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색깔을 보면 경건해진다. 그 속에는 슬픈 음악과도 같은 감격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색깔은 대체로 아름답다. 특히 꽃의 색깔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것이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그 모양 때문이기보다는 색깔 때문일 것이다.
꽃의 색깔뿐만 아니라 모든 자연의 색깔은 그 아름다움 속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는 듯하다. 이제는 그 진실을 보는 눈을 가지고 싶다.
그런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내 시력이 나의 유일한 보석임을 모르고 살아온 셈이다. 새삼스럽게 빛과 색깔을 보는 은혜와 축복이 벅차다. 눈을 가졌으되 밝음과 아름다운 색깔을 못보고 살아온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내 눈으로 되도록 많이 더 깊이 색깔의 경건함 속에 잠입해 있는 그 이치를 깨달아 가고 싶다.
나이가 들수록 유일한 생명에 대한 연민은 더욱 커지게 되고 그 유한한 목숨마저도 희로애락의 시달림을 피할 수 없어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회의감만 증폭되어 왔다.
사물 속에 든 밝음을 찾아내 그것을 찬양하는데 인색하고, 색깔의 아름다움을 잊고 살아왔는지 모른다.
사물을 보되 바로 보아야 하고, 깊이 보아야 하고, 넓게 보아야겠다는 생각, 삶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사물을 바로 보지 못할 때 피상적皮相的 판단을 갖게 되고, 넓게 보지 못할 때 편협한 판단을 하기 쉽듯이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사는 것이 중요하고, 얼마나 오래 사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젊고 아름답게 사는 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어떻게 하면 젊고 아름답게 살 수 있을 것인가. 천방지축 살아오던 내가 늦게나마 이런 생각을 해낸 것부터가 대견한 일이다. 일상 속에서 시를 사랑하고, 바다를 사랑하고, 산을 사랑하고, 자연의 색깔을 사랑하고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리라 마음먹었다. 멋진 시를 찾아 전철을 타고 멀리 있는 서점으로 갈 때 가장 살아 있음의 충족을 느낀다.
내가 사는 거리에 있었던 서점이 그만 문을 닫아버렸다. 온통 술집 간판 숲으로 뒤덮인 거리에 세느강의 미라보 다리처럼 버티고 이었던 그 서점, 온천동 거리의 유일한 문화공간이었던 그 서점, 사는 일에 찢겨 가슴이 쑤실 때 찾던 나의 유일한 문화공간이었던 그 서점이 자취를 감춰버렸다. 20여 년 간 들락거리면서 어디에 무슨 책이 꽂혀 있는지, 또는 신간서적이 들어왔는지조차 훤하게 알 수 있을 정도로 친숙했던 곳이었는데, 그 서점이 없어지고 나서 온통 내 마음이 공허해져 한동안 텅 빈 채로 살았다.
그 서점이 없어진 후 나는 이런 시를 읽었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이 흐르고 우리들 사랑도 흘러내리네.”
서점에서 진열된 새로 나온 책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에 희열이 인다. 책을 꼭 사겠다는 것보다 서점에서 느끼던 살아있음의 어느 한 부분을 충족시켜주던 그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먼 서점을 또 찾아 나선다. 이럴 때는 꼭 전철을 타고 간다.
산골 아이 출신인 내게 산이란 영원한 보헤미안 그것이다. 며칠만 산을 못 만나도 그리운 이를 못 만난 것처럼 목마르고 산의 푸르름은 내게 영원한 안도감을 준다.
서예의 대가이신 청남菁南 선생님이 언젠가 자네는 이름에 범인寅 자가 들어 있으니 범은 수풀 속에 살아야 하므로 호를 ‘임산林山’으로 하라고 하셨다. 그러고 보니 내 성미가 범같이 욱하는 성질이 있어서 산이 좋은지 모르겠다.
산에서 시보다 산문적인 나무들을 보고 있으면 오히려 마음이 가라앉는다. 참나무, 소나무, 오리나무들의 쭉쭉 빠진 모습이 아니라 산문散文같이 수더분하고 펑퍼짐한 모습이 친근감을 줄뿐만 아니라 날이 선 마음을 가라 앉혀준다.
산의 푸름만으로 갈증을 해소할 수 없을 땐 바다를 찾기로 했다. 사주에 수생목水生木이라 했으니 나무가 있으려면 물도 있어야 하는 이치다. 산의 푸름과 바다의 푸름은 그 멋이 다르고 푸름을 갈망하는 마음속의 갈증을 푸는 데도 각각 다르다. 산보다 더 넓고 깊은 푸름이 필요할 때 동해로 서해로 바다를 찾아나선다. 또한 몇십 년 동안 그리던 그리운 이가 보고싶을 때, 그 그리운 이를 실컷 사랑해주지 못한 것이 아쉬울 때 바다 앞에 서면 내가 더 생생해지고 빛나게 된다.
그 다음엔 사람을 사랑하리란 마음을 먹어본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그 또한 쉽지 않은 일이 사랑이다. 먼저 나의 혈육을 사랑하고 나를 찾아온 모든 이를 사랑하겠다는 결심이다. 이 결심은 나의 신앙이요 나의 기도이다.
가정이나 사회에서 남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받지 못해 사랑의 결핍증에 걸렸다는 생각을 가끔 한 적이 있다.
사랑은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이라는 것, 사랑은 유혹당하는 것이 아니라 유혹하는 것, 사랑은 근본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는 말을 새삼스럽게 음미하고 싶다.
그러고도 사랑이 남으면 그리운 이를 사랑하겠다. 그리운 이를 위해 기도하겠다.
일흔이 되어도 사랑으로 산다는 어느 시인처럼 오늘도 나는 시를 사랑하고, 산과 바다를 통해 푸름을 사랑하고 그리고 보람되고 알차게 살 것이다. 사랑의 絃을 튕기는데 인색하지 않고 적극적이 될 것이다. 아름다운 강산 봄 여름 가을 겨울 휴가 때마다 바다와 산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 사랑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정인조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