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 국어과목 시험에
계절별로 금강산을 부르는 이름을 짝지은 뒤 잘못된 것을 고르라는 문제가 출제된 적이 있었다. 봄이면 봉래, 여름에는 금강, 가을에는 풍악,
겨울에는 개골산으로, 객관식 문항에 적당하게 선택지도 4개가 되니 출제자 입장에서는 이만큼 내기 좋은 문제도 없었을 듯싶다. 당시에는 가뜩이나
교과서에 외울 것도 많은데 산 이름까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느냐는 불만도 있었다. 하지만 '천하의 명산' 금강산쯤 되면 계절별로 한 번씩 최소
4번은 올라야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것 아니겠나?
산꾼들이 '명산'으로
치켜세우는 산들은 철 따라 산꾼들을 불러 모으는 매력이 있다. 코스별, 계절별로 혹은 하루 중에도 조석으로 시시각각 그 모습이 변한다. 한 번
오른 것으로 그 산을 죄다 아는 양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이 되고 만다.
6개 동천·44개
영봉·36개 석대 품은 명산
만물상 같은 다양한 모양새 암봉 줄 이어
코발트빛 바다와 섬 풍경에 더위 말끔
휴양림 숲탐방로 지날 땐 본격적인 산림욕
호남정맥의 끝자락에 속하며 호남 5대 명산 중 하나로 꼽히는
천관산(天冠山·723.9m)은 가히 명산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만큼 품이 넉넉한 산이다. 광화문 한복판에 설치된 도로원표를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정남인 전남 장흥 땅에 솟은 천관산은 6개 동천(洞天)과 44개 영봉, 36개 석대가 있고, 옛날에는 89개 암자가 있어 28명의
대사를 배출해 금강산 다음 가는 명산이었다고 한다. 기암과 억새와 다도해의 푸른 바다를 품고 있고, 봄에는 동백꽃, 여름에는 녹음, 가을에는
단풍과 억새물결, 겨울에는 설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해 사철 산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매년 가을 열리는 억새축제 시즌이 되면 전국의
산꾼들로 북적거리지만, 산자락에 산림욕을 즐기기 좋은 자연휴양림이 있어 이즈음은 피서를 겸한 휴양 산행지로서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다.
천관산 산행은 장천재를 기점으로 선인봉~종봉~구정봉~환희대~억새
능선~연대봉~봉황봉을 거쳐 장안사로 내려서는 코스(산&산 277회)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번에는 자연휴양림을 끼고 출발해 천관산의
기봉과 괴석들을 탐승한 뒤 휴양림 숲탐방로에서 산림욕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코스로 꾸며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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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망이 곧 환희'란 말을
실감케 하는 환희대의 다도해 조망. |
천관산자연휴양림 관리사무소에서 진죽봉을 거쳐
환희대에 올라선 다음 억새능선을 지나 정상인 연대봉을 왕복하고, 다시 환희대로 되돌아와 천주봉과 구정봉, 숲탐방로를 거쳐 관리사무소로 돌아오는
원점회귀 방식이다. 총 산행거리 8.8㎞에 순수 이동시간은 3시간 5분, 탐승과 산림욕까지 포함하면 4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기점은 매표소와 주차장이 있는 휴양림 관리사무소다. 임도 모퉁이를 돌아 이정표가
세워진 갈림길이 나오면 임도를 버리고 11시 방향 등산로로 올라선다. 키 낮은 관목과 우거진 수풀을 몸으로 밀치며 나간다. 된비알이 만만치
않지만 침목이 군데군데 놓여 있어 다리 힘만으로 오를 수 있다. 등산로변에 대표적인 여름꽃인 점박이 나리꽃이 작열하는 태양처럼 강렬한 주황빛으로
불타고 있다.
다소 무미건조한 능선을 30분쯤 오르면 삼각돛을 바짝 세운 요트 모양의 너럭바위가 있다. 20명 정도는 너끈히 쉬어
갈 만큼 넓어서 잠시 숨을 돌리고, 온 길을 되짚어본다.
흙과 바위가 뒤엉킨 비탈을 오른다. 용의 이빨처럼 삐죽이 솟은 수십 개의
암봉이 그리는 마루금을 따라 기암괴석의 연무가 시작된다. 15분 뒤 능선이 합쳐지면서 환희대 가리키는 이정표가 있는 곳이 지장봉이다. 단순히
쐐기처럼 보였던 바위와 기봉들도 그 모양새가 점차 뚜렷해진다. 바로 앞 신선봉에는 '고요의 바다'에 발을 내디딘 우주인이 탐사선에 기대어 있고,
그 뒤편 진죽봉에는 이스터섬의 모아이 거석들이 연상되는 기암들이 줄지어 서 있다.
층층이 깎아지른 바위를 계단 삼아 타고 오르면 곧 신선봉이다. 조금 전
우주인이라고 생각했던 바위가 막상 올라서 보니, 고개를 치켜들고 짖어대는 강아지로 변해 있다. 자연은 그대로인데 보는 이의 변덕이 죽 끓듯
한다. 금강산 만물상의 축소판이라 할 만하다.
5분 뒤 요새처럼 우뚝
선 진죽봉을 왼편으로 에둘러 가면 길은 곧 유순해진다. 휴양림에서 오르는 길과 구룡봉 쪽 능선이 합류하는 초원 같은 봉우리가 대장봉이다.
대장봉은 책 바위가 네모나게 깎아져 겹쳐 있어 만 권의 책이 쌓여 있다는 것에서 이름 붙여졌다. 대장봉 정상의 석대 조망처인 환희대는 '조망이
곧 환희'란 말을 실감케 한다. 용 아홉 마리가 머리를 맞대고 놀았다는 구룡봉, 하늘을 찌르는 기세에 눌려 나는 새도 능히 오르지 못한다는
대세봉, 하늘 기둥을 깎아 구름 속으로 꽂아 놓은 것 같다는 천주봉 등 하늘로 솟아오르고 바다로 뻗어나가는 산봉과 산릉이 장쾌하게 펼쳐진다. 그
너머 코발트빛 다도해 위로 크고 작은 수많은 섬이 돛단배처럼 떠다닌다.
환희대에서 정상인 연대봉으로 이어지는 용마루는 억새밭이다. 이즈음은 짙푸른 초원이
펼쳐지지만 10월이 되면 산정이 일렁거리는 은빛 물결로 뒤덮인다. 고려 때 일본 공략에 나선 여몽연합군이 군선을 만들기 위해 수림을 남벌하면서
억새군락이 생겼다고 한다. 편안한 초원길을 15분가량 걸으면 네모 반듯하게 석축을 쌓아올린 봉수대가 있는 곳이 정상인 연대봉이다. 이 봉수는
남해군의 망운산봉수와 함께 해발 700m대 고지에 있는 몇 안 되는 봉수대라고 한다.
연대봉에서는 천관산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다도해의 풍광이 360도로 펼쳐진다.
동쪽으로는 고흥 소록도와 거금도, 남쪽으로는 완도 앞바다 뒤로 청산, 보길도, 서쪽 땅끝마을 해남 뒤편으로 진도가 물기둥을 뿜는 고래처럼 옅은
해미에 가려 있다.
하산은 환희대까지 되짚어 내려간 뒤 우측 천관산
자연휴양림 방면으로 내려선다. 숲으로 뒤덮인 암릉지대를 따라 구정봉과 천주봉, 대세봉을 차례로 지난다. 15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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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제 지나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산림욕 구간. |
대세봉에서 직진하면 선인봉을 지나 장천재 쪽으로 빠져버리니
주의해서 왼쪽 휴양림 방면으로 내려가야 한다. 나무데크 계단 3개를 연이어 지나 갈림길에 이르면 그대로 직진해 내려간다. 곧 숲 구간이
시작된다. 휴양림 이정표에서 왼쪽으로 꺾어 대숲을 지난 뒤 인천 이씨 재실인 수정제를 지나면 곧 임도로 내려선다. 200m쯤 더 가면 삼나무가
쭉쭉 뻗어 있는 본격적인 산림욕 구간이다. 휴양림 내 숙박시설인 '숲속의 집' 방면으로 왼쪽으로 꺾어 오르면, 주차장 맞은편에 숲탐방로 입구가
있다.
숲탐방로에는 편백, 노각, 동백, 비자, 상수리, 굴참나무 등 침·활엽수류가 고루 분포돼 있다. 또 관리사무소 옆에는
더덕, 양귀비, 달맞이꽃, 비비추, 취나물, 당취, 구절초 등 산에서 쉬이 지나쳐버리기 쉬운 수십 종의 야생초와 야생화를 가꿔놓은 화단이 있다.
친절하게 해설판이 곁들여 있어 야생초와 수목을 공부하는 이들이라면 도감과 대조해가며 익히기에 그만이다.
천관산휴양림에는 4인실
5실과 5인실 1실, 8인실 1실로 구성된 숙박시설과 숲속 수련장 1동이 있다. 야영데크 20개와 물놀이장, 족구장, 캠프파이어장 등 부대시설도
갖췄다. 휴양림 진입로에는 수령 30~200년 된 동백나무 1만여 그루가 국내 최대 규모의 동백숲을 이루고 있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비자나무도 군락을 형성하고 있다. 1.7㎞ 길이의 숲탐방로를 빠져나오면 임도와 합류하고 곧 종점인 휴양림관리사무소다. 산행 문의:라이프레저부
051-461-4164. 전준배 산행대장 010-8803-8848.
글·사진=박태우 기자 wideneye@busan.com
그래픽=노인호 기자 noga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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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흥 천관산 고도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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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흥 천관산 구글 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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