '크리스트교 공화국' 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중세 사회에서 크리스트교는 각 지방의 농촌 공동체 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농촌의 축제, 주일 미사, 혼인, 장례 등이 모두 교회를 통해 치루어지고, 교회는 농민의 친목과 결속의 중심이 되었다. 중세 농민의 방목이나 씨뿌리기, 수확, 세금내는 날도 모두 크리스트교의 제일에 맞추는 등 크리스트교는 민중 생활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또 기사의 윤리에도 깊은 영향을 주어 정의를 사랑하는 성실한 전사의 윤리로서 크리스트교 정신이 그 기준이 되었다. 따라서 중세의 문화 또한 크리스트교 문화이며 신학을 중심으로 한 문화라 할 수 있다.
내용출처 : [기타] www.yumkwang-gie.h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