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西瓜)...
중원역사에도...한나라때 회회(回回)...즉, 현 아랍을 정벌하고 최초로 들여온 채소라 하며...
남송은 금나라에 포로가 됀 송막기문의 저자 홍호(洪皓)가 가지고 귀국해 강남에 심은게 시초로 돼어있고...
고려는 원나라시 고려의 배신자인 홍다구가 개성에 심은게 최초라 명기됐다.
현 중국의 일부 학계는...
과거 중국역사기록에도 과(瓜)가 나오니...
서과(西瓜)의 시원이 아프리카가 아닌 중원이라하는 주장도 잠시 있었으나...
과(瓜)란 것은...오이,참외,동과(수세미비슷)등 모든 박과계통 채소의 명칭이니 말이 않돼고...
유물발굴에서 나왔단 수박씨도 다시 감별해 보니...호박이나 동과의 종류라해서...
다시 명실상부한 수박의 원산지는 현재도 다양한 야생종이 많은 아프리카로 재 확인됀 상황이다.
자 그럼,
서역조선사 서역중국사 주장하시는 분들은...
졀대 지중해니 흑해에 조선 중국이 있었단 소리는 하질 못할 근거인데도...
오히려 어느 선생님은...
수박의 원산이 아프리카고...조선과 중국이 서역에서 수박을 들여왔다하는데...
그 서역이 현 중원의 서역이겠나...?...지중해 서남의 아프리카를 이른 것이 아니라할 수 있겠나...?
란 실로 생뚱맞은 질문으로 피해가려 하는데...
이건 진정 역사연구가의 자세는 아니다.
자신의 학설에...모든 역사적 사실들을 껴 맞추기위한...엄청난 모순이자 억지변명일 뿐이다.
기원전 4000천년전 이집트 벽화에도 수박먹는 장면이 있다 한다.
그 수박을 지중해 북변 그리스가 재배한건 기운전 3000년경이며...동유럽까지 포함한 로마가 재배한건 ...
이미 기원전부터라 한다.
흑해 주변 전체...중앙아는 이미 기원전후에 수박이 재배됐단 명확한 증거가 있다.
그러나
중원사나 고려사엔...
기원후 1000년 경에나 회회(回回)로 부터 연유한 서과(西瓜)가 회자돼며...
그나마 남송은...거란지역을 먹은 금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귀국하며 얻어온 수박씨를 강남에 재배하며 수박의 기원이 시작됐다 명기됐으니...
역사의 남송은...한나라(漢)지역관 다른 그 남쪽이란 말이며...
거란도 그, 수박을 회회(回回)에서 얻은 것이라니...
거란 자체도 그 중심이 총령(파미르)서역 아랍지역이 아니란 것이다.
고려의 수박은...
명실공히...고려의 배신자 홍다구가 개성에 심은게 최초라하니...
1200년 경이다.
조선시대엔...
이 수박의 귀하기가...이걸 훔치다 걸리면 곤장 100대라는 중징계니...엄청나게 희구한 채소가 수박였던 것이니...
원조 요동이라 사료돼는...돈황(瓜州)에서...길거리에 잔뜩 쌓아놓고 수박을 팔던 청나라인들의 기록들을 보건데...
구한말 조선은 신장성 조차도 지배하지 못한 나라였단 반증이다.
그럼 또 지중해 조선사가들은...
그 거란이 바로 서역에 있었다고 말장난을 칠 것이다...
그게 맞다면 거란은 이미 기원전 3000년 경에 수박재배를 했어야 했고...서역 회회(아랍)에서 이를 얻어올 필요가 없었단 것이다.
그럼 또...거란은 조선 서북이라 지중해가 아니고...북유럽이라 둘러대겠져...?
그런데 이를 어쩐 댑니까...중북유럽은...중원과 고려보다도...훨 늦은 16~17세기에나 수박재배를 했답니다...?
오히려 아메리카의 수박재배역사(1500년경)가 100년 더 빠릅니다.
어떻게 때려 맞추어 보려 해도...
지중해가 조선이요 중국일 순 없는게...역사서에 명확히 나옵니다.
1200년 경에나 수박을 접한 고려는...기원전부터 수박재배를 했던 동류럽과도 관계없고...
그 조선의 서쪽이란 송나라도 1100년 경에나 수박이 들어오고...한나라도 900년 경에나 서역정벌군이 수박을 들여왔다니...
중국조차도...파미르 이서엔 그 중심강역이 절대 있을수 없었단건...
수박재배역사가 증명해 줍니다.
조선이 지중해 이동이라면...
그 서북이란 거란은...북유럽인데...그들은 고려시대엔 수박구경도 못했다 나옵니다.
고려가 지중해 이동이라면...
그 서쪽인 중국(송나라)는 그리스나 이집트란 얘긴데...
거긴 이미 기원전 4000년~3000년경부터 수박재배를 했단 지역입니다.
지 지역에 온통 수박천지인데...
뭣하러 먼 서역에서 수박을 얻어다 길렀단 역사서를 남겼을까여...?
그럼, 그 지중해의 서역인 회회국은...대서양 바닷속 아틀란티스제국이란 말인지...?
그보다 더 서역인...
중원의 황도에서 수만리 서역인란 대진국(大秦國) 로마는...대서양 건너 아메리카인디언들이란 얘긴지...?
참으로 말이 않 됍니다.
그럼 또...
현 중원과 고비사막에 뭔 옛날부터 수박이 재배됐게나 반문할 것이나...
내몽골의 거란벽화에도 분명 수박먹는 민대머리의 거란족들 묘사됐다니...
거란의 중심은 내외몽골이자...그들이 금나라에 쫒겨 서역으로 밀려나 망명국을 세웠단 서요(카라키타이)...
이째나 거란의 중심이 카자흐등지가 됐던 정황입니다.
거란이 서요지역인 파미르 이서에서 시원했다면...이미 당대에 중앙아엔 수박이 널멀하게 재배됐던 때이니...
거란이 그걸 회회에서 얻어와 재배했을 필요도 없단 것이져...
거란이 회회국에서 얻어다 재배했단 수박은...
원조 요동인 현 돈황일대...과주(瓜州)라 보면 무리가 없을 겁니다.
물론 원조 요나라격인 발해의 대씨황가를 야율씨가가 반란으로 흡수한 것이겠고여....
다 찾아져 가는 천산지역 연경(燕京)...감숙,동황지역 요동(遼東)연구를...
다 같이 정신병자들의 주장으로 물타기하게됄...지중해 조선사...참으로 우려스럽습니다.
제발...최소한은...조금이라도 합리적 근거를 가지고 주장하셨으면들 합니다.
환타지메니아들을 위한 얘기책만들기인지...
감추어진 조선의 역사강역비밀찾기의 정상적 연구인지..무지하게 헷깔립니다.
밑의 기록들 보다 보면...
구한말기 동사록(일본견문록)에 보면...일본엔 서과(수박)이 재배돼지 않는다니...
왜는 지중해 주변의 외곽의 뭐시기란 설도...정말 무책임한 소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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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Citrullus vulgaris)의 기원
기원과 전파
수박의 이름은 성서에서 볼 수 있다. 헤브라이어로 아바티아크(avatiach), 아바티킴(abatichim)이라고 하고, 후에 아라비아어인 바티크(battich)나 바테카(batteca), 프랑스어인 파스테크(pastèque)로 전와(轉訛)되었다. 기원지는 아프리카 중부라는 설이 있으나, 실제로는 남아프리카, 주로 칼라하리사막이라고 하는 것이 정설이다. 이 지역에서는 2가지의 다른 열매살 성분을 가진 야생종이 자생하고 있다. 하나는 쓴 맛이 있는 것과 다른 하나는 쓴 맛이 없는 것으로, 쓴 맛이 없는 형은 이 지역의 부시먼에 의해 식량 및 물의 공급원으로서 이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콜로신스를 조상종으로 알고 있으나, 이것은 단순히 수박의 재배품종의 하나이며 조상종은 아니다. 재배의 기원은 오래되어, 이집트에서는 약 4000년 전에 고대 이집트인이 재배하였다고 추정되는 그림이 남아 있다. 그리스에는 3000년전에, 로마에는 기원 초기에 들어왔다. 원래는 종자를 이용하기 위하여 재배되었고, 열매의 이용은 지중해지역에서 발달하였다고 전해지나 기원지에서는 모두 열매의 이용 때문에 재배하였다고 할 수 있다. 중부유럽에는 17세기에, 미국에는 신대륙발견 후 이민에 의해 도입되어 1629년 매사추세츠, 1664년 플로리다에서 재배되었다. 인도에는 이집트에서 중근동으로 전파되어 페르시아를 거쳐서 들어왔다. 일설에는 해로(海路)를 따라 이집트에서 직접 도래하여 오래 전에 재배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육로를 통해 전해졌다는 설이 유력하며, 그 재배는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10세기 이후라고 보여진다. 중국에는 중근동에서 비단길을 거쳐서 12세기에 서역으로 들어왔으며, 서과(西瓜)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한국으로의 수박 도래는 고려 때라고 추정되는데, 《도문대작(屠門大嚼)》에서는 고려를 배신하고 몽골에 귀화하여 고려사람을 괴롭힌 홍다구(洪茶丘)가 처음으로 개성(開城)에 수박을 심었다고 한다. 《연산군실록(1450)》에도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500년 전부터 재배되었다고 생각된다.
식품과 이용
수박의 열매는 대부분이 수분(91%)이고, 탄수화물이 8% 함유되어 있다. 여름철에 잘 어울리는 열매채소이다. 먹을 수 있는 부분 100g 중 붉은 열매살에는 380㎍, 황육종에는 10㎍의 카로틴이 함유되어 있고, 비타민B
, B
가 각각 0.03㎎ 함유되어 있다. 또한 시트룰린이라고 하는 아미노산을 함유하여 이뇨효과가 높고, 신장염에 좋다고 하며 열매즙을 바짝 졸여서 엿처럼 만든 수박당은 약으로 쓴다. 종자는 뽑아서 소금기를 가하고, 종피를 벗겨 배(胚)를 먹는데, 먹을 수 있는 부분 100g 중 단백질 30.1g, 지질 46.4g, 칼슘 70㎎, 인 620㎎, 철 5.3㎎, 카로딘 16㎍ 외에 비타민B
, B
, 니아신 등이 함유되어 있어 영양가가 높은 식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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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서과는 원(元)나라 세조(世祖) 때부터 중국에 들어왔다고 하였다. 그러나 원나라 초기에 절강(浙江)의 순안(淳安) 사람 방기(方夔)는 이미 시를 짓기를, “줄줄이 이어진 꽃 무늬 적삼은 침에 젖어 푸르고, 가닥가닥 붉은 속살은 멍이 들어 붉구나.[縷縷花衫粘唾碧 痕痕丹血搯膚紅]”라고 하였으니, 이때 절강에 이미 서과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원나라 초기에 중국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송나라 말기 방회(方回)의 시에도, “서과는 갈증을 해소할 수 있으니, 옥같이 푸른 껍질을 자르네.[
西瓜足解渴 割裂靑瑤膚]”라고 하였고, 또 문신국(文信國)의 시에도, “금 패도를 꺼내어 푸른 옥병을 자르네.[拔出金佩刀 斫破蒼玉甁]”라고 하였으니, 들어온 지가 오래된 것이다. 호교(胡嶠)의 함로기(陷虜記)에, “내가 회흘(回紇)에서 서과 종자를 얻었는데 말[斗]같이 큰 열매가 달려 서과라 불렀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서과는 호교를 통하여 중국으로 들어온 것이다. 지금 서과는 이미 천하에 퍼졌다. 대만(臺灣)에서는 가을에 심어 시월에 채취하며, 공물로 서울에 들여보내 납월(臘月) 묘제(廟祭)의 쓰임에 대비한다. 대만은 민해(閩海) 동쪽에 있으니 또 동과(東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경기의 석산(石山)과 호남의 무등산(無等山), 평안도의 능라도(綾羅島)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으며, 씨가 검은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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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말하노라.
여러 가지 식물 중에 사용함에 이롭고 사람에게 유익한 것으로는 남령초만 한 것이 없다. 이 풀은 《본초(本草)》에도 실려 있지 않고 《이아(爾雅)》에도 보이지 않으며, 후세에 나와서 약상자 속의 소홀히 다룰 수 없는 필수품이 되었다. 일찍이 논의하여 보니, 맛은 제호(醍醐)를 깔보고 향기는 난지(蘭芷)를 얕보며, 술에 비교하면
관중(管仲)의 실언한다는 잘못은 없고 선왕의 합환(合歡)한다는 취지가 있으며, 차에 비하면
왕몽(王濛)이 억지로 마시게 하는 괴로움은 없고 선가(仙家)에서 즉시 쾌유하는 효과가 있다.
현산(玄山)의 수수[粱]와 부주(不周)의 벼[稻]는 종자는 훌륭하나 이것이 아니면 답답한 마음을 틔우지 못하고,
곤륜(崑崙)의 네가래[蘋]와 구구(具區)의 무우[菁]는 음식으로는 진기하나 이것이 아니면 울적한 기분을 소통시키지 못한다.
동파(東坡) 시에 나오는 삼팽(三彭)의 악도 이것을 기다려 구제(驅除)하는데 비자(榧子)의 약효가 오히려 이것에 비해 미약하고, 의문(醫門)에서 말하는 한담(寒痰)이 응결된 것도 이것으로 융화시키는데 백매(白梅)의 약효도 이보다 못하다. 민생에 이용되는 것으로 덕이 이에 필적할 만하고 공이 이에 짝할 만한 것이 더 있겠느냐.
지금 사람의 지혜는 매번 옛것에 편당이 되어 가짜 옥이나 위조된 보물을 상(商) 나라나 주(周) 나라의 것이라고 하면 겹겹으로 싸서 보배로 여기지 않는 적이 없으면서 유독 이 풀만은 아예 비천하게 보고 매우 하잘것없는 것으로 여기며 더러는 수치로 여기고 가까이하지 않는 이도 있다. 그렇다면 이 풀이 부정한 풀이란 말이냐? 예가 아닌 물건이란 말이냐? 하후씨(夏后氏)가 일찍이 배척한 것이냐?
향당편(鄕黨篇)의 먹지 않는 음식의 범주에 드는 것이냐? 목면(木綿)은 늦게야 서역(西域)에서 나왔으나 누구나가 모두 그것으로 몸을 감싸며, 수박[
西瓜]은 근년에 회흘(回紇)에서 들어왔으나 사람이나 귀신이나 모두 그 즙액을 마신다. 물품이란 진실로 사용에 편리하고 생활에 윤택한지를 따질 뿐이니, 굳이 옛날과 지금,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을 거론할 필요가 있겠느냐.
나는 어릴 적부터 다른 기호품은 없었으나 오직 책 읽는 것을 좋아하였으니, 연구하고 탐닉하느라 마음과 몸에 피로가 쌓인 지 수십 년에 책 속에서 생긴 병이 마침내 가슴속에 항시 막혀 있어서 혹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즉위를 한 이래로는 책을 읽던 버릇이 일체 정무(政務)로까지 옮겨져서 그 증세가 더욱 심해졌으므로 복용한 빈랑나무 열매와 쥐눈이콩만도 근이나 포대로 계산하여야 할 정도였고,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보았지마는 오직 이 남령초에서만 힘을 얻게 되었다. 화기(火氣)로 한담(寒痰)을 공격하니 가슴에 막혔던 것이 자연히 없어졌고, 연기의 진액이 폐장을 윤택하게 하여 밤잠을 안온하게 잘 수 있었다. 정치의 득과 실을 깊이 생각할 때에 뒤엉켜서 요란한 마음을 맑은 거울로 비추어 요령을 잡게 하는 것도 그 힘이며, 갑이냐 을이냐를 교정하여 퇴고(推敲)할 때에 생각을 짜내느라 고심하는 번뇌를 공평하게 저울질하게 하는 것도 그 힘이다. 일찍이 범희문(范希文)의 ‘공적을 논하면 뜰 앞의 명협(蓂莢)에 부끄러울 것 없다[論功不愧階前蓂]’는 시구를 암송하면서 어쩌면 이 남령초를 말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였고, 또 두자미(杜子美)의 ‘차를 서초(瑞草) 중의 으뜸으로 칭한다[茶稱瑞草魁]’는 시구를 암송하면서 두자미에게 이 남령초(南靈草)를 보게 하였다면 어찌 쉽사리 차를 으뜸으로 여겼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더구나 일원(一元)의 기운이 점점 요박(澆薄)하게 되어 가면서 정영(精英)한 혈기의 순환이 항상 음식물의 조탁(粗濁)함을 이기지 못한 지 오래되었으니, 신분의 귀천과 체질의 강약과 풍토 따위가 일체 담(痰)을 앓게 하는 것도 역시 필연적인 형세이다. 그렇다면 적셔 주고 마르게 하는 공적은 이 풀이 아니라면 어느 것이 으뜸이겠느냐.
대저 천지자연의 마음은 지극히 인자하고 만물의 영장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천지자연은 사람에게 이익을 도모하고 해로움을 제거하는 것을 마치 미치지 못할 듯이 한다. 이 풀이 이러한 시기에 나온 것으로도 충분히 천지자연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냐. 군주가 하늘의 도리를 도와서 이루는 정치에 있어서 또한 어찌 몸소 솔선하여 멀고 가까운 곳에 미치게 함으로써 천박하고 고루한 시속의 견해를 변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월령(月令)에 싣고 의방(醫方)에 기록하도록 명하며 우리 강토의 사람들에게 권장하여 그 혜택을 함께하고 그 효과를 넓힘으로써 조금이라도 천지자연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 보답하려고 한다. 지금 자대부(子大夫)들에게 친히 책문으로 묻는 것은, 한편으로는 자대부들이 속된 견해에 매이지 말라는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자대부들로 인하여 이 풀의 유래에 대하여 들어 보려고 하는 것이다.
중국 사람은 남령초라고 부르고, 동방 사람은 남초(南草)라고 부르며, 민인(閩人)은 연엽(煙葉)이라고 부른다. 또한 박물가(博物家)들은 연다(煙茶)라고 하기도 하고 연초(煙草)라고 하기도 하는데, 어느 것으로 정확한 명칭을 삼아야 하겠느냐? 당초에는 이 풀의 성질이 술을 깨게 하고 기분을 안정시킨다고 하여 죽통(竹筒)에 넣고 불을 붙여 연기를 흡입하여 보았는데, 매우 신기한 효험이 있었으나 독이 있을까 염려되어 감히 가벼이 시험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그후에 그 효능을 알아낸 자들은 대부분 말하기를 간장을 억제하고 비위(脾胃)를 도우며 마비 증세를 없애고 습담을 제거하니, 사람에게 유익함은 있어도 실제로 독은 없다고 하였다. 점차 세상에 성행하게 되고 심지어는 말 한 필과 남초 일근(一斤)을 바꾸기도 하며, 지금에 와서는 곳곳에 재배하고 사람마다 효험을 보고 있는데, 금지하자는 것이 무슨 말인가. 쓰임에 유용하고 사람에게 유익한 것으로 말하자면 차나 술보다 낫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이는, “《본초(本草)》 중에는 색상이나 취미(臭味)가 오늘날의 이름과 맞지 않는 것이 많이 있는데, 이 풀도 실지로 본초에 있는 것인데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하니, 이 말은 어떠한가? 그리고 어떤 이는 “당 나라 태종(太宗) 때
흥경지(興慶池) 남쪽의 술을 깨게 하는 풀이라는 것이 이 종류가 아니겠느냐. 중원(中原)에는 예로부터 있어 왔는데 단지 박식한 이를 만나지 못하였을 뿐이다.”라고 하는데, 이 설은 또한 어떠하냐? 자대부들은 들은 것을 다하여 여러 방면으로 인용하고 곡진하게 증명하여 보아라. 내 친히 열람하리라.
이상생략...
매는 꿩을 잡지 못하게 하고 다만 야학(野鶴)과 거위를 사냥하게 하는데, 한 번 야학을 잡으면 기이한 매라 하여 다시는 사냥을 시키지 않고 길이 팔찌[鞲] 위에 앉혀 삼가 사육(飼育)할 뿐이다. 그리고 산계(山鷄 꿩)는 털과 날개에 문채가 없고 맛도 기름지지 않았다.
대개 날짐승 가운데에는 꾀꼬리와 까치가 나지 않고 매도 또한 드물었으며, 길짐승 가운데에는 범ㆍ표범이 나지 않았다. 과실 가운데에는 잣[栢]과 호두가 나지 않고, 채소 가운데에는 수박[西瓜]이 없었으며, 음식물 가운데에는 벌꿀이 나지 않았다. 호두ㆍ단목(丹木)ㆍ남초(南草)ㆍ설탕ㆍ공작우(孔雀羽) 등은 모두 일본의 천한 물건인데 또한 그 나라의 소산이 아니요, 모두 남만(南蠻)에서 나왔다. 그런데 남초만은 토산물이 되었다 한다.
이하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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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서과는 원(元)나라 세조(世祖) 때부터 중국에 들어왔다고 하였다. 그러나 원나라 초기에 절강(浙江)의 순안(淳安) 사람 방기(方夔)는 이미 시를 짓기를, “줄줄이 이어진 꽃 무늬 적삼은 침에 젖어 푸르고, 가닥가닥 붉은 속살은 멍이 들어 붉구나.[縷縷花衫粘唾碧 痕痕丹血搯膚紅]”라고 하였으니, 이때 절강에 이미 서과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원나라 초기에 중국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송나라 말기 방회(方回)의 시에도, “서과는 갈증을 해소할 수 있으니, 옥같이 푸른 껍질을 자르네.[
西瓜足解渴 割裂靑瑤膚]”라고 하였고, 또 문신국(文信國)의 시에도, “금 패도를 꺼내어 푸른 옥병을 자르네.[拔出金佩刀 斫破蒼玉甁]”라고 하였으니, 들어온 지가 오래된 것이다. 호교(胡嶠)의 함로기(陷虜記)에, “내가 회흘(回紇)에서 서과 종자를 얻었는데 말[斗]같이 큰 열매가 달려 서과라 불렀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서과는 호교를 통하여 중국으로 들어온 것이다. 지금 서과는 이미 천하에 퍼졌다. 대만(臺灣)에서는 가을에 심어 시월에 채취하며, 공물로 서울에 들여보내 납월(臘月) 묘제(廟祭)의 쓰임에 대비한다. 대만은 민해(閩海) 동쪽에 있으니 또 동과(東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경기의 석산(石山)과 호남의 무등산(無等山), 평안도의 능라도(綾羅島)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으며, 씨가 검은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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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 작성도중...우리동네 전체에 벼락이 내려...
온통 전자기기들이 고장이나서 난리가 나는 바람에...본 글이 몇일간 미완의 글로 방치돼었었습니다.
양해를 구합니다.
역사왜곡자들인 메이슨들이 벼락을 만들어...저으연구를 방해하나봅니다...^. .^.....ㅡ. .ㅡ